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64화
온기가 사방에 들어찼지만 영혼은 아직 겨울 바다에 있었다. 로보는 조용했고, 나도 그다지 전할 말이 없어 침묵을 지켰다.
핫 초코를 마시고 솜이불을 잔뜩 뒤집어쓰고 나서부터는 몸이 풀려 근육도 녹아내렸지만 여전히 살결이 차가웠다. 우리는 이따금 들리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 서로와 말을 나누지 않았다.
침묵은 로보도, 나도 본인만이 느낄 미안함을 간직한 것에서부터 나왔다. 나는 로보에 대해 알게 되었고, 로보도 내 뜻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말룸의 상황과 비슷한 듯했지만 엄연히 달랐다.
로보는 세상과 타협해 살아갔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했다. 그럴수록 각자 왜곡된 언어를 받아들이기 마련이어서 말을 나누는 것이 어려웠다.
나는 로보가 말룸보다 유연하지 않다고 했던 크로노의 이야기를 십분 이해했다.
로보에게 선을 그어야 했다.
나는 많은 사람에게 공평한 사랑을 나누어줄 자신이 없었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삶조차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게 할당된 지렛대는 이미 너무 많은 무게를 지탱하고 있어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슨 말 하려고 나와 리몬델에 온 건지 알아.”
로보가 멋쩍은 웃음을 만들었다. 나는 머리 위에 얹어진 수건 끝자락을 손에 넣고 굴렸다. 북슬북슬한 털이 감각을 자극했다. 살아 있는 동물의 털을 만지는 듯했다.
“난 아가씨를 사랑해. 하지만 협력을 빌미로 사랑을 강요하지는 않을 거고, 아가씨의 상황을 외면하거나 쌀쌀맞게 구는 일도 없을 거야.”
그가 다시 단언했다.
“하지만 첩이 되어 티포주 성에 머무르지도 않을 거야. 나에겐 내 삶이 있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육지 황자와는 사정이 달라. 나는 선원들을 버릴 수 없어. 고통스럽지만 바다를 그리는 일도 계속 하고 싶고.”
로보가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저주를 풀기 위해서라도 라딘라티 처치에는 협력할 거야. 그렇지만 이대로 바다를 돌아다니는 것도, 뭐, 그런대로 괜찮겠지. 당장 떠날지, 확실히 아가씨를 도울지 고민을 좀 해보고 싶은데…….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로보가 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나는 자세히 캐묻지 않고 로보의 손을 잡았다. 그가 말을 멈추었다. 마치 처음부터 멈추기를 바랐던 것처럼 무척이나 진중하고 고요했다.
나는 모포를 눈앞으로 내려 시야를 죄다 가려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왜 그렇게 상냥해요? 저는 로보가 원하는 걸 줄 수가 없는데.”
로보가 씩 웃었다.
“아가씨가 나와 같은 슬픔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이야. 돌연변이로 살아가는 기분을,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벽에 막혀 할 수 없었던 절망감을 알고 있으니까. 아가씨가 상황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아서 두고 볼 수 없는 거지.”
나는 그가 내게 사랑을 느끼게 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로보의 약한 모습을 겪고 나니 그라는 인어가 또렷해졌다.
나는 꽃을 틔워 로보에게 전했다. 이번에는 시든 것도, 벌레 먹은 것도 아닌 예쁜 꽃이었다.
꽃들의 왕, 모란.
평소에도 로보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꽃…….
로보의 갈빛 피부와 태양을 닮은 꽃잎이 어우러졌다. 그가 머그잔의 둥근 둘레를 그리듯 매만졌다.
로보가 날 바라보지 않고 모란만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왕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단순히 아가씨가 맘에 들기 때문에 살갑게 구는 것도 있거든.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여태 난 아가씨를 대공 부인이라든가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잖아. 이제는 그만두어야겠네. 그렇지? 오필리아. ……음, 입에 잘 안 붙는군. 며칠 적응 기간을 가져야겠어. 마음의 준비도 하고.”
로보가 모란을 선반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선반 위에는 소라고둥, 클립, 해도, 나침반 따위가 산재했다. 잡동사니 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푸르스름한 테두리의 낡은 액자였다. 들뜬 얼굴의 로보가 그의 선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그날의 활기를 보관하고 있었다.
“나는 약한 것 같으면서도 끝내 정신을 놓거나 주저앉지 않는 아가씨를 참 사랑하게 되어버렸어. 고통스러운 바다를 피해 육지로 도망치지 않고 묵묵히 버티는 아가씨를 동경하는 거지.”
다정한 말이 어깨를 두드렸다.
“아가씨가 살아가길 포기하지 않아서 참 기쁘다.”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는 그를 이해했다.
로보는 다 죽어가는, 아니, 이미 죽어버린 내게서 삶을 보고 있었다. 또는 그가 나름대로 바라던 이상향을 비추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가씨는 세계의 법칙과 타협하지 않고, 거푸집에 맞춰 자신을 어그러뜨리지도 않지. 대공비라는 신분, 자신을 사랑하며 우러러보는 유력자, 도처에 널린 황금에도 쉽게 현혹되지 않아. 아가씨에게는 아가씨만의 세계가 있는 거야.”
그가 다리 위로 이불을 덧씌웠다. 꼬리의 형상이 점차 두 다리로 바뀌어 조형되었다. 나는 홀린 듯 그 경이로움을 관찰했다.
바다보다는 육지가 더 친숙한 인어가 소곤거렸다.
“그거 알아? 비밀인데, 아가씨는 내가 되고 싶었던 삶의 이상향이야.”
나는, 누군가가 이토록 형편없는 나를 자신의 이상향이라 이야기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냉동고에 갇힌 것처럼 머리가 꽁꽁 얼었다. 입술이 파리하게 짓물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태양이 높이 뜨는 낮과 별달이 아름답게 맺히는 밤 모두 로보를 찬양하곤 했다. 당신이야말로 내 유토피아인데…….
“나는 늘 타협점을 찾아내는데, 그건 이 세계에 너무 길들었다는 증거야. 그게 꼭 영혼이 죽어버린 것 같아서 부러 쾌활하게 살았던 건지도 모르겠어.”
그가 멋쩍은 듯 엷게 미소 지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러려니 해서 꿈에 대해 눈물 흘려도 한순간이지. 봐, 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다시 감정이 치밀어 오르지 않는 이상 괜찮다 여기며 살아가겠지.”
로보가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건 그냥 아쉬운 일일 뿐이야.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죽지도, 굶는 것도 아니니까. 가끔은 씁쓸해질 수도 있어, 하지만 전혀 문제없지. 나는 이런 어른이 되어버린 거야.”
로보가 내 머리칼의 남은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로보는 나였다. 내가 이전 세계에서 느꼈던 상념을 그도 똑같이 간직하고 있었다.
“심해의 물고기는 어항에 갇히면 얼마 살지 못하고 대부분 죽어버려. 힘없는 치어라도 약육강식의 바다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아가씨는 어항에 갇힌 물고기가 되지 말아줘. 힘들겠지만 말이야…….”
그의 말을 들어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로보가 내 능력을 벗어나 있는 찬란함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로보의 약한 모습을 보았지만 여전히 그가 강한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했다 해서 좌절하지도, 살아가는 걸 비관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는 건 당연해. 하지만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추진 말아줘. 이 세계에서 아가씨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즐겁게 먹고 마시며 살아 있음에 대한 환희를 느껴.”
그가 머리칼의 물기를 모두 닦아 내었는지 수건을 나무통 안에 던져 넣었다.
“그게 바로 영원히 늙지 않을 수 있는 열쇠야. 나는 그래서 발타사르, 그자를 이해할 수가 없어. 그자는 너무 늙어 버렸어…… 고장 난 시계 같은 남자지.”
나는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감당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무언가가 나를 단단히 지탱하고 있었었다.
“우리는 외면보다도 내면이 늙어버리는 걸 경계해야 해. 마음이 늙어버리면 누구든 추해지고 말아. 그러니 부디 늙지 마, 아가씨. 아가씨의 육체는 인어인 나보다 빨리 쇠약해질 테고, 나보다 먼저 죽어 바다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나는 아가씨의 얼굴에 앉은 주름살을 본 그날까지도 아가씨더러 아름답다 말하고 싶어.”
그가 주문을 걸 듯 속삭였다.
“영원히 젊고 아름다워야 해…… 고귀한 진주가 찬양할 만큼.”
로보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는 요원할 것이다.
로보는 내게 부담을 짊어지게끔 했다. 자신이 풀지 못한 난제를 내게 떠맡긴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비로소 그에게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살아 있음에 책임감을 느꼈다. 결국 내 끝이 파국일지라도 아직 남은 시간을 멋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소중한 관계를 너무 많이 엮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 위로 흙덩이가 내리는 것이 두려웠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직 삶을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텃밭을 개조해 미로를 꾸미고, 실팔찌를 만들고, 요리를 하고,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속삭이고……. 미로가 전부 완성된다면, 그것에 나의 둥지라 이름 붙여도 좋을 것 같았다.
로보와 나는 그 이상 추위에 떨지 않았다. 핫 초코의 따스한 온기가 몸 안에 깃들었던 데다 침대 위에 앉아 나를 응시하는 로보의 붉은 눈동자가 화롯불보다 뜨거운 열기를 품고 반짝거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구태여 로보에게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었다.
“고마워요, 말룸이 괴롭히면 꼭 말할게요.”
“좋아, 언제든 환영이야.”
그러면서 그는 특유의 멋들어진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녀석이 괴롭히기 전에 내가 먼저 지켜줄게.”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무겁게 달음박질했다.
“그리고 맹세해. 설령 이 마음을 잃어버리더라도, 혹은 반대로 아가씨가 변해도…… 내가 아가씨를 상처 입히는 일은 없을 거야, 나의 상냥.”
로보가 내 볼을 덧그리려다 멈추었다. 그의 행동에 품위 있는 망설임이 깃들었다.
로보의 문장은 평야를 감싸고 흐르는 강처럼 잔잔해 거북하지 않았다.
범선대왕문어가 주인 걱정에 몸을 떠는지 간간이 선체가 흔들거렸다.
우리 둘은 곧 분리되었다. 선원들의 말에 의하면, 로보가 ‘대공비’에게 더한 무례를 저지를까 감히 둘만 내버려 둘 수 없단다.
분리 정책에는 이스마엘의 입김이 컸다. 이스마엘은 비죽 솟은 눈매로 로보를 매처럼 사납게 노려보았다. 로보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반항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에는 분명한 친애가 있었다.
여자 선원들이 겨울옷을 새로 사 와 주었다. 내 신분을 고려해 항구에서 가장 비싼 옷가게의 의상을 싹 쓸어 왔다는데,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선원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알겠다. 그들이 엄선해온 옷들은 하나같이 두꺼운 모피로 만들어졌다.
한 선원의 선실을 빌려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친 여자의 안색이 병든 사람처럼 무한정 창백했다. 배짝 마른 몸이 무거운 옷가지를 견디지 못해 여기저기 뻐근했고, 등 위로 내린 상처도 쓰라렸다.
하지만 나는 투덜거리지 않고 착실히 옷을 꿰었다. 둔한 옷을 걸치는 것은 꺼려졌지만 주위의 걱정을 덜기 위해 몸에 걸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