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61화
로보가 사람이 비쳐 보일 정도로 불투명한 상점 유리를 가리켰다.
“아무튼 잘 어울려. 아가씨가 예뻐서 그런가? 저기 봐. 괜찮지?”
유리 안에는 관광을 제대로 즐기는 듯 들뜬 표정의 여자가 보였다. 그의 말대로 유치해 보인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테마파크의 나들이객처럼 보였다.
거울에 비친 상에 시선을 빼앗긴 틈을 타 로보가 솜씨 좋게 불가사리 핀이며 꽃핀 따위를 내게 장식했다.
“머리 잘 만지네요. 전문 미용사 같아요.”
로보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릴린이라고, 집에 일곱 살 여자애가 있어. 사촌 동생이긴 한데 그쪽도 사정이 있어서 우리 집에서 맡아주는 중이지. 들를 때마다 매번 육지 왕자 모양으로 묶어 달라고 해.”
“육지 왕자 모양이요? 마침 크로노라는 표본이 생겼네요. 황자나 왕자나.”
내가 킬킬거리자 로보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길러서 팔찌 만드는 데 쓰겠다고 하는 애 머리를 짧게 자를 순 없잖아. 육지 왕자 모양이 대체 뭔지 알 수 없어서 양 갈래는 어떠냐고 했더니, 육지 왕자든 양 갈래든 상관없으니까 묶기나 하라고 면박을 주지 뭐야. 요즘 애들 참…….”
로보가 육아에 지친 남편의 얼굴을 했다.
“저번에는 트리톤 삼지창 세트인지 뭔지 하는 장난감을 사내라고 난리를 치는데……. 조상님 삼지창은 왜 장난감으로 만들어서 파는 걸까? ‘인어의 날’이랑 겹쳐 절판되는 바람에 구하기 힘들었다고.”
“‘인어의 날’이요?”
로보가 뒷머리를 헤집었다.
“우리 인어들은 수정이 어려워서 아이가 귀해. 그래서 아이를 축복하는 날도 따로 있지. ‘인어의 날’이 되면 어른 인어는 아이 인어에게 뭐든 해 줘야 해.”
“와…… 뭐든지요?”
“그래, 뭐든지. 법으로 정해져 있어. 땡깡 안 들어주면 감옥에 잡혀 가는 거야……. 그래도 애들 수준이 그게 그거지 뭐. 장난감 사내라, 육지 사탕 사내라, 트리톤 인형이나 트리톤 삼지창 사내라. 그게 다야. 좀 별난 애라면 책이나 현금을 요구하기도 하더라.”
로보가 킬킬거렸다. 내가 흥미를 보이자 로보는 동생이 인어의 날에 요구한 공물들을 나열하며 등골이 휜다느니 너스레를 떨었다.
밑으로 동생이 많다는 이야기는 진즉 들었다. 게다가 사촌 동생까지 꽤 천방지축인 모양인데, 어떤 인어들일지 궁금해졌다.
걷던 도중 상어 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핀을 집어 들고 로보에게 손짓했다.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기꺼이 허리를 숙여 주었다. 어느덧 우리 머리 위에는 상어며 병아리 모양의 머리핀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장난을 치며 케이론 호가 정박되어 있는 포트 쪽으로 향했다. 사방에서 경쾌하고 화려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수산물을 두고 흥정을 하는 손님과 상인들, 어렴풋한 생선 내음과 대공비인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영지민들까지. 리몬델은 활기에 묻혀 서늘한 겨울인데도 꼭 여름 같았다.
하지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음흉한 시선으로 로보를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첩실이니 뭐니 소곤대는 소리도 들렸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급히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인어 모습이 따로 있죠?”
“응. 보고 싶어? 인어에 대한 환상이라도 있다면 기쁠 텐데 말이야.”
“조금요. 저는 어릴 때 인어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어요. 지구에서는 인어가 실존하지 않고 전설이나 동화 속에서만 등장하거든요.”
“그래서 인어 공주니 뭐니 했던 거야?”
그가 습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머리 위를 가득 장식한 각종 핀에 손길을 애매모호하게 뭉그러뜨렸다. 그게 꽤 우습고 쌤통이라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로보의 어조가 살짝 들떴다.
“곤란하다거나 싫진 않은데, 그러려면 옷을 다 벗어야 해.”
“……네?”
나는 덫에 걸린 깡통처럼 고장이 나고 말았다.
“옷 입은 채로 바다에 들어갈 수는 없지. 내 꼬리지느러미는 하나인데, 다리는 둘이니까 바지가 안 맞아. 뭐니 뭐니 해도 다시 인간으로 변할 때가 제일 난감하지. 인간의 다리를 형상화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바지가…… 인어 모습으로 육지에서 숨을 쉴 수는 있지만, 역시 바지가!”
“아, 아아, 응, 그렇죠! 미안해요, 이상한 걸 물어봤어요!”
생각이 붉게 꼬여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휠체어를 조종하는 것도 잊은 채 멀거니 일렁이는 지평선만 바라보았다.
“하하, 아하하하! 아가씨 진짜 재미있어!”
“그만 좀 놀려요! 말룸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왜 절 못 놀려서 안달이 난 거예요?”
“놀림당할 때의 아가씨는 활기차거든! 지렁이도 비슷한 맘 아닐까? 그 녀석 속내를 이해하고 싶진 않지만.”
로보의 백색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그러고 보니 다들 내가 우울해하거나 다른 일로 정신없어 할 때마다 부쩍 장난을 걸었다. 장난이 늘어 이상하다고 느꼈던 말룸도, 만날 때마다 이것저것 챙겨주던 로보도, 썰렁한 농담을 곧잘 하게 된 크로노도, 심지어 엘로힘마저도.
“인어로 변할 때 옷을 입고 있으면 거추장스러워. 발가벗은 걸 길거리나 다름없는 바다에서 보여주긴 싫으니까, 기회가 올 때까지 참아줘.”
로보는 그냥 그렇게 덧붙이며 또 파도처럼 웃었다. 나는 그라는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다가갈수록 건물이 점차 웅장해졌다. 역참 부근의 시장은 정제되지 않은 활기가 눈에 띄었다면 이곳은 유적지 느낌이 강했다. 기둥이 나무처럼 우뚝 솟은 것부터, 좌우 대칭이 잘 정제된 웅장한 은행 건물까지 한 가지 양식으로 통일된 것이 없었다.
특히 시선을 잡아끈 것은 거대한 소라고둥을 형상화 해둔 듯한 건축물이었다. 집의 외벽을 원뿔 모양으로 만들어 소라처럼 꾸며둔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사방을 넋을 놓고 관찰했다. 로보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가 기지개를 켜며 착실히 가이드 역할을 했다.
“맘에 들어? 전부 아틀란티스 양식이야. 이 지역은 1기 아틀란티스의 영토였거든. 엄─청 태곳적 일이지.”
“정말요? 그럼 지각변동 같은 걸로 육지가 솟으면서 인간들의 땅이 된 건가요?”
“맞아. 인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동안 존재했거든. 인간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형성된 종족이지. 저기 신전 기둥 있지? 저것도 아틀란티스 양식. 잘 보면 기둥 밑에 돌고래나 불가사리 부조가 조각되어 있잖아. 바다와 관련된 조각이 붙은 것들은 전부 1기 아틀란티스의 산물이야.”
로보의 말 대로였다. 아치형 기둥에도, 정원수를 떠받치는 화분에도, 어느 레스토랑의 벽면에도 전부 아틀란티스의 상징물이 붙어 있었다. 리몬델 자체가 고대 아틀란티스를 보관한 일종의 박물관이었다.
로보가 그리워하듯 주변 건물을 둘러보았다. 유적을 보며 고향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했다.
“쥬벨타 말로는, 육지에 남은 아틀란티스 유적들은 도금이 다 벗겨져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데 진짜였어. 왜, 독립해서 고고학자 일 하고 있다는 우리 집 셋째 말이야.”
신기한 문화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틀란티스의 건물은 일단 대리석이든 벽돌이든 형태를 빚어 놓은 후 금이나 은으로 덧씌우거든. 심해 속에서도 반짝거려 도시를 알아볼 수 있게끔 말이야.”
그간 인어들이 무척 부유하다는 속설을 많이 들었는데, 건물 외벽을 금이나 은으로 치장할 정도라면 부의 깊이가 짐작이 갔다.
나는 아틀란티스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얘기를 들어 보면 로보는 가족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로보가 첫째인 거죠?”
“그렇게 보여? 그런데 첫째는 아니고 둘째야. 셋째가 고고학자로 일하는 쥬벨타, 넷째는 웨이브 로망에 재학 중인 카일락, 다섯째가 집에서 빈둥거리는 유고. 쥬벨타만 여자애고 나머지는 다 남자애야. 요즘 유고의 우울증이 심해진 것 같아서 걱정이지만, 그 애도 마음 추스를 날이 오겠지, 뭐.”
의외인 이야기다. 영락없는 첫째인 줄만 알았었는데. 게다가 그는 지금까지 형이나 누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웨이브 로망은 학교 같은 건가요?”
“응. 아틀란티스 최고의 명문대지. 카일락은 무척 똑똑해. 까칠한 녀석이긴 하지만 내 자랑이야.”
내가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자 로보가 하늘의 구름을 헤아렸다.
“뭐, 내가 첫째와 다름없긴 해.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심해 괴물의 습격 사건에 휘말리셨고, 형과 할머니도 함께 희생되었지. 그래서 지금은 내가 가장 노릇을 하고 있어. 그 당시 습격 사건이 너무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져서, 우린 그걸 시튼 습격 사건이라고 따로 이름까지 지어 부를 정도야.”
로보가 습격당한 시가지 이름이 시튼이라고 알려주었다.
“아…… 많이 힘들었겠네요.”
“거의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이라 이젠 괜찮아. 나보다는 동생들이 걱정이지. 사고가 났을 때 너무 어려서 부모님이나 형 얼굴도 기억 못하거든.”
로보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헤집었다.
“제일 어렸던 유고까지도 스물이 되었어. 우리 유고가 아가씨랑 비슷한 또래인가? 하지만 걔넨 아직 곁에서 챙겨줘야 하는 애란 말이야.”
“그래도 노력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음…… 동생들을 자주 만나지는 못해. 내가 부모님이랑 형의 빈자리를 채워주어야 하는데, 뭍에서 해적질이나 하고 있으니까 형편없는 형인 거지. 항상 미안하게 느끼곤 있지만 상황이 따라주질 않네.”
“전혀요. 자주 만나지 못해서 미안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좋은 형, 오빠라는 증거잖아요, 그렇죠?”
그렇지만 로보는 동의하지 못하겠는지 그저 멋쩍게 미소할 뿐이다.
내 동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애와는 항상 싸우기만 했다. 서로 데면데면한데다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밥이라도 한 번 사줄 걸 그랬다. 영영 그 애를 볼 수 없어지기 전에, 부모님께 속박당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진짜 동생이라고 이야기해줄 것을 그랬다.
나는 의미 없이 오징어 다리만 질겅질겅 씹었다. 배어 나오는 비릿한 내음이 유독 역했다. 결국 오징어 먹기를 그만두었다.
로보는 이후 가족에 대해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파제 근처로 다가서자 크고 작은 배들이 눈에 띄었다. 곳곳에 쓰다만 그물과 통발 따위가 널브러졌다. 통발에는 하나같이 노란 딱지가 붙어 있었는데, 로보는 수거해가지 않으면 추적 주술을 걸어 주인을 찾아 벌금을 물릴 것이라는 경고라고 했다. 주술의 활용 방법은 상상 이상으로 다양했다.
서늘하면서도 청량한 겨울바람이 불었다.
거대한 흑선에 눈길이 묶였다.
갤리온 선이었다. 45개의 돛대, 일곱 개의 거대한 돛, 그리고 세 개의 메인마스트.
나는 기껏해야 중형 배를 생각했다. 하지만 저것은 그야말로 대해적의 배, 약탈을 위해 만들어진 최고의 전투형 선박이었다.
망루 꼭대기에서 흰 상어 문양이 인상적인 검은 깃발이 펄럭였다. 겉면은 황금과 은, 붉은 루비 따위로 장식되어 있어 정박한 배들 중 가장 화려했다. 대부호가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조한 배 같았다. 누구의 배인지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배의 위용에 압도되어 말을 잇지 못하자 로보에게서 즐거움이 묻어났다. 그가 휠체어 째로 나를 안았다. 나는 얼떨떨해져서는 로보의 어깨를 꽉 잡았다.
소박하게 생활하는 데다 말투도 가벼워 잊고 있었지만, 로보는 2기 아틀란티스를 열었던 트리톤 왕의 직계였던 데다 할아버지가 보위에 있었다.
문득 트리톤이 라딘라티의 이부동생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로보가 라딘라티와 옅게나마 피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입안이 텁텁했다.
“오래간만에 보니까 반갑네.”
로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흑선은 다른 배들과는 달리 닻을 내리지도, 밧줄로 고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로보의 배는 바다에 박힌 듯 물살을 거스른 채 멈추어 있었다.
“난 배에 투자하는 걸 아끼지 않아. 내 집이나 마찬가지거든.”
로보가 상쾌한 바람결을 느끼며 미소했다. 그가 이처럼 들뜬 것은 처음이었다.
“늑대 해적단, 케이론 호에 온 걸 환영해!”
“정말 이 배예요? 검은 바탕의, 화려한?”
“내 악명을 생각하면 당연히 저 정도는 타줘야 하지 않겠어? 설마 돛단배인 줄 안 건 아니겠지. 첫 만남이 형편없긴 했지만 이래봬도 전리품은 꼭꼭 챙기는 성격이거든.”
“……전리품이 아니라 약탈품 아닌가요?”
“하하, 그게 그거라고 해 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 배에 나를 초대해서 기쁜 모양이었다.
“전에 수리비도 엄청나게 나왔잖아. 그거 내 맘대로 이것저것 손봐서 그래. 루비도, 사파이어도, 도금도 다시 했지!”
로보가 대수롭지 않다는 양어깨를 으쓱했다.
“아가씨 돈 아니라고 했으니까 맘껏 쓴 거야.”
그가 악동처럼 덧붙였다. 비용이 말룸에게 청구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