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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60화 (60/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60화

흘끗 바라본 로보는 광대극이라도 펼쳐지는 건지 또 바깥에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귀와 내게 노출된 오른쪽 볼이 보이지 않도록 구릿빛 살결을 손으로 꽁꽁 싸맸다.

드러난 손등이 거칠었다. 그의 손은 잘 조형된 것처럼 유려했지만 상처의 흔적이나 밧줄 모양으로 문드러진 굳은살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신체 곳곳에도 굵은 흉터가 잔뜩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순간마다 로보가 편안하지는 않은 삶을 살았음을 실감했다.

상어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끝없이 헤엄쳐야만 하는 생물이었다.

자작나무 숲에서, 로보는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꼭 파도처럼 살아가려 노력했다. 나는 그 점 때문에 로보가 강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순응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파도를 찾아 표류하는 의지가 눈부셨다. 나도 로보처럼 살아가고 싶었다. 감히 그의 인생 궤적을 다 알지 못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N극이 S극에 이끌리듯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아도 상대를 상상하게 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럼 나는 그 모습을 담아두기 위해 캔버스 하나를 꺼내 스케치를 시작했다.

색은 아직 피어나지 않은 흑연, 물감은 사용하기 이르다. 하지만 일단 캔버스가 등장하기 시작하면 속절없었다. 그자가 모나든 사랑스럽든 폭풍 같든 상관없이 풍요로운 청록색 나무, 작은 산딸기 따위로 주변 경관을 치장하게 되었다.

나는 심중 완성된 작품을 ‘포도 풋내 나는 항구’라 명명했다. 로보는 알알이 탐스러운 포도, 그보다는 푹 숙성해 사람 정신을 홀려 놓는 붉은 포도주를 닮았다. 만약 내가 말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일들을 흩어 보내는 이 독한 술 같은 사내를 집어삼키고 싶어 했을 테다. 혹은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어찌 보면 고지식할 수도 있는 이 사랑관이 아니었다면 단번에 그의 손을 잡아 얽었겠지…….

로보는 특별했다. 저돌적인 소용돌이 같으면서도 봄날의 벚꽃처럼 순수했다. 나는 그런 로보가 무척 탐이 났지만, 탐스러운 포도넝쿨에 손을 뻗을라치면 민들레 꽃잎 같은 말룸의 눈동자와 붕대 감긴 다리, 귓가에 울리는 째깍대는 시계소리가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면 나는 형체 없는 신을 그리는 화가처럼 길을 잃어버렸다.

친애하는 사람더러 시체와 함께 춤을 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엮이지 않을 여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나를 멀리하도록 안배하는 편이 우리 모두에게 이로웠다.

리몬델은 관광단지답게 외부인에게 너그러웠다. 역참은 크고 화려했고, 도로도 모난 곳 없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과 말이 다니는 길이 따로 나 있어 넋 놓고 구경하다가 마차와 부딪힐 염려도 없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닷바람이 소금 냄새를 실어 왔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코끝이 알싸해졌다. 바깥으로 빠져나온 입김이 구름처럼 뭉쳤다가 사라졌다.

등대며 해양 박물관이며 항구의 명소를 안내하는 백색 표지판이 이리저리 엉켜 주의를 끌었다. 소라고둥이나 물고기 모양의 풍선이 도처에 날아다녔다. 텁텁하게 느껴졌던 바다 냄새가 갖가지 향기를 담아 색다르게 느껴졌다. 여기저기 호객행위가 한창이었다.

지구의 관광지와 비슷한 풍경에 그리움이 물씬 솟았다. 특히 저 회색 아기 상어 풍선……. 로보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이전 세계에서 유행했던 뚜루루 하는 그 동요가 생각나기도 하고. 여러모로 감상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풍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로보가 말도 없이 풍선을 사 버렸다. 당황해 바라보자 그는 휠체어 팔걸이에 상어 풍선을 묶었다.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어린애 아니에요.”

“물론 그렇고말고.”

로보가 유쾌하게 응대했다.

“하지만 아가씨 입매가 신이 나서 올라가 있는 걸. 솔직해져도 괜찮아, 아무도 나무라는 사람 없어. 그리고 꼭 아이들만 풍선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길도 모르면서 막힘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로보가 한숨 깃든 웃음을 뱉어내며 곁을 따랐다.

나는 상가를 순회하듯 쏘다녔다. 그런 다음 물건의 처리를 고려하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결제했다. ‘이거 주세요. 문어 다리 꼬치’, ‘이것도요, 불가사리 튀김’, ‘저것도, 맥반석 오징어!’ 그런 다음, 나는 흰 봉지를 한 아름 받아들고 선언하듯 이야기했다.

“전부 티포주 성으로 청구해주세요. 발타사르 대공비 앞으로요.”

곁에서 로보가 폭소했다. 나는 그만 웃으라는 의미에서 그에게 문어 다리 꼬치 하나를 앙 물려주었다.

“나 이래서 아가씨가 무척 사랑스러워! 돈 쓰는 것도 감정 달래는 데 괜찮지.”

로보가 꼬치를 우물거리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마저도 멋져 보이는 건 내 눈에 뭐가 씌었기 때문일까?

“음, 그런데 이거 맛있네. 닭으로 만든 건가? 입맛에 딱 맞는 게 아틀란티스에서 먹어 본 것 같아.”

“……문어요.”

“어쩐지.”

나는 신발코로 공연히 바닥을 헤집었다.

“로보 앞에만 서면 투정 부리게 된다니까요.”

“뭐 어때? 난 좋아. 그런데 산 것들 다 먹을 수는 있겠어? 점심은 걸러야겠다.”

“응? 당연히 다 먹을 수 있죠.”

“못 먹을 것 같으면 억지로 먹지 말고 남겨. 아무도 화 안 내니까.”

로보는 잔 생각이 많은 내 성격을 간파해 낸 것이 틀림없다. 그의 다정에 나는 길바닥만 바라보았다. 푸르고 흰 벽돌이 교차한 블록이 눈에 들어왔다. 해마며 꽃게며 물고기 따위의 것들이 물감으로 귀엽게 표현되었다.

도처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 연인처럼 보이는 사람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내게도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푸른 햇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로보는 훌쩍 앞서가 어느 노점 앞에 멈추더니 또 무언가를 구매하고 있었다. 무심코 웃음이 삐져나왔다. 양옆으로 펼쳐진 소박한 상점과 주택의 벽면에서조차 해양 생물과 육지 동물이 서로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는 경쟁하듯 이것저것 사들였다.

“전부 티포주 성으로 청구해주세요!”

“2번 포트에 정박해 있는 케이론 호, 회계담당 로즈우드 편으로. 봄 출항 예정입니다.”

로보는 상인들에게 깍듯이 말을 높였다. 이전에도 그는 드레스룸에서 티샤와 모아를 보았을 때 존대를 했었다.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말을 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첫 만남이 첫 만남이었던지라 그는 내게는 처음부터 존대를 하지 않았었다.

나는 로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저한테는 높임말 안 썼잖아요?”

그 은근한 말에 로보가 눈을 깜빡이더니 멋쩍게 미소했다.

“그러네. 사실 그때 아가씨를 철없고 돈 많은 귀족 집 금지옥엽이라고 생각했었어. 지금이라도 말 높일까?”

로보가 단정하게 허리를 숙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살짝 보이는 붉은 눈이 막 점화된 불꽃처럼 화려했다.

“말씀만 하세요, 주인님.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겠습니다.”

“앗, 됐어요! 이거 봐요. 당신한테 존대 들으니까 소름 돋았어요.”

“오, 평가가 박한데. 너무한 거 아냐?”

“그게 아니라, 당신은 그냥, 그렇게 반말 하는 게 어울린다구요. 예의 차리는 것보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요?”

“그래, 알아들었어. 하지만 아가씨 반응이 재미있어서 자꾸 놀리게 돼!”

“제가 놀리기 적당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투덕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로보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신기하다는 시선을 받았지만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았다.

나는 휠체어 속도에 맞춰 보폭을 작게 하는 로보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끌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푸르스름한 선글라스에 맺힌 햇살이 눈부셨다.

“다들 바라보는 거 말이에요. 불편하진 않아요?”

인어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느낌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그의 삐죽빼죽한 상어 이빨을 보지 않더라도, 검은 쌍창이 없더라도, 척추를 따라 살갗에 아로새겨진 비늘 문양 문신을 보지 않더라도 누구든 로보를 마주하면 아, 저 사람 인어구나 할 만한 이질감이었다. 인어와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나는 답을 기다리며 로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내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아틀란티스가 폐쇄적이라 그래. 저 사람들이 인어를 언제 봤겠어. 서로에 대해 모르니까 인어고 인간이고 상대를 어려워하는 거야. 교역을 하면 나을 텐데……. 육지 물건이 필요할 때도 많고.”

“그래도 기분 상할 것 같아요. 신경 쓰이고.”

“악의가 있는 시선이 아니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해적질을 시작한 지 벌써 15년째야. 이런 건 기분 나쁜 축에도 못 들지.”

로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상어 이빨에서 뾰족뾰족한 자유가 돋보였다. 그 자유이야말로 그만이 간직한 활기, 푸른 바다를 유영하는 생명의 증거였다.

“생각보다 해적 생활을 오래 했네요. 그러고 보니까 이걸 모르는데, 몇 살이에요?”

“글쎄, 아가씨는 몇 살인데?”

“비밀인데, 크로노보다는 많아요. 말룸도 절 스무 살로…… 아, 해가 바뀌었으니까 스물 하나네요. 어쨌든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아무한테도 안 알려 준 건데, 다들 크로노랑 제가 동갑이라고 착각하고 있더라고요. 크로노까지도!”

로보가 폭소하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중에 육지 황자가 알면 당장 말을 높이려고 할 거야!”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답을 종용했다.

“자, 이제 당신 차례에요! 몇 살인지 알려줘요.”

하지만 로보는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비밀이야! 내가 몇 살인지 맞춰볼래?”

나는 가끔 이 사람이 몸만 큰 소년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고 만다. 또 놀릴 심산이라 이거지.

“말룸처럼 조상님뻘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그건 걱정 마. 인어가 끔찍하게 오래 사는데다 노화가 멈추는 인어도 있긴 한데, 난 딱 올해로 서른이거든.”

나는 눈을 깜빡이며 로보를 바라보았다. 서른이라고? 저 자유분방한 사람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외모 때문이라기보다는 로보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그랬다.

“왜, 의외야?”

“좀 더 어릴 줄 알았어요. 스물 초중반 정도?”

“기쁘네! 세월에 굴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증거니까.”

그러게. 당신처럼 시간에 묶인 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묵묵히 인형들을 한아름 끌어안았다. 뱀 인형, 강아지 인형, 상어 인형, 불가사리 인형, 꽃게 인형과 새싹 인형까지. 성의 식구들에게 나누어 줄 상상을 하니 씀씀이가 커졌다.

“예쁘다, 아가씨.”

로보가 내 머리칼에 세 번째 핀을 꽂아 넣었다.

“이번엔 뭐예요? 저번엔 불가사리랑 미역이었죠.”

“산호초. 여기 조개 핀도 있어. 리몬델에서만 살 수 있는 명물 핀이니까 이럴 때 잔뜩 사 둬야지.”

“인어 공주라도 만들고 싶은 거예요? 게다가 전부 다 애들 핀이라구요.”

로보는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인어 공주? 아틀란티스에 공주는 없는데. 늑대상어 일족 중 우리 가문이 해왕 트리톤 직계이기는 한데, 아틀란티스는 후계자가 아니면 왕족 취급 안 해줘. 왕위가 세습위도 아니고……. 할아버지 윗세대의 왕이 귀신고래 일족의 여자였는데, 그 사람이 후계 자리에 있었을 때는 공주였겠지.”

늑대상어 일족 중에서도 해왕 트리톤의 직계……. 무척 생소했지만 그의 가문이 명문가라는 것은 알겠다.

“왕이 존재하는데 그 가족이 왕족 취급을 안 받을 수가 있어요?”

로보가 앓듯이 인상을 썼다.

“그게 바로 아틀란티스 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야. 우리들의 왕은 후계위에 있을 때 그럭저럭 권위를 내세우다가도 왕이 되고 며칠이 지나면 갑자기 죄인처럼 돌변한단 말이지……. 알아선 안 될 걸 알아버린 것처럼. 우리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어. 듣기로, 왕이 되기 전에는 참 권위적인 사람이었다는데…….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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