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9화
늑대 해적단의 케이론 호는 발타사르령 리몬델의 2번 포트에 정박해 있었다.
리몬델은 발타사르령 북동쪽에 있는 한적한 어촌이었는데, 관광업으로 먹고 사는 도시였다. 항구 특유의 고즈넉한 바다냄새와 독특한 양식의 벽화촌이 인상적이라고 로보가 들뜬 듯 이야기해주었다.
“아가씨, 물건 다 챙겼어?”
로보는 갈색 코트에 깔끔한 백색 셔츠로 옷맵시를 냈다. 이곳의 의복은 중세의 복식을 띠는가 싶다가도 종종 현대적인 향취를 풍길 때가 있었다.
나는 로보의 세련된 수려함에 푹 빠져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단추 두어 개를 풀어 내리는 손짓마저 관능적이었다. 로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자주 지어 거리감이 없는 것뿐이지 그가 무표정을 고수할 때면 그의 인상이 얼음바다처럼 가라앉아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지구에서 길을 걷다 로보를 만났더라면 가까이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 다음 친구들에게 오늘 나 모델 봤다느니 연예인 지망생 봤다느니 호들갑을 떨어댔겠지.
“날 두고 다른 생각 하는 거야? 이거 참 섭섭한데.”
“당신 생각 하고 있던 거라고요. 매일 헐렁한 차림새로 지냈으면서, 그렇게 차려입으면 감탄하게 된다니까요. 잠시만요, 이걸 좀 챙기고…….”
나는 냅킨이며 숄이며 초콜릿 따위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공들여 갖춰 입은 검은 원피스 자락에 구김이 앉았다.
“그리고 아직 돈도 못 챙겼어요.”
로보가 상쾌하게 미소했다.
“돈? 아하, 괜찮아! 필요 없어. 리몬델에서 종일 금화 들고 다니다간 소매치기 당하기 십상이야. 치안이 좋은 편은 아니거든.”
로보가 내 손에 들린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앙증맞은 가방이 그의 건장한 팔뚝에서 달랑거렸다.
“살 게 있다면 상인에게 신분패를 보여주고 청구하면 돼. 금품 절도 문제 때문에 관광지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지. 그래도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줄래? 사 주고 싶으니까.”
“로보도 인어잖아요. 인어도 신분패가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나 같은 경우엔 이종족 여권이라는 게 있어. 이종족이라고 해봐야 인어뿐이지만, 어쨌든 인어들은 그걸 써. 하지만 아틀란티스는 인간과 교류하지 않기 때문에, 이종족 여권으로 신분을 증명한 후에는 황금이나 은을 가지고 육지 은행에 가서 기간 내 한 번에 지불해야 해. 아틀란티스에서 통용되는 주화는 육지에서 쓸 수 없고, 환전도 안 돼서 가치 있는 광물을 통해 거래하는 거야.”
“귀찮은 방법이네요.”
“타지에 가면 귀찮은 일이 늘어나는 법 아니겠어? 이것도 여행의 묘미라고 간주하면 꽤 즐거워!”
그가 너스레를 떨며 나를 안았다.
“오늘 하루는 맘껏 부려줘. 데이트 신청 받아준 답례야.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가씨는 모를 거야…….”
비스듬히 안긴 채 균형을 잡았다. 함께하는 일이 익숙해질수록 로보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이번에는 제가 사고 싶어요. 로보야말로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 말해줘요. 제 돈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그러던데. 아가씨, 그 녀석과 결혼한 게 아니야? 돈 쓰는 건 맘고생 한 대가라고 여겨도 될 것 같은데. 아니면 내게 와도 좋아. 아가씨가 돈 쓰는 걸 꺼리지 않도록 받들어 모실게.”
외출용 선글라스에 가려진 로보의 붉은빛 눈동자가 석양을 닮아 우아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무례인 줄 알면서도 입을 달싹였다.
“……당신처럼 멋진 사람이 왜 저한테 반한 건지 모르겠어요. 당장 거리에 나가도 저처럼 평범한 사람 천지일 걸요.”
“아가씨가 평범하다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로보가 나를 돌아보더니 아프게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부정할 건 없잖아……. 내 눈에 아가씨는 어떤 아틀란티스의 보물보다도 귀해 보인단 말이야.”
그의 상냥함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봤자 그에게 고통이 될 듯했다.
이후로도 로보는 쾌활한 척 나를 보듬다가도 속내를 암시하는 말을 했다. 여지를 청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오늘 외출 목적도 그에게 제대로 선을 긋기 위함이었다.
만약 내가 로보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세상이 전부 무너져 폐허만 남았을 때가 되어야 했다.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약을 찾아야 하니까…….
그가 잠시 정면을 응시하더니 중얼거리듯 정곡을 찔렸다.
“그리고 뭐든 사 주겠다고 하는 거 아니야. 아가씨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참 걱정이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로보가 악당처럼 웃었다.
“반지라도 사 달라고 하면 어쩌게? 정인의 증표마저도 사 줄 거야?”
“네? 반지는! 저기…….”
“아하하, 농담이야! 그래도 사 준다면 환영이지. 해적은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거든. ……그래서 내가 아가씨에게 반한 걸지도 모르겠어.”
고장 난 가로등에 삽시간에 불이 번졌다. 나는 목덜미까지 새빨개져선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문장을 엮지 못했다.
귀 끝이 뜨거워 증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로보가 이야기하는 반지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평정을 유지하기가 벅찼다. 코끝에 겨울바람이 얹혀 얼어붙었다.
내가 안겨 있느라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했는지 로보가 상냥히 덧붙였다.
“밑에 휠체어 준비해놨어. 바깥에서는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거야. 매번 안기는 것도 힘들지?”
굳이 정정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장을 도와준 모아가 남몰래 주먹을 쥐며 힘내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로보는 모아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복도를 걸어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아는 ‘로보 파’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번졌는지 모르겠지만,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말룸과 크로노, 로보를 두고 누구를 응원할지 편 가르기가 한창이었다.
아무래도 말룸이 심중에 걸렸다. 로보에게 선을 긋고 오겠다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태연한 척해도 그는 속내를 잘 숨기는 사람이니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곤란했다.
말룸은 최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로보와 크로노에게 폭언을 퍼붓는 것은 전과 같았지만, 그 둘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면접을 보는 것처럼 관찰할 때도 있었다. 로보와 크로노가 라딘라티를 대적할 만한 자질이 있는지 재어보는 중인 듯했다. 물건의 적절한 쓰임새를 고민하는 것과 비슷했다.
말룸은 특히 식당에서 품평하듯 둘을 몰아붙였는데, 노골적인 시험에도 로보와 크로노는 개의치 않아 했다. 오히려 조금 반기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입안이 껄끄러웠다. 말룸이야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익숙한 데다 별 죄책감도 없겠지만…….
사실 말룸이야말로 필요하다면 호적을 이용해 내게 이득이 되는 자를 곁에 붙여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상대는 내 ‘첩’이 되는 즉시 말룸에게 있어서 도구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나는 로보와 크로노가 그렇게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말룸에게 있어서 인간네들의 호적이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방패막이,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
1층 로비로 내려가자 사용인들이 일제히 인사를 했다. 로보가 고풍스러운 휠체어에 날 앉혔다. 휠체어는 이전 세계의 휠체어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모양부터가 일반 의자를 보듯 고급스러운데다 스스로 허공을 부유하기까지 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만 진동 하나 없는 승차감에 금세 들떠 이리저리 휠체어를 조종했다. 반구 형태의 구슬을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드래그하면 휠체어가 그대로 움직였다.
“로보, 이것 좀 봐요! 휠체어가 날아다녀요!”
로보와 함께 있으면 주변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들떴다. 모험과 자유와 파도를 형상화한 것 같은 남자……. 그는 내 이상향이었다.
로보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장난스럽게 뽐내는 행동을 취했다.
“그럼, 누가 공수해온 건데! 그렇게까지 신기해하는 건 부끄럽지만. 아가씨 세계에는 휠체어가 없어? 지렁이 녀석이 좀 손보긴 했지만 특별하지는 않을 텐데.”
“있기는 하지만 바퀴로 움직여요. 하늘을 날지 않는다구요!”
“오, 바퀴라고? 바퀴는 비효율적이잖아. 동력은 주술석을 녹여서 해결하는 게 제일인데. 바퀴는 수레나 마차에만 사용하는 줄 알았어.”
로보가 신기한 듯 짧게 감탄사를 냈다. 그게 귀여워 웃음을 터트렸다. 로보가 따라서 경쾌하게 웃었다.
“오늘 좀 들떴어, 아가씨.”
“기분 좋은 날이잖아요. 로보와 함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거 굉장히…… 듣기 좋은 말이야.”
열감이 번졌는지 로보의 눈가가 홍시처럼 붉었다. 그는 부끄러우면 눈가가 붉어지는 타입이었다. 천성이 자유로운 그가 부끄러워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로보가 얼굴을 붉히는 일은 십중팔구 나와 연관되어 있었다.
나까지 덩달아 멋쩍어졌다. 그가 코트 자락을 정리하는 둥 부산을 떨었다. 속내가 빤히 보여 입안이 썼다.
로보가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배려해 보폭을 좁힌 채였다. 나는 휠체어를 조종해 그의 뒤를 따랐다. 바깥에는 휠체어를 수납할 수 있는 화려한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로보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정리하고 마차에 올랐다. 로보가 내 뒤를 따랐다. 다른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내 옆에 넌지시 앉았다. 혼란스러움과 두근거림에 퓨즈가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잠깐, 아가씨. 거기 원피스 소매 리본 풀렸다. 부드러운 재질이라 그런가 봐.”
너무 신이 나 신경을 쓰지 못했는지, 그의 말대로 소매의 리본이 풀려 있었다. 로보가 내 팔을 조심스럽게 끌어가 맵시 있게 리본을 묶었다. 인어의 손톱 끝이 간간이 살결을 스쳤다. 그의 손톱은 너무 길지도, 뭉툭하지도 않게끔 적당히 정돈되어 있었다.
로보가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었지만 나는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집중하는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자, 다 됐다. 또 풀리면 말해. 아무래도 자주 풀릴 것 같아서.”
“고마워요…….”
“천만에.”
로보가 시원한 파도를 닮은 웃음을 내놓았다. 그 걱정 없는 웃음에 속이 심란한 나도 터놓고 마주 미소 지었다.
로보가 창문 너머에 시선을 두어 조용하고 한적한 들판의 풍경을 감상했다. 인어는 단풍이 내려앉아 울긋불긋해진 목덜미를 자주 어루만졌다.
우리는 급속 냉동된 듯 어색해져선 서로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로보는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자유분방할 때를 제외하면 사색에 잠기기도 했고 자신의 심계를 쉽사리 표현하지 않기도 했다. 그의 감정이 진실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로보 편으로 슬쩍 동그란 초콜릿 하나를 집어 건네주었다. 알아차려주었으면 하는 마음 반, 몰랐으면 하는 마음 반으로 그를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보는 용케 내 몸짓을 알아채고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음.”
그가 초콜릿을 얌 받아먹었다. 뾰족하면서도 잘 정돈된 날카로운 이가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상어에게 먹이를 주는 듯했다. 내가 앉은 이곳은 그저 그런 마차가 아니라 청색 물결이 오로라처럼 물결치는 아쿠아리움이었다.
“하나 더 줘.”
나는 기꺼이 초콜릿을 다시 먹여 주었다. 로보의 행동이 늪에 빠진 듯 더뎠다. 그는 전과 달리 받아먹는 것에 상당히 뜸을 들였다.
마침내 의문스러운 표정의 인어가 입을 벌려 초콜릿을 물었을 때, 그의 혀끝과 내 손가락이 살짝 교차했다. 적당히 따뜻하면서도 말캉한 인어의 혀는 긴장 때문인지 바짝 말라붙은 상태였다.
“아…… 아, 로보! 그게요, 제가 잘못 준 것 같아요. 너무 깊이 밀었나요? 손가락을…….”
로보가 샐쭉 웃었다. 여우같은 표정이었다. 그가 고의로 그랬음을 열 살짜리 어린아이도 알아차리지 않을까?
“맛있었어. 미안, 손수건 줄까? 생수도 있으니 물 묻혀서 닦으면 되겠다. 닦아줄 수 있는데. 어때?”
“하나도 안 더러워요. 로보인데요, 뭐.”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더 날 부추긴다고. 왜 지렁이 녀석이 그렇게 불안해하는지 공감이 되는 것도 같고.”
“…….”
나는 알레르기가 오른 것처럼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쿠키를 다시 입안으로 구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