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8화
나는 오래도록 조용히 일에 매진했다. 텃밭은 이제 텃밭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불어났다.
말룸은 주제를 잡고 꾸며나가면 보다 아름다울 것이라 했다. 나는 미로 같은 티포주 성에 걸맞게 고즈넉한 미로 정원을 만들고 싶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우리의 작업을 감독하는 것은 땅 주인 말룸이었다. 엘로힘이 극구 싫다는 것을 말룸은 땅 주인이라는 명목 하에 끼어들었다. 말룸도 무언가를 따로 구상하고 있는지 이것저것 요구사항이 없잖아 있었다. 대신 그는 자금을 대는 동시에 각종 석재나 기둥 따위를 조달했다.
조각을 도와준 사람은 엘로힘이다. 그는 근 천 년 동안 방랑하며 안 해본 일이 없다는데, 조각 일이 적성에 맞아 취미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과연 그 솜씨가 전문 장인처럼 뛰어났다. 돌에 천천히 조각되는 형상이 고풍스러웠다.
나는 축축한 땅에 이끼와 작은 버섯, 꽃나무를 자라게 했다.
우리는 돌담과 나무 따위로 미로의 칸을 나누었다. 작은 숲과 같을 정도였다.
내가 식물을 부린다는 것은 비밀에 부쳐져서, 이 미로는 다른 이들에게 출입금지 장소가 되었다. 공사 중이라 폐쇄해 두었다는 중앙 정원 생각이 났으나 나는 호기심을 품지 않았다.
“순조롭군요. 공사를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입구를 다 만들었어요. 방치된 유적 분위기가 나기도 하고, 엘프 특유의 건축양식이 묻어나는 것도 같고…….”
말룸이 막 완성된 부조를 이리저리 살폈다. 곁에서 엘로힘이 퉁명스럽게 응대했다.
“엘프가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오필리아는 엘프가 아닙니다.”
“입 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어디가 덧나나? 나 말이다, 나. 부조는 내가 조각하고 있잖나.”
나는 못 들은 척 국화 여럿을 나무 형상의 부조물 아래 틔워냈다. 또 과하게 피었다. 부조야 엘로힘이 조각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겨울의 땅을 초목으로 덧칠하는 것은 내 몫이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말룸이 관심 어린 낯으로 물었다.
“연못도 만드는 건 어때요?”
“네놈 아내가 미로를 만들겠다고 했잖나. 미로에 연못은 필요 없다. 정 연못을 파고 싶으면 남은 공터에다가 파도록 해. 땅도 많은 게 왜 여기서 연못 타령이지?”
“당신! 사사건건 쏘아붙일 겁니까? 미로에 연못이 있으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요!”
말룸이 모종삽을 집어던질 듯 치켜들었다. 나는 기겁을 해 외쳤다.
“말룸, 손버릇이요! 정말 삽을 던질 작정이었어요? 엘로힘 오빠가 다칠 거예요!”
“던지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설령 던진대도 저 작자는 멀끔히 피한 다음 나한테 삽 대신 검을 던질 걸요.”
“이참에 제대로 말하는데, 자꾸 물건 집어던지는 거 그만둬요. 어디서 배워온 버릇이에요?”
말룸이 눈치를 살피며 어조를 일그러뜨렸다.
“신전에서요……. 그때 몸에 익었죠.”
“불쌍한 척하는 거 다 알아요.”
나는 짧게 주의를 주곤 이번에는 이끼를 틔워내는 것에 열중했다. 말룸은 동정 유발 작전이 무산되어 순식간에 표정을 냉랭히 바꾸곤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늘 먼저 시비를 걸어요, 오필리아. 네?”
대꾸할 가치가 없는 소리였다. 내가 봤을 때 분쟁 원인의 8할은 말룸에게 있었다. 훗날 라딘라티에게 잡아먹히더라도 말룸의 손버릇은 꼭 고쳐놓아야 했다. 칠백 년 묵은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저런 아이 같은 투정은 어디서 배워온 건지, 참.
말룸이 엘로힘과 빈번히 충돌하는 것도 문제였다. 말룸과 함께하는 것은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지만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다른 이들과 말다툼을 하는 통에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엘로힘은 자신의 과오로 말룸이라는 괴물이 탄생했다고 여기는 듯싶었다. 그가 말룸에게 날을 세우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협력 상태인 지금은 감정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다.
“오빠도 조용히 해주세요. 나무가 말을 안 듣는다구요.”
“……조각의 영감이 떠오르질 않으니 먼저 들어가겠다. 무리하지는 말아라.”
이 사람도 가만 보면 뚱해지는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식물을 다룰 때는 몸에 힘을 빼고 네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라. 그럼 너와 가장 잘 어우러지고 그 순간 네게 꼭 필요한 식물을 불러낼 수 있을 거다. 굳이 특정 식물종을 분류해 끄집어내려 하진 마. 그런 건 약사나 식물학자가 할 일이지 엘프가 할 일은 아니니까……. 너는 엘프가 아니지만, 비슷하게 생각하면 도움이 될 거다.”
충고하는 엘로힘의 목소리가 힘없이 누그러졌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리를 피해 버렸다.
말룸이 의기양양한 몸짓으로 나를 뒤에서 깊이 안았다. 그 모습이 얄미워 밀어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래도, 너무 가까운데.
엘로힘의 일을 잊어버릴 만큼 사방 햇살이 어지럽게 범람했다. 귀 끝에 열이 올랐다.
말룸이 작게 노래하듯 속삭였다. 그의 매끄러운 중저음은 언제 들어도 유혹적이었다.
“일주일 후 카사블랑카와 조슈아가 도착한다고 했습니다. 겨울인데다 살인 사건의 수습으로 바빠 오지 않겠다는 걸 닦달하느라 좀 걸렸지만.”
“응? 겨울인 게 왜요?”
“레시우스 사람은 추운 겨울날 거처를 떠나면 저주를 받는다고 여겨요. 다음 일 년 내내 불운이 따르는 저주를. 우습지요?”
신기한 문화다. 하기야 지구에서도 붉은 색으로 이름을 쓰지 않는다거나, 밤에 손톱을 깎지 않는 풍습이 있으니까.
“그리고 라딘라티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해서는, 계속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자의 행방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람을 시켜 은밀히 조사하고는 있지만 소재 파악이 되지 않고 있어요. 당신도 아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줘요.”
“그럴게요. 마리아는 한미한 가문도 아니고 평민 출신이었어요. 검은 머리고, 적당한 성인 여성 체형이었죠. 예쁘단 서술은 본 적이 없었어요. 평범한 생김새일 것 같은데……. 찾는 게 좀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마리아의 소재는 오리무중이었다. 그 소설을 읽을 때 워낙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독자 이입 형 여주인공이라 간주하기까지 했었다. 말룸의 재력으로 마리아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가 한둘이 아니니 시간이 상당히 소요될지도 몰랐다. 마리아를 평생 찾을 수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후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돌담에 기대 가볍게 농담하는 말룸은 무거운 과거를 가졌다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활기찼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치거나 지구에 대해 설명했다.
“요르나스 말고도 생명체가 사는 행성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행성이겠죠?”
“응, 아마 그럴 거예요. 저도 지구에서 살 때 이만큼 발전한 행성이 존재할 거란 걸 믿지 않았거든요.”
“어떤 곳인가요? 당신의 고향별은.”
나는 계획한 것과 다른 꽃을 피워 내거나 시든 나무를 자라게 했다.
“편리한 게 굉장히 많아요! 냉장고, 선풍기, 지하철 같은 거요. 그리고 사정이 다른 나라도 있지만, 제가 있던 나라는 왕이나 귀족이 없었어요. 빈부격차가 심하긴 하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거죠.”
“왕이나 귀족이 없는 나라……. 신기하군요. 이 레시우스에도 그런 나라가 도래하길 원하나요?”
“글쎄요,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요르나스의 일은 요르나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정해야지, 멋대로 끼어든 제가 이 제도가 더 진보적이다, 이게 사람에게 더 이롭다 하면서 재단할 순 없는 거예요. 아직 레시우스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고요.”
말룸이 내 볼에 키스했다.
“하지만 그거 알아요, 오필리아? 당신이 원하면, 저는 레시우스 황가를 해치지 않겠다는 계약을 파기해 저주를 짊어지더라도 그자들을 집어삼킬 수 있어요. 왕의 목이 잘리는 거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가끔 이렇게 짓궂게 행동하며 내 반응을 살필 때가 있었다.
“말룸, 농담하지 마요. 크로노가 레시우스의 황자인 거 잊었어요? 그리고 이번 황실 가문이 사라져도 새로운 지배자가 생겨나겠죠. 합의 없는 개혁은 사회적으로 혼란만 불러일으킬 뿐이니까. 어쨌든, 당신이 레시우스 황가를 해치지 않겠다는 계약을 한 줄은 몰랐는데……. 괜히 나서서 일 벌이지 마요.”
“예, 좋아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뭘요?”
“내 행동에 목줄 거는 것. 그래서 날 애완용 뱀으로 만드는 것.”
말룸은 기분 좋게 미소했다. 그 말이 왜 이렇게 야살스럽게 들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레시우스 제국에 터를 잡는 조건으로 그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단다. 추가로 황실에서 지정한 귀족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계약도 이행했다고 한다. 그 계약은 황금 열쇠와 한 쌍인 황금 종에 의해 수호 받아서, 말룸의 힘으로는 파기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신에게 불리한 조건 아니에요?”
“그럴 리가. 파기하면 제 영혼에 무리가 가긴 하겠지만, 어차피 영생을 살게 되었으니 좀 앓고 말겠죠.”
말룸은 의문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는 말룸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황금 열쇠와 황금 종의 출처가 궁금했지만 들뜬 말룸의 모습에 다시 가벼운 주제로 선회했다. 골치 아픈 이야기는 언젠가 알게 될 테니 굳이 알기를 재촉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필리아, 지구 사람에 대해 더 얘기해줘요. 그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나요?”
“여기랑 비슷해요.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도 하고. 혼자 살기도 해요. 별 거 없어요.”
“특징 같은 건요? 버릇이나.”
“음, 제가 있던 나라 사람들의 경우에는 일부러 매운 걸 먹기도 했어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거나 스트레스를 푸는 거예요. 또,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예쁜 사진을 찍기도 해요. 관심을 끌기 위해 괴상한 음식을 먹는 것도 본 것 같아요.”
말룸은 봄에 눈이 오는 것을 본 사람처럼 의아한 낯이었다.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저도 매운 거 좋아해요.”
“그건 숙지해 두겠습니다. 매운 음식을 많이 올리라고 명령할게요. 그나저나 그곳 사람들은 참 이상하네요.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것 같아. 살다 보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데……. 제가 오래 살아서 그런 걸까요?”
“취향 차이인 거죠, 뭐. 하여튼 그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주변을 의식할 필요가 있어요. 어떻게 살면서 주변 사람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어요?”
“간단해요. 사람에게 가치를 두지 않으면 됩니다. 잡초가 걷는 데 길을 막아도 거슬리거나 신경이 쓰이진 않잖아요. 그런 거죠.”
“말룸.”
말룸이 못 들은 척을 했다. 이따금 오래 산 사람 특유의 말을 던질 때가 있긴 했지만, 이럴 때는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내가 아는 말룸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는 속에 내가 모르는 뱀을 품고 살았는데, 그가 그것을 내게 풀어 놓는 일은 살면서 영영 없을 것도 같았다.
텃밭을 개조해 미로를 만드는 작업이 순탄했다. 말룸은 주술로 미로 주변부의 기온을 일정하게 고정시켰다. 때문에 미로는 겨울임에도 봄과 같이 따스했다. 계절과 맞지 않는 곤충까지 속속 모여들었다.
나는 그가 부리는 마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룸은 마법이 아니라 주술이라며 못을 박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배워서 펼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으니 내 입장에서는 마법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칭송하자 말룸은 봄을 타는 양 입매를 매만지더니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딱딱함이란 속에 내린 꽃잎을 감추기 위한 자기방어기제였다.
“마법의 아류에 불과해요.”
“그래도 대단하잖아요.”
“글쎄요. 마법은 기적에 가깝고, 제가 사용하는 주술은 그걸 흉내 내는 것에 그칩니다. 마법으로는 기류를 바꾸거나 세계의 법칙마저도 바꿀 수 있었어요. 이 정도는 마법의 발끝에도 못 미치죠.”
어느 쪽이든 대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말룸이 사용하는 주술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해 보여 배울 생각은 없었다.
오늘자 텃밭 관리를 마친 후, 나는 분주히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로보의 선원들을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출항하는 날 방문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이야말로 만회할 기회였다.
무엇보다도 로보와 내 관계에 대해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로보에게도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