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7화
2월 초입, 바람이 점차 매서워졌다. 3월 말이 되어서야 날이 조금씩 풀린다고 하니 내 펭귄 차림은 한동안 계속될 듯싶었다.
나는 때가 되어 새싹이 움트듯 차츰차츰 나아졌다. 티샤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며 감격스러워했다. 큰 충격을 받았을 때 튀어나온 다른 영혼들의 잔재, 썩어들어 낫지 않은 오른쪽 다리, 라딘라티가 날 이곳으로 불러온 이유의 부재 등 풀어야 할 문제는 산더미 같았지만 나 혼자 해결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로보가 조리사 모자를 고쳐 썼다. 우리는 지금 주방에 있었다.
“오늘은 뭘 할 거야, 아가씨?”
“황금 사냥에 출사표를 던질 거예요. 참가 신청이 오늘부터래요. 드디어 제 손으로 번 금화를 갖게 되는 거죠.”
내가 짙게 웃었다. 로보가 나를 따라 똑같은 모양으로 웃었다. 꼭 2인조 사기단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하려는 것이 사기와 다를 것이 없기는 했다. 말룸이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느림보 금화들을 만들겠다고 한 데다, 신체능력이 인간보다 몇 배는 뛰어난 로보가 내 말이 되겠다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문이나 각종 팁을 모아 둔 잡지를 정독하며 사냥 준비에 열중했다. 말룸은 곁에서 서류 처리를 하며 뿌듯하다는 양 미소 짓곤 했다.
그러나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진 않았다. 황금 사냥 축제에는 배스, 즉 생태계 파괴자가 한 명 존재했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리 때문에 로보한테 안겨서 움직여야 하는 데다 저는 새총을 아주 못 쏘잖아요. 게다가 축제 개최 이후로 매번 우승한다는 그…… 누구였죠?”
조리대 위로 주방 기구가 나란히 정렬했다. 나는 하도 요리에 관심이 없어 그 중 태반의 정확한 이름을 몰랐다.
말룸이 팔을 걷어붙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사막의 왕, 누트 멤피스. 멤피스 대륙 출신으로, 대회에 뿌린 금화의 8할을 독식하는 종자입니다.”
말룸의 손아귀에 잡힌 계란이 앙증맞았다. 나는 단단한 근육이 잡힌 그의 팔뚝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조리대로 시선을 내렸다. 말룸은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설명에만 집중했다.
“그자는 아주 골칫덩어리입니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이죠. 황금 사냥 축제가 열린다는 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개최 이래 단 한 번도 우승을 놓친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요?”
“네, 단 한 번도. 특히 새총 실력이 아주 대단한 데다 돈에 대한 집념이 무시무시해서, 당신의 거북이 금화를 가로챌 가능성이 높은 작자입니다.”
말룸이 당장이라도 그자를 씹어 삼킬 듯 이를 갈았다. 점점 누트 멤피스라는 남자가 궁금해졌다.
더불어 크로노가 수정궁에서 했던 예언도 떠올랐다. 사막에서 손님이 찾아올 것이라는 말…… 누트 멤피스와 관련이 있는 걸까?
“비공정 주차 공간을 만드는 것도 일입니다. 하늘을 나는 배는 또 어디서 만들어 온 건지.”
“하늘을 나는 배요? 배가 하늘을 날아요?”
“오필리아, 눈이 반짝거려요. 좋아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말룸이 이마를 짚었다.
“어쨌든 그자는 자기 배를 빠진 구석 하나 없이 황금으로 치장했는데, 그렇게까지 휘황찬란한 것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은은한 화려함이 있어야죠. 과한 화려함은 사람을 압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존경을 이끌어내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당신 수집품은 전부 화려하잖아요?”
“결이 달라요. 저는 의미를 품은 것만을 수집합니다. 제 수집품들은 모두 이야기를 품고 있어요. 이야기 없는 보물이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죠.”
“혹시, 멸망한 왕국의 유물이라든가, 아니면 죽은 사람의 유품 같은 건…….”
“……흥미롭군요. 누구에게 들었나요?”
말룸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야말로 황금처럼 번쩍거릴진대 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수집품에 얽힌 비화가 마냥 뜬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수집품 얘기에 몰두하기보다는 밀가루 개봉에 열중하는 로보와 함께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뒤가 같은 네 보물에는 별 관심 없고.”
로보가 누트 멤피스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하늘을 나는 배? 해적으로서 흥미가 생기는데. 소용돌이 해역에도 쉽게 닿을 거 아니야. 천둥이나 번개가 칠 때에는 좌초당하겠지만.”
나는 바닥에 놓인 바구니에서 설탕 포대를 꺼내 조리대에 올려놓았다. 로보가 망설임 없이 포대를 개봉해 볼 안에 설탕을 들이부었다. 나는 작은 궁금증이 생겨 물었다.
“그런데 누트 멤피스라는 그 사람, 왕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왕이라면 굳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도 돈이 흘러넘칠 텐데.”
“황량한 멤피스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바위산을 쪼개거나 모래를 뭉쳐 내다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수도 이우누를 중심으로 재건 작업이 벌어지고 있긴 한데, 재정 상태가 빠듯할 겁니다. 오아시스나 있으면 감지덕지겠죠.”
말룸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멤피스는 레시암이나 엘드라코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재앙이 깃들었어요. 그 땅에서 불타 죽지 않는 것도 용합니다.”
말룸이 나는 모를 멤피스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누트 멤피스가 왕이라 칭해지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폐허가 된 수인족 유적에 터를 잡고선, 수인족의 정신을 계승했다 사막에 물길을 끌어 올리겠다 수선을 피우긴 했는데……. 하여튼 괴짜입니다. 즉위식 초대장도 오긴 했지만, 황태자 포이보스 레시우스를 제외하고 다른 귀족들은 가지 않았어요.”
“음, 멤피스에 대해서는 렉스 님께 단편적으로나마 배운 적 있는 것 같아요. 흥미가 생기는데요. 그런 땅에서 재건 작업을 벌이는 누트 멤피스란 사람도 궁금해요.”
“그러지 말아요, 상종 못 할 괴짜니까.”
나는 말룸이 상종 못 할 정도의 괴짜를 헤아리다가 감이 잡히질 않아 그만두었다. 그가 반질반질한 조리대를 뜻 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자 때문에 햇수를 거듭할수록 금화의 도주 속도를 빠르게 해야 했습니다. 원성이 자자하지만, 느리게 하면 독식할 것이 빤해 그러지도 못하겠더군요. 고작 축제 건으로 타 대륙 사람의 접근을 금지하는 것도 모양새가 나빠요. 현물이 상품으로 걸려 있으니까…….”
말을 마친 말룸이 계란 여럿을 깨트려 볼 안에 넣었다. 한 손으로 깨트려 집어넣는 모양새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감탄사를 흘리자 말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별 것 아니니 그렇게 감탄하지 말아요, 오필리아. 쑥스럽습니다.”
그가 귓가를 매만지며 섞이는 계란만 응시했다. 일전의 스산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는 칠백 년 동안 살았으니 요리에도 자신이 있어요. 맛을 볼 수 없어도 음식은 만들 수 있으니까. 정확한 측량이 완벽한 요리를 만들죠.”
“하긴, 그러네요. 조상님의 조상님의 조상님 뻘인데 요리 하나 못 할까.”
“조상님의 조상님…… 당신 요즘 부쩍 장난이 늘었어요.”
나는 놀리듯 생글거렸다.
“싫어요?”
“……싫을 리가. 손에 이것저것 묻지만 않았더라도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췄을 겁니다. 남편이라면 자신이 조상님의 조상님 뻘이 아니라 아직 건재하다는 걸 아내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죠.”
그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속내를 털어놓았다. 턱을 괸 채 빤히 바라보자 계란 젓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우리는 흰 눈이 내리던 날 이후 서로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게 되었다. 내가 진심을 표현하기 시작하자 말룸은 얼굴을 붉게 칠하는 일이 늘었다. 사랑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탓인 듯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당신은 음식을 먹지 않잖아요. 왜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신랑 수업을 미리 한 거죠.”
노골적인 장난에 나는 그의 손등을 꼬집었다. 말룸이 답례로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뭐든 배워 두면 쓸 곳이 있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음식도 만들어줄 수 있게 되었고요.”
“아, 그래서 저번 수프도 그렇게 맛있었나?”
“……잠깐만요.”
말룸이 의아한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 수프에서 탄 맛이 났다면서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옆에서 푹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내가 있단 거 잊진 않았지?”
로보가 주방기구를 아무렇게나 흩어 놓았다. 그 나름의 시위였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로보가 어쩔 수 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의 속이 어떨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말룸을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요리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원하는 대로 해. 어쩌겠어, 결혼한 사이인 데다 그게 전부 오해였다니 거리낄 건 없지.”
로보가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는 이런 순간까지도 나를 위했다.
심장에 가시가 박힌 듯 까끌까끌했다. 조만간 로보와 항구에 가기로 했으니 그때 날을 잡고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아가씨. 눈에서 꿀이 흘러내릴 것 같아. 저 녀석이 그렇게 좋아?”
“꿀은요……. 머랭이나 계속 만들자고요. 좋긴 좋지만 머랭보단 아니에요.”
“아내가 남편 좀 본다는데 유난 떠는군. 잊었나? 우린 신혼이다. 그나저나 오필리아. 머랭보다는 아니라뇨. 거짓말이죠?”
말룸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로보의 찬 목소리가 조리실의 온도를 끌어내렸다.
“좋게 보려고 해도 비린내가 역겨워서 그럴 수가 없군. 이봐. 꼭 잠자는 상어의 코를 주먹으로 때려야겠어?”
“네가 상어였나? 붕어인 줄 알았는데 농담도 잘 하는군.”
로보의 목에 핏대가 섰다. 또 시작될 모양이다.
말룸은 설탕과 계란을 적당히 넣은 볼을 내게 밀었다. 나는 굳이 중재에 나서지 않고 적당히 점성이 생길 때까지 거품을 내기로 했다. 팔이 살짝 아픈 것도 같았지만 운동은 죽은 몸에 도움이 되었다.
말룸이 그릇이며 조리도구며 하는 주방 세간살이를 손닿는 대로 로보에게 집어던졌다. 로보는 그것들을 여유롭게 피하며 계속 말룸의 약을 올렸다.
“하하, 명중률이 형편없군. 응? 칠백 년 동안 뭘 배웠어? 허물 벗는 법? 맛 안 보고 요리 하는 법? 아니면, 지렁이처럼 땅 헤집기?”
“패배자는 끼어들지 마라. 우리 부부 사이를 훼방 놓지 말란 말이다!”
저 뭐든 집어던지는 손버릇은 좀 고치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래도 입가에 슬슬 미소가 번졌다. 일전에 식당에서, 렉스 님이 바구니와 접시가 날아다니는 난장판을 보고 평화롭다고 이야기하셨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결국 남은 설탕 포대가 터지고 말았다. 오늘도 조리실은 반파될 듯했다. 밀가루가 허공에 흩날려 희뿌연 눈이 내렸다. 나는 건물 수리에 금화 몇 개가 들어갈지 헤아리는 틈틈이 요리를 계속했다.
포인세티아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 덕에 겨울에도 텃밭을 가꿀 수 있게 되었다. 능력을 텃밭에 활용할 의사는 없었는데, 엘로힘의 조언이 있어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엘로힘은 어색해하는 내게 먼저 다가와 분별없이 착각할 정도로 어수룩하진 않으니 능력을 개발해 몸을 지키는 쪽을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그 덕에 엘로힘도 내 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게 되었는데, 성 뒤편의 숲과 맞닿은 공터가 연습 장소로 선택되었다.
엘로힘이 팔짱을 낀 채 나를 감독했다. 새총을 가르쳤던 때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태도였다. 나는 힘껏 꽃을 틔워 내면서 재잘거렸다.
“엘로힘 오빠, 성공했어요! 봐요, 시든 것도 아니고 꽃잎 한 쪽이 떨어져 나가지도 않은 튤립! 오빠 말대로 하니까 일사천리네요. 어쩜 이렇게 잘 가르쳐요?”
“……집중해.”
“에이, 그러지 말고요. 오빠도 혹시 나무를 자라게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엘로힘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한참 만에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래…… 내게도 그 권능이 배당되어 있긴 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엘로힘의 낯은 쓰디쓴 독초를 삼킨 것처럼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문 채 연습에만 매진했다.
생활 도처의 모든 주제가 그에게 시련이 되는 듯했다. 엘로힘이야말로 행성이 내린 비극을 짊어진 채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