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6화
06. 매듭
나는 한동안 눈가가 벌겋게 들뜬 채 지냈다. 살결이 짓물러 약을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아침에 말룸을 마주하면 그대로 눈물을 흘렸다. 그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양 나를 품에 안으면 더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말룸이 발타사르령에 통용되는 금화에 내 얼굴을 새겨 넣어도 되느냐 물었을 때에도 눈물지었다. 그가 이미 칠백 년 전의 이야기라고, 당신이 여태 알았던 것처럼 나는 사악한 것이 맞고 윤리관을 고칠 의지가 없다 단언했을 때도 그랬다.
이 세계는 정말 기이했다.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가루가 돼야 했을 행성의 목숨을 억지로 잡아 늘인 대가인 듯도 싶었다. 사위가 폭력적이고 비상식적이었다.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도 시신을 요람 삼아 살아가는 다른 행성의 사람.
일족의 원수를 쫓아 영원히 배회하게 된 것도 모자라 여동생의 시신조차 돌려받지 못한 엘로힘.
신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도 모른 채 신을 부르짖었다.
사정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조슈아 님, 카사블랑카, 렉스 님은 라딘라티와 그자의 권속들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라딘라티가 떼어낸 신성이 파편화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신의 파편’으로 자리매김한 듯했는데, 나는 조슈아 님에게 미칠 충격이 두려워졌다.
인어들은 라딘라티의 잔혹함을 외면한 채 심해의 괴물로부터 자신들의 왕국을 수호하기에만 급급했다. 로보의 말에 의하면, 어린 인어가 태어나지 않는 상황이 인어의 폐쇄성에 한 몫 했다고 한다.
세 대륙 중 두 대륙은 불타거나 얼어버렸고, 인간들은 현실에 안주해 오랫동안 발전을 영위하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안식이 없었다. 특히 말룸은 오래전 부서진 사기그릇이나 다름없었다. 그 균열은 칠백년 동안 더욱 벌어졌다. 너무 심하게 부서져 어떤 도자기 장인이 와도 그를 땅굴 속의 순수했던 소년으로는 되돌려 놓을 수 없을 듯했다.
말룸은 자신이 자행한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엘로힘이, 카사블랑카가, 다른 이들이 왜 자신을 미워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했고 개선할 의지도, 관심도 없었다. 대신 재가 얹힌 폐허 속에 살며 동아줄을 찾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는 주변을 살필 여유조차 없이 박제되고 말았다.
말룸의 과거가 안쓰러웠지만, 그리고 그의 결여가 살이 얼 듯 시렸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길 주저하지 않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벅차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고는 아름다운 세계를 거머쥐듯 나를 품에 가두며 사랑을 속삭였다.
내 상태를 배려해서인지 말룸은 쉴 틈 없이 애정행각을 밀어붙였다. 로보와 크로노는 내게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해 한 발 물러섰고, 엘로힘은 내가 말룸과 함께 있어도 탐탁잖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특히 크로노와 로보, 말룸은 일상을 구가하듯 평범하게 말다툼하고 신경전을 벌였는데, 그마저도 가벼워서 많은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한없이 고마웠고 그저 미안했다.
요즘 내 일상은 아주 단조로웠다. 말룸도, 로보도, 크로노도 나를 자극할 만한 주제는 일부러 피하고 있어 여유로워졌다.
여유가 생긴 탓인지, 아니면 눈밭에서 새어나왔던 영혼의 잔재 때문인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의 꿈을 자주 꾸기 시작했다. ‘오필리아’의 과거를 꿈으로 꾸기 시작했던 것과 비슷했다. 간헐적으로 잠들게 된 후 꿈을 꾸지 못하게 된 줄 알았는데, 영혼과 관련 있는 것은 꿈으로 상영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하루는 ‘오필리아’의 것을, 다른 하루는 ‘포인세티아’의 것을, 또 다른 날에는 이전 세계에 있었을 적의 꿈을 꾸었다. 이제 나는 그 단편 영화들이 누군가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게는 총 세 명 분의 인생이 할당되어 있는 셈이었다. 이 셋은 성격도, 능력도, 좋아하는 것도 제각각이라 정리하는 데 공을 들여야 했다.
갈수록 그들이 켜켜이 쌓였다. 지층이 형성되는 것과 비슷했다. ‘오필리아’의 영향을 받아 나는 조금 염세적으로 변했고 일을 망설이는 경향이 줄었다. 포인세티아의 영향으로는 엘로힘을 무작정 편하게 대하게 되었다. 엘로힘은 내 허물어진 태도에도 한결같은 무심함을 유지했다.
영혼들의 습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둘을 알고 있을 엘로힘과 말룸의 앞에선 최대한 ‘나’를 드러내 보이려 했다. 특히 그날, 내가 지레 겁을 먹고서 장막처럼 내려앉은 패닉에 싸여 있었을 때 빠져나왔던 포인세티아의 단말마가 엘로힘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최근 엘로힘은 시린 겨울날 벽난로를 갈구하는 사람처럼 나를 응시했다. 그는 확실히 선을 지키고 있었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포인세티아와 오필리아의 흔적을 되짚어 꼼꼼히 기억하면서도 닮아가지 않도록 주의했다. 죽은 자에 대한 상념을 불어넣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포인세티아의 육신에 남아 있는 엘프의 힘이 너무 강력해 균형이 흐트러진 지금 바깥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놀랍게도 나는 식물을 틔워내게 되었는데, 기쁨과 벅참도 잠시, 나는 포인세티아의 힘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엘로힘은 포인세티아의 고유 능력이 워낙 강력해 그런 것이라고 했다.
포인세티아는 신목의 가지에서도 가장 크고 굵은 가지에서 태어나 엘프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자연과 친했다. 한겨울에도 꽃을 틔울 수 있었고 메마른 대지조차 초원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엘로힘의 이야기 속 포인세티아는 굵은 나무들을 순식간에 자라게 해 적을 꿰뚫거나 움직임을 봉쇄하는 식으로 그 힘을 활용했다.
엘로힘은 내가 이 힘을 다룰 수 있다면 일이 수틀렸을 때 도망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 것 아닌 힘을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가능하다면 원래의 육체를 되찾고 싶었다. 몸을 지킬 수단이 늘어 달갑긴 했지만 사라질 능력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힘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발현되었다.
“아름다워요, 오필리아. 오늘은 새벽을 닮아 푸른 수국이군요.”
“앗…….”
늦은 밤, 나는 말룸의 개인 집무실에서 그의 곁을 지켰다. 넓고 고급스러운 책상 앞에 의자가 총 두 개 놓였다.
우리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붙어 있었다. 말룸은 황금 사냥 축제의 개최 준비를 하고, 나는 동화책이나 역사서를 읽으며 세계의 지식을 쌓았다. 나는 집중하지 못할 때면 서류 처리에 열중하는 말룸의 옆얼굴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몸에서 꽃이나 풀 따위가 피는 것으로 기겁했던 말룸도 이제는 태연했다. 몸에 무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힘을 제어하지 못해 발생한 현상임을 엘로힘에게 확인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꽃이 핀 위치를 알려주기까지 했다.
“아뇨, 거기 말고. 왼쪽이요. 조금 더 옆…… 네, 거기.”
“여기요?”
그가 알려주는 대로 머리를 더듬으니 꽃뭉치가 잡혔다. 둥그스름한 모양새가 소담해 새벽처럼 예쁠 듯했다. 내게서 피어나는 화초는 벌레 먹은 곳이 없었고 새초롬한 이슬도 군데군데 맺혔다. 출하해도 될 정도였다.
꽃을 내리는 것도 익숙해졌다. 비비듯 문지르다 살짝 잡아당기면 대지에서 뽑혀 나가듯 꽃이 떨어졌다. 아프지는 않았다. 포인세티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꽃을 흠뻑 피운 채 돌아다니길 좋아했다고 한다.
말룸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부쩍 여유가 늘었다. 칠백 년 간 멈추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듯이 그는 나날이 푸르러졌다.
“향이 좋네요. 당신을 닮았습니다, 오필리아.”
“꽃말을 알고 하는 소리예요?”
말룸이 말없이 눈을 휘어 웃었다.
수국의 꽃말은 냉정, 혹은 변심이었다. 말룸은 이렇게 자주 투정을 부렸다. 그는 내가 뜻 없이 주었던 스노우볼을 금고 깊은 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니라고 말은 했어도 그때 많은 상처를 받았던 듯했다.
“제가 미안했어요. 일찍 물어봤으면 좋았을 걸 이상한 오해나 하고.”
수국을 말룸의 머리에 얹어 놓았다. 남빛 머리에 핀 푸른 수국이 그를 요정처럼 꾸몄다. 산천에서 꽃을 두른 그를 만났다면 인간 아닌 정령이라 오해하지 않았을까?
말룸은 영 서류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가 만년필을 손에 넣고 굴렸다.
“화는 안 났어요.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잖아요.”
“말룸…….”
“당신이 곁에서 보살펴 주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점점 멋대로 굴게 되어버리는군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요.”
그가 펜을 놓고 내게 작은 입맞춤을 남겼다. 나뭇잎이 땅에 떨어지듯 무겁지 않은 애정표시였다. 말룸이 지척에서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그의 황금 찬란한 눈동자에 끌려들어간 듯 숨조차 쉬지 못했다.
“제 버릇을 잘 들이세요. 예고 없이 당신의 발목을 옭아맬 수도 있으니까. 그 인어와 크로노…… 제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말룸은 자세가 우아하고 곧아 머리를 장식한 수국이 추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매끄러운 콧날과 창백한 볼을 호소하듯 어루만졌다.
“이미 늦었어요. 내일 로보와 함께 항구에 갈 거예요. 그다음 크로노가 긍정한다면 함께 외출할 예정이고요.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작게 읊조리니 말룸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이죠, 오필리아. 당신이 내게 마음을 주었단 뜻이잖아요. 저는 그게 못내 기뻐서, 서류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지고 말아요.”
서류를 등진 채 환희하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기꺼웠다.
“당신이 잠들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어떤가요? 눈을 뜨면 제가 있는 풍경을 바라게 되진 않았나요? 저는 당신과 한 방을 쓰고 싶어요.”
말룸이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갈망하듯 내 손가락 끝에 점점이 입을 맞추었다.
“그럼 꽃이나 새순에 둘러싸인 채로 깨어나게 될 걸요. 감정이 날뛰어서 능력 제어가 안 될 것 같거든요. 그래도 괜찮으면 당신에게 동화 세계를 선물할게요. 동화책 좋아했다면서요.”
“거듭 이야기하지만, 좋아했던 건 아닙니다. 허구의 세계를 신봉하지도 않죠. 어릴 때 읽을 만한 게 그것뿐이었다니까요. 라딘라티를 찬양하는 사이비 교단의 성서를 읽을 순 없잖아요.”
말룸이 항변하듯 힘주어 이야기했다.
“전 허무맹랑한 얘기에는 가치를 두지 않아요. 제가 입에 올리는 건 허무맹랑해 보여도 실현 가능성이 있는 얘기들뿐입니다. 알아둬요. 당신 나름대로 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말룸의 얼굴은 눅진히 풀려 있었다.
“오필리아. 그럼 우리 같은 방 쓰는 거죠?”
“응, 뭐, 그래요.”
나는 얼떨결에 허락했다. 그러자 말룸은 눈에 띌 만큼 얼굴이 환해져 무척 기뻐했다.
“좋아요. 그럼 오늘은 일단 제 침대에서 자요. 여긴 삭막해서, 피어나듯 아름다운 당신과는 안 어울리지만……. 내일이면 해결될 테니까.”
“내일? 그렇게 빨리 방을 마련할 수 있어요?
“당연히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하죠. 하지만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날 사랑해줄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말룸이 승리자처럼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오만이 이슬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잘 어우러져 마치 신을 보는 듯했다.
“2층 신방 인테리어는 어땠나요? 부부 방 꾸미는 데 참고할게요.”
나는 골몰한 끝에 답을 주었다. 말룸이 내 눈을 가리기 위해 끌어들였던 그 방 말이지……. 보랏빛 가구가 몽환적이긴 했지만 너무 어두침침했고 야시시한 침대를 둔 의도가 빤해 꺼려졌다.
“노골적인 분위기라 부담스러워요. 그날 얼마나 놀랐는데요. 만약 새로 꾸민다면 프로방스 풍이 좋겠어요.”
말룸이 눈을 깜빡였다.
“프로방스 풍? 지구의 인테리어 양식인가요?”
나는 골똘히 생각한 끝에 설명했다.
“프로방스 풍은 자연에 묻힌 것 같은 느낌의 인테리어 양식이에요. 선명하고 아름다운 가구의 색감과 자연 상태 그대로의 식물이 서로 잘 어우러지는 식이죠. 그리고 이참에 이야기하는 건데, 지금 쓰는 방은 너무 화려해서 부담스러워요. 침대 헤드랑 이불에 달린 보석이 제 머리만 하다고요.”
퉁명스러운 척 답하자 말룸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이럴 때마다 그의 평온을 엿보았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말룸에게 기분 좋은 시간이 되는 것 같아 가슴이 충만해졌다.
말룸의 평온을, 기쁨을, 행복을 기원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그의 볼을 끌어당겨 나를 보게 했다.
“말룸, 당신의 하루하루가 매일 동화 같았으면 좋겠어요. 잔혹동화 말고, 아이들에게나 들려줄 법한 진부한 동화요.”
말룸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등불에 기댄 창백한 낯이 오늘따라 유독 맑았다.
손끝에서 꽃 하나가 더 움텄다.
붉고 탐스러운 장미…….
그와 아주 잘 어울리는 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