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5화
알렉산더는 라딘라티를 추적하며 이곳저곳을 방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왕의 티를 채 다 벗지 않아 매우 고아한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알렉산더는 다양한 약초를 조합해 병을 고칠 수 있다며 신전으로 잠입했어요. 처음에 저는 그를 경계했고, 잡기를 집어던졌죠. 하지만 알렉산더는 저를 동정할 뿐 언성을 높이거나 매서운 말을 하지 않았어요. 지금 우리 사이를 헤아려 보면 퍽 놀라운 일이죠.
알렉산더는 당시 제 세계에서 유일하게 저를 신으로 대하지 않던 인물이었어요. 그는 가끔 그리운 사람을 보듯, 혹은 증오하는 사람을 보듯 저를 응시했습니다만, 그것은 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향한 것이라 신경이 쓰이진 않았죠.
저는 자연스럽게 알렉산더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푸른 초목을 엮어 만든 것처럼 아름다웠고, 빛의 가호를 받는 양 찬란했어요.
저는 알렉산더의 말투, 행동거지, 다정함, 세심함 하나까지 모두 동경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저를 세상 바깥으로 내보내 주었죠. 그게 그 찬란한 엘프의 치명적인 오판이었지만요.
인정합니다……. 관계를 망친 건 저예요. 제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라딘라티의 힘을 받았으니 알렉산더가 저를 경멸하게 된 것도 당연합니다.
알렉산더도 자신이 구해 준 꼬마가 악심을 품고선 괴물이 될 줄은, 그래서 사이비 교인들을 죄다 죽여 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틀어질 것이 빤한 관계였죠. 저는 그가 바깥세상에 풀어주겠노라 약속했을 때부터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까요.
알렉산더는 사이비 교단의 실체를 알게 된 후, 멀거니 눈만 끔벅이며 기침이나 했던 저를 안아 들었어요. 그 사람이 안심시키듯 속삭였죠.
‘괜찮다. 내가 구해주겠다. 네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겠어.’
알렉산더는 처참한 형상으로 뭉개진 제 삶이 자기 탓인 양 여겼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말렉시우스. 병도 나을 수 있을 거다.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꾸릴 수도 있을 테지. 평화에 잠겨서, 녹아내리는 석양을 바라보는 식으로…….’
흰 눈이 내리던 날, 우리는 정면 돌파로 신전을 빠져나가기로 했습니다. 제게는 탈출이었고, 알렉산더에게는 구출이었지요.
알렉산더는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 장궁으로 제게 달려드는 사이비 교인들을 후려쳤어요. 힘없는 인간들은 휘두름 한 번에 이리 흩어지고 저리 흩어지며 신을 부르짖었죠. 저는 그 와중에서도 그들에게 침을 뱉어주었어요.
‘성격 좋은 녀석이군. 잘 했다.’
알렉산더의 칭찬은 그때가 마지막이었지요.
그는 미로 같은 신전 내부를 잘도 쏘다니더군요. 하지만 교인들의 수가 너무 많았어요. 그들은 횃불을 들고 들소 떼처럼 알렉산더의 뒤를 바짝 쫓았습니다.
알렉산더는 지치지 않았지만, 품 안에 매달린 저는 점점 지쳐만 갔어요.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남아 있던 영혼 조각이 바다로 떠내려갔죠.
우리는 신전을 나서는 문 앞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내 부모라는 작자들이 흰자위를 보이며 기다리고 있었죠.
알렉산더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어요. 저도 알렉산더에게 탈출을 채근할 수 없었어요.
그자들은 누이들과 할아버지의 목에 낫을 들이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시나무처럼 떨었어요. 어떻게 행동해야 그들을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있는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포위된 채 광기 어린 낯을 마주해야 했죠.
‘하하, 아하하! 신님, 그렇게 가시면 안 돼요! 하지만 우린 신님과 신님의 사도를 막을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신님이 가버리면, 이자들을 죽일 거예요! 그리고 계속해서 아이를 낳아서, 다른 신님을 만들 거예요!’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알렉산더를 세게 끌어안느라 그럴 수 없었습니다.
문득 그저 땅에 서고 싶었어요.
제가 알렉산더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자, 친절한 엘프는 저를 땅에 내려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돌리지도, 피하지도 못한 채 잡힌 가족들을 벙벙히 응시했어요.
할아버지와 누이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울지 않았습니다. 바깥세상으로부터 스며들어오는 약간의 태양 빛에 휘감긴 채 이야기할 뿐이었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가거라, 말렉시우스. 살아남아야 행복할 수 있다. 살아남아야 평화를 가질 기회를 얻을 수 있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끝의 끝까지 사는 거다. 깜깜한 바위산을 오른다고 생각하렴. 응?’
누이들이 덧붙였어요.
‘중요한 건 너야, 말렉시우스. 넌 그럴 자격이 있어. 모두를 미워할 자격이…….’
‘무슨 수를 써서든 강해져. 꼭대기에 올라가. 그래서…… 이딴 녀석들이 감히 널 범접할 수 없도록 해. 사정 봐주지 말고, 너만 챙기란 말이야. 알겠니? 우리 같은 건 잊어버려. 네 앞날에 도움이 되질 않아. 적으로 반목하는 자도 필요하면 네 편으로 끌어들이고, 싫은 자라도 밑에서 엎드린 채 때를 노려!’
최고가 되렴, 말렉시우스.
그 누구도 너를, 그리고 네가 손에 넣게 될 행복을 해치지 못하도록.
그래서 행복해지렴.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평범하고 예쁘게 사는 거야.
그들 주변으로 흰 눈이 들어찼어요. 스노우볼 속에 갇힌 것처럼, 평화롭고 덧없이…….
저는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몽롱해졌습니다.
그래요, 그 말이 맞았던 거예요……. 살아남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어요. 살아남아야만 평화와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저 살아간다 해서 전부 해결되지는 않아요. 권력이, 불변하는 황금이, 건강하고 완벽한 육체가, 강한 힘이 빠짐없이 존재해야지만 동화책에서 보았던 찬란한 바깥세상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사이비 교인들이 어서 결정하라며 재촉했습니다. 활을 쥔 알렉산더의 손에 힘이 들어갔어요.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가요.’
알렉산더는 말없이 제 의견을 따라 주었어요.
저는 그날 세상이 떠나가라 울부짖었습니다. 도주해 겨울 설원에 닿았을 때도, 울음이 공기를 막아 핏물 섞인 기침을 토해내었을 때도, 밤이 드리워졌을 때도, 어둠이 물러가 새벽이 찾아왔을 때조차.
그리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차분해지더군요.
울음이 빠져나간 맘속엔 이상할 만큼 짙고 어두운 독기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 몸뚱이는 끔찍할 정도로 연약했지만, 저는 완벽해질 수 있는 방법을, 할아버지와 누이들의 조언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고야 말았죠.
저는 알렉산더가 약초를 찾으러 간 틈을 타 부서지는 몸을 이끌고 내달렸어요.
알고 있었던 겁니다. 신을 부르는 방법을.
하늘은 주황빛, 밤과 낮의 중간. 이 세상 어느 때에도 속하지 않는 어중간한 시간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물가에서, 저는 검은 인어를 끌어올리는 주술을 시행했습니다. 어설프기 짝이 없었죠.
하지만 제 몸은 라딘라티의 신체 일부를 섭취해 그자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자가 내킨다면야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검게 색칠된 듯 이목구비가 뭉그러져 생김새조차 알아볼 수 없는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자는 번뜩이는 이빨을 내보이며 재미있다는 양 미소하며 온갖 헛소리를 꺼내 놓기 시작했죠.
아, 이런. 나와 닮게 되었군. 닮게 되어 버렸어. 나는 이렇게 생겼을 때, 신록의 엘프와 뛰어다니고, 그를 사랑하고, 친애하고, 동경하고, 함께 좋은 어른이 되겠다 맹세하고……. 좋은 어른 같은 것은 세상에 있을 수가 없는데 말이야. 천진한 어린아이라도 훌쩍 자라면 남을 짓밟고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옳다는 양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버리는데 말이야. 아,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아주 불쾌하군. 얘야, 무슨 일이니? 형은 지금 비늘을 떼어내느라 아주 바빠.’
‘저는, 저기, 말렉시우스라고 합니다.’
저는 멍청하게 말을 더듬었지만 그자는 제 얘기를 듣고 있질 않더군요.
‘이 비늘은 말이다, 증오스러울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신의 잔상을 떠올리게끔 해서 견딜 수가 없어……. 아, 신성! 찬란한 만큼 사람을 배신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 몽땅 떼어내서 육지에도 몇 버리고, 네가 지내던 신전에도, 태양과 가장 가까운 땅에도 몇 버려야겠다. 이걸 인간들이 집어삼킨다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텐데 말이야.’
‘이봐요! 내 말 안 듣고 있죠?’
‘아…… 그래. 고슴도치 같이 까칠하고 오만하구나. 널 잊고 있었다. 응, 그래, 그래. 세상살이는 항상 재미없지. 불공평하고, 슬프고, 힘들고.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니?’
그자는 완전히 미쳐 있었어요.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걸러낼 의사도 없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저는 그자가 신이라는 것을, 그것이 아니더라도 신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신을 마주한 인간이 본능적으로 신을 알 듯, 그렇게 인지해버리고 만 겁니다.
‘제게 삶을 주세요. 완벽한 육체를, 적을 절멸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저는 떨지 않았어요. 맘속 모든 게 울음과 함께 빠져나가 다른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또박또박 이야기하자 그가 고개를 기울였어요.
‘그건 어렵지 않지. 그럼 넌 내게 뭘 줄 수 있지?’
‘당신의 고독을 없애 드릴 수 있어요.’
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답을 내놓았어요.
영원한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살게 해주세요.’
라딘라티는 기이하게 울부짖었어요. 그것은 상어 울음소리와 닮아 있었어요. 저는 그가 폭소하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이윽고 끔찍한 격통이 찾아들었고, 아주 잠깐 앓았지만 천 년을 앓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몸을 구성하는 것들이, 심지어 영혼마저 잘게 분해되어 재조립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 안의 중요한 무언가가 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저는 너무나 비참하고 두려워 눈물이 났지만 그것을 다시 붙잡으려 하진 않았죠.
눈을 뜬 저는 산양의 뿔을 지닌 거대한 뱀이 되어 있었어요. 라딘라티는 사라지고 없었죠.
그는 그저 흥미로 제게 불사의 은혜를 선사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라딘라티의 의도 따위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극도로 흥분했어요. 새로 얻게 된 권능이 사방 생명을 녹여버렸죠.
주변 초목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물고기가 죽어 가는데도 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알지 못했던 고대의 주술들, 살아 있는 것을 썩게 만드는 힘, 완벽하고 강건한 뱀의 육체까지. 인간의 모습도 입맛에 맞았지요, 정상적으로 성장한 시점의 모습을 얻게 되었으니까…….
이제 절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어요. 포식자의 위치에 선 겁니다. 폐병에 묻혀 학대당하기나 했던, 신물이 날 정도로 볼품없고 약했던, 스물이 되도록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던 병자가!
저는 땅을 아주 빠르게, 빠르게 기어서, 아직도 아수라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도들에게로 향했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단번에, 신속하게 조각내 끊어 놓았지요. 한 줌도 남김없이.
아작아작, 아작아작.
그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 충만한 만찬이었는지…….
이후 저는 라딘라티의 밑에서 충실한 심복인 척 행동했고, 그자의 육신을 썩게 만들 틈을 엿봤답니다. 그리고 성공해서, 그가 약해지는 바다 근처 티포주 성에 사념체를 봉인했지요.
그자는 영락했지만 7할이 신이라 육신만 없앤다 해서 처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사념체를 없앨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벌 심산이었죠.
……울지 마요, 오필리아. 당신을 울리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당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저를 경멸해야 옳지 않은가요?
어쨌든 저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할아버지와 누이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살아 있기만 하면 행복이 찾아올 거란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을 만나서 사랑을 빠질 거란 사실을, 깊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