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4화
「겨울」
오필리아.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당신도 이해하겠지만, 두려움은 지혜를 빼앗고 방향감을 상실하게 한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그것을 경계해야만 하겠지요. 결국 잃어버린 줄 알았던 용기를 칠백 년 만에 구축할 의지를 가지게 된 셈인데, 예, 맞습니다. 저는 칠백 년 전 처음으로 숨을 움텄습니다.
기억이란 게 존재했을 때부터 저는 세상의 어둠은 다 끌어 모은 듯한 땅굴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는지도 알지 못했죠.
먼지가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뻐끔대며 호흡할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아 몸이 약했었습니다. 어둠에 묶이는 바람에 시력까지 형편없었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땅굴은 허리를 펴고 설 수 없을 만큼 좁았고, 사방에는 흙내가 진동을 했어요.
하지만 저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죠. 회색빛 머리칼이 먼지를 닮은 추레한 노인과, 저보다 삼 년 일찍 태어난 쌍둥이 여자아이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노인은 제 할아버지였고, 쌍둥이 여자아이들은 제 누이였어요. 저는 짧은 시간동안 그들과 함께 있으며 가족이란 것의 형상이나마 알아갔죠. 우리는 서로의 온기에 의지한 채 간혹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부싯돌로 불을 피우며 연명했어요. 그곳은 참 따뜻했답니다.
저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어요. 말하는 법, 읽는 법, 쓰는 법, 노래하는 법, 웃는 법, 심지어 우는 법까지도……. 저는 배우는 것이 빨랐고, 먼지 얹은 땅에 손가락 연필로 이름도 쓸 수 있게 되었지요.
제 이름은 ‘말렉시우스 라딘라티’라 적었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게라스’, 쌍둥이 누이들의 이름은 ‘유스티티아’와 ‘메렛세게르’라고 적었답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늙음을 상징했고, 유스티티아는 정의를, 메렛세게르는 자비를 상징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제 이름의 뜻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다섯 살 무렵이었을까요? 그 즈음 저는 바깥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나가길 허락받지 못했다는 것도…….
유스티티아 누나와 메렛세게르 누나는 종종 바깥세상으로 외출했는데, 그럴 때면 몸에 상처를 잔뜩 달고 돌아왔습니다. 바깥에 다녀온 날 밤 누이들은 저를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어요. 그 비명소리는 이따금 땅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보다 더 두려운 것이었지요.
저는 누나들을 퍽 사랑했는데, 그런 그들을 괴롭히는 바깥세상이 아주 무섭고 잔인한 것으로 느껴져 걸음 할 생각일랑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 세상은 몇 평 되지 않는 땅굴로도 충분했던 거예요. 땅속 세계는 저만의 낙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할아버지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을 자는 시간이 많아졌고, 누나들은 침울해졌어요. 특히 그들이 ‘불쌍한 말룸, 왜 이곳에서 태어났니’ 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통에 땅굴에 갇혀 자란 저도 제 처지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이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박살 나 있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한 쌍의 남녀로 인해 확실해졌지요.
‘이 늙은이는 죽지도 않아. 밥만 축내는, 지긋지긋한…….’
여자가 할아버지를 발로 차 땅에 묻어버릴 듯했습니다. 어두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해치고 싶다는 살의를 느꼈죠. 누이들이 잔뜩 겁을 먹어 사자를 마주한 생쥐처럼 벽으로 바짝 붙었습니다. 오직 저만이 그들을 힘껏 노려보고 있었어요.
여자가 제 머리채를 잡아채 살갗의 냄새를 맡았죠.
‘흙냄새가 잘 배어들었군. 완벽해. 이제 의식을 진행할 수 있겠다.’
‘이번에도 딸이 태어날까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몰라. 그분은 남성이시니 여자아이의 몸을 그릇으로 삼을 수는 없잖아. 어쨌든 수고했다. 이 녀석이라면 그분께서도 받아들여 주시겠지. 우리는 드디어 신을 섬기게 되는 거야!’
저는 반항할 틈도 없이 바깥세상으로 끌려갔습니다. 강제적인 부활이었어요.
여자가 비틀어진 입매로 ‘내가 낳았어. 내가 낳았다고! 그분께 인정받을 수 있어!’를 연신 외쳤습니다. 남자는 제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공을 가로채지 말라며 눈을 번뜩였고요.
저는 흰 건물 안에 갇혔습니다. 세상살이에 대해 배우게 된 후, 그곳이 신전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흰 벽면이 아름답고, 검은 인어가 음각된 벽화가 도드라져 보이는……. 제국 수도에 위치한 그 흰 신전 말입니다.
수도의 신전은 저를 이렇게 만든 사이비 교단을 전신으로 두고 있어요. 그들이 섬기는 이름 없는 남성신 역시 라딘라티를 근원으로 두고 있는 허상이죠. 칠백 년 전의 일인 데다 기록까지 말소되었으니 지금의 신관들이 이 사실을 알 리 없겠지만, 그자들이, 특히 조슈아가 이걸 알게 된다면 아주 볼 만할 겁니다.
신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신’이라 칭했어요. 하지만 실상은 달랐죠. 신이라면 신 대접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들은 신의 자격을 시험한다는 명목 하에 제게 말도 안 되는 짓들을 저질렀거든요.
그자들은 하루 열 시간 동안 저를 밧줄로 꽁꽁 묶어 두었어요. 한 시간 동안은 물과 친해져야 한다며 숨구멍만 겨우 낸 물동이 안에 가둬 놓았고, 육신을 단단하게 해야 한다며 마구 맞았죠. 절 주무르고, 살갗에 침을 뱉고, 머리칼을 맘대로 난도질하고…….
머리카락이 뭉치로 빠질 지경이었어요. 갇혀 있는 방의 벽을 손톱이 뭉개져 빠질 때까지 긁어대는 이상한 버릇까지 생겼죠.
그 생활을 칠 년 동안 이어나갔습니다.
숨 쉬는 허수아비처럼 증오와 원망, 살의를 축적하며 지내는 나날이었어요. 저는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병들어 있었고, 결과가 잘 나올 수가 없었죠…….
‘어떻게, 왜! 왜 병이 든 거냐, 왜! 바다를 닮은 검푸른 색 머리칼도, 샛별 같은 노란 눈동자도 그분과 같아. 분명 이 애는 신님이야. 이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신님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관리 안 하고 뭐 했어!’
‘진정해! 고치면 돼. 아아…… 하지만 아버지의 병이 이 애에게 옮겨갔어. 폐병인 것 같아. 봐,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토하잖아!’
‘일단 그릇을 단단하게 만드는 의식을 중단해. 먼저 속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좋은 걸 잔뜩 먹여. 뒤룩뒤룩 살이 쪄도 좋아……. 돼지처럼 걷는 신님도 무척 사랑스러울 테지. 얘야, 아빠 좀 보렴. 네가 신님이라면 건강해져야 해! 아니면 우린 매번 네 침대 맡에서 흐느낄 거다. 알겠지요, 신님? 건강해지시는 겁니다.’
그들은 주문을 외우듯 끊임없이 중얼거렸습니다. 저는 방 안 모서리에 쪼그려 앉아 몸을 말고 벌벌 떨었죠.
몸 상태가 크게 악화했어요. 숨을 쉴 때마다 폐를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고, 악을 쓰는 날에는 어김없이 피를 토했죠.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고, 귓가에는 그놈의 신님을 찾는 신도들의 목소리까지 끊이질 않아 미치는 줄 알았죠.
그들은 제게 윤리와 사랑 대신 폭력과 절망을 가르쳤어요. 저는 끝없이 분노했어요. 화가 나 견딜 수 없었습니다.
가장 비참했던 건, 동화책을 통해 접한 바깥세상과 제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다르단 거였어요. 황금의 세계, 아름다운 들판, 청색 비단을 닮은 바다, 자유로운 사람들, 행복을 나누는 다정한 연인과 사랑스러운 아이,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 하지만 제 주변에는 무엇이 있었죠? 신에 매몰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린 미치광이뿐이었죠.
신도들은 제가 신이 되기 위한 훈련을 거치는 중이라고 했어요. 신이 되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더해서 저들까지 부귀영화와 불로장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지껄여댔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린애라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어요. 병이 악화되어 침상에서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실책은 제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한 거였어요.
몸은 나날이 약해졌습니다. 이상스러운 학대는 멈추었지만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절 고통스럽게 만들었어요. 매번 너무 많은 양의 음식을 제게 주었고, 모두 먹지 못하자 누이들과 할아버지를 불러와 그들을 대신 때렸습니다.
먹고, 토하고, 다시 먹고, 기침하고, 거듭해서 토하고…….
끔찍한 나날이었어요. 당연히 건강에도 차도가 없었죠. 그러자 그들은 제 머리맡에서 끝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는데, 떠올리기만 해도 분노가 치밀고 창자가 거꾸로 뒤집히는 것처럼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들 때문에 저는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저를 만지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데다 역겨워 구토하고만 싶어지는 거예요.
열여섯 살, 저는 또래보다 한참 작았습니다. 거의 어린아이처럼 보일 지경이었어요. 그제야 신도들은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는지 호화스러운 생활을 보장하더군요. 우스운 일이죠…….
그건 사육이었습니다. 그릇 사육. 저는 누이들과 할아버지를 인질로 잡힌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죠.
그 즈음 식사 거리에 이상한 것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건……. 손톱과 머리카락이었습니다. 검은 비늘도 몇 들어 있었죠. 그것들은 라딘라티의 신체 일부였어요. 그들은 정말 ‘신’을 섬기고 있었던 겁니다.
제 부모들. 그러니까, 사이비 교단의 교주들은 우연히 한 동굴 속에서 그를 발견했고, 라딘라티의 가공할 만한 신성과 능력을 알게 되었죠.
좀 더 자란 후 저는 그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배웠는데, 대부분이 그를 찬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직도 인어만 보면 신물이 올라와요. 이 세상 모든 인어의 절멸을 목적으로 하고 움직였을 때도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죠.
사이비 교단의 신도들은 신을 자기 멋대로 부리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그자를 손에 넣기 위해 새로운 육신을 위한 제물이니 뭐니 하며 아이들을 라딘라티에게 들이밀었습니다. 물론 그자는 상당히 흥미로워하며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죠.
저는 라딘라티를 인간의 몸에 강림시키기 위한 그릇이었던 겁니다.
인간의 몸에 신을 강림시킨다니, 라딘라티의 속내를 몰라서 꾸밀 수 있었던 속 편한 간계였죠. 제 혼을 잡아먹고 그가 제 육신을 차지할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원작의 그 미래도 제가 그자의 그릇으로 사육되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기는 합니다.
이후 라딘라티에게서 강림에 대한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그저 인간들이 하는 모양새가 재미있어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그자를 얼마나 증오하게 되었는지……. 그자의 장난질 하나 때문에, 그 가벼운 행동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악취 나는 인생을 살았는데.
검은 인어의 신체 일부는 저를 점차 바꿔 놓았습니다. 흰 천이 서서히 물감에 먹히듯,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어느 날엔 몸의 핏물을 다 쏟아낼 것처럼 피를 토했고, 또 어느 날은 벽을 맨손으로 부수어도 멀쩡할 만큼 상태가 좋았죠.
저는 겁에 질려 한동안 미친 채 지냈는데, 글쎄요. 신도들은 그릇이 완성되어가고 있다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맘속에 점차 사악이 들어찼습니다. 선한 생각일랑 배운 적도, 그렇게 하라고 훈계 받은 적도 없었어요. 신이라는 명목상의 권위도 즐기게 되었지요. 권력의 아름다움은 황금과도 같아서, 저는 아직도 그것을 참 좋아한답니다.
저는 안하무인이 되어갔어요. 그릇을 던져댔고 악을 썼습니다. 욕설도 퍼부었죠. 나를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가장 고통스러운 식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그러는 중에도 폐병은 낫지 않아서, 저는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는 듯싶었습니다. 교인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어요. 반갑진 않았습니다. 해소되지 않는 고통만이 제 삶에 있었죠.
그러다 의원으로 위장한 알렉산더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 스물 무렵이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