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3화
인어, 엘프, 인간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머리 위로 뱀의 호흡이 가라앉았다. 말룸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침묵이 돌부리 모양으로 뻗쳐 걸음을 막았다.
그가 침묵하면 침묵할수록 눈앞이 새까매졌다. 나는 진정하려 애를 쓰며 고리를 걸듯 양손을 맞잡았다.
손가락이며 손바닥이며 벌벌 떨렸다. 견딜 수가 없었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가장 뾰족하고 모난 씨앗을 목구멍에 숨긴 채 근근이 호흡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망치질 한 번이면 깨져버릴 유리 공예품이 나보다 강할 듯했다.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란 말이야. 변명이라도 하란 말이야…….
“당신……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기다림 끝에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랬다.
“알고 있으니까 물어보는 거잖아요!”
이 단말마를 끝으로 시계가 바닥에 나뒹구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렸고, 소용돌이에 휩쓸리듯 정신이 무진 아득해졌다.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빠져나왔다. 숨결 마디마다 헛소리가 한 줌 씩 섞였다.
“신목의 가지를 꺾어 활을 만들다니, 저는 왕실 근위대장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유감이 기묘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발부터 머리끝까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포인세티아…… 포인세티아! 너인 것이냐?”
엘로힘 오빠의 망토가 몸 위로 떨어져 내 모습을 깊이 숨겼다. 나는 빛 한 줌 스미지 않도록 망토 끄트머리를 잡고 얼굴을 가렸다.
“살아 있는 것이냐? 네가, 그 안에 있었느냐? 잔가지나마 남아 있었던 것이냐…….”
오빠가 나를 안아 들었다. 몸이 붕 떴다. 오빠의 냄새였다. 낡은 오크통에 숨겨진 포도주와, 채 자라지 못한 어린잎의 초록 향기. 청명하고 위풍당당하며 공정한, 엘드라코의 엘로힘…….
“저를 엘드라코로 데려다줘요. 호랑가시장미덩굴에 물을 주어야 해요, 아니면 꽃이 화를 낼 거예요. 무두질은 다 끝났나요? ……거리는 넓고 황량하지. 춥고 외롭고 배고픈 것이 꼭 급류에 휩쓸린 것 같아. 배가 고파, 싫어, 밉다. 날 이 몸에 가둔 미치광이를 저주한다……. 엄마, 저 잠깐 시골에 다녀올게요. 아예 모르는 곳에 가서 봉사도 하고……. 이제 성인이니까, 괜찮아요. 추스를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에요.”
속이 메스꺼웠다. 째깍, 하고 뭔가 돌아가다가 팅, 하고 쇳덩이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한데 엉겨 어느 것이 누구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균형을 이루고 있던 영혼들이 붕괴하고 있잖아. 정신 차려, 엘프 양반. 어서 안으로 옮겨! 이봐, 식인에 대한 것까지 모두 털어놓은 것 아니었냐고!”
“식인이라고? 하, 어처구니가 없군! 난 식인을 하지 않아! 닿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러운 인간 놈들을 왜 배 속으로 집어넣어야 하지? 네놈이 오필리아에게 잘못된 이야기를 전한 거지. 바른대로 말해!”
구역질을 참지 못해 모두 게워내고 싶었다. 무언가 속에 많이 있었다. 감당하기 벅찬 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 있었다…….
나는 엘로힘에게 번쩍 들려 이동했다. 여러 개의 발소리가 눈밭을 헤치고 달렸다. 말이 쏜살같이 뛰어나가는 듯했다.
‘아냐, 내가 묻기로 결정했잖아. 뭐 하는 짓이야…….’
나는 처음 눈을 뜬 것처럼 망토를 내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차분하게 행동하고, 말룸에게서 답을 구해야 했다. 그는 나를 아끼는 듯했으니 분명 어떤 쪽으로든 유익한 결론을 내려줄 테다. 지금은 이런 두루뭉술한 믿음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호흡이 안정되자 컴컴해졌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어느새 나는 벽난로가 눈에 띄는 따스한 분위기의 응접실 안에 있었다.
“오필리아! 정신이 들어요? 영영 당신을 잃어버리는 줄 알고…….”
가장 처음 보인 사람은 말룸이었다. 그와 나는 응접실에 단둘이 있었다. 내가 깨어난 것을 발견하자 말룸이 내게 바짝 붙었다. 몸을 덮은 담요를 확인하고, 볼을 몇 번 쓸어도 보고. 그의 체온이 차갑게 가라앉지 않을 때 나를 품으로 숨겨 온기를 전하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조슈아와 카사블랑카를 호출하러 연락을 하러 갔어요. 크로노는 난동을 부리는 로보를 끌고 무언가를 설명하러 갔죠. 자, 저 뿐입니다. 괜찮아요.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못해…….”
그는 너무 놀라 손까지 떨고 있었다. 말룸이 연신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대답해요. 거기 있는 거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맞는 거죠? 오필리아…….”
나는 초점이 맞지 않아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말룸이 집요하게 눈을 맞추었다.
“심장을 걸고 당신을 지키겠다고 한 말을 기억해 줘요. 제 심장은 라딘라티의 사념체를 봉인하기 위한 동력이 되어서 그 어떤 수집품보다 값비싸죠. 그 심장을 걸겠다고 할 만큼, 저는 처음의 처음부터 당신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러니 날 제대로 봐요, 제발…….”
말룸이 진흙덩이에 호흡을 불어넣는 신처럼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이마, 콧등, 입술, 눈가, 양 볼……. 나는 어떤 반응을 할 수가 없어 멀거니 세례를 받고만 있었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보다 더욱 충격에 질려 있었다. 그 선고는 이미 겪은 죽음을 다시 받아들이라는 폭력에 불과했지만, 지금 상황은 말룸과 멀어져야 한다는 슬픔을 의미했다.
“대답…… 대답을 해줘요. 내가 물었잖아요.”
“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말룸이 한 번 마른세수를 하더니 급박하게 말을 토해 내었다.
“오필리아, 저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아요. 맹세코 그런 적 없습니다. 식인 같은 것으로 불사를 이룰 수 있었다면 세상에 죽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가요?”
나는 양손을 꾹 마주잡고 덜덜 떨었다.
“거짓, 거짓말이야. 전부 봐서 알고 있어요. 당신, ‘오필리아’를 머리만 남기고 삼켜버리고선, 내 목에 걸린 열쇠로밖에 열지 못하는 푸른 문 안에 넣어둘 심산이잖아요. 첫 번째 아내도 그렇게 삼켰죠. 영원히 살고 싶으니, 다른 사람의 수명을 거름 삼아서…….”
“당신이 잘못 알고 있어요! 신이 아닌 이상 행성을 거스르고 영생을 사는 자에게는 저주가 따르죠. 자, 생각해 봐요. 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저주’에 걸렸어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저주.”
번개가 내리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저주.”
말룸은 아이에게 첫 말을 가르치는 것처럼 초조한 낯으로, 그러나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타오르듯 했다.
“인간도 포함돼요. 끊임없는 공복을 느끼도록 저주받았으니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겁니다. 배 속으로 집어넣는 즉시 염산을 마신 것 같은 고통이 들이닥치죠.”
나는 얼이 나가 계속 물었다.
“푸른 문 안에는……. 뭐가 있나요? 전 아내의 주검이 있는 게 아닌가요?”
말룸의 한숨이 안개처럼 방 안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곤란해 하고 있었으나 전 아내에게 유감을 간직한 것 같진 않았다.
“그자의 머리…… 예, 안에 있겠죠. 하지만 저와는 무관합니다.”
나는 결국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한때 당신 아내였던 사람의 시신인데 무관할 수가 있어요! 장사라도 지내줘야죠. 그 사람 아직도 실종 처리 되어 있다면서!”
“내 아내? 글쎄요, 나는 그자를 아내라고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자는 황제의 핏줄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성에 고용된 사용인 정도의 위치였단 말입니다. 내가 왜 관심도 없는 사람의 안위까지 신경 써야 하죠?”
“당신…….”
“진정해요. 어쨌든 그자는 제가 죽이지 않았어요. 지하로 걸음하지 말라 분명 경고했는데 듣지 않은 건 그쪽이란 말입니다.”
말룸이 머리를 짚었다. 혈관의 핏기가 싹 가시는 듯했다. 나 아닌 자를 향하는 말룸의 비인간성이 식은 재처럼 검었다.
“시신이야 알 바 아니고, 푸른 문 안에는 라딘라티의 사념체와 그를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끔 하는 촉매인 제 심장 결정이 들어 있습니다. 티포주 성 전체가 라딘라티를 봉인하는 미궁이고, 그 동력은 제 심장이죠. 원래는 적당히 얼려 두었는데, 당신과 있으면 심장이 계속 박동해 자꾸만 녹아내려서 차라리 소분해 결정화시키기로 했었죠.”
말룸의 낯빛이 파리했다.
“일전의 지진도, 크게 앓았던 것도 전부 개조 작업과 연관이 있었어요. 체온이 불안정하게 날뛰는 것도 심장을 개조해 생긴 부작용이죠.”
떨리는 비명 사이로 헛웃음이 샜다. 울음조차 나지 않았다. 전 아내에 대한 말룸의 감상이 비정해 그랬고, 말룸을 의심하고 두 번째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발악했던 시간이 허무해서 그랬다.
“아, 하하, 아하하하…… 그럼 나는, 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야…….”
말룸에게 날을 세웠던 일, 잡아먹힐까 전전긍긍하며 도주 궁리를 했던 일, 괜찮은 척 시체 몸을 이끌고 장난을 쳤던 것, 벼랑 끝에서 떠밀린 듯한 두려움을 느꼈던 일, 겁을 먹어 아무것도 묻지 못한 것, 입 맞추지 못했던 것,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 말해주지 못했던 것, 그리고, 말룸이 내게 보낸 사랑스러운 감정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것.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할 과오였다. 원망할 대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소설 속에 빙의하고, 원작이 달라지는 스토리라인은 비일비재했는데…….
그랬다, 클리셰. 이 상황은 클리셰였다. 나는 그저 소설 속에 나오는 빙의자들처럼 즐기면 되었다…….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내 잘못이었다. 말룸에게 솔직함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나는 두려움을 숨겼고, 말룸에게 안겨들면서도 도주할 구멍을 찾아 로보와 크로노에게 말미를 주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저울을 두고 안전을 무게추로 올리며 간을 보고 있었다. 가장 비겁한 사람은 나였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검정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생을 구성하고 있던 시간이 죄다 빠져나가 갑작스럽게 늙어버린 것 같았다.
“마차 안에서 했던 말, 거짓말이에요……. 스노우볼도, 당신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아부하려 준 거야.”
말룸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말룸이 입을 열 때 내게 향했던 달콤한 속삭임이며 사랑이 전부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떡하죠, 당신이 너무 좋아져 버렸어. 당신이 세 번째 아내와 함께 있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끓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룸의 음성에는 고저가 없었다. 삭막하고 텁텁했지만 그것이 말룸의 본래 목소리처럼 느껴져 기꺼웠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말룸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벽난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저를 사랑하나요?”
나는 사형 직전 최후의 말을 남기는 죄수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요. 심장을 대신 주고 싶을 만큼.”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말룸에게 다가가 안겼다. 나를 내쳐도 좋았고, 벽난로 속에 집어던져도 괜찮았다. 하지만 말룸은 그러지 않았다. 나를 세게 품은 후 깊이 입을 맞출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힘껏 매달렸다. 말룸이 키 차이가 거슬렸는지 나를 단단히 안아 올렸다. 내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옭죄듯 감싸자, 말룸이 끊임없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이전처럼 어색해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말룸은 나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나도 그에게 익숙해지고 싶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내 생애 최초의 사랑이야말로 당신이죠.”
말룸은 자신의 진심을 내 손 위에 올려주었다.
말룸이 새벽처럼 고요히 눈물지었다. 나는 그를 울리고 싶지 않은데도 매일 울게 했다.
“이름 모를 분,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지 못해서 속이 상하네요. 당신에게 속아 우는 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우는 거예요.”
그의 숨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우리 어디서부터 엇갈린 걸까요? 당신이 보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요. 지금 보니 인어가 이야기한 건 아닌 모양인데, 당신은 어떻게 저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말룸의 셔츠 자락을 세게 쥐었다. 나는 피할 구석이 없음을 깨닫고 더듬더듬 문자를 엮어 내려놓았다.
평가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말룸이 되어야 했다. 내가 그간 말룸을 관찰하고 평을 내렸으니 이번에는 말룸의 차례라야 공평했다.
“저는 소설을 통해 당신을 처음 봤어요. 책 속 당신은 아주 못된 악당이에요. 인간을 혐오해 접촉하는 것조차 꺼렸고, 수틀리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치워버렸죠……. 또 당신은 끊임없이 결혼했는데, 결혼 목적은 불로불사를 유지하기 위한 먹잇감 확보에 있었어요. 미리 먹이를 점찍어두는 편이 관리하기 편하다는 이유였죠.”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첫 번째 아내는 이미 잡아먹었고, 다음 제물이 바로 저, 제가 잡아먹힌 후의 세 번째 아내가 바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리아였어요.”
말룸은 놀란 표정도, 기묘하다는 표정도, 혐오스럽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대지를 비추는 초승달처럼 가만히 나를 응시할 뿐이다.
“소설 속 당신은 마리아에게 단죄당해요. 그리고 원작대로라면, 대강 2년 후에 제가 당신에게 먹혀 죽게 되죠. 원래는 3년이었어요.”
말룸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정보를 계속 늘어놓았다. 그가 원작에서 얼마나 소름 끼치게 행동했는지, 마리아를 어떻게 핍박했는지, 광기 어린 잔혹성을 어떤 식으로 발산했는지, 폭력을 형상화 해둔 것 같은 강박과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혐오를 얼마나 깊이 간직했는지.
“미래의 시점을 다룬 원작에는 엘로힘 오빠도, 아라크네도, 저도, 크로노도, 렉스 님도 없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 등장하는 사람은 로보, 조슈아 님, 카사블랑카뿐이었어요.”
침묵이 강처럼 흘렀다. 나는 떨리는 손을 마주잡고 하고 싶지 않은 미래의 가정을 하나 더 풀어놓았다.
“그리고 원작에서, 로보는 라딘라티 처치를 위해 마리아에게 협조하기는 했지만 무척 무기력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했던 것 같아요…….”
높다란 곳에 매달린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책 속 로보는 파도에 휩쓸려 부유하는 해초같이 힘도, 기쁨도, 의지도 없는 인물이었어요. 마리아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분쇄하는 수단일 뿐이었죠.”
나는 고해하듯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은, 멀지 않은 미래에 저를 잃어버리고 그렇게 되어버리는 걸까요?”
말룸의 낯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수수께끼를 풀어냈지만 잔혹한 진실을 마주한 듯 평정심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말룸이 내 양어깨를 아프지 않도록 그러쥐었다.
“당신이 본 ‘원작’의 저는 제가 아니라 라딘라티일 겁니다, 오필리아.”
말룸이 선고하듯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추론을 확신하고 있었다. 신탁을 내리는 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하는 소리를 단 한 톨도 이해하지 못했다.
말룸이 명확한 발음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자가 제 육신을 뒤집어쓰고 저인 척 행세했던 거예요.”
“라딘라티가…… 당신 육신을 뒤집어 쓴 거라고요?”
상상을 초월하는 가설에 헛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말룸은 말을 물리지 않았다. 혈색 없는 말룸이 냉정한 선고를 내렸다.
“분명해요. 그자가 맞아요. 당신이 묘사하는 소설 속의 제 모습과 행동 양식이 라딘라티와 아주 똑같아요. 추측에 불과하지만,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자에게 잡아먹힌 것이겠지요. 아라크네의 경우에는 왜 등장하지 않는지 짐작하기 힘들지만……. 그 책 속에 등장하는 저희는 라딘라티의 사념체를 없애는 걸 실패한 겁니다.”
그가 지친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는 것과 사실이 달라요. 자세히 얘기해줄게요. 조금 전 이야기했듯이, 저는 황제의 동생으로 위장하는 조건으로 첫 아내와 정략혼으로 묶였습니다. 사이도 좋지 않아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죠. 어쨌든 저는 그런 자에게 감정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는 각자 따로 삶을 꾸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자가 열쇠로 푸른 문을 열었고, 라딘라티와 조우해 머리만 남기고 잡아먹혔죠.”
“……무책임해요.”
말룸의 샛노란 눈이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전 그자를 책임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필리아.”
입안이 바짝 말랐다. 이 건에 대해서 말룸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듯했다.
말룸은 근본적인 것이 나와 다른 사람 같았다. 그의 심장은 박동하는 혈관이 아니라 검게 그을린 비늘로 만들어졌다.
“왜 처음부터 그자에게 황금 열쇠를 준 거죠?”
말룸은 전처에 대해 거론하고 싶지 않은 듯했으나 착실히 답했다.
“그자는 외도 중이었던 데다 선민의식에 젖어 패악질을 일삼았어요. 열쇠가 아니었다면 성에 머무를 수 없을 만큼 괴롭힘 당했을 테죠. 당신에게 열쇠를 준 이유도 당신이 평민 출신이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가짜 조카나 붕어 자식과 염문도 나돌고 있잖아요. 당신에게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말룸이 한숨을 쉬었다.
“위험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 나라는 첩실에 관대하지만, 외도는 용납하지 않으니까. 혼외자식의 존재로 족보를 어지럽히느니 차라리 첩을 두라는 의미죠. 사용인들도 붕어와 크로노를 당신의 첩이 될 자로 여기고 그에 걸맞게 대우하고 있을 겁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외도는 아닐 것이라 짐작한 거죠. 그리고 열쇠를 주었을 때의 겁에 질린 반응으로 확신했어요. 당신은 호기심을 억누를 만큼 겁이 많아서 함부로 열쇠를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그가 단언했다.
“저는 이미 불사를 얻었습니다. 라딘라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서, 한 번 타인에게 불사를 넘기면 그것으로 완성되죠……. 불사를 이어가기 위한 조건 같은 것도 없어요.”
나는 그의 말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어 석상처럼 있었다.
라딘라티는 차라리…… 괴물이라기보다는 전능한 신이 아닌가?
“하지만 라딘라티는 영락했어요. 그는 3년을 주기로 생명을 해쳐야만 한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그의 광증은 무진 지독해서, 이 땅과 바다 위에 선 모든 생물을 증오하죠. 제가 그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라딘라티는 3년 주기로 제물을 원했습니다.”
말룸이 나를 벽난로 앞에 앉혔다. 그는 내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핫 초코 머그잔까지 쥐여 주었다. 불꽃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조각조각 나누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불려올 수 있었는지, 왜 크로노모르테가 저더러 수명이 3년 남짓 남았다고 했는지.”
말룸이 헛웃음을 흘렸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말룸이 어느새 흘러내렸던 담요를 다시 덮어주었다. 나는 담요 가장자리를 꼭 쥔 채 말을 고르려 노력했다.
“그럼 그 소설은 대체 뭔가요? 당신이 뱀이라는 것도, 이곳 요르나스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도 전부……. 소설을 통해 알게 된 거란 말이에요.”
말룸은 한참 신중히 고민했다. 그만이 알 숱한 지식들을 헤아리는 것도 같았다.
“라딘라티는 이 세계와 당신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소설의 형태로 미래의 파편을 엿보게 한 것 같군요. 연고 없는 혼을 무작정 불러오는 것은 그자라도 힘들 테니, 미래의 이야기를 읽게끔 해 ‘인연’을 만든 겁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럼 그자도 크로노처럼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건 아닐 겁니다. 미래를 읽을 수 있고,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해 그 길을 따라 신호를 실어 보낼 수 있는 어떤 요소를 활용한 거겠죠. 아주 드물지만 이 땅에 존재하기는 합니다.”
말룸이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간 움푹 한숨을 쉰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까지 적색거성을 찾으려 오만 군데를 헤집고 다녔는지 이제야 앞뒤가 맞는군……. 라딘라티는 적색거성을 통해 지구에 이 행성의 미래 중 한 갈래를 소설 형태로 편입시키고, 당신이 그걸 읽어 요르나스와의 인연을 구축하게 만든 겁니다. 그 후 별의 운행 궤적을 따라 당신의 영혼만 이곳으로 불러온 거겠죠. 살해당했다고 했으니 영혼이 덩그러니 남았을 때 곧장 시행했겠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워 적색거성이나 별의 운행 궤적 같은 개념을 처음 접하는 내 이해를 어렵게 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말룸은 그만의 걱정에 매몰되어 적색거성에 대해 더 첨언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오늘로부터 2년 남짓. 크로노모르테의 예언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패해 절멸할 겁니다. 라딘라티는 제 껍데기를 쓰고 설치다 마리아라는 여자에게 퇴치 당하겠고요. 라딘라티가 미래에 죽는다는 것은 참 기쁘긴 한데, 지금은 대책을 세워야 해요. 우리 목숨이 파리 목숨이나 다를 게 없단 뜻이니까.”
말룸은 극도로 불안해 보였다.
“라딘라티를 죽였다는 그 여자는, 대체 어떻게…….”
이명이 들리듯 머리가 멍했다.
원작의 말룸이, 진짜 말룸이 아니었다니. 게다가 미래가 모두 실현되면 원작에 등장한 인물들을 제외하고 모두 죽게 될 거라니…….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알 수 있어서 다행이죠. 제가 안이했습니다. 사념만 남았다고 그자를 쉽게 보고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말룸이 내 볼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냥 멀거니 그를 응시했다.
“그런데 말룸. 원작에서, 그러니까, 미래에서요. 라딘라티의 사념체가 어떻게 당신의 몸을 뒤집어쓰고 있게 된 거죠?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 말을 꺼내자 이제까지는 그냥저냥 괜찮았던 말룸의 낯빛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나는 이것이 그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음을, 말룸의 역린과 다름없는 고통의 표상임을 짐작했다.
말룸은 그 후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말룸이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은 라딘라티나 내 몸 상태와 관련된 진실이 아니라 바로 그의 과거, 오랜 세월 살았을 말룸이 아직까지도 떨쳐내지 못한 깊은 흉터인 듯 보였다.
결국 벽난로 안 불길이 내 눈동자의 안광을 앗아갔을 즈음, 말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신전에서…… 지나가듯 들었을 겁니다. 제가 사이비 교단에서 태어나서, 살아 있는 신으로 떠받들어졌었다는 것.”
말룸이 진창에 처박힌 사람처럼 섧게 웃었다.
“여러 가지로 힘들겠지만 들어줘요. 잠깐 인간이었을 때의 이야기를 해줄게요.”
그가 의자 깊이 몸을 묻었다.
“제 진짜 이름은, 말렉시우스 라딘라티……. 풀어 말하자면 ‘라딘라티의 그릇’. 이름 그대로 저는 라딘라티의 그릇이 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제 존재 의의는 그것뿐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