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2화
크로노가 눈 위로 나무를 스케치했다. 밑그림이 선의 덧댐 없이 한 번에 뻗어나갔다. 나무는 비실비실한 것 같으면서도 위로 잔가지가 넓게 뻗쳐 이상하리만치 영험해 보였다.
“그 나무는 다음 공예의 주제인가요?”
크로노가 고개를 저었다.
“행성 흐름을 나무로 형상화 한 것이오. 가지마다 열매 형태로 운명이 맺히지……. 운명이야말로 별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데, 행성이 미래 기억까지 포함해 운명으로 틔워 내는 것이라 이해하면 될 듯하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크로노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의 말은 내 귓바퀴를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그의 뜬구름 잡는 말을 해석하기에는 아직 같이 지낸 시간이 짧았다.
크로노가 마른 나뭇가지를 눈밭 위로 끌었다. 그가 그리는 궤적을 따라 눈이 뭉쳐지고 흩어졌다.
“오필리아 님이 왜 자신을 배제하려 하는지 모르겠소. 흔적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소, 나는.”
이번에 크로노는 말을 늘이지 않았다. 나는 털장갑으로 꽁꽁 싸맨 양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비치는 착각이 들었다. 부활절 달걀을 연상케 하듯 알록달록한 색감이 예쁜 장갑이었는데도 그랬다.
두어 번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실의 촉감이 영 까슬까슬했다.
“벌써부터 부재를 안배할 필요는 없소……. 오필리아 님은 끝을 모르니 미리 재단하는 것은 큰 잘못이지. 사람들은 제각각 본인의 운명을 어렴풋이 직감한다 착각하지만……. 말 그대로 착각에 불과한 것이오.”
그의 얼굴에 흰 눈송이가 날렸다. 크로노는 눈 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 그림에 빠져들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럼…… 크로노는 끝을 알고 있다는 의미인가요? 끝의 끝까지요.”
“모를 수가 없지 않겠소.”
그렇게 이야기하는 크로노의 표정이 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텁텁했다. 나는 일부러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대로 놓아두면 크로노가 눈 동굴 속으로 끌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전부 알고 있으면 인생이 재미없을 것 같아요.”
그제야 크로노가 나를 보았다.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르니까. 안다고 해서 내가 미숙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오히려 보이기 때문에 더 미숙할 때가 있는 것이오…….”
크로노가 엄선한 나뭇가지를 챙겨 눈 무덤을 밟고 일어섰다.
“볼 때에는 정보만을 습득한 채 흘려보내게 되오. 하지만 직접 겪을 때는 맘속에 감정이 들어차 비로소 내 것이 되지. 나는 그 순간을…… 참 사랑하게 되어버렸소.”
“그렇다면 왜 당신이 본 것을 제게 이야기해주지 않나요? 혼자 괴로울 이유는 없잖아요.”
“필요한 것은 이야기해주고 있소. 숨기는 것들은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니 말하지 않는 것이오. 미리부터 걱정을 심어주는 것은 낭비요……. 그 상황이 닥치면, 살기 위해 어떻게든 헤쳐 나가게 되어 있으니까.”
크로노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오필리아 님 또한 그렇게 행동할 것이오. 싫어도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생길 수 있겠지……. 내가 엿본 미래의 그날, 오필리아 님은 손속에 자비가 사라지고 사랑하는 자들의 안위만을 위해 일을 꾸려 나가지만……. 나는 그 결정이 가장 합리적이고 올바르다 느꼈고,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소.”
맥락이 뒤엉켰다. 크로노는 예언과 해설 모두를 지나치게 아꼈다. 그는 나름의 소신에 의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만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더욱이 크로노는 이미 보았기 때문에서인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거나 크게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절박한 낯을 했던 것은 나를 따라 저택에 오길 청했을 때뿐이었다.
나는 크로노가 사는 세상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세상의 계절이 뒤섞여 꽃나무가 언제 싹을 틔울지 모르게 되었다.
나는 입김과 함께 무지를 토로했다.
“천천히 고민해봤지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결정을 의심하지 말란 뜻이오. 그게 최선일 테니…….”
“하지만 크로노, 저는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리지 못해요. 천재이거나 자기 주관이 뚜렷한 것도, 혜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당신이니까 얘기하는 건데, 저는 평화로운 와중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두려움에 매몰되고, 그렇게 겁을 먹을 때면 다 팽개치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어요. 그런 상태에서 하는 결정이란 좋은 결정일 수 없는 거죠.”
“아니, 오필리아 님. 당신이 항상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오. 그 상태에 머무르고자 해도, 상황이 용인하지 않을 테지.”
크로노는 완강했다. 그는 당장 그와 함께 눈 구경을 하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운명 줄기 속에 들어 있는 미래의 나를 보고 있었다.
“단 하나를 위해 당신의 세계를 희생하지 마시오. 오필리아 님이 조금만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이 세계는 그 누구보다 상냥한 신을 얻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얼어버린 대지와 척박한 사막도 완전해질 것이고, 물과 달의 광기에 먹혀 지하로 끌려들어 갔던 이들도 자신만의 샘을 찾아 몸을 쉴 수 있겠지…….”
“미안하지만, 크로노. 세계 이야기는 제게 너무 벅차요. 하지만 그걸 이야기해준다는 건, 지금 제게 필요한 조언이라는 뜻인가요?”
“망설이고 있는 것을 매듭짓기 위해서라면 필요하오. ……숙부의 일 말이오.”
그의 백색 시선이 몽롱한 연기처럼 흩어졌다. 나는 선인장에 찔린 사람처럼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는 내가 외면하고 있던 불편한 구석을 콕 집어내었다.
나는 자문을 구하듯 크로노에게 호소했다.
“당장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전의 대화를 통해서 저는 그 사람한테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말룸이 상처받으면 어떡하죠?”
“당신이 말을 꺼내지 않으면, 숙부는 평생 입을 다문 채 있을 것이오. 알고 있지 않소……. 이 조언은 앞을 내다보고 한 것이 아니오. 숙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론이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크로노도, 엘로힘도 모두 말룸의 천성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의문스러운 미소로 내 정신을 흠뻑 홀려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동전 뒤집듯 해버리니까.
크로노가 방점을 찍었다.
“나는 오필리아 님이 황금에 둘러싸여 행복하길 바라오. 잔잔한 수면 위, 머리에 화관을 얹은 채 쓸려가듯 물밑으로 가라앉는 게 아니라…….”
나는 눈의 바다만 응시했다. 한 쪽은 울퉁불퉁했고 다른 한쪽은 매끄러웠지만 발자국이 찍혀 원래의 형상을 잃은 것도 있었다.
“부디 영원히 천진난만하여 주시오……. 오필리아 님이 행복하다면, 당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대상이 누가 되었든 무관하오. 내가 아니더라도…… 나는 기쁠 것이오.”
나를 응시하는 크로노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창백했다. 은색 눈동자에 맺힌 희끄무레한 내 상이야말로 그의 영혼에 깃든 한 줌의 불씨였다.
“크로노. 당신이 지금 저와 함께 눈 장난을 치는 이유는, 말룸과의 일을 당장 해결하라는 뜻이겠죠?”
“다음에 도래할 일에 짓눌리고 싶지 않다면.”
그가 대화 도중 처음으로 미소했다. 크로노는 거미줄에 묶인 사람처럼 머뭇거리며 손을 뻗더니, 내 볼을 빚어내듯 어루만졌다.
“오필리아 님께 열쇠가 있소. 나는 운명을 엿볼 수 있으니 이렇게 몰래 일러주는 것이오……. 숙부는 내가 오필리아 님을 따라온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있다 말하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살아가니 예언도 오필리아 님께만 풀어 놓고 싶었소.”
오랫동안 밖에 나와 있었지만 크로노의 손은 차갑지 않았다. 나는 내 볼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강하게 쥐고 호흡을 정리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닥칠 비극적인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 미래의 조각이나마 엿보게 되는 날엔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사막에 묻혀 있는 석유는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지만 위치를 알게 되고 나면 어서 파 올리려 조급해지는 것과 비슷했다.
말룸을 향하고 있는 두려움…… 그가 불사를 위해 사람을, 어쩌면 그의 사랑이 가물었을 때 나를 잡아먹을까, 잡아먹지 않을까에 대한 것.
크로노모르테는 대체 어디까지 볼 수 있는 걸까?
“사담이오만, 그래서 나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 싫소……. 원치 않아도 모두 보게 되고 말아 자극을 최소화하고 싶은 것이지. 그래서 오필리아 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무척 소중하소. 오필리아 님의 미래는,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까…….”
“죽은 자의 미래를 어떻게 보겠어요. 그렇죠? 지금껏 당신은 제 미래를 직접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미래를 통해 제 미래를 간접적으로 가늠하고 있었겠네요.”
내 말이 정답이었던 듯 크로노는 답하지 않았다. 그가 눈밭에 동물 발자국을 닮은 손자국을 만들었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크로노가 보는 세계가 두려워졌다.
크로노는 재료 수집 때문이 아니라 착잡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가시게 하려고 눈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크로노가 다른 이에게 여생의 기한을 말해주었던 것은 심술 섞인 투정이었을까, 아니면 순전히 호의로 이루어진 일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자…… 오필리아 님. 이제 그만 가는 편이 낫겠소. 저기 숙부가 나를 노려보고 있군.”
크로노가 내 손을 잡아 조심히 끌었다. 나는 절뚝이며 못 박힌 듯 덩그러니 있는 의자로 돌아갔다.
엘로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폐허가 된 나라의 왕은 빈 의자 곁에서 눈처럼 시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얼어붙은 손을 한번 잡곤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그가 새총의 탄환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을 때처럼 곤란함이 깃든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가린 채 살았다. 상대가 궁금해지는 날에는, 그리고 관계를 돈독히 다지고 싶어지는 때면 도망하는 그치를 잡아 실토할 생각이 들게끔 길들여야 했다.
말룸과 로보는 서로에게 눈뭉치를 집어던져댄 통에 온통 희었다. 눈덩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눈싸움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살벌하다. 멋모르고 곱게 자라는 작물에 서리가 앉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외모만 두고 보면 두 사람 모두 눈의 요정이 따로 없었다.
“뭐예요, 그게. 둘 다 엉망이네요.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눈싸움하는 법은 어떻게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처럼 하면 안 돼요. 로보 얼굴에 상처가 났잖아요. 안에 돌 넣는 거 금지, 딱딱하게 언 눈 조각 넣는 것도 금지.”
“아가씨, 저 자식이 먼저 시작한 거야. 돌이 참 딱딱하더라고. 하마터면 내 창을 찔러 넣어 저 지렁이 자식이 사흘이 지나도 과연 죽지 않을지 시험해버릴 뻔했지 뭐야.”
로보가 입가에 난 상처를 엄지로 쓸며 사납게 이야기했다. 핏물이 번져 입매가 엉망이 되었다.
말룸은 로보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눈싸움을 이어나가는 대신 흘러내린 머리칼을 위로 올려 묶었다. 목도리를 하지 않아 드러난 목덜미가 유독 하얗다. 찌푸린 인상이 주변의 앙상한 겨울나무와 어우러졌다.
“눈싸움이라는 어감에서 짐작했었습니다마는…… 설마, 오필리아. 당신에게 눈을 던지라는 소리는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요? 봐요, 이렇게 꽁꽁 뭉쳐서…….”
허리를 굽혀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크게 움직이거나 쪼그려 앉지 않아도 눈을 끌어올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의자가 너무 높았던 데다 내 키가 작았고, 오래 잠든 것처럼 근육이 빳빳하게 굳어 손이 땅에 닿지 않았다.
허리를 굽힌 채로 버둥대며 굳어 있으려니 크로노가 도처의 눈을 끌어다 언덕을 만들어주었다. 야트막한 봉분의 정수리가 간신히 손끝에 닿았다. 말룸이 웃음을 참았다. 사랑스럽지만 가끔 얄미운 사람이었다.
“당신 의중은 알았습니다. 더는 안 싸울 테니까 그만 해요. 보기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군요.”
“조용히 해요. 원래는 할 수 있었어요. 지구에서는 키도 크고, 무척 건강했었단 말이에요…….”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크로노와의 대화가 떠올라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말룸의 어깨 위로 눈 묻은 나뭇잎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매일 공부만 했다고 그랬잖아요. 무엇이더라…… 코딩? 그걸 배우느라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지 않았다면서요? 얘기를 들어 보면 썩 건강했을 것 같진 않아요.”
“아니라니까요. 선천적 강골이었다구요. 힘도 세고, 체육 대회가 있을 때마다 매번 우승하고! 저희 과 애들이 용의 자식이라느니 뭐니 그런 아저씨 같은 별명까지 지어 붙일 정도였는데……. 저도 이 몸에 적응하느라 곤혹스러워요.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말룸은 흥미로운 듯 비음을 낼 뿐 이렇다 할 호응이 없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그가 나를 집요하게 응시하다가 예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원래 모습을 보고 싶군요. 그럼 당신인 줄 모르더라도 첫눈에 사랑에 빠질 텐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 우스운 소리와 함께 엉성한 눈 뭉치를 집어던졌다. 투척 대상은 당연히 말룸이었다.
“얍.”
말룸은 굳이 피하지 않고 맞아주었다. 그렇지만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는데, 그는 부스스 떨어져 내리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말룸이 드물게 흐린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돌이 되어 버린 듯했다.
“이봐. 아픈 척.”
로보가 비뚜름하게 말룸을 불렀다. 그제야 말룸이 제 배를 감싸며 그의 조언을 따랐다. 이럴 때면 합이 잘 맞는 것도 같고…….
“아, 이런. 팔 힘이 정말 좋군요. 돌을 넣은 줄 알았어요. 아파서 쓰러질 것 같은데. 이리 와서 호 해주지 않을래요? 그럼 다 나을 것 같아요.”
“연기하는 거 다 알아요. ……알고 있었다고요.”
이마가 지끈거렸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명치가 울렁거렸고, 위장은 자꾸만 무언가를 게워 내려 하고 있었다. 만약 구역질을 한다면 내가 오늘 빨아들인 눈뭉치가 줄줄 샐 듯했다.
말룸은 아직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연기 같은 게 아닙니다. 곤란해요, 이러다 픽 죽어버리면 어쩌죠? 아무리 생각해도 멍이 든 것 같은데. 직접 확인해줄 생각은 없나요? 당신에게는 제 맨 몸을 보여줄 수 있으니 거리낄 것도 없고.”
“꼴값 떨지 마. 아가씨도 말이야, 저런 헛소리를 굳이 받아줄 필요 없어. 그렇지? 눈싸움을 하고 싶다면 내가 하는 걸 잘 봐. 내가 생태계를 교란하는 괴물 지렁이를 눈 속에 파묻어줄게!”
로보가 눈뭉치를 다시 뭉쳐 세게 집어던졌다. 말룸이 즐거운 낯을 싹 지우고 덩달아 눈덩이를 던져대었다. 심지어 둘은 주술로 눈뭉치를 양산하기까지 했다. 하얀 탄환이 쏘아져 나가는 속도가 대포처럼 빨랐다.
장갑에 감싸인 손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분명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다. 소년들의 장난이라 치부해도 좋을 정도로 활기가 충만했다.
하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괜찮은 척 심호흡하며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어도 털실을 사이에 두고 맥박이 불안하게 달음박질했다.
푸른 문 안에 내 시신이 들어 있는 상상을 자주 했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말룸이 불사를 계속해서 염원하는 이상, 나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였다. 잇새로 파리한 낱말이 빠져나와 눈밭 위로 내려앉았다.
“말룸.”
“예, 오필리아. 무슨 일이 있나요? 조금 전부터 안색이 좋지 않아요.”
“물어볼 게 있어요. 나를 사랑한다면 얘기해줘야 하는 거.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불안해서, 그리고 지금보다 당신을 신뢰하고 싶어서 용기 내서 물어보려고요.”
크로노가 해준 말로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룸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을 먼저 해소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관계의 지평을 넓히는 것도 불가능했다.
“대답해요. 날 잡아먹어서, 불사를 연명할 건가요?”
말룸이 병정인형처럼 생기 없이 굳었다.
“……제가, 누굴 잡아먹어요?”
“저를 첫 번째 아내처럼 잡아먹어서, 남은 시신을 지하 3층의 푸른 문안에 넣어 둘 건가요? 머리만 남기고 식인을 하는 못된 식습관을 가졌잖아요.”
“잠시만요, 진정해요. 당신 지금 심하게 떨고 있어요.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대체…….”
“당신이 라딘라티의 힘을 빌려 불사를 연명할 수 없는 상황인 거, 저도 알아요. 불사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당신은 삼 년 주기로 인간을 잡아먹어야 하잖아요.”
좌중이 고요해졌다. 눈에 깊이 파묻힌 것 같았다.
“날 잡아먹으려고 결혼한 거잖아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결혼식장에서부터요……. 만약 저를 잡아먹지 않으면, 불사를 위한 제물로 다른 사람을 물색하겠죠. 저는 그게…… 사무치게 끔찍해서, 당신이 날 사랑한단 걸 아는 지금까지도 당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겠어요.”
비겁한 사과도 덧붙였다.
“분위기 깨서 미안해요. 잘 놀고 있었는데. 기다리겠다고 말 했으면서, 기다리지 못해서 그것도 미안해요.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모든 게 불투명해서, 흰 눈 속으로 사라질 것 같단 말이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알록달록한 털장갑만 바라보았다. 모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튕겨 나간 것 같았다.
이 흰 설원에서 이물질이란 눈 위에 내린 썩은 나뭇가지도 아니었고, 순리를 거스르고 영생을 사는 말룸도 아니었다.
요르나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끌려와 저주인형 꼴이 된 나였다.
크로노, 당신이 말했죠. 내 결정을 의심하지 말라고, 후회하지 말라고.
이렇게 하는 거 맞는 거죠? 이렇게 말룸에게 물어도, 틀리지 않은 선택을 하는 거죠? 그가 지키고자 했던 최후의 철조망을 뛰어넘어 난동을 부려도, 나는…… 괜찮은 거죠?
우리는 흰 눈 속에 파묻혔다. 눈송이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말룸은 말을 고르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심산인지 답이 없었다. 나는 그의 선고를 기다리며 소리 없이 쌓이는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