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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51화 (51/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1화

[이름 모를 자의 책상]

가구에 꼭 이런 이름표가 달린 것 같다. 구불구불한 레시우스 어로 음각되어 마차 하나 값의 가격표까지 붙여 놓으면 완벽할 듯했다. 책상은 까만 숯처럼 보이는 흑단으로 이루어졌다. 결을 그대로 살려 가공해 숲의 향이 물씬 묻어났다.

그렇지만 결국 책상은 책상이었다. 숲에 있었더라면 오직 하나뿐이었을 세상 유일의 나무가 찍어낸 가공품이 되었다. 나는 이 양산된 책상이 내 신세를 가리키는 것 같아 우울해졌다. 라딘라티의 입맛대로 가공된 미지의 무언가가 바로 나였다.

의자를 끌어 억지로 앉았다. 삐걱대는 소리가 크게 났다. 몸에서 나는 삐걱댐인지 가구의 마감이 미흡해 들리는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책장에서 노트와 종이 뭉치를 가득 잡아 빼었다. 요즘은 렉스 님이 내 주신 숙제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덕분에 레시우스와 이 행성 요르나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끝낸 숙제는 종이를 버리지 않고 잘 쌓아 두었다. 공부한 것을 복습하고 싶어지면 요긴히 쓰일 예정이었다.

렉스 님의 숙제에 이어 최근 나는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는 일이었다.

12월 29일.

로보와 말룸이 크게 다투었다. 말룸의 볼에 검푸른 비늘 조각들이 돋아난 것을 무심코 마주했다. 말룸은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는지 언성을 높이기 바빴다.

아는 척할까 싶었지만 고민은 짧았다. 나는 모퉁이로 숨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말룸이 우는 모습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아름답긴 하지만 활짝 웃는 얼굴만 못하다.

12월 30일.

크로노가 새 공예품을 가져다주었다. 배짝 마른 나뭇가지가 황량했지만 가운데 소담히 핀 홍색 나뭇잎이 인상적이었다.

공예품은 책상 옆 진열장에 잘 넣어 두었다. 나란히 늘어선 것이 벌써 여섯 개째였다. 이번 작품의 이름은 ‘기갈의 해소’라고 한다. 어떤 의미인지 물었지만 그는 덤덤히 미소 지을 뿐 말해주지 않았다.

1월 2일.

엘로힘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그는 공사 중이라고 못을 박았던 중앙 정원에 자주 가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나는 엘로힘이 몸에 찬 기운을 묻히고 돌아온 후 홍차를 내려주었다. 엘로힘 오빠, 하고 부르니 그는 평소처럼 나를 쓰다듬었다.

문득 서러워 그가 돌아가고 나서 몰래 울었다. 포인세티아의 감정이 남아 있는 걸까, 그만 보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1월 5일.

결국 고집을 물렸다. 황금 사냥 축제에서 말룸이 거북이 금화를 끼워 넣는 것을 깔끔하게 수용했다.

축제 준비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새총 실력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연무장에 구경 온 로보가 폭소하는 바람에 오늘은 한동안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1월 6일.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실수로 로보의 품에 감겨들었다. 로보는 날 그대로 안아 든 채 의기양양하게 웃었는데……. 손이 곱아들 것처럼 부끄러웠다.

1월 7일.

말룸이 렉스 님과 무언가를 논의하는 걸 본의 아니게 목격했다. 식당에서, 두 사람은 내가 도착하자 바로 주제를 돌려 버렸지만 아닌 척 섭섭한 감정이 드는 것은 별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 나는 항상 아름다운 말룸의 얼굴을 덧그리듯 바라보았다. 요즘 그의 태도를 보면 날 잡아먹을 리는 없을 테지만……. 모르겠다. 원작 소설에서 묘사된 말룸이 너무 충격적이라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1월 9일.

또 깊이 잠들었다. 잠드는 것조차 느낄 수 없었는데, 잠을 자게 되었던 모양이었다. 깨어나 멍하니 상황 파악을 하고 있으려니 말룸이 다급하게 내 상태를 살폈다. 그는 내 곁을 계속 지켰는지 정리되지 않은 서류가 침대 도처에 있었다.

1월 10일.

말룸과 로보가 크게 다투었다. 전에도 비슷한 구절을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로보는 화가 나서 이날 아예 성에 돌아오지 않았다.

둘 사이의 관계가 나아지질 않는다. 로보와 크로노가 부쩍 친해진 것과는 달리 로보와 말룸의 사이는 진전이 없었다. 크로노는 그저 받아들이라고 했다. 티샤는 내가 ‘정부들’에게 공평한 사랑을 주어야 본부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라고 조언했다. 우스운 소리다.

1월 11일.

말룸이 ‘비가 오려나’ 하는 할아버지처럼 날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확한 표현은 ‘눈이 오겠군요’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록적인 폭설이 내릴 예정이라고 한다. 크로노가 별말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선 정말인지도 모른다.

눈이 온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크로노에게 눈싸움을 하겠느냐 물었더니, 그는 눈싸움이 무엇이냐 반문했다. 놀랍게도 로보와 말룸, 심지어 모아조차 눈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요르나스의 풍습이 아닌 듯했다.

비록 나무토막 같은 몸이지만 눈싸움의 살벌함을 가르쳐쳐주기로 했다. 관절 여럿이 삐걱거려도 눈 뭉치를 만들 수는 있을 테니까.

1월 12일.

눈이 오질 않는다. 거짓된 일기예보를 가져온 말룸을 추궁하듯 바라보니 그는 당장 내일이 되면 눈이 내릴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믿기진 않았지만 말룸은 날씨에 민감하다고 했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 듯했다. 비늘 돋은 그의 얼굴이 찰나 떠올랐지만 흩어 버렸다.

오늘은 1월 13일이었다.

종이 내음이 기꺼웠다. 검은 가죽 커버 일기장을 덮어 원래 있던 곳에 두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글자에는 힘이 있다고, 짧은 기록을 살피니 기억이 불씨를 머금고 되살아났다.

일기는 이 방에서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유일한 생존의 증거였다.

이 화려한 방은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항상 감탄사를 드리우게끔 했다.

하지만 말룸이 처음 내게 이 방을 소개해주었을 때와 달라진 풍경이 그다지 없었다. 나는 내 것이 아닌 빌린 물건을 사용하는 기분이 항상 들어 유난스럽게 꾸미지도, 가구를 빼지도 않았다.

시계 똑딱이는 소리가 나면 안심하고, 들리지 않는 날에는 불안해졌다. 나는 묵은 상념을 가슴에 안은 채 먼지 한 톨 없는 책상을 검지로 살살 쓸어 보았다. 이 기감도 오늘의 일기에 적어 넣을 예정이었다.

훗날 내가 사라진다면 나를 기억하는 모두가 이 기록을 읽고, 독특했던 나무인형 하나를 잊지 말아주었으면 했다. 말룸처럼 물질적인 불사를 추구하지 않더라도 글자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좀 더 빨리요! 목발까지 버리고 온 거라고요. 일찍 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안전운행 해야지. 하지만 이렇게 아이 같은 아가씨는 처음 보니까, 좋아, 달릴게. 꽉 잡아!”

나는 새된 웃음소리를 내며 로보를 꼭 붙들었다. 로보가 사춘기 소년처럼 딱딱하게 긴장했다. 그가 날 안은 팔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이 느껴졌다.

로보가 층계 꼭대기에서 단숨에 뛰어내려 밑으로 곧장 착지했다. 주변 사물이 한데 뭉뚱그려져 빠르게 지나갔다. 착지가 얼마나 완벽했는지 조금의 충격조차 없었다.

우리의 우스꽝스럽고도 요란한 행동에 일을 하던 사용인들 모두가 희미하게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로보도, 나도 눈싸움 생각에 들떠 주변을 살필 틈이 없었다.

1층 로비에서 못마땅한 듯 있는 엘로힘이 보였다. 로보가 멋쩍었는지 우뚝 섰다. 로보는 말룸에게는 강하고 엘로힘에게는 약했다. 말룸도 로보에게 강하고 엘로힘을 껄끄러워했다. 보이지 않는 생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엘로힘이 있었다.

엘로힘은 나를 발견하고 한결 녹은 표정을 지었다.

“말룸과 황자는 3번 공터로 먼저 출발했다. 네가 다치지 않도록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겠다는군.”

“항상 느끼는 거지만 공터 이름이 너무 삭막해요.”

“동감이야. 아가씨가 지어주는 게 어때?”

로보가 이야기했다. 나는 난리 통에 헐거워진 목도리를 다시 매매주는 엘로힘에게 인사를 건네곤 곧장 거절 의사를 밝혔다.

“저 작명 못 해요. 키우던 도마뱀 이름도 초록이였는데.”

“도마뱀도 키웠어? 어쨌든, 번호만 대강 붙여 놓은 것만 할까. 아가씨가 붙인 이름이라면 동그라미, 세모, 네모, 이런 식이라도 지렁이 녀석은 좋아서 춤을 출걸. 물론 나도 그렇고.”

로보가 나를 단단히 안았다. 뾰족한 말끝에서 말룸에 대한 적의가 짙었다. 로보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고, 말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도 그걸 알아 내게서 굳이 서로를 떼어놓진 않았지만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갔다.

말룸은 로보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로보는 한 발 물러서는 기색이었지만 내가 보지 않을 때 말룸의 습관이나 강박 따위를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둘이 싸울 때면 나는 죄를 지은 것처럼 허둥대다가 목발을 놓치거나 발목을 접질리기 일쑤였다.

우리는 숲과 맞닿아 있다는 3번 공터로 출발했다. 로보의 품은 겨울날 담요에 묻힌 듯이 따뜻했다. 불규칙한 체온이 도드라지는 말룸과는 달랐다.

말룸의 말대로 폭설이 내려 사방이 온통 새하얬다. 입김이 한 줌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짐작보다 바람이 매서워 나는 둥지 찾는 펭귄마냥 털옷에 얼굴을 묻었다.

겨울은 모르는 사이 날 선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럼 살아 있는 이상 온기를 나눌 상대를 찾아 방랑하게 되었다.

훌쩍 앞서나가는 엘로힘, 칼바람이 더욱 거칠어질 때면 나를 코트 안으로 끌어당기는 로보, 점처럼 보이던 것이 어느새 가까워진 말룸과, 공예품에 사용할 재료를 수집하는 중인지 말룸 곁에 쪼그려 앉아 땅바닥만 내려다보는 크로노까지. 모두 내가 이 세계에서 쌓아 올린 불씨들이었다.

“오필리아, 당신 정말 귀여워요. 털이 불어난 아기 새 같습니다. 춥진 않나요?”

말룸이 반색하며 자신에게로 오라는 듯 양팔을 뻗었다. 오늘만큼은 싸우지 말아 달라 신신당부해서인지 로보가 나를 말룸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살짝 웃어주었는데, 그것마저도 참지 못했는지 말룸이 내게 입을 맞췄다. 눈이 내려앉듯이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말룸, 간지러워요.”

하필 모두가 있는 곳에서……. 귀 끝이 뜨거워졌다. 싫지가 않아 문제였다. 몸속에서 샘물이 솟아났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발뒤꿈치를 들고 말룸에게 속삭였다.

“방에서 해요.”

“방에서라면 계속 해도 괜찮다는 뜻이죠?”

“바보.”

나는 투정 부리듯 말하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말룸의 웃음소리와 로보가 하는 욕지거리가 동시에 들렸다. 나는 한껏 민망해지는 바람에 내려달라는 의미로 말룸을 툭툭 건드렸다.

“저자들 눈치 볼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말룸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나를 미리 준비해 둔 의자에 앉혔다. 털방석이 있어 차갑지 않아 좋았다. 그 곁을 로보가 맴돌았다.

“아가씨, 내게도 상을 줘. 여기까지 운반해주었잖아?”

“남의 부인에게 웃기는 수작 걸지 마라.”

“사기 결혼을 한 주제에 말이 많아. 내 창의 저주가 어디까지 통할지 참 궁금한걸.”

“포인세티아의 육신을 두고 뭐 하는 짓이냐. 당장이라도 활대로 후려치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 둘 다 적당히 해라.”

천 년 정도 수명이 줄어든 기분이었다. 나는 다툼에 집중하는 대신 크로노에게 시선을 주기로 했다.

흰 설원 위 불쑥 나온 검은 머리칼이 기꺼웠다. 그는 소란스러움에서 동떨어진 채 추위와 동화되었다.

재료 후보로 모아 둔 나뭇가지를 두고 그만이 알 고민에 빠졌는지 크로노는 눈 얹힌 벌판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한 공간만 다른 세상에 속한 듯했다.

크로노는 세상의 소란스러움에 섞여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황제의 핏줄, 레시우스의 셋째 황자……. 그는 권력의 중심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크로노의 백색 눈동자 앞에만 서면 돈이며 좋은 음식 따위가 가치를 잃었다.

그에게서 엿볼 수 있는 세속의 편린이란 내게 향하는 감정과 이따금 새어 나오는 명령조뿐이었다. 전자는 크로노가 자의로 소유한 것이었고, 후자는 그에게 주입된 것이었다.

“눈을 보관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오……. 그렇게 하면 흐트러짐 없이 간직해 여름에도 꺼내 볼 수 있겠지.”

크로노의 시선이 서로 멱살잡이를 할 듯한 로보와 말룸에게 닿았다. 로보가 그를 눈치채고 넓게 손을 흔들었다. 크로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맞추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극성 부모님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서 눈밭에 한쪽 발을 내려놓았다. 솜 위를 걷는 듯 감촉이 좋았다. 엉성한 절뚝거림에도 크로노는 말리거나 질겁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이불 속에 파묻힌 것처럼 편안해졌다.

크로노의 곁에 얌전히 섰다. 어느 정도 쌓인 눈이 움푹 들어가 분화구가 남았다. 쪼그려 앉아 설원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오른다리가 당겨 그만두었다.

나는 검지로 크로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눈 위를 손바닥으로 쓸다 말고 나를 응시했다.

“크로노는 같이 안 놀아요?”

“나는 괜찮소. 그리고 저건 노는 게 아니라 물어뜯는 것이오……. 사이가 개선될 기미가 없소.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저렇게 지내겠지…….”

“그것 참 안 좋은 소식인데요.”

“받아들이시오. 천성이 상극인 자들이오. 숙부는 세상에 반대된다 해도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 사는 습성이 있고……. 저 인어는,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 빠른 천성이니까.”

크로노가 황갈색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끄트머리가 벼락을 맞은 듯 갈라져 보기 좋지 않았다.

“특히 인어는 영 닿을 수 없는 것은 체념해 버리기도 하는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고지식한 쪽은 오히려 인어라고 할 수 있소…….”

그가 설원에 작게 난 눈 무덤에 그것을 세로로 꽂았다.

“저들을 왜 말리지 않는 것이오? 오필리아 님.”

“매번 싸우면 저 없을 때 곤란하잖아요. 서로에게 적응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크로노는 계속 눈밭만 헤집었다. 공예 재료를 모으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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