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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50화 (50/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0화

겨울바람은 자비가 없었다. 콧속으로, 귓속으로, 입안으로 어디든 파고들어 속을 냉랭히 만들었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시렸다. 새총을 쏘아야 해서 장갑도 착용할 수 없었다.

나는 동태처럼 얼어 연무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얼마나 새총을 쏴 대었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

“다시. 팔 내리지 마라.”

“…….”

“다시. 계속 말했다, 새총을 옆으로 살짝 젖혀서 팔에 들어가는 힘을 분산하라고. 탄알을 쥘 때는 탄알을 지지하는 가죽을 감싸는 느낌으로 잡아라……. 아니, 그게 아니다. 주먹밥 만드나? 그렇게 쥐지 말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너는 정말이지.”

리 경의 말이 신경증에 불을 지폈다.

내가 그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연무장에서 체력 훈련을 봐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날카로움이었다. 그가 높다란 벼랑 같은 기세로 나를 감독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수업은 30분 새총을 쏘고 20분 휴식하는 식으로 더디게 이루어졌다. 육신에 대한 이야기는 꺼낼 틈도 없었다.

분노를 담아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얼마나 힘을 실었는지 앉아 있던 의자가 덜컹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회심의 탄알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날아갔다.

나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리 경이 저렇게 신경질적으로 나오는 원인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었다. 나는 새총을 심각할 정도로 잘 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다정하고 자세하게 가르쳐주던 리 경은 두 시간이 지나도 실력에 차도가 없자 마귀처럼 변했다. 나를 구제불능이라고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다시 쏜 새총까지 모조리 빗나가자 리 경이 탄식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포인세티아의 육체가 아닌가.”

리 경이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내게 다가와 자세 교정을 도왔다. 나는 그의 손길을 따라 근육을 움직이면서도 심통이 나 공연히 성을 냈다. 처음으로 나온 포인세티아의 이야기였지만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 살 때 표범을 사냥한 아이였다. 조금 산만하고 천진난만해 가끔 골치 아픈 일을 벌였지만, 엘프 최고의 전사였지. 그 애는 장궁의 명수이기도 했는데, 활을 쏘기보다는 활대로 후려치는 걸 더 즐겼다. 아주 위력적이어서 참나무도 쓰러뜨렸어.”

“…….”

리 경은 희미한 낯으로 여동생이 얼마나 강한 전사였는지 늘어놓았다. 정치는 주로 리 경이 도맡아 했고, 엘드라코로 침입해 오는 이들은 포인세티아가 격퇴하는 식으로 정국을 꾸려 나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엘프 최강의 전사가 포인세티아였다.

처연하고 청초할 것 같은 포인세티아의 이미지가 단번에 부서졌다. 나는 포인세티아가 작고 아담해 활동적이지 않은 엘프라고 느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고 편견이었다.

“널 목전에 두니 더 그립군……. 포인세티아는 산처럼 단단했고 들녘처럼 자유로웠다. 당당하고 지혜로운, 푸른 신목의 포인세티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트리톤까지 자신의 친구로 만들 만큼 사교성도 좋았지.”

나는 슬쩍 새총을 내리며 딴청을 피웠다.

“트리톤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요? 라딘라티를 무찌른 아틀란티스의 왕이라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녀석이 왕이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트리톤은 타고난 병증 탓에 몸이 무척 약해서 늘 혼자였고, 성격도 음침했다……. 자신의 형에게 집착하기나 했지. 어쨌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새총이나 다시 쏘도록 해.”

나는 그의 말대로 다시 새총 쏘기에 매진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이쯤 되면 내가 새총을 못 쏘는 게 아니다. 새총이 나를 거부하는 것이지.

리 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 애의 시신이라고는 하지만.”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발음하는 그의 표정은 황량한 농지처럼 생기가 없었다.

“저주로 모든 것이 보존되어 근육량이나 단련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을 텐데……. 이쯤 되면 네 기량의 문제라고 하는 수밖에는.”

격식 차린 말투가 절로 튀어나왔다.

“미안해요, 열심히 해볼게요. 과녁의 가장자리라도 맞추겠습니다…….”

“왜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듣자 하니 말렉시우스가 거북이 금화나 보석을 수북하게 만들어둔다던데. 심지어 널 졸졸 따라다니게끔 하는 걸 고려중이라고도 했다.”

리 경이 한숨을 쉬었다. 부끄러움으로 양 볼이 홧홧해졌다.

“정말 유난이라니까요, 그 사람.”

말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까? 새총에 대한 내 재능의 총량이 복병이었다.

그나저나 말렉시우스라니, 말룸을 지칭하는 듯한 말에 내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말렉시우스요? 처음 들어봐요. 말룸을 지칭하는 명칭인 것 같은데.”

리 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을 해주었다.

“녀석의 본명이다. 어린 시절의 이름이지. 그런데 뜻밖이군. 아직 네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네. 들은 적 없어요.”

“그렇다면 자세한 사정은 녀석에게서 들어라. 내게 성을 낼 것을 생각하면 골이 다 아파.”

말룸에게 본명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하기야 오랜 세월을 살았을 텐데 한 가지 이름만 쓸 수는 없었겠지. 조금 섭섭해지려고 했지만 그도 정신이 없었겠거니 하고 털어냈다.

하지만 말렉시우스라니. 그건 레시우스어로 ‘그릇’이라는 뜻이었다. 자식의 이름을 그릇이라고 짓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불길함이 속을 들쑤셨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것이 좋겠다. 무리해선 좋지 않아. 네 건강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나.”

리 경이 흐리게 웃었다. 새벽, 댐 근처의 고요한 마을에 안개가 낀 듯한 웃음이었다. 나는 고집부리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차다. 이만 들어가지.”

리 경의 말투는 나를 대할 때면 가끔 그의 동생에게 이야기하듯 부드러워지고 우아해졌다. 나는 그 모습이 그가 왕으로 있을 시절의 일부인가 싶어 가슴이 먹먹했다.

“새총 이리 줘. 몰래 연습이라도 하면 네 몸이 무너질 거다.”

리 경이 나에게서 새총을 받아들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날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올렸다. 무의식적인 행동인 것 같았다.

이후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쓰다듬어주시는 거예요? 좋아요!”

나는 기꺼이 발뒤꿈치를 들고 허공에 붕 뜬 그의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리 경은 그만이 기억할 과거에 잠겨 조용히, 그러나 아주 소중한 것을 매만지듯 날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네가 고집부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엄격하게 굴어 미안했다.”

“괜찮아요, 제가 못한 잘못이죠. 연습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리 경.”

“리 알렉산더는 엘드라코를 떠나고부터 사용한 가명이지.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군. 나라와 백성이 있었을 시절의…… 사장된 왕의 이름이다.”

이름을 허락받을 줄은 몰랐다. 나는 뛸 듯이 기뻐 둥그스름한 미소를 지었다.

“응, 그럴게요, 엘로힘.”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옅게 웃었다. 석양을 닮은 웃음이었다. 내게서 포인세티아가 겹쳐 보였던 걸까?

하지만 그가 마주한 환상은 오래 가지 못한 듯했다. 리 경……. 그러니까 엘로힘은, 나와 포인세티아를 혼동할 만큼 분별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추태를 부렸다. 미안하군.”

“아뇨, 정말 괜찮아요. 저야말로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해서…….”

내가 멋쩍게 웃었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 혹은 선생님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조곤조곤 쏟아져 나왔다. 목소리에 녹음 파일이라도 달린 듯했다.

“새총 가르쳐 달라는 부탁, 엘로힘과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했던 거였어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미안하기도 하고요.”

“왜 네가 죄책감을 느끼는지 모르겠군. 넌 피해자다. 사악한 것은 라딘라티와 말룸 발타사르지. 게다가 말룸 놈은 널 꾀어내어 결혼하기까지 했잖느냐. 단순히 포인세티아와 닮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설마 진짜 그 애의 육신이었다니.”

“아하하…….”

“말룸 놈과 네가 붙어 있는 장면을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널 포인세티아와 겹쳐 보고 있지는 않다만, 아무리 그래도 육신만큼은 포인세티아의 것이 아닌가. 복장이 터져 요 며칠 새 녀석을 암살해버리고 싶었다.”

“음, 엘로힘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그럴 만도…….”

“그놈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네 뜻에 달린 것이지만, 내 앞에서 애정행각은 하지 말아 다오. 나머지 두 녀석도 논외는 아니다. 특히 로보, 그 녀석은 늑대상어 일족의 직계라서인지 보면 볼수록 트리톤과─”

“─그런 거 남들 앞에서 안 해요!”

얼굴이 새빨개져선 힘껏 소리쳤다. 농담이었는지 그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말룸 발타사르를 조심해라. 놈이 널 소중히 여긴대도 그게 네게 이로운 방향일지는 알 수 없어.”

그가 어지럽혀진 연무장을 정리하며 넌지시 충고했다.

“네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을 거다. 본인에 대한 것도, 재앙에 대한 것도, 이 죽어버린 행성에 대한 것도. 뒤에서 네가 모르는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 녀석이니까.”

“왜 그렇게…… 숨기기만 하는 걸까요?”

“그게 네게 고통이 될 걸 아니까.”

엘로힘이 연무장의 흙바닥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말렉시우스는 고통이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추락하게끔 한다고 믿는다. 환경이 녀석을 그렇게 만들었지.”

“환경, 이요?”

“고리타분한 옛일이지만, 나는 라딘라티의 흔적을 추적하다 녀석을 처음 만났었다. 녀석이 갇혀 있던 장소는 어떤 성인군자라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는 곳이었지. 그게 녀석의 악행을 변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천성이 비뚤어지고 잔혹해진 근본 원인일 수는 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새총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혹시 괜한 말을 했나.”

“그건 아니에요. 걱정해주신 거잖아요, 그렇죠?”

“그래.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네가 행복해졌으면 싶다.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에게는 누구든 행복해질 수 있는 자격이 있어. 포인세티아의 일과는 무관한 감상이다.”

“아…….”

“물론 그 자격을 스스로 걷어 차버린 놈들은 예외지만.”

연무장을 정리한 엘로힘이 내게 손을 뻗었다.

“힘이 한정되어 있는 인간은 객기 부려서는 안 돼. 주변인을 챙기는 건 네게 여유가 생긴 다음이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 그게 누군가의 마음이라도 죄책감 갖지 마라. 너는 약자인데, 왜 약자가 강자를 이용하는 걸 죄스러워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네게 ‘착한 아이’로 지내는 걸 강요하기라도 했나?”

그의 동작은 간결하고 절도가 있었지만 절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초반의 어색함은 이미 빗물이 마르듯 사라졌다. 남은 것은 엘로힘에 대한 연민과 약간의 혼란스러움이었다.

직접 마주한 그는 내게 너무도 상냥했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속이 편했을 텐데.

엘로힘이 맞잡은 손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의 손에는 굳은살이 참 많았다. 무참한 세월이 쌓아 올린 고통의 흔적이었다.

“네 방으로 가지. 안아주마, 훈련이 끝나면 핫초코를 마시고 싶다 하지 않았나.”

우리 모두 겨울바람에 꽁꽁 묶여 체온이 높진 않았다.

말룸이나 로보 같은 다른 이들이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안기는 것을 얌전히 승낙했다.

“부탁할게요.”

엘로힘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날 가볍게 안아 들었다.

“목에 팔 둘러. 떨어진다.”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의 목에 단단히 팔을 얽었다. 엘로힘이 나를 품에 가득 안았다.

우리 둘은 꼭 닮아 있을 것이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단번에 혈연이구나 싶을 정도로.

엘로힘은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또, 어떤 풍경을 보고 있을까.

“널 포인세티아로 착각하고 있진 않다.”

내 속을 꿰뚫어 보았는지 엘로힘이 넌지시 덧붙였다. 사용인들이 그와 내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엘프는 영혼과 육신이 하나인 종족이라, 네게 포인세티아의 버릇이 하나하나 보이지만……. 그 애는 이미 잠들었을 테니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힘의 품속은 내가 지금껏 안겼던 그 어떤 사람의 품보다 단단했고 안정적이었다.

“지금 확실히 해두지. 그 육신이 내 동생인 이상 전처럼 데면데면하게 널 대하지 못할 것 같다. 너 하나만을 아껴 이러는 것이 아니라 속이 상하겠지만…….”

“괜찮아요. 참, 그리고…… 오빠 소리는 살면서 해본 적이 없지만, 엘로힘만 좋다면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엘로힘 오빠, 이렇게요.”

입 밖으로 나오는 발음이 어색했다. 손위 형제가 없었던 데다 학과의 남자 선배들에게는 그저 선배라고 부르고 다녔기 때문에 입에 잘 붙질 않았다.

“포인세티아 때문이 아니라, 오빠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요. 혹시 배려가 부족했나요? 안 그래도 계속 동생분이 생각나실 텐데…….”

엘로힘은 말이 없었다. 그의 숨결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나는 굳이 엘로힘의 얼굴을 보거나 말을 붙이려 하지 않았다. 섣불리 그의 상처를 들쑤신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마침내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호칭은 네 맘에 드는 것으로 하도록 해. 그런 것 하나하나에 포인세티아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이미 그 시절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어. 그 애가 나를 어떻게 불렀는지, 무엇을 할 때 즐거워했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또 누구를 사랑했는지……. 이제는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는 어느새 연무장을 벗어나 저택 내부로 들어온 상태였다.

“환상 속에 잠겨 있고만 싶다. 하지만 너와 포인세티아 모두에게 미안해 그러진 않겠다. 나는 그 애와 일족의 복수를 완성해야 해. 상념에 쓸려갈 만큼 한가하지 않다.”

“…….”

“그래도 내킬 때 종종 품을 내어 다오. 아주 가끔이면 된다.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그 애를 추모할 수 있도록……. 그 대가로 너를 위험에서 지켜 주마. 네가 상대해야 할 그 괴물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교활하고 잔악하니까.”

나는 기꺼이 허락했다.

엘로힘은 엘드라코를 통솔하는 엘프들의 왕이었고, 라딘라티 못지않게 긴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칠 수 있는 듯했다. 그는 완연한 어른이었다. 상황을 체념하는 것이 빠른 사람 말이다.

이후 나를 방으로 데려다주던 엘로힘이 말룸과 마주쳐 약간의 말싸움을 벌였다. 엘로힘은 끝까지 나를 말룸에게 넘겨주거나 내려주지 않았다. 말룸도 나와 엘로힘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때만큼은 한 발 물러서 지켜보는 태도를 취했다.

“유난이군요, 알렉산더. 둘 사이가 가까워진 건 오필리아에게 이로운 일이지만…….”

말룸이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었다. 그는 비뚜름한 자세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내 앞에서도 자세를 곧추세우는 그가 엘로힘 앞에서 만큼은 부러 철없는 태를 만들었다.

엘로힘은 말룸에게 대꾸하는 대신 그를 싹 무시하고 내게 이야기했다.

“소란을 피웠군. 푹 쉬어라. 분명 내일 근육통에 시달릴 거다.”

“아, 네, 엘로힘 오빠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엘로힘은 내가 침대에 제대로 파묻히는 것까지 확인하더니 인사를 남긴 채 방을 나가 버렸다.

천 년 이상 살았을 엘프의 과거가 족쇄처럼 무겁고 씁쓸했다. 나는 말룸을 곁에 두고도 한동안 다른 행동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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