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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49화 (49/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49화

말룸과 리 경의 말다툼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크로노에게 수프를 덜어주던 로보가 숨을 몰아쉬었다. 로보는 말룸의 말버릇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였다. 그는 요즘 부쩍 골머리를 앓았다.

“아가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며칠 사이 저 녀석 입담이 너무 거칠어졌어. 아가씨 앞에서는 자제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 같았는데…….”

“어처구니없는 수작을 걸어서 정신을 빼놓으려고 하길래 전부 말했어요. 뱀인 거 다 알고 있다고.”

“어처구니없다뇨, 오필리아. 아주 조금도 두근거리지 않았나요? 게다가 전부 알고 있었다니……. 얼마나 놀랐는데요.”

말룸이 울상을 지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말 안 했으면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쪽이 누군데요!”

말룸은 입이 사라진 것처럼 침묵에 빠졌다. 그가 서류에만 집중했다. 과거의 행동에 한 점 부끄러움이라도 있다면 지금 큰소리를 칠 수는 없었다.

“아가씨, 용기 냈구나! 무서워하고 있었잖아.”

로보가 반색했다. 그는 나를 원하고 있으면서도 내 상황이 나아졌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기뻐했다.

“아가씨를 약탈하지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여행은 언제든지 함께 갈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아가씨의 안전이 중요하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

그의 붉은 눈동자가 오늘도 활기차게 빛났다.

“그리고 내가 아가씨를 포기한 건 아니야. 그건 알아줘. 언제고 일이 힘들어지면 도망 올 구석 하나는 있어야 하잖아. 그렇지? 그거 내가 되어줄게.”

다정한 말에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음식을 마저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로보가 턱을 괴고 엷게 미소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아가씨가 나와 결혼을 한 번 더 하게 될지? 요르나스에서는 결혼 여러 번 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래도 저 녀석 성미를 봐선 거름망이 필수적으로 필요해. 기사 형씨랑 붙여 놓으니까 전쟁터가 따로 없잖아.”

“비린내 나는 입, 그 이상 놀린다면 오늘 식사는 없다, 붕어.”

“아하. 봤어, 아가씨? 내 식사를 빼앗는다니……. 폭군이 따로 없군. 누가 보면 내 아빠인 줄 알겠어. 그리고 비린내는 그쪽에게서 나는 거 아닌가, 뱀 양반. 어때, 창으로 비늘 청소 좀 해줘?”

언제 봐도 말룸을 상대하는 로보는 낯설었다. 로보는 기습 공격을 준비하듯, 혹은 어떤 술수를 쓰려는 양 상대를 화나게 하려는 비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해적으로 살아온 사내의 진면목을 엿본 기분이었다.

조금 참아 보려다 허용치를 넘어섰는지 말룸이 샐러드 접시를 집어던졌다. 로보가 고개를 까딱해 가볍게 그것을 피했다. 접시가 벽에 부딪혀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천박한 것들. 식사 예절이란 게 눈곱만큼도 없군.”

자기 몫의 닭다리를 덜어 가던 리 경이 한탄했다. 조금 전 자신도 무언가를 집어던졌다는 것은 잊은 모양이었다.

렉스 님은 아직도 태연히 식사 중이셨고, 크로노는 이 장면을 예언을 통해 미리 보았는지 내 곁으로 이사했다. 나는 가장 상석에 앉아 황망히 빵이나 우물거렸다.

로보와 말룸의 충돌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말룸은 적이라고 인식한 이들에게 어떻게든 시비를 거는 버릇을 가졌고, 로보는 말룸에게만큼은 져주지 않았다. 말룸이 검은 안개를 두르고 로보가 쌍창을 꺼낸 적도 있어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식당을 청소하는 이들만 고생이었다. 대공비 권한으로 말룸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용인들의 월급을 올려주기는 했지만 맘이 편치 않았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렉스 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렉스 님은 아이들 장난이라도 관망하듯 사람 좋은 얼굴로 홍차를 홀짝였다.

“오늘도 평화롭군요. 발타사르 저자가 이토록 제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요. 감회가 새로울 따름입니다.”

“정체 드러냈다고 서류 일에서 손 뗄 때는 언제고, 왜 날 키운 아비처럼 이야기하는 건가.”

말룸이 으르렁거렸다. 렉스 님의 단단한 눈동자가 말룸을 향했다.

“혀는 앙화를 불러오는 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고요히 이야기했다. 소름이 쭈삣 돋았다. 수업 시간, 레시우스 어 백 번 쓰기를 시키는 렉스 님, 영지의 경제 상황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렉스 님, 말룸의 도발을 아이 장난 대하듯 넘기는 렉스 님, 그러면서도 말룸에게 일이란 일은 노련하게 넘겨 버리는 렉스 님…….

말룸은 제 무덤을 팠다. 렉스 님이야말로 말룸의 일을 가장 잘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이 자리에서 일말의 숙고 없이 일주일의 휴가를 제출해버린 것이다. 하긴 렉스 님은 라딘라티를 처단하기 위해 잠시 협력하는 인물이었지 말룸의 집사가 아니었으니 일을 도울 이유가 없기는 했다.

말룸이 황망한 표정으로 식당을 나선 렉스 님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렉스 님은 끝까지 고요한 물길 같아 틈이 없었다.

“이제 보니 숙부는 감정적인 측면이 상당한 듯하오…….”

크로노의 첨언에 말룸은 대꾸하지 않았다. 턱을 괸 채 서류 처리를 하는 속도를 올릴 뿐이었다. 렉스에게 이야기해 봐야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말룸이 걱정스러웠다. 그가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해서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룸, 괜찮아요? 일이 늘어났잖아요.”

“괜찮아요. 매일 하는 일이고, 제 의무입니다. 어차피 지금까지 영지의 중요한 일은 대부분 제가 처리했어요. 적에게 재정 상태를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룸이 사나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치고는 필기를 하는 손놀림이이 점점 빨라졌다.

로보가 꼴좋다는 듯 쾌활히 웃으며 연신 회를 우물거렸다. 그는 해산물을 특히 선호했다. 아무래도 그는 인어인지라 해산물이 육지의 고기보다 익숙한 것 같았다.

“동족상잔…….”

크로노가 질린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로보는 어떻게 생선을 인어와 동족으로 취급할 수 있냐며 크로노의 뒷머리를 세게 눌러 버렸다.

“인간과 원숭이를 동족으로 취급하진 않잖아, 육지 황자.”

“그런 맥락이었다면 사과하겠소…….”

“좋아, 빠른 사과를 하는 사람은 현명하지.”

로보의 사교성 덕에 크로노와 그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추세였다. 나는 로보가 크로노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으면 싶었다. 파편에 대해 이야기해주려고 해도, 크로노는 그 주제만 나오면 내가 자신을 내칠 것이라고 여기는지 말을 돌려 버리니까…….

한 편의 만담을 나누는 듯한 둘을 바라보다가 말룸을 흘끔거렸다. 여전히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말룸의 정신 상태가 피폐해진 원인 중에는 일이 한 몫 거들었을 듯했다. 아무리 일 처리에 익숙해도 종일 일만 하고 싶은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말룸, 이래봬도 제가 요약하고 중요한 거 걸러내는 일은 익숙하거든요. 학생이기도 했었고. 도와줄까요?”

“고맙지만 당신에게 일을 시키고 싶진 않아요. 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 일을 하다 앓으면 집중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냥 곁에만 있어줘요.”

말룸이 말을 이었다.

“저 붕어가 어떤 수작을 부려도, 크로노가 아무리 불쌍한 척을 해도. 당신은 절대 날 버리면 안 됩니다. 제가 뱀의 육체를 해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것도…… 침대에서.”

말룸이 경쾌하게 덧붙였다. ‘침대에서’를 강조하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나는 로보와 크로노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 뱀이라는 것을 들킨 이후 말룸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옭아매곤 했다.

“그렇담 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래요? 렉스 님의 말로는 아주 거대한 뱀이라면서요. 심지어 양 관자놀이에 산양의 뿔도 달린.”

“……그 모습이 완벽한 건 사실이죠.”

“뿔이 달린 줄은 정말 몰랐어요. 위엄 있고 멋있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해요.”

하지만 그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룸은 이 건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듯 매번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는 한번 지켜보자는 심정이 되어 할 일이나 하게 되었다.

말룸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첫째, 정말 식인을 해서 불로불사를 연명해야 하는가. 날 잡아먹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해쳐야 하는지. 둘째, 이 성에 봉인되었다는 라딘라티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수상한 곳이라면 푸른 문뿐인데, 그 안에는 첫째 아내의 시신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셋째, 그의 과거. 넷째, 심장에 주술을 심었다는 이야기가 대체 무엇인지…….

상대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나만 해도 말룸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그가 의미를 두고 있는 스노우볼도 로보가 사준 물건이었고, 텃밭에서 다정스레 굴었던 것도 말룸의 눈에 들어 최대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로보에게 그를 해치워 달라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다고 호소하기도 했었지.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항아리 속에 더 많은 금을 숨겨 놓은 자는 내가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채근을 그만두고 식사에 집중했다.

겨울이 성 안으로 성큼 걸음했다. 내 상태가 부쩍 나빠지는 바람에 티포주 성의 난방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돌아갔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하루걸러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정신적으로 구석에 몰려 잠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목발을 짚고 잘 다니다가도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말룸이 졸음 방지 주술을 걸어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닌 의식이 육체에서 빠져나간다고 표현하는 편이 알맞았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꿈조차 꾸지 않았고, 로보의 말로는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는다 했다. 그 말을 들은 날, 나는 저녁을 걸렀다.

나는 다시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면 이미 죽어 있거나.

귓가에 종종 들리던 째깍거림이 완전히 멈추는 날, 내게 할당된 유예도 함께 깨져 나갈 것이다.

따지자면 나는 소생되어서 안 되는 망자였다. 라딘라티가 걸어둔 주술의 수명이 다하게 되는 때, 그 이상 연명하게 된다면 포인세티아에게, ‘오필리아’에게, 그리고 리 경에게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한 번 죽음을 경험하고 나니 그것이 전보다 더욱 두려워진 탓이었다.

다리도 나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괜히 오른 발목을 까딱여 보았으나 제대로 움직여지질 리 없었다.

말룸은 결국 아라크네 피티아 공작에게 서신 폭탄을 보냈다. 그러나 공작에게서는 답이 오지 않았다.

사실 그자는 라딘라티의 가장 충실한 종복으로 거미의 형상을 한 괴물인데, 그가 거미 괴물이 되며 라딘라티에게서 받은 저주가 내 몸 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실마리라고 했다. 그러나 공작은 말룸이 라딘라티를 배신하자 아예 교류를 끊어 냉전 상태였다.

나는 그자가 거미 괴물이라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때는 거의 졸도할 뻔했다. 어딘지 수상쩍기는 했지만 말룸 말고도 다른 괴물이 이 제국의 유력자로 군림하는 줄은 헤아리지 못했다. 만약 말룸에게 도망치기 위해 그자를 찾아갔었다면…….

어쨌든 피티아 공작은 서신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고, 계속되는 무시에 이성을 잃은 말룸은 피티아 공작이 공을 들이고 있다는 금융 사업 하나를 말아먹으려 작정하고 달려들었다. 말룸은 라딘라티의 첫 번째 권속이라고 했으니 아예 공작을 제 밑으로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요즘 나는 2월 즈음 열린다는 황금 사냥 축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황금 사냥 축제는 말룸이 발타사르령을 차지하고 난 이후 만들어진 신생 축제였다. 황금 사냥은 금화나 각종 보석 따위에 주술을 걸어 그것들을 움직이게 한 다음, 새총을 쏴 맞춘 것을 수확할 수 있게끔 하는 축제였다.

말룸의 말로는 제 위치를 공고히 하고 겨우내 굶주렸던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는데, 아무리 그래도 돈을 그렇게 마구 뿌리다니…….

재정 상태가 걱정스럽긴 했지만 정말 기우에 불과할 테고,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말룸의 재력은 마르지 않는 바다처럼 깊고 넓었다.

어쨌든 내가 황금 사냥 축제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있었다. 황금 사냥을 통해서 드디어 내가 번 돈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돈은 내 손으로 벌어다 써야 쓰는 맛이 있다. 게다가 새총을 쏘기만 하면 되니 무리해서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렉스 님의 말로는 금화나 보석들이 잔인할 정도로 빠르다던데, 내가 참가를 망설이자 말룸은 거북이와 착각할 정도로 느린 금화를 잔뜩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부정 청탁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리 경과의 훈련 일정이 잡혔다. 오늘은 내가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리 경과 단 둘이 마주하는 날이었다.

나는 하도 옷을 껴입어 몸이 둔해진 채로 저택 옆에 자그맣게 딸린 연무장에서 벌벌 떨었다. 이 연무장은 기사들이 훈련하는 곳이 아니라 간단히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임시 공간이었다.

12월 중앙, 바람이 너무 매서웠다. 코끝이 빨갛게 익어 콧물이 종종 삐져나왔다. 그러나 나를 추위에 떨게 하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리 경이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멈칫한 나는 한 번 더 코를 훌쩍였다. 그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내가 황급히 멀쩡한 척 미소하자, 리 경은 동생의 파편이라도 발견했는지 그제야 날 선 분위기를 흩었다. 대신 골치 아프다는 감정이 그의 면면에 퍼졌다. 미운 일곱 살을 돌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리 경에게 훈련을 부탁한 쪽은 다름 아닌 나였다. 언제까지 리 경과 데면데면한 채로 지낼 수는 없었다. 좋은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육신에 빚을 지고 있는 이상 무엇이든 이야기를 해 봐야 했다.

“음, 저기, 오늘 참 추워요. 그쵸?”

“이 추운 날씨에 굳이 새총 쏘기 연습을 해야 하는 건가.”

“……하하.”

내 육신의 오빠라는 저 사람을, 포인세티아를 사랑했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저 의미 모를 소생으로 다가올 일이 리 경에게는 떨쳐내지 못한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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