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48화
어릴 때면 왕왕 농촌으로 향했다. 당산나무와 그 밑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만이 입구를 알리는 표시의 전부인 곳이었다.
마을 앞에는 작은 논밭이 즐비했고, 왼편으로는 대나무 숲이 바람결을 따라 스스스, 스스스스 노래를 풀어 놓았다.
부모님은 내게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이셨다. 나는 시설로 보내지만 말아달라는 심산으로 천진난만하게 복종했다.
외갓집에 맡겨진 나는 항상 혼자였다. 사람보다는 나무가 편했다. 아침나절부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대나무 숲에 파묻혀 있었다. 점점이 기어 다니는 개미 관찰이야말로 내 세상의 전부였다.
흙바닥 위, 사람 주먹만 한 구멍이 적잖이 눈에 띄었었다. 작은 운석이 땅에 머리를 박아 생긴 산화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노상 같은 개미를 관찰하는 것보다 정체불명의 구멍을 파헤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미지의 존재는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개중 가장 크고 좋아 보이는 구멍을 하나 골라잡았다.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 똑같은 흙구덩이를 보고 어떻게 좋고 나쁨을 구별했는지 모를 일이긴 했다.
로보의 말마따나 우리가 너무 자란 나머지 어른이 되어 버려서 그때의 분별을 잃어버린 걸까? 그 다정한 남자가 더는 소라고둥에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것처럼.
구멍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결심한 후, 내 손에는 단단한 나뭇가지 하나가 따라붙었다. 나는 땅의 여묾을 확인하는 농부처럼 점찍은 구멍을 쿡쿡 쑤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반응 없던 구멍 주변의 흙이 언젠가부터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던 흙들이 점점 바깥으로 움텄다.
나는 마비된 것처럼 우뚝 섰다. 그러고는 나뭇가지를 세게 쥔 채 흥분에 찬 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발 달린 잎사귀나 거대한 과일 따위의 동화 속 존재들이 기어 나올 줄만 알았다. 하지만 머리를 치켜든 것은 요요함이 밤과 비견될 만한 흑사였다. 나는 피라미드 도굴꾼이 아니라 녀석의 집을 파괴하는 흉악범이었다.
흑사는 샛노란 눈으로 어린 침입자를 빤히 관찰하더니, 이내 관심을 거두곤 둥지를 지키듯 구멍 근처에서 어물거렸다. 천이 나부끼는 듯한 몸짓이 관능적이었다.
나는 어딘가에서 주워 읽은 이야기책 속 명칭을 가져다 대어 그걸 ‘구렁덩덩 신선비님’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하니 그 뱀은 그저 돌연변이 구렁이였다. 혹자는 검은 뱀을 영물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걸 알 리 없던 나이였다. 기다란 몸체가 재미있고 신기했을 뿐이다.
녀석은 나를 관찰하며 이따금 싯싯대는 소리만 냈고, 나는 흑사의 거처 옆 흙바닥에 친구 구렁이랍시고 기다란 지렁이 몇 마리를 끄적거렸다. 우리는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만났고, 내가 다시 부모님의 손에 들려 촌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우리는 평화로웠다. 흑사와 나 사이의 평화를 매만진 것은 무지함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몰랐고, 그래서 상대를 위협적이라고 느끼지도 않았다. 미지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만 상식 밖의 미지는 두려움조차 불식해 경이로움만을 남겼다.
말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그에 대한 것을 몰랐더라면, 나는 말룸을 ‘구렁덩덩 신선비님’처럼 여긴 채 그가 오랫동안 공들여 꾸민 낙원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조그마한 정보의 씨앗을 심장에 간직하면 그 정보가 덤불처럼 무성히 자라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의 어긋남은 이것이 근원이었다. 그렇게 된 이상 우호적인 관계 유지하려면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지의 상태에서 관계 진전을 위해 존재했을 수만 가지의 방법들이 모두 사라지고 ‘바른 정보 제공’이라는 한 가지 길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입김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숨을 잘게 나누어 쉬었다. 용암을 몽땅 분출해 죽어버린 화산처럼 속에 힘이 없었다.
내 품에 안긴 남빛 뱀은 움직이지 않았다. 땅꾼에게 사냥 당해 거죽만 남은 듯했다.
나는 양팔을 힘껏 벌려 커다랗고 단단한 몸뚱이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남자가 된 뱀이 고요히 숨을 내뱉었다.
그는 거처에 물이 차 땅 바깥으로 기어 나온 뱀처럼 표정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슬픔을 토해 낸 후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깊은 피곤뿐이었다.
“오필리아. 당신은 내 힘조차 두려워했죠. 제가 모든 걸 이야기하고 감정을 발산하거나 힘을 휘두르면 피하지 않을 자신 있나요?”
“안 그럴 거잖아요. 설령 그런다 해도 날 지키기 위해서 그럴 거잖아요. 당신은 날 좋아하니까.”
“정답이지만, 교활해요…….”
나는 이불을 끌어와 그의 몸체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화려한 벽 위 돌출된 주술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부지불식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말룸이 있는 곳은 빛이 추방된 들판이었고, 내가 있는 곳도 같아졌다.
말룸이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 말을 고른 후였다.
“시간을 주세요. 정리할 시간을. 난 아직 과거를 꺼내 놓기가 두렵고, 그 끔찍했던 시간을 다시 반추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내가 뱀이라는 것, 그러나 당신을 결코 해치지 않을 거란 거. 지금은 이거 하나로 만족해주세요, 제발…… 이름 모를 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촉 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럼 말룸, 당장은 뭘 하고 싶어요?”
살살 그의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머리끈을 조심히 조여 짙푸른 밤 끝에 단단히 매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린 내가 처음 머리 묶기에 도전했을 때처럼 조심스럽고 진중했다. 소원 쪽지를 나무에 매다는 것과 비슷한 애틋함이었다.
낡고 지친 목소리가 잔잔히 내려앉았다.
“……잠을 자고 싶어요. 그리고 한 모금이라도, 설령 흙탕물이라도 좋으니 약간의 물과 음식을 먹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이파리 없는 나무처럼 척박했다.
“눈치채고 있겠지만, 저는 잠을 자지 못해 끝없는 피로를 느끼고, 물과 음식을 먹지 못해 갈증과 공복에 시달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찰흙 맛이 나서 입안에 넣고 굴릴 수도 없죠. 영생에 대한 대가이니 거스를 뜻은 없어요. 하지만…….”
말룸은 꿈에 잠긴 사람처럼 몽롱하게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당신이 품어주고 있는데도, 저는 이성에 의지하지 않으면 본능에 사무쳐 그것만을 갈망하게 됩니다. 뭐든 배 속에 집어넣고, 실컷 잠을 자고 싶어지고 말아요. 그렇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저는 완벽해졌는걸요. 더는 아프지도 않고, 괴롭힐 당할 일도 없죠. 불변하는 황금의 수집품들을 잔뜩 모을 수도 있고,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강한 힘도 있고…….”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말룸은 자신이 완벽하다 이야기했지만, 조금 전만 해도 완벽한 인간 남편이 되고 싶었다며 울부짖었었다.
결핍의 골이 깊어 아득했다. 그 구덩이에 대고 비명을 지르면 꽉 막힌 것처럼 어두워 메아리조차 묵살될 듯했다.
“잘했어요. 그리고 고생 많았어요. 이 말 꼭 해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살아 있어서 기뻐요…….”
나는 이렇게 속삭여 주었다. 말룸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나 더 말해도 괜찮겠습니까?”
“좋아요. 뭐든지.”
말룸이 새벽녘의 바람처럼 희미한 웃음소리를 냈다. 소리가 울음과 섞여 기이했다.
그는 아직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던 나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어둠에 적응된 눈이 말룸의 이목구비를 식별하려 허공을 짚었다. 하지만 물길로 엉망이 된 얼굴색을 볼 수는 없었다.
그가 내 곁에 가만히 누웠다. 내 몸을 끌어안지도 않았고, 전처럼 정을 나누겠다고 달려들지도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고요에 젖어 있었다.
“이전에, 심장에 주술을 심는 과정에 잠시 앓았을 때. 당신이 자장가를 불러 주었잖아요. 꼭 잠을 자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기뻤던 것 같습니다.”
심장에 주술을 심었다니? 당신의 심장은 이미 의미가 사라진 부산물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말룸은 심장과 관련해 숱한 감상을 내놓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그냥 어두운 천장만 멀거니 바라봤다.
말룸이 손가락을 얽어 왔다. 나는 그걸 감싸 안듯이 잡아주었다.
“괜찮다면, 저번처럼 자장가 불러줄래요?”
“제가 잠들거나 아는 노래가 떨어질 때까지라면요.”
곤란한 부탁이다. 노래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잘 부르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노래를 그에게 불러주었을 때부터 나는 마음을 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어설픈 가락이 입술로부터 흘러나왔다. 상품 가치가 없는 도자기처럼 엉성하고 가끔은 가사도 틀려 의미가 불분명했다.
이 행위가 말룸을 잠들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룸은 마치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서 힘을 풀곤 얕게, 그리고 때로는 깊게 호흡했다.
말룸이 괴상한 노랫가락에 의지해 까마득한 과거 누렸을 잠의 조각을 더듬었다.
나는 뱀이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을 목격한 듯 신비에 감겨들었다.
바람이 매섭다. 벌써 단풍이 다 졌다. 이곳의 시간은 참 빨리 흘렀다. 잡을 수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어 소중했다.
의상을 책임지는 모아가 특히 바빠졌다. 모아는 해가 서산으로 지기 시작할 때 하나 둘 두꺼운 의상을 추가했다가, 그나마 햇살이 내비치는 따뜻한 아침이 오면 슬쩍 덜어냈다.
나는 목발을 짚고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사랑을 볼모로 잡아 도움을 받고 싶진 않았다.
마냥 반대할 줄만 알았던 말룸은 나를 존중해주었다. 대신 움직일 때 누군가와 동행하도록 못을 박았다.
다른 이들도 나를 많이 배려해주었다. 로보는 항해 도중 꼬리지느러미 내지는 다리를 다친 적이 있다며 목발 잘 짚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리 경은 병아리 대하듯 주변을 은근히 맴돌았다. 크로노는 내가 목발을 종용할 것을 미리 보았는지 작은 키에 꼭 맞는 목발을 구해다 주었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이들은 이성적이었고 강압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화로 앞에 앉은 조난자처럼 깊이 편안해졌다.
모퉁이에서 크로노와 마주쳤다. 반가움에 목소리가 반음쯤 높이 올라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크로노. 이제 밖에 나가면 입김까지 나와요!”
“겨울이 한창이오……. 그리고 오필리아 님은 펭귄 같소. 조만간 감기에 걸릴 것이니 조금 더 단단히 입는 것이 좋겠지…….”
“저 감기 걸려요? 예언으로 본 모양이네요.”
크로노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작게 대꾸했다.
“아니, 농담이오. 농담을 하면…… 상대와 친해질 수 있다고 해서. 싫다면 하지 않겠소.”
“싫다뇨, 너무 좋아요. 완벽한 농담이었어요!”
훌쩍 자란 아이를 보는 기분이다. 감격해서 외치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크로노는 이제 농담도 던질 줄 알게 되었다. 제대로 된 농담이 아닐지라도 농담을 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크로노는 수정궁에서 만났던 때보다 하는 말에 자신감도 부쩍 붙었다. 유폐에서 해방되고 로보와 얼굴을 맞댄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내 의견으로 우리는 연회장 식당에 모여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일전에는 각자의 방에서 따로 먹는 편이었다.
모이도록 한 이들은 라딘라티와 관련된 자들로, 렉스 님, 리 경, 로보, 크로노모르테, 말룸, 그리고 나였다.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 이 부탁이 껄끄러웠을 텐데도 그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맨 처음 식당에 모였을 때, 나는 라딘라티와 말룸에 대해 모두 알고 있으니 날 배제하지 말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이미 짐작했다는 양 조용히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는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라 사건의 당사자이지만 도움이 되질 않았다. 나는 타인의 호의에 온전히 기대고 있었다.
“아침부터 애정행각이라니.”
리 경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무슨 상관이죠?”
내 손등을 어루만지던 말룸이 뾰족하게 응대했다.
말룸은 식사를 하지 못했지만 항상 나와 함께했다. 그가 한 손으로 베이컨을 돌돌 말아 내 그릇에 덜어주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펜을 놀리며 업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여태 몰랐던 것이 있다면 말룸이 양손잡이라는 점이었다. 원래는 오른손잡이였는데 동시에 일을 처리하고 싶어 긴 세월 연습해 왼손까지 잘 쓰게 되었다고 했다.
“적어도 서류 처리는 집무실에서 해라. 음식물이라도 떨어지면 가만있지 않을 거면서.”
“시간이 아깝습니다. 그리고 제가 서류에 음식물 같은 걸 떨어트릴 얼뜨기로 보이나요?”
“……아주 기고만장해졌군.”
리 경이 소태 씹은 낯을 했다. 아침 훈련을 마친 후 샤워까지 끝냈는지 차림새가 가벼웠다.
그는 여전히 나를 ‘그쪽’이라는 삭막한 호칭으로 불렀지만 이전처럼 무관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인세티아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리 경은 아침 식사를 하게 된 이후 누구에게든 존대를 그만두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같잖은 존대를 집어치워서’ 아주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그는 짐작했던 것보다 말투가 거칠었다.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알렉산더.”
말룸이 말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지금껏 어떻게 숨기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납게 일갈했다.
“꼴 보기 싫으면 당신이 나가요.”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버리니 속이 다 시원하군. 혼잣말하듯 덧붙인 말룸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는 그저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노를 참지 못한 리 경이 빵 바구니를 말룸에게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말룸은 그것을 그대로 맞아주었는데, 그는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말룸, 속내를 숨기지 말라는 당부가 리 경의 신경을 긁어 놓으라는 뜻은 아니었는데요…….”
막 단어를 조합하기 시작한 아이가 말하기 연습을 하는 것처럼 요즘 말룸에게는 좋을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저 사람 나름대로 마음을 열고 있는 것도 같은데, 긍정적인 변화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