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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46화 (46/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46화

말룸은 어떤 생애를 살았을까?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어서, 삶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다른 이들을 해치면서까지 불사를 원하는 걸까.

숲에서의 대화로 알았다. 모두 각각의 애로사항을 안고 표류물처럼 살았다.

바닷물에 푹 젖은 몸을 말리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었다. 로보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급한 일이 아닌 이상 당장 결정하지 않는다고 했고, 크로노는 말을 타고 궁을 몰래 빠져나와 초원을 질주했다. 나는 온종일 잠을 자거나 디저트를 한계까지 먹는 버릇이 있었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견디는 법을 터득해 버티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룸은? 그는 대체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버티고 있을까?

내가 본 말룸은 영생을 얻었다 해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행복을 위해 정체불명의 내게 매달리기나 하고 있으니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사를 누림으로써 인간이 누리는 평범함을 먼저 버린 쪽은 다름 아닌 말룸이었다.

그는 평범한 행복 하나만을 위해 자신을 껍질 속에 가두었다. 값비싼 수집품을 모으면서, 권력을 끌어 모아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좋은 신랑인 척 연기해 신부를 꾀어 잡아먹으면서 자신 아닌 것처럼 살았다. 삶에 대한 집착이 비정상적이었다. 나는 그가 갈망하는 평범한 행복이라는 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도 정의내릴 수 없었다.

몇 달을 지켜봐 알았다. 그는 천성이 예민했고 날카로웠다.

말룸은 잠을 자지 못해 비는 시간을 모두 일에 쏟아 부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모도 감당했다. 그러면서 나를 제외한 타인과 접촉하는 것은 참아낼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워했다. 그는 혼자 살아가는 것에 거리낌이나 애로사항도 없어 관계 맺는 것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또 말룸은 미움 받으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못된 말만 골라 했다. 그가 내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 거짓말 같을 정도였다.

‘그런 주제에 다정하게 굴고 말이야. 사람 헷갈리게…….’

나는 ‘오필리아’가 아닌 날 원한다고 호소하던 말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털어 놓을 뜻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매사 한 발자국 물러서 겁쟁이가 되었다.

웨스턴우드 휴양림에서 돌아온 후, 나는 말룸과 며칠째 실랑이 중이었다. 은근슬쩍 비밀을 털어놓을 것을 종용하는 나와, 그 주제가 등장하면 서둘러 자리를 피해 버리는 그.

크로노를 닮은 것도 아니고.

더운 숨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금색의 머리칼과 무지개를 닮은 색색의 자수 실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실이 나부끼는 바람에 테이블이 엉망이었다.

요즘 나는 로보에게 실팔찌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상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 적당한 단순노동이었다. 로보가 크로노에게도 몇 번 권유한 모양인데, 어떻게 회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로노까지 실 엮기에 동참했다.

우리는 삼 일에 한 번 티타임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팔찌를 만들었다. 가장 잘 하는 것은 역시 강의를 주도하는 로보였고, 다음은 크로노, 제일 꼴찌는 나였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지 맞나 봐줄래요, 크로노?”

크로노가 내 실팔찌를 살짝 들여다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는 도움을 청하듯 로보를 응시했지만 상대는 빙글뱅글 웃으며 무시로 일관했다.

크로노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물음을 목전에 둔 어린아이 같았다. 내 물음은 그가 답을 낼 수 없는 물음이었다.

크로노의 눈동자가 길을 잃고 방황했다.

“음, 그렇게 엉망인가요?”

그는 비를 피하는 동물처럼 하늘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크로노의 저음이 살짝 떨렸다.

“오필리아 님. 실의 위치를 세 칸이 아니라 두 칸씩 번갈아 놓아야 하오……. 그리고 꽃무늬는 오필리아 님께 무리인 듯 보이는데…….”

“잘 보면 꽃처럼 보이지 않나요?”

“아…… 잘 보니 그런 것도 같소. 하지만 아주 잘 보아야만 하오…….”

어물어물 답한 크로노가 자기 몫의 자수실에 집중했다. 로보는 벌써 하나를 다 만들어 놓고 쿠키를 먹고 있었다.

열정이 회색 빛깔로 식었다. 관둘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러나 여태 내 곁을 지켜 준 셋 모두에게 실팔찌를 선물하고 싶었다. 사람 마음을 담아 놓으면 조금의 운이나마 따라 주지 않을까 하는 미신에서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기는 했다.

시간벌이.

오늘 말룸은 갑작스럽게 신방을 새로 꾸몄다면서 이쯤 합방해야 하지 않겠냐고 은근히 물었다. 잠깐 시간을 내 인테리어만 살펴도 괜찮다며 덫을 놓기까지 했다.

말을 전한 것도 본인이 아니라 유려한 필체로 작성된 편지였다. 면전에서 이야기하면 곧장 거절할 것을 알았던 듯했다. 어떻게든 자기 정체에서 관심을 돌리려 수를 쓰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다.

금색 머리칼과 엮인 남색 실을 노려보았다. 제일 못 만든 팔찌였고, 형상도 엉망이라 팔찌라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로보가 테이블의 유리 커버를 길쭉한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아가씨. 정말 갔다 올 셈이야? 단둘이 뭘 하려고.”

“걸맞은 일을 하지 않을까요, 신방이니까. 물론 거절할 거예요. 그럴 기분도 아니고, 목적이 빤히 보이는데.”

“흐음…….”

“그냥 팔찌나 더 만들래요. 팔찌 만든다는 핑계로 안 가면 납득하지 않겠어요? 수공예품은 밤새도록 집중해야 번듯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거니까.”

그러자 크로노가 몽롱한 듯한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숙부가 길길이 날뛰는 미래가 스쳐 지나갔소……. 그러다 세상살이에 관심 없는 엘프와 전투를 하는데, 결국 성이 무너지고 말 것이오. 그럼 모든 것이 끝이지.”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미래가 닥치는 건가요? 신방에 가지 않겠다는 건 저인데 왜 리 경과 말룸이 싸우는 결말로 끝나는 거예요.”

“나는 알 수 없소……. 오필리아 님의 미래는 워낙 두루뭉술해서 이것밖에 보이질 않소. 하지만 가는 편이 오필리아 님께 도움이 될 것이오…….”

그가 몽롱하게 덧붙였다. 수정 같은 눈동자가 허공을 배회했다.

“인어와 내게는 해독이 불가한 독이 되겠지……. 하지만 어차피 오필리아 님은 우리를 내치지 못할 것이고, 처음부터 당신의 애정은 기한부였소…….”

크로노의 예언은 대체로 들어맞는 편인 듯싶었지만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은 여전했다.

저만이 알 미래를 풀어 놓은 예언자가 다시 야무지게 팔찌를 엮기 시작했다. 로보를 살폈지만 그는 새로운 자수실을 꺼낼 뿐 주석을 덧붙이지 않았다.

결국 일이 닥친 사람은 나였다. 긴장으로 속이 오그라들어 울렁거렸다. 크로노도 로보도 내게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반응이라면, 말룸의 행동을 좁쌀만큼도 경계하고 있지 않다는 뜻인 걸까?

확실히 요새 말룸이 거는 수작질은 내 취향이 아니긴 했다. 그는 수작이란 수작을 다 부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하필 꽃다발을 사다 바친다든지, 귓가에 속삭인다든지 하는 빤하고 이상한 수작들이었다.

요즘은 티샤까지 합세해 둘이 작당 모의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나 티샤도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로보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말룸을 좋아하지 않는 그가 봐도 퍽 우스웠던 듯했다.

“구닥다리 시절 작업을 걸고 있는데, 오래 묵은 티가 나서 방해할 기분도 안 들어. 불쌍하기까지 할 지경이야. 연애를 책으로 배웠나? ……아니다, 그 성격에 무슨 연애야. 하여튼 그 티샤 씨도 좀 고지식한 것 같은데, 적당히 상대해 줘, 아가씨. 울리지는 말고.”

로보가 밉지 않게 덧붙였다.

“팔찌 더 만들 거야? 내 걸 가장 먼저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잔뜩 꼬이고 이지러진 실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당신 걸 가장 먼저 만들고 있긴 한데, 완성 못 할 것 같아요. 실팔찌가 아니라 실뭉치 꼴이 났거든요.”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른 녀석들 건 내가 만들어줄까? 특히 지렁이 녀석에게 줄 팔찌 말이야, 아주 멋들어지게 만들 자신 있는데.”

로보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것마저 거절했다. 말룸의 팔찌에 저주를 걸면 걸었지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고요한 밤.

실팔찌 엮기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실타래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창문 틈으로 부엉이인지 올빼미인지 이름 모를 새소리가 강물처럼 흘러들어왔다. 이 야밤에 말룸의 방으로 가는 어두침침한 복도를 지날 줄은 몰랐다.

아이바르가 나를 부축해 이동을 도왔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거의 기듯이 움직였다.

적막한 복도는 중세 시대의 갑옷이나 괴상망측한 가면처럼 수상한 사치품들이 즐비해 으스스했다. 그래도 이전처럼 검이나 창 같은 날붙이가 걸려 있지는 않았다. 말룸이 잊지 않고 치워둔 듯했다.

“저희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대공 전하의 수집품에 저주가 걸려 있다는 소문이 돌아요…….”

“응? 저주?”

아이바르의 가녀린 어깨가 잘게 떨렸다.

“수집품들이 하나같이 멸망한 왕국의 유물이거나 죽은 사람의 값비싼 유품이래요. 물론 소문이지만요. 죄송합니다……. 괜한 이야기를…….”

“아냐, 나 무서운 이야기 좋아해.”

그래도 소녀의 얼굴은 도저히 펴질 줄을 몰랐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미로를 헤쳐 신방 앞에 닿았다. 아이바르가 수집품이 튀어나올 때마다 숨을 멈추는 소리를 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저냥 예뻐 보였는데, 아이바르에게는 섬뜩하게 다가온 듯했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었다.

뿔 달린 뱀의 형상이 조각된 고풍스러운 문 앞. 말룸이 있었다.

“오필리아. 좋은 밤이에요.”

그리고 나는 곧장 그의 면전에 대고 기함했다.

“말룸!”

말룸은 의복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외설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저것도 유혹이랍시고, 속이 다 드러나 보이도록 얇은 상의는 벗겨질 듯 하늘거렸다. 바다를 유영하는 해파리의 외피 같았다…….

뚜렷한 형상을 지닌 복근과 흉근이 희미한 불빛에 기대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옷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던 사내의 잘 여문 몸이 매끄럽게 시야를 희롱했다.

핏기가 가셨다. 도움을 청하는 시선으로 아이바르를 찾았지만 그 아이는 질겁해 몸을 물리고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나는 평소 말룸의 금욕적인 복장과 지금의 외설적인 복장 사이에 일치점을 찾으려다 실패했다. 자극이 심한 데다 목적까지 뚜렷해 당황스러웠다.

내 반응에서 대체 어떤 결과를 산출했는지 말룸이 가까워졌다. 몸짓이 자연스럽고 막힘없는 것이 과연 뱀과 같았다. 사내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나는 그가 저렇게 웃을 때마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요즘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그러니 오늘 밤은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그렇게 해줄 거죠?”

“저기요……. 일단 그 옷을요, 어떻게 해보지 않을래요?”

“‘저기요’라뇨. 당신 말버릇인 것 같은데, 귀엽긴 하지만 친근하게 불러 줘요. 단둘이 있는 건 오랜만이잖아요. 응?”

온몸이 불이라도 난 것처럼 달아올랐다. 말룸은 만족스러운 듯 배부른 표정으로 내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접촉을 차단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방패를 두르는 행위였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정신을 집중했다. 달빛 아래에 있는 말룸은 교교한 신상처럼 아름다웠다. 일이 수틀리면 그라는 파도에 휩쓸려 형체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게 지금 무슨 꼴이에요?”

“뭐가 문제죠? 잠옷에 불과한데.”

말룸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인간의 마음을 술렁이게 하는 보석처럼 요사스러웠다.

“잠옷? 변명도 그런…… 매번 그렇게 다 벗은 것처럼 입고 자진 않을 거 아니에요. 불면증도 심하다면서요!”

“전 옷 안 입는 편이 잠을 잘 잡니다. 불면증 치료에 아주 좋더군요.”

잠도 못 자는 사람이 변명은 아주 청산유수였다. 그가 먹이를 유인하듯 날 신방 안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뒤로 밀려가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보다, 바지. 바지는 입었나?’

살짝 시선을 내려 바지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말룸은 정상적인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바지까지 저런 걸레조각을 입고 마중했더라면 망설임 없이 뺨을 때렸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을 쳐 치안대에 신고했겠지.

우린 형식적 부부란 말이다. 아무리 사이의 기류가 이상하다지만!

그나저나, 밤이 한창이라 꽤 쌀쌀한 시간인데 저렇게 입으면 감기 걸리진 않을까? ……아니다, 말룸은 괴물 뱀이니 감기에 걸릴 리 없었다. 그는 분화구에 뛰어들어도 다치지 않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오필리아, 제게 집중해요. 당신은 물에 비친 달보다도 아름다워서, 수면에 파문이 일 때 흩어져 버릴까 두려워…….”

내가 패닉에 빠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서도 그는 착실히 날 침대 근처로 몰아넣었다. 이제 침대까지는 거의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아무리 그가 식인 뱀이어도 지금의 목적이 먹이 감별이 아니라는 건 명확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서 버티고 섰다. 말룸은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슬쩍 눈을 뜨자 바로 보이는 뱀의 퇴폐적인 웃음에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어……. 달은 내가 아니라 당신인 걸.’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로보와 크로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내가 말룸의 외모에 아주 많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그가 거는 이상하고 유치한 구식 유혹을 묵과해버리고 말 정도로…….

이전에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외면할 수 있었지만, 말룸이 내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 확실시된 지금은…….

나는 거의 외치듯 말했다. 최후의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잠시만,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물론 우리가 부부이긴 하지만 순서란 게 있잖아요!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고요.”

“괜찮아요, 이름 모를 분. 긴장 풀어요.”

그가 나를 부드럽게 덮쳐 뒤로 넘어뜨렸다. 몸이 속절없이 밀려갔고, 등 뒤로 부드러운 킹사이즈 침대 결이 느껴졌다. 보석 같은 사내의 면면이 손가락 하나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말룸이 내 귓가로 제 붉은 입술을 가져갔다. 속살거리는 중저음이 얄미웠다.

“즐겁게 해주려는 겁니다. 다 잊고 제게 맡길 수 있도록. 누군가와의 접촉은 물론 정을 나누는 행위는 혐오스럽다고, 지금껏 그렇게 여겨 왔습니다만…….”

“아…….”

내가 들어도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어요. 그렇죠?”

나는 그에게 밀려 침대에 쓰러진 채로, 말룸은 자연스럽게 내 위에 올라탄 채로. 우리는 그렇게 시선을 교환하며 있었다. 천장의 요요한 등불마저 말룸을 위해 마련된 것 같았다.

“오필리아. 당신에게는 닿아도 괜찮다는 말…… 그 이유를 이제는 알고 있나요?”

말룸이 유혹적으로 다가왔던 이전과는 달리 영 쑥스럽고 멋쩍다는 양 엷게 미소 지었다.

영롱한 황금빛 눈동자, 태양보다 찬란하고 밤중 피어난 봉화처럼 맑은 그 눈동자가 문제였다.

마른침이 목 뒤로 꺼슬꺼슬하게 넘어갔다.

말룸은 밤하늘 달이 지상으로 내려와 만들어졌다. 나는 달에게 이끌려 눈이 먼 가난한 천문학자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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