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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44화 (44/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44화

오늘 바깥이 쌀쌀하단다.

야단 떨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다들 내가 두껍게 차려입지 않으면 동행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잠자코 따르는 것이 나을 듯했다.

크로노는 치장 준비를 할 사용인을 불러 모으라고 언질했다. 그가 나를 안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하명하는 모양새가 매끄럽고 어색함이 없었다. 나는 크로노가 유폐당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성장했을 시점의 모습을 찰나 엿봤다.

크로노가 꼭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성 안을 돌아다녔다. 나는 진흙 속 진주를 마주한 것처럼 놀랐다. 그의 말로는, 수정궁 깊은 곳이 티포주 성 못지않게 복잡한 데다 성에 도착한 첫째 날 귀찮은 일이 없도록 말룸이 준 지도를 외워 놓았다는데……. 로보와 내가 그 기억력에 혀를 내둘렀다. 크로노는 특별한 감상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크로노는 나를 안은 채로, 로보는 그 옆을 툴툴거리며 따르는 채였다. 크로노는 말룸과 로보보다도 키가 컸기 때문에 이동 속도도 빨랐다.

길을 헤매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드레스 룸이 별세계처럼 화려했다. 샹들리에가 밝은 빛을 발했고, 엔틱 풍의 흰 옷장이 벽면을 장식했다. 안에는 값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의상들이 잘 정렬되어 있었다. 말룸은 레헬른에서 돌아와 바로 디자이너를 불렀는데, 키며 허리둘레며 발까지 치수를 재어 가더니 그새 옷을 채워 둔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비전하.”

티샤와 모아, 그리고 요즘 자주 보기 시작한 수습 사용인 아이바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바르는 오른다리가 불편한 내 생활을 보조해주는 아이였다. 옅은 밀색 머리칼이 소박하고 성격도 수줍어 괜히 언니처럼 굴고 싶었다.

그들이 날 발견하곤 서둘러 앞으로 나서다가, 나를 안고 있는 크로노와 멋쩍은 표정의 로보를 마주하곤 멈칫했다. 바깥으로 분출되어 급격히 식은 용암을 보는 것 같았다. 아이바르는 아예 티샤의 뒤로 숨어버렸다.

셋 모두 각자의 개성이 뚜렷했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크로노와 로보를 세세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점은 같았다. 잘 익은 과일을 감별하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로보가 주춤해서는 사용인 아가씨들에게 물었다.

“저기, 아가씨의 사용인들이죠? 오가며 보기는 했는데 이렇게 얘기하는 건 티샤 씨 빼고 처음이네. 반가워요, 늑대상어 일족의 로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랑 저 육지 황자를 보는 겁니까?”

“부디 말씀을 놓아주십시오.”

로보가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으음…… 그래서, 혹시 볼일 있어?”

셋은 그저 작위적인 미소를 빙그레 드리웠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미리 나눴는지 화원에 숨겨둔 보물을 논하는 모양새였다.

한편 크로노는 로보보다 당혹감이 더 심한 듯했다. 그는 날 의자에 앉히고 멀찍이 떨어져 드레스 룸 입구에 바짝 붙었다. 로보도 서서히 몸을 물리는 것이 크로노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둘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기를 원하는지 몹시 불편한 기색이었다.

크로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오필리아 님……. 바깥에서 기다리면, 안 되는 것이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잠시 기다려줄래요? 로보도요.”

“물론이야. 어서 나가는 게 좋겠어, 육지 황자. 여긴 아무래도 낯설어…….”

로보가 크로노의 팔목을 잡고 바깥으로 끌었다. 크로노는 저항하지 않았다. 전보다 로보를 편하게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공통적인 느낌을 받아 저렇게 된 것 같은데 원인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살펴도 셋은 무해한 데다 로보와 크로노 쪽이 몸집도 훨씬 컸다.

그러나 치장 도중 나는 왜 그 둘이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는지 알게 되었다. 치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서열을 정하셔야 합니다, 비전하.”

티샤가 머리칼에 향유를 발라 주며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 1순위는 대공 전하가 되셔야겠지요. 요즘 대공 전하께서 비전하께 굉장히 헌신적이신데, 다른 이에게 나누어진 사랑을 붙잡고 싶으신 것이 아닐까요. 주제넘은 말이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모아는 불퉁한 얼굴이었다.

“아이, 참! 티샤 님! 요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건 구닥다리라구요! 한 분은 이미 첩실로 내정되셨고, 나머지 한 분도 곧 그렇게 될 것 같으신데. 본부가 잘못하면 사랑에서 밀려나는 건 순식간이랍니다. 아무리 불타는 사랑을 했어도 다 과거의 일인 거죠!”

“저기. 과거의 일이라기엔 나 결혼한 지 몇 달도 안 지났어, 모아…….”

“그래도요, 주인님. 주인님께서는 누가 제일 좋으셔요? 저는 아무래도 유쾌하고 다정하신 로보 님이!”

“하하.”

나는 경련하듯 웃었다. 딱히 사랑이랄 걸 나눈 적도 없는데 답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첩실이라니. 모아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그게, 나는…….”

따지자면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쪽은 말룸이었지만 마음을 온전히 주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데다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쪽은 로보였고, 크로노모르테는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었다.

번개에 맞은 듯 머리칼이 쭈뼛 섰다. 허리케인 속에 빨려 들어가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혼잡한 애정전선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모르겠어. 난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벅차.”

나는 치장해주는 대로 빨랫감처럼 늘어졌다. 자괴감이 폭풍처럼 밀려들어 똑바로 서기 힘들었다.

티샤가 모아의 말이 못마땅했는지 딱딱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바르는 무엇을 상상했는지 수줍은 홍조를 띤 채 숄과 맞춤 신발을 골라 오고 있었다.

“대공 전하야말로 진정 비전하를 보호해주실 수 있는 분이다, 모아. 요즘 무척 바쁘신데 매일같이 비전하의 상처를 살펴 주시잖니.”

모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로보 님은 활기차시잖아요! 주인님과 딱 잘 어울려요. 주인님께서는 로보 님과 함께 계실 때 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리시는데, 그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겠어요? 아이바르! 너는 어때? 너도 로보 님이야? 아니면 큰 주인님?”

경청하던 아이바르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동백꽃처럼 새빨개져선 웅얼거렸다.

“저는, 그, 황자님께서…… 너무 외로워 보이시고, 오필리아 님께 많이 의지하시는 것 같아서…….”

모아가 아이바르의 등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역시 그런가! 황자님께서는 주인님 앞에서만 큰 강아지처럼 변하시니까. 하지만 너무 어렵고 까마득히 높은 분이라 난 잘 모르겠어. 말을 걸어도 답해주는 법이 없으시고, 목숨이 얼마 남았다는 무서운 예언까지……. 나는 앞으로 62년 남았대. 장수한다고 좋아해야 하는 걸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황자님의 예언은, 황자님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하는 장난 같은…… 그런…… 아, 아닌가요?”

나는 내 눈치를 보는 아이바르에 어깨를 으쓱했다. 크로노의 예언이 미치광이의 헛소리 취급당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보다는 그 예언, 나와 말룸에게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마주치는 모두에게 해주는 서비스 같은 거였나. 크로노는 어떻게든 사람들과 대화의 물꼬를 트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걸까?

생각에 잠기자 모아가 내 눈치를 살폈다. 사실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슬슬 대화에 빠져들어 가고 있던 찰나였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양 하품을 살짝 했다. 모아가 눈치 좋게 신호를 알아채고 계속 이야기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이바르가 아닌 내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투가 공손해졌다는 점이었다.

“황자 전하께서는 티포주 성이 낯서신 게 아닐까요? 평생 궁에서 지냈다고 하셨으니까요. 또, 큰 주인님께서는 황자님을 아예 경멸하시고, 로보 님과는 데면데면하고, 리 경과는 아예 접점이 없으시니까…… 그분께는 정말 주인님뿐일지도 몰라요.”

아이바르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밖에도 모아는 크로노모르테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를 속속들이 이야기했다. 크로노는 식사조차 방에서 따로 한다고 했다. 또 어쩌다 말룸과 마주치는 날에는 멸시에 가까운 폭언을 듣거나 무시당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나마 크로노를 기피하지 않는 이는 로보라는데, 로보는 대부분 나와 함께 있어 크로노모르테와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고민이 깊어만 갔다. 내게 매달리는 크로노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지력 탓에 유폐당해 줄곧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의 예언을 믿어준 최초의 사람이었고…….

크로노에게는 내가 유일했다.

단지 내 곁에 있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이들에게서 배척당하는 것이 합리화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말룸의 소유욕과 내게 향하는 특유의 다정은 사정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와 같아서, 두 사람 사이에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외출 준비가 끝난 후, 우리는 저택 현관에서 3분 정도 떨어진 큰 부지로 나왔다. 이 부지도 성벽 안에 있어서 크게 보면 티포주 성의 일부였다.

티샤는 이곳을 칭하기를 5번 부지라고 했는데, 땅덩어리에 이름 붙이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말룸의 성미가 묻어나 내심 재미있었다. 티샤는 이런 식으로 붙은 이름이 성 곳곳에 아주 많다고 했다.

이번에 나를 옮겨 준 이는 로보였다. 오른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이렇게 멋쩍고 불편할 줄은 몰랐다. 매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자니 면구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긴장 풀어, 아가씨. 지렁이 녀석이 다리 치료할 방법을 수소문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고생하자.”

“……만약 제가 로보였다면 버리고 갔을 걸요.”

“뭐? 아가씨, 내가 다리 다치면 버리고 갈 거야?”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아니라 저를 버리고 간다는 의미였어요.”

로보는 날 놀린 건지 양 볼을 기세 좋게 물들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팔짱을 끼는 식으로 불만을 표현했다.

“나도 같아. 아가씨를 두고 갈 리 없잖아. 그러니 조금 편해져 봐. 내가 누구 병수발 드는 건 아주 드문 일이라고.”

그럴 것 같긴 하다. 로보는 어느 한 곳에 매여 있는 것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로보의 너스레에 긴장이 탁 풀렸다.

가을 특유의 청량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기분이 상쾌했다. 배기가스나 각종 분출물로 점철된 지구의 공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축사는 거대하고 깔끔히 조형되어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일을 하는 사용인들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새삼 말룸이 큰 영지를 경영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잠을 자지 못하니 할 만한 것이 일밖에 없는 걸까?

“숲까지는 말을 타고 가야 해. 마차가 다닐 만큼 길이 좋지는 않다더라.”

로보가 흰색 암말을 골치 아프다는 듯 응시했다.

“곤란한 걸. 해마라면 타 본 적 있지만, 말은 영…….”

“해마를 탔다고요? 바다의, 그?”

“당연하지, 아틀란티스의 교통수단이니까. 교통수단으로 일하는 심해 해마종이 따로 있어. 그런데 말은 나랑 안 맞아. 육지 동물들은 인어를 기피하는 습성이 있거든.”

로보가 흰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가 이처럼 곤란해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순간 암말의 눈이 로보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이윽고 암말이 극도로 분노해 날뛰어대기 시작했다. 원수라도 만난 것 같았다.

나는 한껏 겁을 집어먹어 로보와 암말을 번갈아 응시했다. 로보는 이쪽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말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말이 앞발을 치켜들어 위협적으로 울었다. 그 후에는 로보를 받아버릴 듯 질주하기 시작했는데, 비명이 절로 나왔다.

“로보, 조심해요!”

“괜찮아! 이럴 줄 알았거든.”

로보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말의 질주를 피했다. 과연 전투가 익숙한 사람답게 움직임이 매끄러웠다.

“이 녀석도 날 태워야 한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인어가 싫어서 심술을 부리는 거지. ……정말, 가만히 있어! 나만 걸어갈 수는 없잖아, 응?”

“로보도 못하는 게 있었네요.”

신기하다는 듯 이야기하자 로보가 철없는 아이를 보듯 대꾸했다.

“저번부터 내가 완벽하다는 것처럼 말하는데, 나도 못하는 게 아주 많, 앗! 그래, 착하지! 미안, 내가 잘못했어!”

로보는 암말의 발에 채일 상황이 되자 급기야 말에게 사과를 했다. 웃으면 안 되는데, 그 모습 자체가 평화로워 자꾸 바람소리가 샜다.

암말은 크로노가 끼어든 후에야 겨우 진정했다. 나도, 로보도, 크로노도 모두 희게 질려 암말의 성질머리를 되새겼다. 로보가 휘파람 소리를 닮은 한숨 소리를 낸 다음 송골송골 빠져나온 진땀을 대강 훔쳤다.

“다시 말하는데, 난 육지 말과 안 맞아. 이 녀석들은 마차 끄는 건 괜찮아 하면서 날 등에 태우기만 하면 광견병 걸린 것처럼 날뛴단 말이지.”

로보가 양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숨을 골랐다. 곁에서 질린 기색으로 관망하던 크로노가 당황해 머뭇거렸다.

“당신…… 이대로도 괜찮겠소?”

암말은 크로노가 근처에 서자 거짓말처럼 온순해졌다. 로보는 암말을 샐쭉 노려보았다.

“응,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지. 오늘 참 체면 많이 구기네. 아가씨는 육지 황자의 말에 타는 게 낫겠어. 이 녀석 날 태우고 가다 날뛸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암말이 푸르릉 하고 투레질을 했다. 반드시 난동을 피우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로보와 함께 말을 타면 십중팔구 추락할 것이다. 멀쩡한 왼쪽 다리마저 다치게 둘 수는 없었다.

“부탁할게요, 크로노. 추락사하고 싶진 않거든요.”

나는 크로노를 응시했다. 몸은 착실히 로보와 암말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기꺼이 그럴 것이오. 이리로, 오필리아 님.”

그의 저음이 묵직했다. 크로노는 단단한 산맥처럼 뻗은 말의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검은 말도 그가 좋았는지 둘은 고요하게 어우러졌다. 그 모습이 한 폭의 명화처럼 우아했다.

크로노가 흑마의 콧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그러고는 말의 안장을 몇 번 점검하더니 괜찮겠다 싶었는지 나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크로노가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의 흑발에 햇살이 내려앉아 여러 빛깔로 반짝거렸다. 또다. 그는 항상 날 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기쁘다는 듯 행동했다. 크로노의 경애가 꽃잎처럼 내려앉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내게 자비로운 날이오…… 바람조차 호의적이지. 오필리아 님,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하고 있소. 쓸모를 다 할 수 있어 벅차오른다오…….”

“당신은 충분히 멋진 사람이에요. 쓸모로 세상을 따지면 버려지는 게 너무 많지 않겠어요? 게다가 그런 관점으로 주변을 보면 이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은 저인걸요.”

“오필리아 님은 쓸모없지 않소. 감히 신에게 그의 신도가 쓸모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지……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구심점임을 느끼고 있을 텐데.”

나는 그의 뜻을 바꿀 만한 단어를 말해주고 싶었지만 형언할 수 없어 그만두었다. 크로노는 항상 자신을 도구 취급했다. 망가진 정원을 보는 기분이었다.

“괜찮소, 긴장하지 않아도. 나는 말 타기에 익숙하니까……. 당신을 내 승마 실력이 책임지게 된 것이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체면이 서질 않지……. 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소. 그러니 긴장 풀고 내게 기대 의지하시오.”

크로노가 부드럽게 미소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크로노의 시선은 왜 이제껏 눈치채지 못했나 싶을 만큼 고풍스러웠고 단정했다.

그의 슬픔과 애처로움에 신경 쓰느라 염두에 두지 못했는데, 일상을 보내는 크로노는 처절하게 절박하지도, 불안정하지도 않아 꿈속에 사는 듯 평온했다.

차라리 신문을 펼쳐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등 뒤로 맞닿은 크로노의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나도 그의 감정에 전염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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