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41화
05. 눈 가리고 아웅
티포주 성, 세상의 화려한 것을 몽땅 넣어 만든 것 같은 내 방.
나는 때가 되었다는 듯 번쩍 눈을 떴다.
천장에 점점이 매달린 보석 결정들이 별을 닮았다. 사막 한복판에 누워 바라보는 밤하늘이 저만큼 화려할까? 언제 봐도 부담스러웠다. 성을 떠나기 전보다 사치스러워진 것 같았다.
손으로 시트를 짚어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팔에 힘이 풀렸고, 그 바람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으…….”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이제는 팔까지 문제였다. 아니, 팔뿐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엉망이었다.
성수로 다친 후 안 그래도 좋지 못했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몸을 되찾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약골이 되어 버리다니. 머리에 봉지를 뒤집어 쓴 것처럼 답답했다.
지구에서 나는 비쩍 마른 편이긴 했으나 키도 지금보다 컸고 강골이었다. 알게 모르게 함부로 할 수 없게끔 하는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들은 적도 있었다.
건강을 걱정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도로 침대에 누워 천장의 보석이나 헤아렸다. 저것들은 무생물이라 쇠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룸은 저 별과 같은 것들을 심장 삼아 노쇠한 영혼 대신 끼워 넣었을까?
하지만 늙음 없는 것은 어둠 속에서 빛나지 못한다. 다이아몬드보다 값비싼 열정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열정은 유한하기 때문에 만들어졌고, 사그라드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 있었다.
눈만 깜빡였다. 잠기운이 고요와 함께 다시 밀려들었다. 마차에서도 숙면, 돌아와서도 내내 숙면이었다. 나는 잠을 잘 때만큼은 평화로워졌다.
창밖에서 태양 줄기가 너울거렸다. 나는 멀거니 그것을 보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를 잃었다. 다리의 격통이 밀물처럼 사납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른다리를 감싸고 있던 이불을 멀리 던져 버렸다. 말이 되질 않았다, 이불을 덮고 있기만 해도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프다니. 약초를 충분히 받아 온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누구, 밖에 있나요? 약초물이 필요해요!”
나는 힘껏 사람을 불러 진통제를 찾았다. 그러는 중에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게끔 양쪽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말룸이 미리 언질을 해 두었는지 누군가 급히 약초 달인 물을 가지고 왔다. 익숙하면서도 정갈한 노크 세 번. 티샤였다.
티샤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창백했다. 내 비명을 들은 모양이었다. 쟁반을 쥔 티샤의 손이 작게 떨렸다. 투명한 유리잔도 그에 맞춰 잔잔히 흔들거렸다.
“티샤, 좋은 아침……. 오래간만이네.”
목소리가 힘없이 샜다. 입술도 다 갈라져 전쟁터에서 다친 군인처럼 보일 것이다. 몰골이 매우 좋지 않았던지 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는 티샤가 힘껏 말했다.
“다리를 다쳐 빨리 귀환하시게 되었다고 전해 듣기는 했지만, 정도가 심합니다!”
“음, 괜찮아. 많이 나아진 거야. 진통제가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붕대도 엉망이군요. 얼마나 아프실까…….”
오래간만에 만난 티샤가 반가웠지만 그 이상 대꾸할 틈이 없었다. 나는 컵을 잡아채 역한 맛이 풍기는 약초 물을 몽땅 털어 넣었다.
이 정체불명의 약초는 인체에 해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을 만큼 효과가 뛰어났다. 이런 것은 보통 마약성이라 해서 오래 복용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던데.
약초 물을 복용하자마자 순식간에 통증이 가라앉았다. 지구에서 이 약초로 사업을 하면 불티나게 팔릴 게 분명했다.
실없는 생각을 관두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진이 빠져 사지가 흐물흐물했다.
티샤는 할 말이 있는지 나를 흘끔거렸지만, 나는 티샤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목욕을 해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 내고 싶었다.
내가 끝내 그를 응시하지 않자, 티샤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양 인사를 하곤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다 생각이 미치는 곳이 있어 작게 한탄했다.
“아, 크로노.”
혹시 티샤는 크로노에 관해 묻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말룸은 황제를 협박하는 데 성공했고, 크로노는 우리와 함께 티포주 성에 닿았다.
듣기로는 수정 같은 백은색 눈과 수려한 생김새가 워낙 인상적이라 레시우스 제국에서 크로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앞으로는 모두가 크로노와 내 관계를 주시하겠고, 내가 다른 무고한 남자와 함께 있기만 해도 염문이 떠돌겠지.
그도 자신의 방을 배정받았을 것이다.
파리한 숨이 빠져나왔다.
크로노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나는 크로노를 정부나 첩과 같이 성적인 의미로 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말룸이나 크로노가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를 듯했다.
나를 잡아먹지 않겠다 확언하지 않는 이상 말룸과 완전히 사랑에 빠질 일은 없겠지만, 그건 말룸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크로노와의 일을 엮어 괜히 속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이 열쇠도 골치고.”
황금 열쇠가 아침나절 햇살을 받아 영롱히 빛났다. 벗어 두고 싶었지만 잃어버리면 곤란했다. 만질만질한 열쇠 표면이 차갑고 매서워 북풍을 닮았다.
열쇠를 만지작거리자 드는 상념이 많았다.
말룸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수도 레헬른을 함께 거닐었던 그의 다정함과 내가 무너졌을 때의 절박함이 저주를 남용했던 비정함과 교차되어 흑백 대비를 이루었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 몸에 대한 단서는 찾았을까. 아내가 유령이라니, 게다가 애초 결혼하고자 했던 여자도 아니었다니……. 안 그런 척해도 깊이 상처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마른침을 삼키고 살금살금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약효가 탁월했다. 다리에 감각이 없고 힘이 들어가지 않을 뿐, 특별히 아프거나 쑤시지 않았다.
흘끗 바라본 붕대는 거무스름해 흉했다. 나는 환부에서 시선을 피했다. 정강이부터 발등까지 이어진 붕대가 마뜩잖았다.
상처에 신경을 쓰고 있기보다는 말룸과 크로노를 찾아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얘기를 들어 보는 것이 낫겠다.
조심스럽게 왼발을 바닥에 디뎠을 무렵이었다.
“아가씨, 환자가 그러면 곤란해.”
세상에.
방문을 열고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온 이는 로보였다!
나는 너무 놀라고 기뻐 뻐끔거리기만 할 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간신히 소리를 내는가 싶었지만 실없는 웃음소리만이 덜컥 퍼졌다.
나는 소중한 것을 몇 만들지 않는 천성을 타고났다. 지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소중한 상대를 잃거나 그가 떠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정에 약해 내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처럼 꼬리를 흔들며 마중했다.
로보는 나를 완전히 길들였다. 내게서 떠났던 두 달 간의 시간이 오히려 그와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로보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부담스럽기만 하던 보석도 본래의 광채를 되찾았다. 다리의 상처도 그를 만나기 위한 시련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거머쥘 수 없을 것만 같던 행복과 환한 평화를 로보에게 주어 그가 대신 보관하도록 했다. 로보가 내 곁에 있는 한 나는 영근 벼처럼 영원히 풍요로울 수 있었다.
“로보! 도착해 있던 거예요? 항해는 어땠나요?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준 향주머니도 항상 가지고 다녔어요.”
“나도 아가씨를 만나서 정말 기뻐. 무척 그리웠거든! 그리고 항해 말이지, 키가 손에 잡히질 않아서 엉뚱한 곳으로 갈 뻔했지 뭐야. 좀 더 졸았다간 남극해에 닿지도 못했을 거야.”
“……정말이에요?”
“농담이지! 더할 나위 없이 순항했어.”
로보가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다 향기가 묻어나는 청량한 소리였다. 나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어 기운차게 로보의 곁을 맴돌았다.
다리가 아픈 것도, 골칫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도, 말룸과 크로노에 대한 상념도 모두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그의 살갗에 손을 대어 로보가 실존함을 확인하고 싶었다. 몸을 움트자 로보가 나를 말렸다.
“가만히, 괜찮아. 진정해. 아가씨가 내게 오지 않아도 내가 아가씨에게 갈 거야.”
로보가 나를 번쩍 안았다. 몸이 붕 뜨는 것이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마법 날개가 돋은 듯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말을 한 줄 알고 있을까? 그 말이 내게 얼마나 다정한 위로가 되었는지도 깨닫고 있을까?
“로보에게 가지 않아도, 로보가 내게 올 거라구요?”
“응.”
쉽고 간단히 떨어지는 긍정문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좀 전 일의 답례로 농담했다.
“고백하는 말 같아요. 제가 오해하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로보가 듣지 못한 척 딴청을 부렸다. 그러나 나를 안은 손힘이 순간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공들여 만든 기계 부품 하나가 빈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눈앞에서 한 사람의 담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았다. 장엄하고 황홀했으나 면구스러웠다. 속에 불길이 치솟았다. 화제를 돌리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 음, 저도 농담 좀 해봤어요. 무겁지는 않고요?”
“전혀. 이것 참, 앞으로 농담도 가려서 해야겠어.”
그가 나를 깊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심장 소리가 차츰 로보의 규칙적인 숨결과 섞였다. 나는 거짓말처럼 얌전해졌다. 목동을 만난 양이 온순해지는 것과 비슷했다.
로보는 아이를 어르는 것이 익숙한 듯했다. 거둬 키우다시피 했다는 동생들도 잘 돌보았겠지. 책임감이 강하고, 유머 있고 다정한데다 배려하는 것이 생활화 된 남자. 나는 이런 사람을 만나면 십중팔구 경애하게 되었다.
“못 본 사이 어리광이 늘었네. 나야 환영이지만 그래도 막 움직이면 안 돼. 조심해야 어서 낫지.”
“그런 거 말고요. 묻고 싶은 거 없어요?”
“없을 리가. 자, 그럼 우선 안부 인사부터. 잘 지냈어, 아가씨? 상태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로보가 곤란하다는 양 콧등을 살짝 찌푸렸다. 걱정은 이해하지만, 또 상처 이야기다. 말룸이며 로보며 나를 걷지도 못하는 병든 사슴 대하듯 하는 게 불만이었다.
부러 퉁퉁 부은 표정을 했다. 로보의 앞에만 서면 어린아이가 되었다. 투정을 부려도, 모든 것을 내보여도 괜찮은 사람. 내게 로보는 그런 존재였다.
“하하, 미안. 여기저기서 잔소리 들었을 텐데 너무 물고 늘어졌나?”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기쁜걸요. 저는 그동안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 예상 밖이지만 말룸이 순순하게 굴었거든요.”
“순순하게 굴었다고? 그 뱀 괴물이?”
로보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마저도 마음에 온기를 여러 방울 떨어트린 듯 기꺼웠다. 돌처럼 일그러졌던 표정이 절로 살살 폈다.
“아가씨, 솔직해져도 괜찮아. 정말 그자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겁을 주었다든가, 아가씨를 강제했다든가…….”
“그렇진 않았어요. 물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일이 있었지만, 전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또 로보가 와줬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치료비도 이쪽에서 내겠다고 할 계획이에요. 말룸이 고집부리겠지만 이건 제 독단이니 그 사람도 뭐라고 안 하겠죠.”
로보가 날 더욱 깊이 안았다. 나와 헤어져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한 건지 그는 나를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듯했다.
“혼자 둬서 미안해. 많이 불안했을 텐데……. 이젠 아가씨가 안전하겠다 싶어질 때까지 떨어질 일 없을 거야. 일정 같은 건 맘대로 조정할 수 있지.”
“선원 분들은요?”
“그 녀석들은 맘대로 하라고 해. 한 몇 주 정도는 포트에 정박하고, 다시 몇 주 정도는 떠돌아다니도록 둘 거야. 예전에도 몇 번 이랬어, 부선장이 유능해서 괜찮아.”
로보가 내 어깨에 이마를 댔다. 체온을 나누어주는 걸까? 나는 그의 위로 기어올라 비죽비죽 솟았던 걱정을 녹였다.
둥지를 찾듯 그의 품 안에 자리 잡았다. 근육이 나른하게 풀어졌고, 과한 긴장으로 얼었던 숨이 흩어졌다. 내가 차분해지자 로보가 천연덕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어쨌든 때 맞춰 와서 다행이다. 티샤라고 했나? 성을 돌아보는 도중 만났는데, 아가씨가 일어났다고 해서 와 본 거야. 내가 오지 않았으면 그냥 걸으려고 했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란 말이야.”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혼이 나면서도 나는 싱글벙글했다. 무지갯빛 비눗방울을 처음 보았던 때의 설렘이다. 로보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다른 이들은 짐작하지 못할 만큼이었다.
내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자꾸 웃음이 나요. 왜 이러지……. 다시 만나서 너무 기뻐요, 로보. 다시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로보가 못 말린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이 이 세상엔 참 많잖아요.”
구릿빛 피부, 실내이기 때문인지 선글라스를 벗어 두어 온전히 보이는 산홋빛 눈동자, 왼쪽 입술 밑에 자리한 작은 점 하나와, 바람을 형상화한 듯 자유분방한 흰 머리칼까지. 내가 알던 로보였다.
못 본 새 그는 더욱 다정하고 아름다워졌다. 그는 꼭 사람 정신을 홀려 물속으로 끌고 간다는 세이렌 같았다. 바다에서 유영하는 로보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익사하는 것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나는 그를 면밀히 살피곤 감상평을 주었다.
“피부가 더 그을린 것도 같아요.”
“뱃사람이 다 이렇지 뭐. 두 달 간의 긴 항해였으니까. 낯선가?”
“아뇨. 로보잖아요.”
로보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진심으로 한 소리였는데 너무 긍정하는 나머지 작위적으로 들린 듯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속이 잘게 울렸다. 로보의 반응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만큼은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밖에 가려고 했던 거지? 어디보자, 아가씨 상처 때문에 멀리는 못 가겠고…….”
로보가 나를 안아 든 채 방을 나섰다. 드디어 그 비싼 방에서의 탈출이었다. 복도 이곳저곳을 쓸거나 닦아내고 있는 사용인들의 눈치가 보였지만 신경 쓰는 이들이 없었다. 말룸이 언질을 주기라도 한 듯했다.
아무래도 영 부끄러웠다. 그래도 운반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로보의 품은 요람에 잠긴 듯 편안해서, 내가 평범한 상황 속 보통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짙은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의 목에 팔을 감자, 로보가 내 허리를 단단히 지탱했다. 그는 내게 있어서 등대였다. 낯선 곳에서 내 편을 들어준 최초의 사람, 나를 도와주겠다고 선언한 첫 번째 아군.
“아가씨. 날 만난 게 그렇게 좋아?”
로보가 눈을 내리접어 활짝 웃었다. 그가 그리는 초승달은 사람 정신을 남김없이 훔쳐 갈 만큼 매력적이었다.
내 영혼이 계속 변덕을 부리게끔 두었다. 나는 마구잡이로 두려움에 떨다가도 봄날 들판에 앉은 듯 우아해졌다.
“반겨주니까 아틀란티스까지 다녀 온 보람이 있네.”
그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를 거예요.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서 맘이 안 좋았는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나는 떠오르는 것이 있어 급히 덧붙였다.
“로보, 말룸을 만났나요? 그 사람이 성을 내진 않았어요? 아무래도 인어를 혐오하는 정도가 심해서…….”
“아까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러자 로보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자더러, 사람이라고…….”
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듣지 못했다.
“응? 잘 못 들었어요. 다시 말해줄래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로보가 파도처럼 미소했다.
“별 거 아냐. 그냥 추임새지. 어쨌든, 짐작하는 대로 날 환영하지 않았지만 나도 그자를 썩 좋아하진 않으니 피차일반이라고 해 둘게.”
로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룸이 품은 적의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는 뾰족한 가시를 갑옷처럼 두른 채 오랜 세월을 홀로 지냈을 테니까.
달 없는 밤하늘을 본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말룸을 생각하면 날 좋은 가을, 풍요로운 과수원에 열매도, 잎도 없는 황량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 듯 기분이 뻑적지근해졌다.
“나들이를 가면 발타사르 그놈이 길길이 날뛰겠지? 아픈 사람 내보냈다고. 차라리 내 방으로 가자. 어제 새로 받았어.”
로보의 걸음이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시가지에서는 나와 동행하느라 걸음을 늦추고 있었던 듯했다.
로보가 고압적인 분위기의 철갑옷이 전시된 모퉁이를 왼쪽으로 돌았다. 그러고는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낡은 참나무 문을 열어젖혔다. 방문을 여는 동안 그는 날 한 손으로 안고 있어야 했지만 버거워하지 않았다.
로보의 환영사가 심해 보물이라도 소개하듯 경쾌했다.
“인어 로보의 임시 거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가씨.”
나는 눈을 깜빡이면서까지 전체적으로 방 안을 훑었다. 어떻게든 반응을 되돌려주고 싶은데, 혀를 재촉해도 미사여구가 가물었다.
“어…… 로보, 그러니까.”
방 안은 놀랍도록 비어 있었다.
내용물이라고는 로보의 것으로 보이는 여행 가방 하나와 낡은 침대가 전부였다. 병간호하느라 들렀던 말룸의 방보다 더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