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40화 (40/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40화

저주받은 자 특유의 흉포함이 좌중을 압도했다.

렉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말룸 발타사르는 이성적인 척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는 먹잇감을 빼앗겨 무엇이든 분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뱀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의자 깊이 몸을 맡긴 채 고요히 호흡할 뿐이었다.

로보를 제외한 나머지는 산전수전을 겪으며 라딘라티 처단을 위해 동분서주해왔다. 괴물의 기질이 저렇게 발작하는 것도 자주 접한 일이었다.

말룸은 일이 수틀리면 저주를 휘두를 테지만 그가 아는 것이 적은 이상 당장 해를 끼칠 가능성은 낮았다.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음습함이 그가 정보를 놓치게 만들었다.

“일 돌아가는 모양에서 오물 냄새가 나는군.”

리 알렉산더, 엘로힘이 후광이 비치는 장궁을 사라지게 했다. 활을 이루었던 빛의 띠가 점점이 부서져 산화했다.

엘프는 꽃무릇 정원에 홀로 동떨어진 사람처럼 표정에 힘이 없었다. 남자가 술잔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단순히 닮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라딘라티가 동생의 시신을 이용해 말룸에게 접근하게끔 했다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트리아이나…… 어디까지 추락할 셈이냐.’

엘로힘이 눈을 감았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천장에 매달린 불빛이 엘프의 육신을 축축하게 덮었다. 그는 여동생이 검은 상어의 배 속으로 사라졌던 과거를 당장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의지를 잃은 듯 보였다.

엘프의 시선이 매끄러운 테이블을 향했다. 모든 사물은 정갈했다. 하지만 그 사물을 틔워낸 사람이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이 세계는 이미 한 번 멸망하고 다시 쌓아 올려졌다. 천 년 전. 정체불명의 이유로 우주룡이 세계를 버리고, 이어 신들이 떠나가면서 별은 차츰 붕괴했지. 신의 부재에 적응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먼 과거를 헤집었다.

“그 여파로 각종 재앙이 창궐했다. 가장 심한 것은 기후변화였어. 수인족들의 멤피스는 불타올랐고, 나의 엘드라코는 얼어버렸다. 레시암은 여름에는 불길이 치솟고, 겨울에는 혈관과 호흡을 얼게 만드는 혹한의 추위가 찾아왔지. 그 재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가 이례적이군.”

로보가 놀란 듯 저도 모르게 말했다.

“잠시만. 천 년 전이라면 트리아이나가 타락했을 시점과 얼추 들어맞네. 맞지?”

“트리아이나? 그자는 또 누구지?”

모르는 사정이 오가자 말룸이 인상을 구겼다. 심지어 초조함과 분노에 의태까지 거의 풀려가고 있었다. 동공은 세로로 쭉 찢어졌고, 검청색 비늘이 볼 위로 스멀스멀 드리워졌다.

로보가 혐오스럽다는 듯 뱀을 응시했다. 말룸은 당장 로보를 땅에 묻을 듯 탁상 가장자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네놈이 오필리아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흘린 것은 알고 있다. 무언가를 위해 아틀란티스에 다녀왔다는 것도.”

로보가 눈살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아가씨가 출신도 불분명한 괴물에게 시집을 갔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게다가 어떻게 네가 트리아이나에 대해 모를 수가 있어? 트리아이나가 라딘라티잖아! 나도 지워진 줄 알았던 그자의 이름을 알게 될 줄은 몰랐어. 하지만 넌 알고 있어야 했던 거 아니야?”

“그딴 것 관심 밖의 일이다. 나는 라딘라티만을 알아. 타인의 이름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지? 나와 무관한 것은 모래와 같다. 지금이야 상황이 달라졌지만…….”

말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다시 말을 계속했을 때, 말룸은 대기를 지배하는 폭군처럼 살기를 풀었다.

“그보다는, 정말 거슬리는군.”

로보의 머리 위로 말룸의 저주가 드리워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수많은 비수가 로보를 위협했다.

“너. 오필리아에게 대체 무슨 소릴 흘린 거지? 그 사람에게 내 정체를 이야기한 건가?”

로보가 턱을 괴곤 한숨을 쉬었다. 오필리아와 했던 대화는 숨기는 편이 나을 듯했다.

“아가씨는 아무것도 몰라. 재미있는 얘기나 전설 식으로 운을 떼보긴 했는데 안 믿더라고.”

“하지만 네놈은 아틀란티스에 다녀왔잖나.”

“남편이라는 상대가 영혼에 썩은 내를 풀풀 풍겨서 조사하러 간 것뿐이야. 라딘라티나 댁들 얘기는 전설로만 전해질 뿐이라서 나도 놀랐다고.”

말룸이 무어라 대거리하려 했지만 엘로힘이 둘의 설전을 끊었다.

“얘기 들을 거면 둘 다 입 다물어. 특히 말룸, 어릴 적 네놈을 살린 건 충분히 후회하고 있으니 신경 그만 긁도록……. 이제라도 끝장내 버리기 전에.”

엘로힘의 위협은 진심이었다. 말룸이 동생 잃은 오라비의 사나운 기세에 눌려 혀를 찼다.

문득 말룸은 침대에 죽은 듯 누워 있을 아내 생각으로 손끝이 찌르르 아팠다. 그는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엘로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엘프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어서 이 자리를 끝내고 제 여동생, 엄밀히 따지자면 포인세티아의 시신을 살피러 가고 싶었다. 왕은 그것만을 위해 불타버릴 것 같은 속을 억눌렀다.

“천 년 전, 너희들이 구세계라 칭하는 세계에는 엘프, 수인족, 인간, 인어 네 종족이 공존했다. 본래 이 행성은 태양신을 필두로 한 신들에 의해 보살펴졌고, 평화롭게 번영했지. 신은 행성에 순환을 내리기 위해 보다 상위의 존재인 우주룡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용은 엘드라코와 우리 엘프들을 만들어 행성 경영을 도왔다.”

엘로힘의 눈동자가 깊은 과거를 헤아렸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용이 떠나고, 뒤이어 신들마저 행성을 버렸지. 그 후 이어지는 재앙과 라딘라티에 대한 항쟁에서 그나마 종을 보존한 종족은 인어와 인간뿐이었다. 엘프와 수인족은 재앙에서 살아남았지만……. 라딘라티와 말룸 네놈으로 인해 소수만 남고 절멸했지.”

엘프는 라딘라티에게, 그리고 수인족은 말룸의 밀고로 라딘라티가 남은 이들을 습격하며 멸족이 이루어졌다.

뜻밖으로 인간의 피해가 적었던 이유는 라딘라티가 인간을 하찮게 생각해 언제든 말살할 수 있는 집단으로 여겨 남겨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멸망을 초래하는 저주받은 족속들이었다. 엘로힘은 말룸이 오필리아에게 집중하는 것도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엘프가 깊이 침잠했다. 감정을 다스리려 호흡할 때마다 그의 양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용과 연결된 나무, 신단수를 가장 앞에서 살피던 엘프의 왕이었다. 하지만 별이 절멸하고 재앙이 끓어올랐을 때, 나는 피해 입은 자들을 위해 구호 정책을 펴거나 검게 말라가는 신목을 보살피며 존속을 염원할 수밖에 없었다. 신단수가 없으면 엘프들도 없었고,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생각나지 않았지.”

그때 자신의 욕망을 제물 삼아 변절한 인어가 트리아이나였다.

축복받은 파도, 아틀란티스와 하이스트림의 트리아이나.

7할은 신이고, 3할은 인어로 이루어진 완벽한 생명체.

주의력을 잃지 않고 엘프의 말을 듣던 로보가 튀어 오르듯 놀랐다.

“7할이 신이라고? 인어보다는 신에 가깝단 말이야? 라딘라티가 조상님과 이부형제라는 건, 그럼 그 사람의 아버지가 신이라는 거야?”

엘로힘은 로보의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애매하게 뭉뚱그려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신이든 인어든, 트리아이나는 타락했다. 그것만이 중요한 거다. 그 남자는 인어 오천을 제물로 삼아 세계 수명과 자신을 연결했고, 행성은 7할이 신이었던 그자를 떠난 신을 대신할 존재로 받아들였지. 라딘라티는 아틀란티스에서부터 난동을 피워댔다. 트리톤이 군대를 꾸려 놈을 간신히 타르타로스에 밀어 넣었지만, 어떤 수를 쓴 건지 탈옥했어. 이후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엘로힘이 먼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회생했다. 그자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족의 군대와 왕족이 모였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당시 라딘라티는 지금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7할이 신으로 빚어진 존재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이들과 영혼의 격부터가 달랐다.

“어찌 되었든, 그 검은 인어가 신의 모조품으로 기능하며 행성이 안정되기까지의 시간을 번 셈인데, 이미 세계가 안정되었으니 현 시점에서 그자라는 쐐기는 필요하지 않아. 처치하기 적기인 셈이다.”

엘프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안정되었다고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더 나빠지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재앙이 봉합된다는 뜻은 아니다. 재앙을 안정시키는 건 신의 영역이야……. 하지만 녀석을 처단해야 함은 변함없다. 재앙과는 별개의 이야기지.”

한참 말이 없던 로보가 엘로힘의 말을 받았다.

“내가 무너진 제단 유적에서 읽어낸 것도 당신이 하는 얘기랑 같아. 하지만 전혀 몰랐어. 그자가 절반 이상……. 그것도 7할이나 신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 말이야. 그자는 해왕 트리톤의 이부 형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병에 걸려 있었다며?”

“뭐? 웃기는 소리. 병에 걸려 있던 것은 트리아이나가 아니라 트리톤이었다. 놈의 추락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타고난 병증마저 옮겨 놓았던 모양이군. 라딘라티를 물리친 2기 아틀란티스의 해왕을 그렇게까지 포장하고 싶었던 건가?”

엘로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깊은 증오에 몸서리치고 있었지만 발음과 안광만큼은 또렷했다.

“예나 지금이나 음침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군. 그자는 분명 7할이 신이었고, 병 따위는 평생 앓은 적 없이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평범한 인어가 사술을 부려 봤자 세계는 평범한 피조물을 신으로 착각할 만큼 허술하지 않아. 트리아이나는 태생부터 신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거다.”

엘로힘이 코웃음 쳤다.

로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따금 들리는 산새 소리가 그의 비늘에 흉터를 남겼다. 오필리아를 만나고, 이 자리에서 일종의 작당모의를 하는 것조차 주어진 운명인 듯 느껴졌다.

“한 가지만 더, 형씨. 이건 개인적인 일이야. 라딘라티가 트리톤의 혈족에게 저주를 내렸을 가능성이 있을까? 그 누구도 풀어낼 수 없을 법한, 피를 타고 내려오는 저주를.”

엘로힘이 턱을 괴었다.

“저주에 걸렸나?”

로보가 어색한 모양으로 미소했다.

“음…… 그게, 약간은.”

“저주에 약간 같은 건 없다, 애송아.”

엘로힘이 낮게 코웃음 쳤다.

“가능성 있는 소리이기는 하지. 네가 저주에 걸렸고 그 출처가 불분명하다면, 라딘라티를 가장 유력한 범인 후보로 두고 조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네가 원한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전제 하에.”

로보가 제 살갗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트리톤의 피를 가장 짙게 타고난, 차기 왕으로 거론되는 촉망받는 인어.

그런 것들은 허울에 불과했다.

원해서 해적 생활을 하는 게 아니다. 싫어서 왕위를 마다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다가 좋았지만, 폐쇄적인 아틀란티스를 바꾸고 인간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지만…….

로보가 한숨을 쉬었다.

트리톤에게 원한을 품은 라딘라티로부터 촉발된 저주라면 앞뒤 맥락이 맞았다. 힘이 빠졌다. 강풍 속에 우산을 드리우고 선 어린아이처럼 밟고 온 길과 밟고 가야 할 길 모두가 두려워졌다.

그간 로보는 자신이 태생 돌연변이인 줄만 알았다.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저주일 수 있다는 것도 선의 에녹스를 만나 우연히 알게 된 것이었다.

“하여튼 라딘라티가 탈옥했기 때문에 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거지? 아가씨의 안위와도 연관되어 있고. 뭐, 나도 그자에게 볼일이 생긴 셈이니 협력할 수 있겠어. 그게 아니더라도 아가씨를 도울 생각이었지만.”

로보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룸을 살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미심쩍었다. 세계 사정에 관심 없다던 말과는 달리 말룸은 라딘라티가 7할이 신이라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뱀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간 라딘라티가 트리아이나니 7할이 신이니 인어니 하는 것은 관심도 없었지만, 라딘라티가 신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오래 전부터, 심지어 그자를 직접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말룸은 그가 아직 인간이었을 적부터 라딘라티의 신위에 대해 모를 수 없던 처지였다.

때문에 말룸은 직접적으로 상처를 입혀 라딘라티를 처단하기보다는 세계와 그를 묶어낸 주술을 해제하려 수를 쓰고 있었다. 아무리 라딘라티가 신위를 버렸다지만 7할이나마 신의 피가 흐르는 자를 해치우기에는 말룸이라도 별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가로놓여 있었다.

뱀이 한숨을 쉬었다.

연회장 구석, 레시우스 양식으로 잘 꾸며진 조각상이 유독 서늘했다. 그 조각상은 노상 정면만 바라보게끔 만들어졌다. 말룸도 조각상처럼 앞길만을 갈망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지켜야 할 상대가 생겼으니 신중을 가해야 했다.

나의 오필리아……. 청록의 계수나무를 닮아 아름다움이 요란한 사람.

“네놈 붕어 자식들이 잘 관리하면 되었을 일 아닌가.”

로보가 어깨를 으쓱했다.

“천 년 전에 탈출한 걸 나더러 어쩌란 거야? 네가 그 증거잖아. 라딘라티의 힘을 받아 불사를 누리게 되어 놓고서……. 그것도 그자가 7할이 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누군가를 죽지 않게 만든다니, 아무리 괴물로 탈바꿈시킨대도 과하다고.”

로보가 쭉 기지개를 켰다.

“아가씨가 걱정이야.”

목소리가 새벽을 닮아 어슴푸레하게 깜빡거렸다. 인어의 형상 위로 덧씌워지는 망령에 엘로힘이 눈 위를 꾹 눌렀다.

그는 무척 정신이 없었다. 포인세티아고, 트리톤이고 뒤편으로 미뤄 두었던 이들의 형상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대에 밧줄 하나 없이 외발로 매달린 듯했다.

하지만 엘로힘은 내색하지 않았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아무리 신이라도 피조물에게 영생을 부여할 수 없다. 순리를 거스르는 일을 행하려면 크나큰 제약이 따르고, 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검은 용조차 행성 하나를 제물로 삼아야 하지. 그것을 제외하고 영생을 누리게끔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수많은 제물의 생명력을 모아 옮기는 것인데……. 라딘라티는 그렇게 사악한 주술을 부릴 만큼 타락한 거다.”

엘로힘이 말룸을 노려보았다.

“너는 몇의 생명을 제물로 삼아 뱀이 되었지?”

“……모릅니다. 그자는 그저 기적을 행하듯 단숨에 날 뱀으로 만들어줬어요.”

“가관이군.”

엘로힘의 잇새로 경멸이 빠져나왔다. 그는 말룸의 태생도, 자신의 인간성을 버린 그 악랄함도, 심지어 트리아이나를 쏙 빼닮은 그의 외모조차 증오하고 있었다.

세계를 지키고 온 종족을 아우르는 상냥한 왕이 되겠다고, 나와 그렇게 맹세를 나누지 않았었나.

왕 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참 벅차고 외롭다 호소했었잖나.

언젠가 이 세계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이름을 버리고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심장을 나누었잖나, 트리아이나…….

아직 그 상냥한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데, 그것마저 덮어 버릴 만큼 실망과 슬픔이 거셌다.

엘로힘이 깊은 과거를 유영하다 다시 증오의 불길을 푸르게 점화했다. 검은 상어의 이빨에 찢긴 일족의 비명이 마디마디 선명했다.

“어찌 되었든, 말룸. 너는 하루빨리 그자를 세계와 분리해라. 행성과 떼어놓지 않으면 놈을 결코 해치울 수 없어. 행성과 연결되어 있는 이상, 녀석은 행성의 생명력을 끝없이 빨아들일 수 있다. 여벌의 목숨 수만 개를 가지고 있는 셈이지.”

“말 안 해도 알고 있습니다. 방법도 찾고 있었죠. 하지만 쉽지 않더군요…….”

말룸이 눈 밑 광대를 힘없이 지분거렸다.

“그자의 사념체는 이상한 구석이 많아요. 신위를 잃어 천 년 전처럼 강하지 않을 텐데 형체가 흐트러지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고, 상처를 입어도 다시 회복됩니다. 육신을 썩게 만들었는데도 살아 있는 것만 같아요.”

“그건 네 몫이지. 네가 그자와 대적하길 선택했다면, 감당해야 하는 것.”

엘로힘은 말룸을 응대하지 않은 채 혼잣말하듯 이야기했다.

“탈출한 그자에 의해 엘프는 멸족했다. 격전 끝에 일어난 충돌로 라딘라티와 영혼이 얽혀 버린 나를 제외하고는……. 라딘라티가 죽으면 비로소 나도 죽겠지.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거다.”

쓸쓸한 목소리였다.

말룸과 렉스는 내심 놀라 탁상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멸망했다지만 그는 한 종족의 왕, 세월을 거치며 고귀함은 사라졌고 위엄은 깎여나갔지만 좀처럼 약점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었다.

“포인세티아는, 내 동생은.”

엘로힘이 집채만 한 검은 상어의 입안으로 사라진 여동생을 그렸다.

“그 애는 녀석에게 잡아먹혔다. 끝도 없이 거대한 괴물, 검은 상어에게.”

엘프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라딘라티와, 그에 대적했던 엘로힘과 포인세티아.

라딘라티는 어째서인지 바다 근처에서 급격히 힘을 잃었고, 자연히 격전지도 바닷가로 정해졌다. 말룸이 바다 근처의 티포주 성을 봉인지로 선택한 것도 그자가 바다와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힘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족의 생명이 메말라 포인세티아와 엘로힘만 살아남았을 무렵.

사흘 밤낮을 싸우다 보름달이 뜨던 날 밤, 백색의 해안 절벽에서 숨을 고르던 포인세티아는 바닷가에서 솟아난 검은 상어에게 통째로 집어 삼켜졌다.

손 쓸 틈도 없었다. 남은 것은 포인세티아의 손아귀에서 굴러 떨어진 백색 장궁뿐.

리 알렉산더는 그것을 동생의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슬픔에 사무쳐 포인세티아를 지키지 못한 백색 해안 절벽의 이름을 박탈한 것은 부가적인 일이었다.

“포인세티아는 라딘라티가 자신을 소화할 수 없게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저주를 걸었다. ‘그 누구도 내 시신을 양분으로 삼을 수 없으리라’……. 그게 이런 악재로 작용할 줄이야.”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포인세티아의 악에 받친 저주가, 분하다는 듯 바다 밑으로 사라지는 검은 상어의 긴 울음소리가.

라딘라티라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소화되지 않은 포인세티아의 시신을 이용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을 테다.

게다가 말룸은 라딘라티를 보며 자랐다. 그처럼 라딘라티와 닮은 개체는 전무후무했다.

무엇이든 관찰하길 즐겼던 라딘라티라면 말룸의 취향이나 행동 양식 정도는 꿰뚫고 있을 테니, 말룸이 어떤 소망을 갖고 어떤 여자를 선택할지 추산해 미끼를 던지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테다. 말룸은 상대가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연고 없는 여자와 혼인하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무슨 의도로.

라딘라티가 자신을 배신한 말룸을 해치기 위해 오필리아를 선택했다 해도 오필리아는 전투력이 없었다. 시체 위에 씐 혼은 약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말룸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긴장의 파도 속으로 가라앉았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헐떡였다.

말룸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라딘라티를 배신하고 성 어딘가에 봉인했다는 내용은 들어 봐야 별 도움도 안 되었다. 심지어 말룸은 로보와 크로노모르테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며 라딘라티가 봉인된 위치를 숨기기까지 했다.

결국 대화는 뚜렷한 소득 없이 끝났다. 라딘라티가 다른 행성의 영혼을 불러온 이유도, 오필리아의 다리를 고쳐낼 수 있는 방법도, 사념체만 남은 라딘라티를 처단할 수 있는 방법도 찾지 못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해 퍼즐 조각을 억지로 맞춰낸 것이 유일한 전리품이었다.

도중 말룸이 침묵하던 크로노모르테더러 미래에 대해 털어놓으라고 독촉했지만 황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말룸이 계약 내용과 다르다며 날뛰었음에도 황자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크로노모르테의 면면은 달빛을 받아 의문스럽고도 수척하게 주조되었다. 백색 눈동자가 먼 미래를 향해 항해하듯 몽롱했다.

황자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본인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었다. 예언자는 여전히 오필리아가 도망치는 미래만이 보인다고 할 뿐으로, 말룸의 속이 자작자작 타들어갔다.

이후 오가는 말은 없었다. 렉스는 한 마디도 내비추지 않고서 신전에 연락을 넣고자 생각할 뿐이었다. 결국 밤중 불러내었다며 신경질을 낸 엘로힘의 비명을 끝으로 야합은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영결식을 마친 산 자들이 우줄우줄 무덤을 빠져나갔다.

삶에 갇힌 말룸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앞으로 검은 마차가 질주해 오는 것만 같았다.

말룸은 한 십 분 동안은 광물처럼 있다가, 다음 십 분 간은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창문을 죄다 걸어 닫았다.

산새 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저것은 아주 요사스러워 기쁠 때 들으면 황홀하게 들렸고 두려울 때 들으면 섬뜩하게 들렸다.

오필리아. 저는 당신에게 얼마나 말해주어야 할까요?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것을 이야기함이 옳아요.

하지만…….

인간과 완전히 다른 내 모습을 보아도, 당신이 나를 남편으로 받아들여줄까요? 크로노모르테가 보았다는 당신이 도망치는 상황. 괜히 당신에게 내가 실은 뱀이라는 이야기를 해서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까요, 아니면 이런 위험 속으로 끌어들여 원망하게 될까요.

말룸은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달이 추락한 듯 온기 없는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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