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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39화 (39/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39화

「퍼즐」

향할 때는 둘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셋이다.

마차 안은 북극이 따로 없었다. 오필리아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택하는 바람에 오가는 말소리가 없었다.

크로노모르테가 생전 처음 타는 마차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마차 멀미는 상상 이상으로 사람을 지치게 했다.

말룸은 오필리아의 머리를 제 무릎에 누인 채 공들여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뱀의 입가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맺혔다. 숨길 수 없는 애정과 열기가 눈동자 속에 있었다.

심약하고도 평범한 사람……. 그러면서 제 능력의 한도를 벗어나는 상냥함을 지녔지.

말룸은 기꺼이 상대의 만용을 용인하기로 했다. 그저 대상이 오필리아이기 때문에 그랬다.

크로노모르테는, 자신들의 앞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저 예언자는 필요한 존재였다. 이전까지는 저자가 지껄이는 모든 예언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치부했지만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크로노모르테의 예언을 이용해 절명의 대비책을 강구해야 했다. 지금처럼 두루뭉술한 것이 아닌, 보다 자세한 예언이 필요했다.

뱀은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수치를 감내하더라도 골수까지 이용하는 천성을 타고났다. 황자도, 인어도, 말룸에게는 하늘 꼭대기에 뜬 태양을 손에 넣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말룸의 샛노란 눈동자는 초승달을 닮아 반쯤은 죽고 반쯤은 살아 반짝거렸다.

어차피 오필리아는 크로노모르테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기묘할 정도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으니까.

* * *

성이 발칵 뒤집혔다. 대공비가 인어를 데려왔을 때보다 더한 반응이었다.

기절한 듯 잠든 대공비와, 그를 애틋하게 안아 든 대공은 황도로 출발하기 전만 해도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좁쌀만큼도 존재하지 않던 연애 기류가 싹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검은 머리칼과 수정같이 빛나는 은백색 눈동자를 지닌 체격 큰 남자.

사용인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감히 짐작 가는 바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크로노모르테 3황자.

짧은 검은색 머리칼과 아예 멀어버린 것 같은 은백색 눈동자는 너무도 유명해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티샤가 기함했다. 다행히 유능한 사용인답게 입 밖으로 비명을 지르는 일은 없었지만, 잘게 떨리는 눈동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크로노모르테 3황자를 무시한 채 오필리아의 방을 향해 착실히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그를 뒤따르는 황자 역시 대공비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간혹 뒤척이는 오필리아를 살폈다. 심히 애틋하고 맹목적이었다.

티샤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러나 억측은 삼갔다.

짐작은 무례한 짓이었다. 일전에도 로보에 대해 오해를 해 폐를 끼친 적이 있어 더욱 조심스러웠다.

“없는 듯 살아라.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눈에 띄지 말도록.”

“…….”

“따라와. 네 능력 이상으로 협조해야 할 거다. 그것이 거래 조건이었으니까.”

오필리아를 손수 침대 위에 눕힌 후 대공이 한 말에, 눈치 빠른 티샤는 크로노모르테 황자가 어떤 위치로 딸려 왔는지 단번에 알아 버리고 말았다.

귀족의 생태는 꿰고 있었다. 크로노모르테 3황자가 대공비의 곁을 차지하게 된 듯했다. 지금은 어떤 공표도 없어 정부나 다름없었지만, 식이라도 작게나마 올리면 그는 정식 첩으로 등록되어 크로노모르테 발타사르, 즉 작은 대공이 될 것이다.

있을 수 없었다. 대공의 잔인한 성정은 유명했다. 그가 자신의 것에 보이는 비정상적인 집착과 소유욕도 자주 화두에 올랐다.

대공이 누그러지는 것은 오직 대공비의 앞에서였는데, 그런 그가 다른 이를 제 비의 곁에 용인하다니. 황자가 대공이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제시한 것일까?

티샤가 오필리아의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속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자신은 사용인에 불과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자비 없는 대공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티샤는 프로답게 인생의 방향을 정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티샤의 주인은 성이 얼마나 소란스러운지도 모르는 채 규칙적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새벽달이 떴다. 가을바람이 창문을 때리며 기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특정 인물에 한해 소집령이 내려졌다. 거부권은 없었다. 대공이 객식구를 용인하는 대가였다.

부름 받은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3층의 너른 회의장에 밀어 넣어졌다. 아틀란티스에서 돌아와 오필리아를 기다리고 있던 로보, 집사인 척 말룸과 협력하고 있던 대신관 렉스, 말룸을 죽일 듯 노려보는 리 알렉산더…….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말룸과, 미치광이 3황자로 추정되는 사내 하나.

말룸은 배려가 없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가치와 부귀영화를 위해 움직이는 이기적인 인물이었다. 시간이 늦었다고 해서 그가 다른 이들을 배려할 일은 세상이 망해도 일어나지 않을 이변이었다.

“그래서.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낯을 하고. 귀하신 분이 왜 이렇게 다 불러 모으셨을까? 이제 와서 새삼 친목 도모라도 하고 싶어진 거야?”

로보가 말룸을 노려보듯 웃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로보의 속은 금방이라도 넘칠 듯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오필리아가 포트에 오지 않았을 때부터 말룸과의 사이에 무언가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했다.

말룸 발타사르가 오필리아를 잡아먹기 위해 연기로 구슬린 건지, 아니면 오필리아가 말룸 발타사르를 과하게 사로잡아 버렸는지는 불확실했다. 로보 자신을 위해서는 전자를, 오필리아를 위해서는 후자를 바랄 뿐이었다.

인어가 초조함을 억누르기 위해 손을 쥐었다가 폈다. 당장 검은 쌍창을 꺼내 저자의 목에 들이밀고 싶었다.

로보는 입술을 짓씹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고대 상어종을 기원으로 두는 날카로운 이빨은 피 몇 방울 흐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 상처를 만들었다.

로보가 쓰게 웃었다.

‘나는 솔직히, 아가씨가 포트로 오지 않았을 때 실망했어. 오지 않아도 괜찮다 했던 건 나인데 말이야. 또, 아무리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라지만 아가씨는 저자의 법적 부인인데도……. 망루 위로 올라가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질투가 났어. 아가씨와 뭔가를 공유하고 있던 건 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자만했던 걸까? 아가씨가 저자와 사랑에 빠지면, 나는 아가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그는 제 감정을 모르는 어수룩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가 오필리아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은 분명 사랑이었다.

로보는 아틀란티스로 향하는 항해 내내 오필리아와 자신의 상황을 가늠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오필리아를 심중 깊이 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풋사과에 불과했던 감정이 어느덧 무르익어 심장을 대신할 열매가 되어 있었다.

로보는 살아남으려 버둥거리는 오필리아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늘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다.

게다가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긴장을 푸는 여린 몸체가, 이야기를 들을 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기쁜 듯 들뜨는 웃음소리가 속절없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로보는 무리해서까지 왕국으로 가 유적을 살폈다. 아틀란티스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처지라 조사는 고고학자 일을 하고 있는 셋째 쥬벨타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탐색 대상은 왕과 후계자만이 출입 가능한 ‘무너진 제단 유적’이었다.

조사가 매끄럽게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무너진 제단 유적 뒤편에는 또 다른 유적 ‘진주무덤’이 있었는데, 그곳에 닿기 위해서는 현 아틀란티스의 왕이자 로보의 할아버지인 포세이돈의 직접적인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걸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로보는 오필리아에게 헌신적으로 행동하고 싶었다. 새로운 감정을 알려 준 상대에 대한 예의이자 보답이었다.

“언제까지 폼 잡고 있을 거야.”

로보가 짜증 깃든 숨을 내뱉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업무를 보던 렉스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지압하듯 눌렀다.

집사장으로 잠입한 것은 잠입한 것이고, 일을 하는 것도 하는 것이었는데……. 말룸은 정말 렉스 자신이 집사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간혹 렉스도 자신이 애초부터 대공에게 고용된 사용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신경 쓰이는 존재도 있었다.

리 알렉산더.

그는 이곳에 모인 누구보다도 신경질적인 낯으로 기분 나쁨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엘프는 한겨울의 유령처럼 생기가 없었다.

렉스는 이들의 신경전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 걱정스러워졌다. 안 그래도 흰 머리가 더욱 하얗게 세어 버릴 것만 같았다.

마침내 말룸이 무거운 음성을 풀어 놓았다.

“오필리아가 성수에 상처를 입었다.”

좌중이 고요해졌다.

로보는 자신이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인어가 심해 괴물을 상대할 때처럼 기세를 사납게 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평범한 인간이 성수에 어떻게 상처를 입어?”

말룸이 검은 속내를 숨기고 본론을 꺼냈다. 평소 같았으면 겉보기나마 격식을 차려 존대를 했겠지만 겉치레를 이어나갈 정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오필리아가 누군가의 의도로 인해 만들어진, 소생된 시체라더군.”

결국 로보가 역정을 냈다.

“꾸역꾸역 살아가는 시체는 다름 아닌 그쪽 아닌가? 시취가 진동을 해서 코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이봐, 난 아가씨에게서 그 어떤 냄새도 못 맡았던 데다, 아가씨의 영혼은 깨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어!”

“그렇겠지, 영혼만큼은 멀쩡하니까. 어차피 인어의 기감이 예민해 봐야 수인족만은 못하다. 마지막 수인족에게서 공언 받은 사실이니 인어의 감각 따위를 내세우지 마. ……그러고 보니, 너. 같잖은 향주머니를 오필리아에게 주었던데. 감히 내 아내에게 더러운 것을 넘기다니, 역겹기 짝이 없군. 어차피 액운이 씐 게 아니라 비린내 나는 향주머니는 의미가 없다.”

말룸이 시큰둥한 척 말을 이었다. 그는 거슬리는 인어의 장단에 어울려줄 만큼 사려 깊지 못했다.

“영혼이 아니야. 육신의 문제다.”

“말도 안 돼, 인어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 해!”

로보가 항변하듯 소리쳤다. 그는 소용돌이에 배가 휩쓸려 들어가거나 해군을 만나 난파당한 해적처럼 보였다.

로보는 말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머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연한 것은 말룸과, 이미 이 상황을 엿봐 알고 있었던 듯이 보이는 크로노모르테뿐이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이들이 각자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무어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말룸은 그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그는 태연한 듯 보였으나 실상은 속이 거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저들의 혼란을 고려해 하나하나 이해시킬 여념이 없었다.

말룸이 털어내듯 이야기했다.

“오필리아는 어떤 목적을 위해 형성된 존재다. 지금 몸을 움직이고 있는 당사자는 다른 행성에서 끌려온 영혼인 것 같더군. 내게 이미…… 자신이 죽었다고 했어.”

말룸이 마른세수를 했다. 세상의 끝에 두어도 위세 등등할 사내가 낡은 옷감보다도 초라해 보였다.

“그런 아내를 지탱하는 것은, 기반이 된 엘프의 시신. 그리고, 영혼을 이 세계에 부작용 없이 고정할 수 있도록 하는 거리의 부랑자, ‘오필리아’의 영혼이다.”

바로 그때였다. 리 알렉산더의 손에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거대한 장궁이 잡혔다.

활을 쥔 리 알렉산더의 손이 극도로 경련했다. 그가 내비친 것은 천 년이 넘는 시간동안 축적되어 화석처럼 굳어진 분노였다.

말룸의 짐작대로였다. 오필리아의 육신은, 리 알렉산더와 가장 밀접한 방향으로 관련이 있었다.

리 알렉산더는 새끼 잃은 어미, 혹은 연인을 잃은 사내처럼 얼굴이 일그러져선 절규했다.

“너…… 포인세티아를, 그 애를, 그 불쌍한 아이의 시신을 대체 어떻게 한 거냐. 말해─!”

리 알렉산더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미칠 것만 같았다.

포인세티아, 가엽고 총명한, 끝의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사랑하는 동생.

엘프는 육신과 영혼이 합일을 이룬 존재, 시신이 썩지 못하면 영혼의 안식도 없었다. 말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동생은 아직도 자연의 품에 안기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뜻이 되었다.

리 알렉산더는 당장에라도 활을 휘둘러 말룸을 후려칠 듯했다.

리 알렉산더가 쥔 활은 엘프의 근원, 용이 내린 신단수의 가지로 만든 것이어서 말룸은 물론이고 라딘라티에게까지 유효타를 입히는 것이 가능했다.

활은 포인세티아의 것이기 때문에 주인이 아닌 알렉산더는 시위를 당길 수 없었지만, 그는 활을 휘두르는 식으로 검처럼 다뤄왔다.

이것이야말로 알렉산더가 라딘라티와 노골적으로 적대할 수 있었던, 그리고 때로는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수단이었다.

“진정해요. 제가 아닙니다, 알렉산더.”

말룸은 알렉산더에게까지 말을 내리지 않았다. 오래 되어 부식된 과거가 관계를 미묘하게끔 했다.

“당신도 알잖아요. 물을 상대는 따로 있어요. 제 눈을 피해, 그리고 날 겨냥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입니다. 오필리아의 몸에 중첩된 엄청난 주술을 숨기고, 시체를 다른 영혼과 결합해 살아 숨 쉬도록 할 수 있는 자.”

말룸이 사납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지친 듯 메말라 추락했다.

“앉아요. 다 엎어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건 이쪽이니까. 오필리아의 다리 상처가 낫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전부 썩게 만들고 싶을 지경인데, 당신까지 신경 쓸 여유 없어요.”

말룸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번개처럼 사납게 빛났다.

“말해…… 알고 있는 것 전부. 내가 쓸모없다 생각해 탐구하지 않았던 요르나스의 사정, 라딘라티에 대한 것, 그리고 크로노모르테, 너는 그 같잖은 예언의 결말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회의장 바닥으로 검은 안개가 꾸물꾸물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니, 숨겨져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으면, 네놈들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내게 있어서 쓸모없는 것은 살아갈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룸의 힘이 산재한 회의실 안으로 걸어들어 온 것이었다. 이 회의장 자체가 협박을 위한 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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