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38화
말룸과 나는 신전에서 돌아왔다. 착잡함이 가시질 않아 수정궁의 방으로 향하는 내내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만 고수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다름 아닌 크로노모르테였다.
“오필리아 님.”
레시우스 제국의 3황자는 이전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지도, 몸을 움츠리지도 않은 채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몸체로 땅을 딛고 섰다.
주인에게 버려진 사냥개처럼 사나운 기세였다. 어눌하고 소심한 평소 모습과는 정 반대였다.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뀐 사람처럼 크로노는 일전의 유약함을 버리고 고통과 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크로노? 안 그래도 작별 인사를 하러 가려고 했어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챙기지 못했으니까,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나는 주춤했다. 겁을 집어먹은 것도 같다. 크로노는 말룸보다도 체격이 큰데다 미치광이라고 매도당하는 속에서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 겉으로 보이는 근육도 상당했다.
하지만 그의 적의가 향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크로노는 분노와 질투를 담아 말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적의를 내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크로노는 지금껏 말룸을 소극적으로 견제하기만 했다. 지금 그의 행동은 자신의 터전을 짓밟은 침략자에게 보내는 적의이자 도전장이었다.
나는 향주머니를 가방 속에 마저 집어넣고 크로노에게 다가갔다. 크로노는 내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를 찬찬히 뜯어보자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한없이 미안하고 유리 조각이 박힌 듯 속이 아렸다.
짧은 시간 동안 그를 알았다. 하지만 크로노는 결코, 설령 그 대상이 말룸이라 할지라도 타는 듯한 적의를 표출할 수 있는 성정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황성에 머무는 일주일만을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한 축제 기간으로 지정해 놓았던 듯했다.
어떻게 잊고 있을 수 있었을까? 저 가여운 사람을.
말룸의 상냥함에, 그리고 충격적인 몸 상태에 매몰되어 크로노에게 신벌을 받은 게 아니라 전하는 것조차 미뤄둔 채 있었다. 그저 티포주 성으로 돌아가 몸을 쉬게 하는 것만 생각했다. 한 사람의 인생과 고통이 걸린 일이었는데도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나는 크로노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간 크로노는 명백히 내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내가 사라지면 그는 수정궁에 유폐되어 영원히 홀로 살아가야만 했다.
그는 나야말로 자신의 구원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질책당하고 업신여김당하는 가운데 손을 내미는 이가 있다면, 그자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라면……. 나라도 놓칠 수 없었다.
크로노가 접한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많았을 테지만 결국 나는 크로노에게 유일했다.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크로노 역시 로보처럼 생면부지의 세계에서 내게 호의를 보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안쓰러움과 자괴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크로노에게 집중했다. 꿀벌이 꽃에 이끌리듯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본능이었다.
그 순간 말룸이 내 손목을 넌지시 잡아 왔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요동쳤다. 말룸은 뇌우와 세찬 비바람이 움트는 벼랑 꼭대기에 매달린 사람처럼 절박한 낯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크로노도 꼭 같아서, 뇌가 두 쪽으로 나뉘었으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말룸을 직시했다. 그러자 그는 끝내 고집을 물리고는 나를 놓아주었다.
한결 낫다. 속을 가다듬고서 크로노에게 다가갔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크로노는 문지방에 서서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말룸을 원수 보듯 했던 것과 달리 나를 보는 크로노의 얼굴에는 슬픔만이 가득했다. 백색 진주를 닮은 영롱한 눈동자가 파도를 품었다. 크로노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는지 괴로움 깃든 한숨을 공기 중으로 흘려보냈다.
“떠나는 모습을…… 전부터 보았소.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는 깊은 바다 밑에 홀로 갇힌 사람처럼 보였다.
“오필리아 님을 잡을 수 없소. 당신이 선택한 일이니 강제할 수 없는 것이오. 상황도 상황일 테니까……. 이해하오. 하지만 나는 참 외롭고 무서워서……. 오필리아 님이 돌아오지 않았던 지난밤을 견딜 수가 없었소.”
“크로노, 미안해요. 하지만 해줄 이야기가 있어요. 잠시만…….”
“날 위한 이야기라 해도 오필리아 님이 내 곁에 있지 않으면 들을 가치가 없소. 이미 내 세상은 오필리아 님으로 인해 한 번 깨어졌다가 재창조되었기 때문이오.”
크로노가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어느새 말을 늘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과 우리를 가르고 있는 장벽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숙부 때문이오? 그런 것이라면 내가 숙부에게 애원하겠소.”
크로노가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는 말룸의 앞에 섰다. 내가 따라붙어 말렸지만 크로노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다음 행동은 말룸도,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크로노가 깊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유폐되었던 데다 미치광이라 손가락질 받는다지만, 권위적인 레시우스 제국의 3황자가 가장 낮은 자세로 애원하고 있었다.
크로노의 주먹 쥔 손이 난기류를 만난 새의 날개처럼 떨렸다.
“곁에 있게만……. 그저 곁에 있게만 해주시오. 숙부라면 폐하께 아뢰어 날 수정궁에서 꺼내줄 수 있지 않소.”
말룸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그를 난도질하듯 응시했다. 나는 유령을 본 것처럼 놀라고 비참해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우리를 태운 전차가 어디론가 하염없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이 전차의 바퀴는 한 쪽이 빠져 덜그럭거렸다.
“일전 청을 드린 적이 있었을 것이오. 나를 버리고 가시려거든, 말도 되지 않는 떼를 쓰며 당신에게 동정을 구걸할 것이라고……. 그래도 부디 경멸을 품지 말아 달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계속 사람을 저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나는 크로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크로노는 아교로 붙은 것처럼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우선 일어나서 얘기해요.”
버릇처럼 입안을 꾹 깨물었다. 타는 듯 아픈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아니.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이렇게 있겠소.”
크로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함께 가게 해주시오. 그 이상 바라지 않겠소……. 거슬린다면 화풀이를 해도 좋소. 감히 사랑을 얻으려 하지도 않겠소. 없는 듯 살아갈 자신도 있소.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지…….”
“크로노, 제발! 일어나요.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생애 처음 만난 햇살을 빼앗아 가진 말아주시오. 오필리아 님이 없는 세상은, 홀로 남겨졌던 이전보다 몇 배는 춥고 고독할 것이기 때문이오……. 오필리아 님이야말로 내 신탁을 들어주는 유일한 신자이고, 내 세계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오.”
“크로노!”
“숙부에게도 내 능력이 도움 될 것이오. 나는 쓸모없지 않소. 숙부가 가고자 하는 길을 먼저 내다볼 수 있지…….”
폭풍전야였다. 크로노는 아직까지도 무릎을 꿇은 채 있었고, 말룸은 순식간에 설산의 주인이 되어 냉랭한 낯빛으로 크로노의 생사를 재단했다.
말룸은 의중을 알 수 없을 만큼 경직된 표정으로 크로노의 검은 머리칼만을 노려보았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말룸을 불러도, 크로노를 불러도 둘 모두 대답이 없었다. 대체 저 사람들의 심계에 얼마나 큰 돌조각이 묻혀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크로노는 그저 곁에 머물 수 있기를 부탁하고 있었지만, 이 중 크로노가 내게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아무리 가상의 설정이라지만 공식적으로는 크로노의 숙부인 말룸의 아내였다. 조카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머리가 핑 돌아 통증을 느낄 리 없는 오른다리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쓸모? 쓸모라고.”
틈 없는 공기를 가르고 냉랭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크로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오는군. 쓸모는 다른 이야기다.”
말룸은 정말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폭소하고 있었다.
“말룸…….”
작게 불렀지만 말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나는 표류물 신세가 되어 황망한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말룸이 크로노의 멱살을 잡아채었을 때에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힘껏 말룸의 단단한 손아귀에 매달렸다.
“둘 다 진정 좀 하라고 계속 말하지 않았어요? 따지고 보면 당신들은 나 때문에 이런 망아지 같은 꼴을 하게 된 건데, 왜 날 제외하고 서로 날을 세우는 건데요!”
크로노는 분명 숨이 막힐 텐데도 말룸의 샛노란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계속해서 둘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 고집쟁이들은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날 존중하고 입이 있으면 말을 좀 해요!”
말룸이 아름답게 미소했다. 그것은 독처럼 위험해 보였다. 그는 분노에 휩쓸려 이성을 차리지 못했다. 곁에 내가 있어서 끝없이 인내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말룸이 다시 헛웃음을 뱉었다.
“상냥한 오필리아, 이 녀석은 교활해요. 참, 당신은 이곳이 익숙하지 않다고 했지. 이 녀석이 하는 말,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요?”
“……제 곁에 있기를 바라는 게 아닌가요? 물론 그게 밖에서 보기에 좋은 모양새는 아닐 거란 것도 알아요.”
“아뇨, 바깥 시선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 녀석은 지금 정식 남편인 내 허락을 받아냄으로써 당신의 옆자리를 꿰차고 싶어 하는 거예요……. 속된 말로 당신의 정부가 되고 싶어 하는 거지.”
“네? 그럴 리가…….”
해명을 바라는 시선으로 크로노를 바라보았지만, 말룸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크로노는 묵묵히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룸이 요사스럽게 속삭였다.
“들어 봐요.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저 녀석이 성에 딸려 온 순간부터 당신은 3황자를 첩으로 삼은 여자가 될 겁니다. 원래 소문이란 게 그렇죠. 그리고 저 역시 저 녀석을 유폐에서 꺼내 놓기 위해선 그런 변명을 사용할 수밖에 없겠고요……. 헬리오스는 아주 좋아하겠군요. 나와의 연줄을 하나 더 만들어 놓는 셈이 될 테니까.”
말룸이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샐쭉 미소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웃는다는 착각은 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황족들은 간을 밖으로 빼 놓아 배짱이 두둑해요. 그 아버지고 자식이고,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아주 같잖고 우스워. 그런 인간상을 싫어하진 않지만, 때로는 이렇게 참 거슬리죠.”
나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이제 알겠나요? 이 녀석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하고 있는 건지.”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제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불륜 현장을 욕하기만 했지 정작 그 당사자가 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크로노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외면하기에는 이 황자님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때였다. 크로노가 작달막하게 말했다.
“내가 필요할 것이오. 두 분 다. 그러니 그 대가라고 생각하시오.”
“아니, 네놈 따위의 도움은 필요 없다. 오필리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것이니까……. 오직 나만이 집어삼킬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순간 나는 말룸이 내렸던 마법에서 퍼뜩 깨어났다. 바싹 소름이 올랐다.
집어삼킨다니. 나를 먹어 치우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
야간 비행을 하는 도중 길을 인도하는 불빛이 모두 점멸한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자꾸만 마른침이 넘어가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신전에서 그가 보였던 다정한 행동,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의 본질에 대해서 번민을 거두지 못했다.
말룸의 노골적인 위협에도 크로노가 선고하듯 음성을 무겁게 했다.
“숙부는 3년을 못 채울 것이고, 오필리아 님은 감히 잴 수 없소. 하지만 나는 짐작해 낼 수 있지. 이 크로노모르테 레시우스는 오필리아 님을 살게끔 하는 안전장치이자 그 순간을 위한 안배인 셈이오.”
“헛소리 집어치워라. 말로 하니 내가 우스워 보이나?”
“설마. 감히 어떻게 당신을 우습게 생각할 수 있겠소. 말룸 발타사르……. 신처럼 무정한 나의 숙부.”
크로노가 마른웃음을 지었다.
“숙부께서도 신전에 다녀오셨으니 알 것 아니오.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소……. 내 말이 믿기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겠지.”
크로노의 입매가 작게나마 씩 호선을 그렸다.
그것은 광기였다.
“나는 오필리아 님이 시신처럼 쓰러지는 미래를 보았다오. 그리고 나는 그 미래를 차단할 방법을 알고 있는 유일한 오필리아 님의 편이오. 나는 결국 오필리아 님을 위해 태어났소. 그게 내 존재 의의 전부인 셈이지. 아아…… 나는 그게 못내 기뻐 벅차오른다오.”
크로노모르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미소 지었다. 나는 파도처럼 덮쳐 오는 크로노모르테의 광기에 잠시 넋을 놓았다.
“제가 존재 의의의 전부라뇨. 당신은, 고작 사람 하나를 삶의 이유로 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절벽 끝에 몰려 있는 건가요?”
크로노가 긍정하듯 미소했다.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저도 당신을 모르고, 당신도 저를 몰라요. 제가…… 대체 무엇이기에?”
“당신은 날 모르겠지만, 오필리아 님.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지켜보았소…….”
크로노는 여전히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릴 뿐으로, 나를 이해시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신전에서 공언한 것이 있으니, 크로노모르테를 미치광이 취급하며 예언을 믿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그가 허탈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땅에 떨어진 기분이군.”
말룸의 음성이 너무 서러워 나는 울컥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말룸…….”
“미안해요. 말이 거칠었어요. 그래도……. 이해해주세요. 저는 크로노모르테의 불길한 말을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죽음보다 첩 하나 따라붙는 것이 나아요.”
“크로노는 제 첩이 될 수 없어요.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는 것 따위로 단정 지을 수가 있어요?”
“그 말마저도 나는 화가 납니다. 다른 놈을 향하는 당신의 상냥함이, 내겐 너무 아파. ……헬리오스와 담판을 지으러 가야겠군요. 그 녀석은 인형 재고 처리하듯, 먼지 얹힌 아들을 쓸모 있게 굴릴 수 있게 되어 참 기뻐할 겁니다…….”
말을 마친 말룸은 크로노모르테의 어깨를 부러 강하게 밀친 채 방을 나서 버렸다. 내가 쫓아갈 틈도 없이 문이 굳게 닫혔고, 말룸의 말마따나 그는 헬리오스 황제에게 협박이든 무엇이든 해 크로노를 유폐에서 꺼내 놓을 것이었다.
단지 내 미래를, 안위를 위해서. 그토록 내게 늪과 같은 소유욕이며 애틋한 맘을 갈라 바깥으로 꺼내 보이던 사람이…….
짐을 싸느라 엉망진창이 된 방,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응시하는 크로노, 갑작스러운 군식구과 중첩되는 죄책감에 얼이 나가 버린 나.
“숙부가 허락한 모양이오. 그 남자는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니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자, 나를 좀 쓰다듬어주시오. 사랑하지 않아도 좋소. 다만 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분노를 거두어주시오…….”
크로노가 달콤하게 속삭이며 허수아비처럼 그저 서 있기만 하는 나를 품에 끌어안고 차분히 등을 토닥였다. 스트레스로,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애정의 부담감으로 퓨즈가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크로노에게서는 아무런 향수 냄새도 나지 않았다.
불빛이 환했다. 방 안은 각종 사치품으로 화려했고, 애타게 나만 바라보는 잘생긴 3황자도 있었다. 그러나 동서남북 모든 공간이 회색 빛깔로 덧칠되어 있어 그 깊은 페인트칠을 벗겨낼 수 없을 듯했다.
말룸은 거의 해가 질 무렵에서야 돌아왔다. 그때 나는 소파에 늘어지듯 몸을 기대고 있었고, 크로노는 여전히 창문 곁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아온 말룸은 겨울 호수처럼 차분했다. 내게 화를 내지도, 속앓이를 풀어 놓지도 않았다. 나는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면구스러워 감히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필리아.”
한참 후, 침잠한 낯의 말룸이 정적을 뚫고 내게 물었다.
“입 맞춰도 되나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러나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주 조심스럽고 정중한 태도로 내게 오더니, 몸을 낮추어 내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가 숨 쉴 틈 없이 자신을 밀어붙였다.
말룸의 말캉한 입술이 내 숨을 머금었다. 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숨이 가빠 그의 셔츠 자락을 꼭 쥐었다. 체격 차이로 매달리는 쪽은 나였지만, 심리적으로 매달리는 쪽은 말룸이었다.
크로노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말룸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말룸은 내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크로노모르테의 절박한 고집을 저주 한 번 쏘아 보내지 않고 용인할 만큼.
첫 입맞춤은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고, 언 거품을 입에 댄 것처럼 뭉개진 맛이 났다.
말룸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가라앉았다. 보석은 별처럼 반짝여 사람 정신머리를 뒤흔들었지만 결국 광물에 지나지 않아 온기를 품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듯했다. 나는 머리가 잘린 조각상이 되어 전시되기 위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말룸이 마지막으로 작게 입을 맞추더니 나를 놓아주었다. 그는 그간 두르고 있었던 잔악함과 매정함과 모순 따위를 모두 내려놓은 채 함빡 지쳐 숨을 골랐다.
말룸이 눈가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을 손으로 가렸다. 그가 작달막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안전했으면 좋겠어요. 부디 끝의 끝까지. 그것뿐입니다. 그걸 위해서 나는 모든 걸 수단 삼을 수 있어요.”
“……동의 못하겠어요. 이해도 안 되고. 두 사람 다 잘 들어요. 난 누군가를 수단 삼아서까지 살고 싶은 맘 없어요.”
하지만 내 말을 들을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사달을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의 이번 결정은 날 존중하지 않은 결정이에요. 목숨을 빌미로 날 무시해 버린 거지.”
크로노가 내 손을 끌어 덮듯이 잡았다. 물끄러미 바라본 크로노의 눈동자에는 물이 얹혀 금방이라도 넘칠 듯했다.
나는 반쯤은 신경질이 치솟았고, 다른 반절은 연민과 동정이 잠식해 다시 크로노에게서 시선을 치웠다.
“오필리아 님. 나는 당신의 영원을 절실히 바라고 있소. 당신은 나 같은 것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유영할 수 있는 사람이지. 그러니 이 나를 너무 밉게 보진 말아주시오.”
그의 말로 결정이 끝났다.
크로노는 결심을 물리지 않을 것이고, 우리와 함께 성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이 고집쟁이들…….
불쌍한 사람들.
나는 애정을 주기엔 너무 지쳐 있는데도, 그걸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맘대로 해요. 당신들 맘대로 해. 하지만 난 이번 일이 전혀 기쁘지 않아요. 그건 알아둬요.”
나는 크로노가 자신의 가치를 나 하나로 결정짓지 않기를, 말룸이 이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했다. 깊은 구덩이 속으로 미끄러진 것처럼 몸에 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