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36화
하염없이 말룸이 밀려들었다. 새벽을 닮은 시원스러운 체향이 아카시아 꽃향기처럼 나를 적셨다.
말룸은 새였다. 철길 위의 들풀이고, 산의 개울물이었다. 구름 없는 낮의 태양이며 한낮의 갈대였다. 고인 습지에서조차 일어나는 잔잔한 물결, 산의 그림자, 흐드러지게 잎사귀를 늘어트린 나무, 그런 모든 것이었다.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이 스며드는 때, 나는 속절없이 말룸에게 휘말렸다. 담을 쌓아도 소용없었다. 말룸은 담쟁이덩굴로 모양을 바꿔 내게 왔다.
석 달 남짓, 사랑을 논하기에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의심하고 반목하며 천성을 숨기는 와중에서도 그는 빗물처럼 스며들었다.
말룸이 나와 함께 걷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게 못내 아쉽고 까끌까끌했다.
굴레에 엮인 것 같았다. 나를 먹을까, 먹지 않을까? 나를 사랑할까, 사랑하지 않을까?
그래도 나는 호소하듯 끊임없이 속에 얹힌 것을 말로써 토해 내었다.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불분명한 이에게 틈을 내어줄 만큼, 나는 홀로 덤덤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저,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그곳은 가진 돈에 따라 계층이 나뉘긴 하지만 신분 질서도 없고 대체로 평탄해요. 그곳을 지구라고 불러요. 여길 요르나스라고 하는 것처럼.”
“그렇군요. 괜찮다면, 더 이야기해줄래요?”
“당신에게 가르쳐주었던 모종 심는 법도 지구에서 배운 거예요. 아주 어릴 때 시골에서요.”
“어쩐지 조금 생소하다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잘 할 테니 모종 망쳐도 봐줘요.”
“노래…… 당신이 아팠을 때요. 그 노래도.”
“예쁜 노래였어요. 더 듣고 싶어요, 오필리아.”
“살해당한 것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그래서 나이프가 식기로 올라오면 무서웠어요.”
이번에 말룸은 말없이 내 어깨를 쓸어주었다. 사부작사부작 와 닿는 온기가 긴장했던 마음을 녹여 나는 뒤늦게 정돈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잔뜩 지쳤다. 그저 몸을 웅크리고 쉬고 싶었다. 안식의 상대가 뱀이든 뭐든, 설령 메두사라도 상관없었다.
말룸이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한 말들로 나를 달랬다.
“많이 무서웠죠? 괜찮아요……. 다신 그런 게 당신 손끝 하나 상하게 하지 못하도록 지켜줄게요. 복도에 걸어둔 날붙이도 모두 치워야겠군요.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말룸에게 비스듬히 기대자 그는 자세를 바꿔 날 지탱했다. 자신도 낡은 신전 기둥 같은 꼴을 하고 있으면서 헌신적인 모양새가 기꺼웠다.
그러나 말룸은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그 자신에 대해 말해주기 전까지는 온전히 나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을.
카사블랑카의 목소리가 산통을 깼다.
“그래서, 소설은 다 썼냐.”
그는 지친 듯 보였다. 소년이 지을 수 없을 만큼 초연한 표정은 세상의 분진을 머금고 바짝바짝 갈라졌다. 건장한 구릿빛 피부가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카사블랑카는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마 어린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재생이라는 그의 파편과 관련이 있겠지.
나는 선고를 기다리듯 묵묵히 조슈아 님과 카사블랑카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그들은 말룸의 변화를 용납할 수 없는 듯했다. 꼭 진화론을 부정하려는 창조론자들처럼 보였다.
카사블랑카가 벙거지를 꾹 눌러썼다. 수인족이라고 했으니 저 밑에 붉은 귀가 있을 법했다.
조슈아 님의 한탄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진귀한 광경을 보는군요. 제가 두 분의 결속을 단단하게 해준 것 같은데, 기뻐해야 하나요?”
“기뻐하지 않을 일인가?”
말룸이 의기양양하게 미소했다. 그는 우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모두 잘 어울렸지만 오만한 표정이 가장 잘 들어맞았다.
문제는 나였다. 내 얼굴은 물길로 엉망진창이 된 것은 물론 갑작스러운 봄내로 온통 새빨개졌을 듯했다. 부끄러움이 매섭게 달려들었다. 이 상황은 내 속내를 한 번 보시오 하고 전시해 둔 것과 다름없었다.
다행히 신관님들은 내 꼴에 별 관심이 없으셨다.
“어찌 되었든, 그 주술은 시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교해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라든지, 다리의 회복 속도랄지 하는 것들이요. 저로서는 아주 일부를 읽어내는 것에 그쳤으니 나머지는 말룸 발타사르, 당신 몫입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궁리 중이었다.”
말룸이 매섭게 쏘아붙이면서도 짓무른 내 눈가를 엄지로 살살 쓸어주었다. 전등 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듯해 눈이 시렸다.
“말룸, 그럼 저희는 티포주 성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고요.”
“네. 당연하죠. 그곳에서 렉스와 알렉산더를 불러 당신에 대해 논의할 겁니다. 다리의 상처도 치료하도록 노력해야겠고, 만약 되지 않으면 당신 몸을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한 아라크네를 성으로 초대해야 하는 차악을 선택해야겠죠. ……그보다는.”
말룸이 거의 혼잣말했다.
“하아……. 어째서 미리 알지 못했는지 모를 정도로 그자를 많이 닮았군.”
나는 말룸이 ‘그자’라 칭하는 이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귀 끝이 살짝 뾰족한, 티포주 성의 무뚝뚝한 기사.
리 알렉산더.
리 경은 대하기 어려웠다. 그는 온통 공적 영역으로 치장된 인물이었다. 리 경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는 성 내 어떤 사용인과도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기사들과는 업무 때문에 자주 어울리는 듯했으나 보이지 않는 선이 뚜렷하다고 지나다니던 사용인 무리의 수다를 들은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리 경과 친하지도 않았다. 막상 이 몸이 리 경과 관계가 있다고 하면 그를 어떤 낯으로 보아야 할지 짐작이 서질 않았다.
만약 정말 관계가 있다면 리 경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말룸의 호위 기사로 있다고 했으니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테고, 말룸의 비인간성에 대해, 그가 정말 나를 잡아먹을지에 대해 확답을 내려줄지도 몰랐다.
그러다 생각이 닿는 사람이 있었다.
“참, 로보. 로보도 곧 돌아올 때가 되었을 거예요. 성에 먼저 도착해 있거나 며칠 안으로 절 찾아오겠죠. 로보는 인어니까 신비로운 주술이나 저주 같은 걸 많이 알고 있을 테고, 제 상태를 파헤치는 걸 도와줄지도 몰라요. 물론 그 전에 제가 로보와 이야기를 좀 해야겠지만요.”
“그러고 보니 인어도 있었죠. ……크로노모르테에, 인어란 말이지.”
말룸이 작게 중얼거린 탓에 뒷말은 듣질 못했다. 그는 바짝 마른 선인장처럼 날 선 표정을 지었다.
인어라는 말에 카사블랑카가 흥미를 보였다. 적의가 아닌 호기심 깃든 소년의 표정은 천진난만하고 싱그러워 말룸의 과거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인어? 의외로 인맥이 있잖아. 일족은? 유령아귀? 귀신고래?”
“늑대상어 일족이요.”
“늑대상어? 엄청난 명문가군. 대대로 왕을 많이 배출했지. 1기 아틀란티스 당시에는 그자들이 왕위를 세습하는 식으로 정국을 꾸려 나갔대. 이름은?”
나는 학자처럼 눈을 빛내는 카사블랑카에 어색하게 답했다.
“음, 들었다시피요. 로보라고 하는데…….”
“뭐? 아틀란티스 차기 왕으로 거론되는 인어잖아! 그 쌍창의 악명은 유명하지. 맘에 안 드는 건 다 꿰뚫고 다닌다면서. 게다가 트리톤의 직계라……. 이거, 해볼 만하겠어. 말룸 발타사르에, 우리 신전 세력, 엘프와 트리톤 직계 인어까지. 다음 단죄 대상은 말룸 네 녀석이지만,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협력 관계를 구축할 의미가 있겠군.”
“잠깐. 셋이라뇨?”
“몰랐냐? 렉스 칼른. 그자도 대신관이다. 꽤 베테랑이지. 조슈아가 어릴 때부터 신전에 있었어.”
나는 말룸을 힘껏 노려보았다.
렉스 칼른? 렉스, 칼른! 내게는 그저 집사라고만 했으면서!
그러고 보니 조슈아도, 카사블랑카도 모두 성이 칼른이었다. 칼른은 대신관 직에 임명된 이들에게 붙는 특별한 성인 듯했다.
말룸이 점점 괘씸해졌다. 그는 상상 이상으로 제대로 된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숨기고, 숨기고, 또 숨기고. 급기야 자신마저도 숨겼다. 그는 뱀이었지 소라게가 아니었다.
말룸이 살며시 시선을 피했지만 내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맞추는 게 빨랐다. 말룸은 귀 끝이 살짝 붉어져선 저항할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얼굴을 붉힐 건이 아니었다. 이건 상이 아니라 취조였다.
“대체 푸른 문 안에 뭐가 있는 거예요.”
말룸이 얼굴이 철광처럼 굳어졌다.
“안 됩니다. 절대 가지 마세요.”
“리 경은 당신 호위 기사 맞아요?”
“아니요. 그도 신전과 관련된 협력자입니다.”
“당신, 왜 그렇게 체온이 널뛰어?”
“……무리를, 조금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문제없어요.”
“나 빼고 뭘 하는 거예요! 설마 티샤랑 모아도?”
“아니, 그자들은 단순한 일반인이에요.”
잇새로 한숨이 나왔다. 말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전부 안 된다고만 하고, 되는 게 무엇인지. 그러나 정보에서 배척당하는 나보다 오히려 말룸이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당신과 어설프게나마 감정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룸. 당신…… 나를 사랑하나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하지만 말룸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는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진다는 당연한 진리를 언급하는 듯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예,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요? 그런데 저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건 물론이고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건…… 제 문제입니다. 제가 겁쟁이라서……. 겨우 당신이 저를 편하게 대해주고 있는데, 다시 원점으로, 어쩌면 그 이하의 관계가 되어 버릴까 봐.”
말룸이 대리석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 그를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는 고집부리지 않고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그러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색한 눈망울로 날 바라보는데, 아무래도 진짜 봄은 조금 늦게 올 듯했다.
머리가 아팠다. 이곳에 와서 머리가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물끄러미 오른다리를 바라보니 벌써 붕대에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어 보기 좋지 않았다.
“일단 절 이 꼴로 만든 사람을 찾아서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동기를 알아내야 하는 거죠? 누군가를 해치지도 못하는, 전투와 백만 년 떨어진 절 당신과 붙여둔 이유 말이에요.”
“누구인지는 짐작이 갑니다.”
말룸이 불안정하게 제 남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끝내 짐작 가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이리 와봐요.”
마구 흘러나오고 삐져나온 잔머리를 참을 수 없었다. 말룸을 불러 앞에 앉히고는 가지런히 머리칼을 정리해 하나로 묶어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남색 명주실이 걸림 없이 빠져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말룸은 인형처럼 얌전했다.
누구인지 짐작이 간다는 건가…….
말룸과 관계된 자들 중, 그 말룸 발타사르가 홀로 상대할 수 없고 신전에 협력을 구해야 할 만큼 강한 존재는 단 하나밖에 생각나질 않았다.
라딘라티.
또 그자였다.
언젠가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자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만약 말룸이 그를 적대하고 있다면 신전 측과 협력하고 있는 것도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조슈아 님은 나를 이렇게 만든 자가 말룸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으니까.
하지만 나는 짐작한 것을 말룸이나 조슈아 님, 카사블랑카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말룸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고, 이 일에서 나를 배제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말룸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두려워하며 라딘라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끊임없이 되뇌고 또 되뇌었겠지.
촌스러운 신발의 답례라고 해 두면 적당하겠다.
사람 마음은 이토록 한없이 투박하면서도 순수한 색채를 띨 때가 있었다. 이 색감이 부디 인간이기를 포기한 말룸에게도 남아 있기를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