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32화
말룸은 레헬른이 익숙했는지 복잡한 길목에서도 막힘없이 걸어갔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뒤따르며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신전에 볼일이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나는 뱀 괴물이 신전을 나다닐 만한 용무를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말룸과 신전, 괴물 뱀과 성스러움.
아무리 생각해도 상극이었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조합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원작이 비틀려 신전이 말룸의 편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착잡함에 입술을 꾹 씹었다. 그러자 말룸이 걸음을 잠시 멈추고 곧게 뻗은 검지로 내 입가를 톡톡 매만졌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벌렸다.
그가 쑥스럽다는 듯 상가 게시판에 붙은 전단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피날 것 같아서요. 멋대로 만져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버릇인 것 같은데, 그럼 안 좋아요.”
힘이 쭉 빠졌다. 다정하게 구는 말룸도 어색했고, 날이 좋다지만 오래 걸어 다리도 무거웠다.
“더 가야 하나요?”
“벌써 힘들어요? 운동량을 늘려야 할 것 같은데.”
“……멀었냐니까요.”
“아뇨, 바로 저기. 보여요?”
고대 그리스의 신전을 닮은 건물이 저 멀리 비죽 보였다.
신전은 탁 트인 언덕 부지에 있었다. 조금 더 걷자 작게 지붕만 보이던 것이 전체적인 위용을 드러냈다.
신전 건물은 전체적으로 새하얬다. 흰 대리석 벽의 둘레를 따라 청금석에서 추출한 푸른 물감으로 기하학적인 도형들과 예쁜 벽화들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벽화는 소용돌이치는 바다와 어떤 신성한 나무, 불타오르는 바위산, 그리고 검은 인어를 표현한 듯했다.
벽화 속 인어는 검정 일색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성스럽다기보다는 불길해 보였다. 지구 사람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이곳만의 감성이 벽화 곳곳에 녹아 있었다.
신전 앞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신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제대로 기다리면 한나절은 걸릴 듯했다. 나는 창백히 질려 말룸을 바라보았다. 그도 줄을 서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축제 주간이라 세례를 해주는 모양이군요. 가끔 저치들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행사를 하죠. 몸은 괜찮아요?”
“한계인 것 같아요. 미안해요……. 벌써 목 근육이 찌릿찌릿 아프고 손발에 힘이 없네요.”
“상관없어요. 이럴 때 쓰라고 권력이 있는 거니까.”
말룸이 오만하게 웃었다. 인간의 목숨을 쥐고 있는 저승신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살며시 불안감이 차올라 말룸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무언가를 궁리하느라 즐거움에 젖어 나를 살피지 못했다.
말룸이 권력욕의 화신답게 거만한 몸짓으로 뽐내듯 줄의 옆으로 비켜섰다. 내가 덩달아 따라 나서자 사람들이 금세 우리 자리를 차지했다.
“따로 방법이라도 있어요? 안하무인처럼 구는 거 말고.”
“안하무인? 전 언제나 적당히 규칙에 맞춰 행동해요. 그게 대중을 구슬리기 편하니까……. 자, 오필리아. 일단 저기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놀라지 말아요.”
“규칙에 맞춰 행동하는데 왜 놀라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불법 행위는 아니니까 자꾸 그러지 말아요. 정원에서의 일이 당신을 힘들게 한 건 알고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조심하고 있으니까.”
말룸이 이파리를 잔뜩 내린 버드나무 아래의 평상에 날 앉혔다. 나는 가시가 돋친 듯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그의 말씨를 해석하느라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은 봄볕 아래 늘어진 맹수처럼 한없이 여유로웠지만, 그 휴식이 사냥을 위한 준비 행동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기뻐요. 내게 질문하는 걸 전보다 편히 하게 된 것 같아서.”
“……그럼, 이거 하나만 더요.”
말룸의 소맷자락을 아무렇게나 잡아당겼다. 말룸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외줄 타기를 하듯 불안한 낯빛이었다.
“뭘 하려는지 그것만 알려 줘요.”
“간단한 작업이에요. 미끼를 흘리는 거지. 힘의 기운만을 흩뿌릴 겁니다. 제 능력을 꺼리는 것 같았으니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말룸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집이 막대기로 들쑤셔진 개미 떼처럼 신관들이 바깥으로 나올 겁니다. 높은 확률로 집 지키는 개와 샌님 보모가 마중 나올 것 같긴 한데……. 성가시기는 하지만, 따로 초인종이 없으니까.”
“아니, 그래도 이런 방식은……. 그리고 신전에서 당신 힘을 경계하고 있는 건가요?”
“당연하죠. 내 힘은 위험하니까.”
“그럼 자극해서 좋을 것 없잖아요.”
“무슨 의미죠? 어차피 권력구조상 신전 세력은 제 권위에 미치지 못해요. 요즘 저들의 부패가 만천하에 알려지는 바람에 주위 시선이 곱지 않기도 하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새치기를 하는 게 당연하진 않다는 거예요.”
말룸은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미간에 금이 갔다.
“신관들은 신경 쓸 정도로 가치 있지 않고, 더욱이 새치기도 아닙니다. 평민보다 앞서 행동하는 게 뭐가 문제죠? 저 인파를 뚫고 맨 앞의 수행 신관에게까지 가서 정식 입장 절차를 밟으면 시간이 더 걸려요.”
“하지만…….”
“제게 의지해요, 오필리아. 어차피 신전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이 제국은 탐욕스럽거든요.”
말룸의 노란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나는 마른침을 삼켜 술렁이는 마음을 정돈했다.
“당신 귀족이었죠…….”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도 귀족이잖아요, 그것도 아주 높은.”
진짜 제대로 나쁜 양반이군. 기본적인 도덕심이라는 게 결여되어 있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어라 이야기해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고집을 부려 기어이 내 항복을 받아낸 말룸이 밤처럼 짙고 깊이 웃었다. 그는 말룸 발타사르 식 새치기를 정식으로 허락받았기 때문에 무척 즐거워 보였다.
내가 평상에 대강 늘어져 앉자, 말룸의 눈동자가 서늘히 가라앉더니 성에 머물 때 종종 느꼈던 소름 끼치는 기운이 주변을 잠식했다. 빛도, 온기도 없는 삭막한 추위에 둘러싸여 겨울 호수 밑바닥에 수장된 느낌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내 결말이 저 기운에 삼켜지는 것만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말룸의 호언장담대로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광분해서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를 쏘아보는 그들의 눈동자에 가시가 돋았다.
“저 사람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죽일 것처럼 달려오고 있잖아요!”
다급히 말룸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태평한 기색이었다.
“아무 짓도요.”
천연덕스러운 작태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말룸이라면 모를까, 나는 신관에게 악의를 사면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달려오는 신관은 둘이었다. 새하얀 신관복을 입고 커다란 회색 벙거지를 뒤집어쓴 붉은 머리칼의 소년과, 소년을 말리려는 듯 그에게 무어라 소리치는 유약한 학자풍의 젊은 남자.
특히 소년은 아주 작았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무척 귀여운 생김새의 남자아이였다. 회색 벙거지 밑으로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이 비죽 나왔는데, 생명력을 상징하는 듯한 활력 있는 머리칼이 갈색 피부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눈동자도 화려하게 붉어 영롱히 파도쳤다.
그러나 소년의 표정은 인생의 원수를 마주한 것처럼 살벌했다. 심지어 소년은 청년을 따돌리고선 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했는데, 불도그나 광견병 걸린 개가 절로 떠올랐다.
‘무슨 애가 이렇게 사나워?’
곧이어 나는 생각을 전환했다. 분명 말룸이 먼저 잘못했을 것이다.
소년이 확성기를 가져다 댄 것처럼 어마어마한 성량으로 소리를 질렀다.
“말룸, 발─타─사─르! 이 쓰레기! 무뢰배, 양심도 없는 놈! 먹다 남은 고깃덩어리! 썩은 달걀, 할아버지의 벗어 놓은 양말, 씹다 버린 껌!”
……엄청난 폭언이었다.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이성을 잃고 말룸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말룸이 시큰둥하게 소년의 이마를 한 손으로 밀어 공격을 차단했다.
그는 소년을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소년에게서 적의를 받는 게 무척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작태에 소년은 더 열을 받은 듯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 삿된 기운을 풍겨대는 거냐!”
말룸이 말 잘 듣는 강아지라도 교육하는 것처럼 싱긋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폭탄을 떠넘기는 것만 같아 식은땀이 났다.
그가 경쾌하게 말했다.
“봤죠? 오필리아. 이렇게 하면 편해요. 금보다 귀한 시간을 들여 기다릴 필요도 없고.”
“무시하지 마!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주마. 네놈이 결딴낸 일족의 원수를 갚겠다! 내가 완전히 지쳐 포기해 버리기 전에, 이 악연을─”
소년이 갑작스럽게 말을 멈추었다. 그의 붉은 눈은 나를 향해 있었다.
“그런데 뭐야, 저 여자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기세에 눌렸다. 말이 엉성히 샜다.
“저기, 안녕. 나는 오필리아야.”
“꼬맹이로군. 말룸이 데리고 온 고아인가? 아니, 고아에게 자비를 베풀 작자가 아니지.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병이라도 있는 건가.”
꼬맹이. 그리고 고아. 그것은 내 이성을 끊어 놓는 마법의 단어였다. 나는 경주라도 하듯 자리를 박차고 나가 ‘꼬마’와 대거리했다.
“이 작은 게 지금 누구더러 꼬맹이라는 거니? 나는 오필리아, 어른이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예의를 갖춰서 제대로 존대를 해. 그리고 병도 없어. 건강하다고.”
나는 옥죄는 심장을 무시한 채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함부로 고아라느니 시설 출신이라느니 하지 말아줘. 나는…….”
“시설 출신? 무슨 시설. 라탈트 구빈원을 말하는 거냐?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라탈트 구빈원에 들어갈 일은 없을 텐데. 뭐, 거기서 태어났다면 논외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 건은 미안하게 되었군. 어쨌든 시설 운운하진 않았어.”
소년이 내 말을 딱 끊어버리고서 제 할 말만 쏘아붙였다.
“그래. 이제 알겠다. 네가 그 소문의 재혼 상대냐.”
소년이 흥미롭다는 듯 사납게 웃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나이가 몇인데 이런 어린애와 결혼을 해? 하긴, 그 음습한 속내를 어떻게 알겠냐. 누군들 그 실종된 전 아내처럼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입 다물어. 단어 하나 내뱉을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 썩어나가게 해주마.”
시큰둥해 있던 말룸이 몇 마디 스산하게 내뱉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사위가 적막해졌다.
말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소년과 안절부절못하던 온화한 생김새의 청년, 그리고 나까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소년이 분한 듯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말룸은 눈썹을 모나게 세웠을 뿐 정말 그의 손가락을 썩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다시 나를 잡아먹을 듯 달려들지 못했다. 표정에 서린 비참에 신경이 쓰였다.
대치가 심화되는 듯하자, 소년의 뒤를 지키듯 서 있던 남자 신관이 나섰다.
그는 ‘나 신실해요’를 인간으로 형상화한 듯 포근한 밀색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수려하게 단정한 외모가 신관복과 잘 어울렸다. 지구에서 도시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희귀한 생명체, 교회 오빠가 떠오를 정도였다.
남자가 한숨을 쉬며 두꺼운 책을 고쳐 들었다. 일반적인 책이라기에는 무거워 보였다.
“어쨌든, 발타사르 님. 이런 호출 방법은 좋지 않다고 매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신도 그만 도발하십시오, 카사블랑카. 여기 손님도 계시니까요.”
카사블랑카라고 불린 소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했으나 나와 말룸을 자극하길 그만두었다.
상황이 진정되자 청년이 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는 놀랄 만큼 따뜻한 미소에 잠시 얼이 나가 있었는데, 그를 멀거니 보고 있으니 기시감이 느껴져 찰나 골몰했다.
그러고 보니 이 둘은 어딘지 익숙했다. 원작의 인물이었던가?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지 않도록 노력하며 둘을 자세히 관찰했다.
순간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였다.
마리아의 조력자 중 하나는 아주 키가 작았고, 나머지 하나는 붉은 성해포를 어깨에 두르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저 단정한 사내는 성해포를 걸치고 있지 않았지만, 옷차림이라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꽤나 까칠한 소년 신관과 꼭 붙어 다니는 남자 신관은 저 신관님뿐일 듯했다. 분명한 호재였다.
내가 두 신관을 관찰하고 있을 때 그들도 나를 관찰했던 듯했다. 우리가 서로를 충분히 탐색한 후에야 끊어졌던 대화가 제자리를 찾았다.
“저는 조슈아 칼른. 이곳의 세 번째 대신관직을 맡고 있습니다. 이쪽은 카사블랑카 칼른. 마찬가지로 다섯 번째 대신관입니다."
“대신관, 이요?”
“예, 저희는 일곱 대신관 중 하나죠. 카사블랑카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그래도…….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말룸은 우리가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못마땅한 듯했다. 그는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조슈아 칼른에게 이야기했다.
“안내나 하도록,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노예.”
“그 불신은 세월에 썩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이 신관님도 쏘는 성격이 있었다.
“자,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조슈아 님이 퉁명스러운 기색을 지워내고 햇살처럼 웃었다. 물론 그 미소는 나만을 향한 것이었다.
카사블랑카도 조슈아 님의 뒤를 따랐다. 소년의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내가 둘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말룸이 곁을 지켰다. 새치기가 이렇게 파란만장할 줄이야. 역시 사람은 도덕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조슈아 님이 일반 입장문과 조금 달라 보이는 문 앞에 멈추어 섰다. 황금의 아치 모양이었는데, 어쩐지 숨쉬기가 벅찼다.
흘끗 바라본 말룸은 아예 인상을 구긴 채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불길하다는 직감이 척추를 따라 오르내렸다. 나는 별 일 아니겠거니 울림을 무시하며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입장하시기 전에 먼저 성수로 악함을 씻어내는 의식을 치러주십시오.”
“나는 되었다.”
말룸이 재고 없이 거절의 말을 뱉었다.
“당신한테는 권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슈아 님이 매섭게 받아쳤다. 그는 말룸과 짧게나마 눈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추태를 보였군요. 부디 신경 쓰지 말아주십시오. 자, 그럼 이쪽으로…….”
금세 적의를 갈무리한 조슈아 님이 내게 성수를 들고 바짝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성수를 환영하지 못했다. 심지어 주춤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성수를 꼭 피해야 한다는 것처럼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신관님들에게 왜 말룸에게 권할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말룸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물어봐야 했다.
그런데 저 성수에 닿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본능이 저것에서 도망치라 외치고 있었다.
속에서 검은 것이 올라와 헛구역질이 났다.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음? 왜 그러십니까?”
고개를 갸웃한 조슈아 님은 성수가 든 병의 뚜껑을 열어 내게 가져왔다.
째깍대는 굉음이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들리는 듯했다.
저것은 나를 죽게 할 칼날이었다.
“저리 치워요. 그거 하지 마세요!”
나는 성수가 든 병을 매섭게 쳐냈다. 병이 바닥에 맞부딪혀 박살 나 뒹굴었다. 병에서 빠져나온 성수가 종아리와 발의 살갗에 잔뜩 튀었다.
“……어?”
성수와 접촉한 부분이 즉시 검게 부식되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보았는데도 믿기지 않아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끔찍한 고통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머리가 지끈거려 세상이 저물 듯했다.
“아…… 이게 뭐야. 아파…… 너무 아파─!”
“오필리아, 나 좀 봐요. 제발 정신 차려요!”
겁에 질려서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말룸이 날 끌어안은 채 무어라 이야기하며 날 진정시키려 했지만, 나는 그의 옷깃을 세게 말아 쥔 채 헐떡거렸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살아 있지 않았다. 이미 죽은 것이었다. 나도, 내 이 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