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31화
결국 성화에 못 이겨 옷을 갈아입었다. 승마복까지는 아니었고 원피스 형식으로, 일전에 시가지에 나갔을 때보다 약간 신경 쓴 수준의 옷차림이었다.
문제는 신발이었다. 황궁 어디에도 내 발 사이즈에 맞는 작은 신발이 없었다. 말룸이 톡 쏘는 말벌처럼 시종을 재촉했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황성에서 사전에 준비해 놓은 것들은 전부 굽 높은 구두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말룸에 의지해 걸어 다니기로 했다. 넘어지면 그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날 붙잡아줄 것이면서 그 사람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말해줘요. 당신은 발이 무척 작으니까, 걷기도 힘들 것 같아요.”
말룸이 수정궁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는 온종일 내 발에 대해 이야기했다.
“됐네요. 그거 편견이거든요. 피곤하긴 한데 오징어처럼 흐물흐물하게 걷다가 구를 정도는 아니고. 전에는 당신이 대책 없이 빨리 가서 접질렸던 거예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습관이란 무시할 게 못 되는군요.”
이해할 수는 있었다. 말룸은 손도, 체격도 모두 크니 그의 입장에서는 조그만 완두콩 같은 내가 신기해 보일 법도 했다. 단순히 먹이의 표면적 계산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남자가 내게만 집중했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황궁의 고풍스러운 벽화나 조각상에 슬쩍 시선을 주긴 했지만 이전처럼 성에 들여놓고 싶다느니 하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의 태도와는 상이했다. 행동 양식을 바꾸게 된 이유라도 있는지 그는 친근하게 다가오려 노력하고 있었다.
말룸은 사랑스러운 보석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날 관찰했다. 일전의 소름 끼치는 시선과는 명백히 달랐다.
나는 여러 의미로 그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말룸이 끊임없이 내 마음을 두드리면, 속절없이 기대고 싶어졌다. 홀로 망망대해를 떠돌아다니는 표류자는 다가오는 선박이 해적선이라 해도 그것을 염원하고 정을 주게 되니까…….
말룸이 희귀 생물을 발견한 동물학자처럼 눈을 빛냈다.
“당신 발이 이렇게 작을 줄은 몰랐어요. 제 손바닥에 들어오고도 한참 남을 것 같은데요?”
나는 표정을 구겼다.
“과장이에요.”
“아니, 진심으로. 당신 키도 작고, 손도 작고, 발도 작고, 얼굴도, 이목구비도 모두 작아서…… 잘못하면 부서질 것 같아요.”
확실히 오필리아의 발이 상당히 작았다. 이전 세계의 치수법대로 따지자면 220쯤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 발 사이즈의 성인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구에서만 해도 내 주변에 셋 정도 있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하나같이 골격이 커서 내 발이 더 작게 느껴지는 걸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앞만 보고 걸었다. 물론 속도는 무척 느렸다.
말룸이 또 장난을 쳤다.
“궁금한 게 있어요. 그렇게 먹이는데 왜 자라질 않는 거죠?”
“자랄 리가 없잖아요. 저는 성인이니까요.”
“그건 물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조금 더 자라줘요, 응? 혹시 태엽 인형 같은 건 아니죠? 태엽이 모두 풀리면 활동이 멎어버린다거나 그러면 곤란해요. 저는 당신을 평생 데리고 살 거니까.”
“헛소리.”
“……네?”
“아, 그게…….”
뱉어 놓고 아차 싶었다. 헛소리라니. 말룸이 너무 격 없이 다가오니 말이 편하게 나오고 말았다.
말룸의 표정이 산산조각 난 유리 주전자처럼 망그러졌다. 그는 난제를 마주한 학자처럼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성급했군요. 미안해요, 너무 장난쳤습니다.”
말룸이 어색하게 응대했다. 나도 손가락이 굽어 양옆으로 펼쳐진 황궁 담벼락의 벽돌이나 헤아렸다.
사실 ‘헛소리’ 말고 ‘표면적 넓은 먹이를 구하고 싶으면 이혼하고 다른 여자 찾아봐요’라고 이야기하고 싶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말룸이 무르게 굴어도 그 정도의 무례를 용납할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는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걸었다. 말룸이 남빛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대강 빗어 내렸다. 어색한 상황이 되면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남색 머리칼로 시선이 향했다. 잘 관리되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에 감탄사가 절로 났다.
그의 머리칼은 장인이 한 가닥 한 가닥 공을 들여 엮은 명주실 같았다. 팬지 꽃잎처럼 아름다웠고, 초저녁의 하늘을 그대로 옮겨 온 것처럼 선명했다. 흰색이나 노란빛 물감을 점점이 떨어트리면 밤하늘에 별이 떠오른 것 같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걷고 있으려니 말룸이 한 번 더 날 붙잡아 끌어당겼다.
“조심. 앞에 돌계단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공연히 턱을 만지작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호의였다. 가을의 햇살이 그를 말갛게 비추며 잔잔한 낯과 어우러졌다.
차분한 면모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말룸은 뱀 괴물이기는 하지만 보석이 빛을 잃을 정도로 잘 생긴 남자였다. 그는 시종일관 입안의 혀처럼 얌전하고 달콤하게 굴었는데, 그것이 독배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눈길이 갔다. 뱃속이 이상해질 듯했다.
나는 말룸의 껍질 안에 괴물이 들어앉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목덜미까지 붉어져 고개를 수그렸다. 황금빛 머리칼이 얼굴을 차양처럼 가려 속이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뱀과 사랑에 빠진 쥐, 쥐를 사랑하게 된 뱀.
말룸과 나의 사랑은 생물학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붉게 물든 얼굴이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아서…… 나는 그냥 열심히 걸었다.
말룸이 곱게 뻗은 손가락을 슬쩍 얽어 왔다. 나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의 체온은 이번에 열이 나듯 펄펄 끓었다. 말룸의 창백한 피부에 붉은 기가 옅게 피었다. 열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 역시 나에게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나는 그에게 휩쓸리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단속했다.
햇빛이 포슬포슬 내렸다. 가을 한복판이라기에는 적당히 후덥지근했다. 나는 살짝 들떴다. 경계하는 포식자가 곁에서 걷고 있었음에도 피가 빨리 돌았다.
이곳은 온 대륙을 통틀어 홀로 번영한 제국 레시우스의 수도 레헬른. 티포주 성의 시가지도 정경이 아름다웠지만 이처럼 사람을 압도할 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다.
레헬른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명목 하에 축제 분위기였다. 종종 고위 귀족의 결합을 공표/하기 위해 축제를 개최하기도 한다는 모양이었다.
음악이 크게 울려 귀가 먹먹했다. 퍼레이드가 노란 블록을 따라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양식의 음악과 역동적인 춤사위가 이지를 빼앗을 것만 같이 아름다웠다.
“상냥한 태양과 행성을 건축한 용의 축복이 있기를, 달빛과 물의 광기가 미끄러지듯 그대를 피해 가기를!”
연분홍빛 천을 양 팔목과 발목에 묶은 아름다운 무희들이 일제히 공중제비를 돌았다. 온갖 종류의 꽃잎과 알록달록한 비단 자락이 팔랑 내려앉았다. 나와 말룸의 모습을 본뜬 밀랍 인형은 행렬의 가장 선두에 있었다. 우리를 꼭 닮은 정교함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 뒤로는 화려한 가짜 보석과 우스꽝스러운 의상으로 치장한 광대들, 이야기꾼과 음악대, 신이 난 아이들이 따랐다. 모두의 면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때마침 흩뿌려진 종이 꽃잎이 내렸다. 말룸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꽃비 속에 고요히 있는 아름다운 남자는 현실감이 없었다.
“자, 선물이에요.”
말룸이 보란 듯 종이 꽃잎을 내게 내밀었다. 흰 장갑을 착용하고 있어서인지 그의 손바닥 위에 앉은 꽃잎이 돋보였다.
“고마워요. 종이인데도 진짜 같네요.”
“그렇죠?”
선명한 분홍빛 꽃잎을 마지못해 받자 말룸이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웃었다. 가슴에 꽃잎이 들어갔는지 감정이 파도쳤다.
“봐요, 모두 우리를 축복하고 있어요.”
나는 봄볕의 침대 위에 있는 듯 마냥 안온하고 행복하다는 어조에 아무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곳곳에서 마주하는 세계의 호의는 사방을 경계해야 하는 내게 벅찼다. 곁에서 보폭을 맞춰 걷고 있는 말룸은 우리의 결합을 축하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동요가 없었다.
똑바로 걸으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몸이 강풍에 휘날리는 대나무처럼 휘청거렸다. 마음이 술렁였다. 바람 따라 속절없이 떠밀려가는 파도처럼 기류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위태로운 신발, 축제의 한창, 자꾸만 밀려들어오는 사람들, 주의 깊지 않은 아이들의 무리와 대낮부터 들떠 술을 마신 주정뱅이들까지.
내가 자꾸 휘청거리는 걸 용납할 수 없었는지 말룸이 인상을 찌푸렸다.
“인파가 가라앉을 때까지 쉴 곳이 필요하겠군요.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입니다.”
말룸이 취한 행동은 또 내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그는 디저트 카페의 테라스를 발견해 날 그곳에 앉히더니, 음료 몇 가지와 디저트를 주문했다.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도저히 듣질 않았다.
그러더니 말룸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날 덩그러니 남겨둔 채 사라졌다. 부디 미아 찾기 방송을 이용하기 전에 돌아와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혼자라는 감각이 덜컥 들었다.
이곳은 나 자신을 잊어버릴 만큼 낯설었다. 불빛 없는 버스 정류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주변은 혼잡했고, 나 홀로 우두커니 고요했다. 내가 알던 세계와는 모습도, 양상도 달랐다.
애써 밀어 두었던 고독이 엄습해 음료의 빨대 끄트머리를 짓씹었다. 이때다 싶어 나는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아까도 디저트, 지금도 디저트. 내가 디저트만 흡수하는 기계인 줄 알아. 음료도 이렇게 많이 살 필요 없는데…… 싼 것도 아니고.”
확인한 디저트 가격표는 거의 번듯한 옷과 맞먹을 정도로 헉 소리가 났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힘없이 늘어져 힐을 잠깐 벗어두고 맨발을 동당거리고 있으려니 머리 위로 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뾰족한 눈으로 항의하듯 노려보았지만 말룸은 개의치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놀라지 말아요.”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말룸이 무릎을 굽혀 내 발을 살피기 시작했다. 기겁해서 발을 빼려 했지만 발목이 단단히 잡혀 불가능했다. 주변에서 이쪽을 주목하는 것이 확연히 느껴져 더욱 당황스러웠다.
“뭐 하는 거예요? 만지지 마요. 잠깐, 간지러워요!”
“가만히 있어 봐요. 발뒤꿈치가 얼마나 상했는지 보는 거예요. 걸을 때 계속 절뚝거렸잖아요. 새 신발을 신으면 항상 뒤꿈치가 벗겨지니까.”
샛노란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봐요, 피는 안 나지만 살갗이 많이 상했어요. 안 아파요? 다음부터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힐은 신지 말아요.”
“무도회에 초대받으면요?”
“어차피 드레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잖아요. 감히 당신에게 신발 지적을 할 수 있는 위치의 귀족도 없고.”
“그래도 다들 노력했는걸요. 제 발이 작은 걸 어떡해요?”
“작은 신발을 준비해 두었어야죠. 이건 황제 폐하께 정식으로 항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자, 신어봐요.”
말룸이 흰 쇼핑백에서 신발 한 켤레를 꺼내 발치에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가 꺼낸 것은 절대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촌스러운 디자인의 신발이었다. 샌들 형식이긴 했지만 끈에 붙어 있는 유치한 왕리본,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한 분홍 색감까지…….
말룸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덧붙였다.
“화내지 마요. 응? 작은 신발은 이런 것밖에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주문 제작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성으로 돌아가면 바로 베테랑 디자이너를 불러줄게요.”
“……당신도 이 축제 한복판에서, 종아리 다 내놓은 원피스를 입었는데. 이런 신발 신고 걸을 수 있어요?”
나는 딱딱 끊어 이야기했다. 말룸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가 자그맣게 들렸다.
“……아뇨.”
“이봐요.”
인상이 험악해졌는지 말룸이 달래듯 웃었다.
“어쨌든, 신어봐요. 잠깐이잖아요.”
그가 다정히 나를 응시했다. 이상한 기분이 치밀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결국 항복한 나는 촌스러운 신발에 슬그머니 발을 밀어 넣었다. 신발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듯 꼭 맞았다.
눈으로 확인해 사온 것치고는 발이 편했다.
땅에 발을 굴려보았다. 촌스러운 디자인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내 사이즈 신발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닌 건 알지만…….
“괜찮아 보이네요. 다행이다. 그렇죠?”
말룸이 굽혔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벗어둔 하이힐을 쇼핑백에 넣고 손에 들었다. 행동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그는 당연한 행동을 했다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금 당신이 얼마나 편안한 분위기인지 알고 있을까.
“자, 이제 가요. 신전까지는 10분 정도 남았으니 조금만 힘내요.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사고 싶은 건?”
고개를 저었다. 말룸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쏟아지며 내 어깨를 치자 말없이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머뭇거리던 말룸이 내 손을 잡아 왔다. 너무 세지도 않게, 너무 약하지도 않게, 힘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말룸 당신…… 기피증 있다면서요.”
물끄러미 축제 행렬을 보며 걷고 있던 그가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때마침 은하수 빛깔의 머리칼이 예쁘게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말룸은 가장행렬이 들고 다니는 거대한 액자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수채화처럼 유려했고 싱그러웠다.
“사람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닿는 걸 기피하는 정도예요. 그리고 괜찮아요, 당신은.”
입술이 비죽 나왔다.
“선택적 기피증도 아니고.”
“궁금해요? 왜 다른 사람과 닿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는지.”
“말해줄 거예요?”
“아뇨.”
입술이 더 비죽 나왔다.
“대신 궁금할 때마다 물어봐줘요. 제가 닿을 때마다, 그렇게 걱정해줘요.”
말룸의 손에 깃든 온기가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의 손은 내 손을 모두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당신만이 괜찮은 이유는…… 그것도 헤아려주면 좋겠군요.”
장갑의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그의 체온이 여실히 느껴졌다. 가끔 얼음처럼 차가워지기도, 들끓는 불꽃처럼 뜨거워지기도 하는 변칙적인 체온이.
“나라는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 줘요. 당신만의 답을.”
올려다 본 말룸의 얼굴은 긴장으로 얼룩져 있었다. 덩달아 내 얼굴에도 단풍이 잔뜩 피었다. 풋내가 서로를 얽어 놓았다. 민들레 홀씨가 앉은 것처럼 손끝과 심장 곳곳이 간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