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30화
짐작만 하던 크로노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마주한 후 나는 심히 혼란스러워졌다. 크로노의 거부는 상처받은 자의 거부였다. 과거 내가 겪었던, 결핍을 충족하지 못해 생긴 흉터와 찍어낸 듯 닮은 종류의 상실…….
이전에는, ‘오필리아’가 되기 전 지구에서의 나는.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설명하기를 사랑했다. 생명의 발자국을 뒤쫓는 과학과, 정확한 답이 도출되는 수학,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겉핥기로나마 배웠던 인문학까지. 모두 세상의 퍼즐을 해체하고 지식을 갈망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들이었다. 나는 수수께끼를 풀어내길 좋아했다.
하지만 능력은 지극히 평범했다.
평범한 말솜씨, 평범한 지능, 평범한 감정선, 평범한 학업 성취 능력, 전부 대체로 평범한 무언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인간에게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은 주고 재능을 내려주지 않은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무력하게, 로보가 귀환하기만을 바라며 말룸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걸까?
내게 그나마 봐줄 만한 점이 있다면 어딘지 안개를 닮아 음울한, 그러나 도화살이 있어 매력적이었던 미인의 외형이었다. 나는 키도 꽤 길쭉했고 생김새도 아시아 사람이라기에는 다른 구석이 있어 시선을 받았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껍데기는 일순간의 만족감만을 내릴 뿐 결핍을 채워주지 못했다. 오히려 내 외모는 소란스러움을 몰고 오는 독이었다.
답답하고 무서운 마음은 있어도 분한 마음은 없다. 능력에 따라 삶을 사는 게 인간이니까. 난 여전히 최선을 다해 발버둥치는 중이고, 결말이 어떻게 맺어지든 주저앉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태어나고 죽는 것, 삶의 끝에 흙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준비를 하는 것은 만만찮은 일, 일생일대의 고난이었다.
한 번의 여행을 본의 아니게 끝마쳤으니 그다지 삶에 집착할 것도 없는데, 어째서 이렇게 발가벗겨진 듯 괴로운 것일까. 나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할 때 겪는 끔찍한 고통과 고독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고 나니 시야가 뚜렷해졌다. 그러나 당장 로보와 함께 말룸에게서 도망치거나 크로노와 함께 있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나치게 무력했고, 불벼락에 맨몸으로 노출된 것처럼 금방 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속에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내 쓸모를 증명해야 했다. 크로노처럼 자존감이 낮아 쓸모를 부르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 기여하며 살아 있음을 느끼는 부류도 있었다.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 세계에 속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크로노모르테는 많은 화두를 던지는 사람이었다. 크로노가 사라졌는데도 나는 그에 대한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보인 것은 분명한 고독과 온기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말룸은 내가 크로노를 생각하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테지만 생각을 멈추겠다고 해서 쉽게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로노는 좀처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마주하자마자 눈물을 흘릴 만큼 그에게 내가 필요한 걸까? 이 세계에서 나를 순수한 의미로 필요로 해준 사람은 크로노가 처음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크로노의 빈자리를 곱씹고 있었던 듯했다. 말룸이 힘주어 내 이름을 발음했다.
“오필리아.”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주술이라도 깃들었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 시선을 속박하는 힘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생각은 끝났나요?”
내 관심을 얻자 말룸이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우아하고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 혼을 쏙 빼놓는 아름다운 몸짓이었다.
말룸이 자신의 머리칼을 정리해 태연하게 하나로 올려 묶었다. 사슴의 목덜미처럼 유려하게 뻗은 목선이 노골적이었다. 말룸은 설정상의 조카 걱정이라고는 한 톨도 하지 않았다.
뽐내듯 단장을 끝낸 말룸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올리는 대신 크로노의 공예품이나 얹어주었다.
말룸이 억지로 웃었다. 웃음이 잘게 조각 나 이어 붙이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나도 이제 이 뱀 양반의 만들어진 표정 정도는 곧장 가려낼 수 있었다.
“나무 조각이군요. 제가 그토록 쓰레기라고 매도했던. 버려도 되나요?”
고개를 젓자 말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저 모른 척했다. 악감정을 담아 살짝 치는 장난이었다.
“성에 가져가고 싶어요. 조잡한 것 같아도 소박하니 예쁘기만 한데요.”
말룸이 날 선 이유를 빤히 알면서도 그가 공예품을 잘 챙기도록 눈치를 줬다. 그는 내 뜻에 따라 공예품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거의 내팽개치듯 탁상 위에 두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말룸이 당연하다는 듯 옆에 섰다.
그와 나는 키 차이가 참 많이 났다. ‘오필리아’와 말룸의 외모는 아주 잘 어우러져 다이아몬드 샹들리에처럼 반짝거릴 것이다. 멀리에서 보면, 완벽한 한 쌍처럼 보일까?
말룸은 절대 기분 상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내 앞에서 항상 정중한 사내처럼 굴기를 선호했다.
“팔짱 낄래요?”
말룸이 다시금 제 팔을 내밀었다. 나는 자주 닿으려 하는 말룸이 의심스러워 견딜 수 없었지만 잠자코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주 약간이나마 신경을, 긴장을 풀 필요가 있었다.
잘생긴 뱀 괴물이 멋들어지게 움직였다. 귀족 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깃거리도 함께였다. 정확한 발음, 잘 조각된 남신상 같은 미소,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의 햇살. 그 모든 것들이 말룸을 위해 존재했다.
말룸이 예쁘게 미소했다. 창백한 낯에 붉은 입술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수도 레헬른은 무척 번화했지요. 옷은……. 평민인 척 다니려는 게 아니니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저보다는 당신이 더 눈에 띄는 것 같아요. 누가 봐도 말룸 발타사르 대공 전하네요.”
“감히 시비를 걸 수 없게끔 하는 겁니다. 내 아내에게 허튼 수작을 부리는 머저리들을 미리 차단할 수도 있고요.”
“당신한테 허튼 수작 부리는 사람은 없을까요?”
“내게요? 진심인가요? 당신 정말 내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하나도 모르는군요.”
말룸의 눈동자가 물가에 비친 달처럼 빛났다. 나는 부러 그 눈빛을 피했다.
“짐작은 가요. 당신이 다른 사람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요즘은 성격 단속 하면서 얌전히 지내고 있으니 무서워하지 마세요.”
그는 생각 끝에 이렇게 덧붙이곤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의 아름다운 옆얼굴을 멀거니 응시했다. 저 완벽한 인간의 껍질 안에 흉포한 뱀이 들어앉아 있다니…….
말룸에게 식인을 하는 괴물 뱀이냐고 물으면 그는 분명 난폭하게 돌변할 것이다. 마음에 두면 손해 보는 건 이쪽이었다.
한숨을 쉬었다. 드레스 때문에 움직이기가 편치 않았다. 신발도 굽이 높아 몸이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겠다.
전부 황궁의 사용인들이 예법을 지키라며 억지로 구겨 넣은 것들이었다. 티포주 성에서는 원피스 한 장만 걸친 채 맨발로 돌아다녀도 그 누구도 무어라 하지 않았었는데. 말룸이 먹이의 몸가짐에 별 관심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말룸이 대화의 연장선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레헬른은 레시우스의 수도이니 고위 귀족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건 흔한 일이에요. 정원에서의 일이 신문을 통해 퍼져나갔을 테니 함부로 접촉하려는 바보는 없을 겁니다.”
나는 삽시간에 ‘바보’가 되어버린 그 여자들을 애도했다. 평정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들의 상태가 나빠져 아케론 강가에 닿지 않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로 연락을 취해 사과 서신을 보내는 것이 나을 듯했다.
말룸이 수정궁 복도를 성큼 앞서나갔다. 나는 말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그와 함께 걷는 것은 저택의 수집품을 소개받은 이후 처음이었다.
말룸은 여전히 타인과 동행하는 것이 생전 처음인 사람처럼 보폭을 맞출 줄을 몰랐다. 매번 마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짧게 산책하기만 해서 보폭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잠시, 말룸! 너무 빨라요!”
다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오른발을 잘못 디뎌 삐끗하고 말았다. 몸이 아래로 형편없이 기울어졌다.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나는 형편없이 땅에 나뒹굴지 않았다.
“오필리아! 괜찮아요?”
말룸이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휘감아 지탱했다. 놀란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나는 토끼처럼 눈을 댕그랗게 떠 속을 다스렸다.
“다친 곳은?”
추태에 귀 끝이 홧홧해졌다. 말룸이 내 상태를 살폈다. 정성 들여 살피는 모양새가 잡은 고기에 흠집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사냥꾼 같았다.
“미안해요. 걸음이 빨랐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급해지는 바람에…….”
말룸이 작게 덧붙였다.
“누군가와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잡아줬으니까 괜찮아요. 삔 건 아닌 것 같으니 계속 가요. 많이 천천히……. 조금 전 당신 걸음에서 대략 네 배 정도 더.”
“네 배 말인가요? 하하, 알겠습니다. 당신의 명령대로 할게요.”
말룸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양 경쾌하게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는데. 표정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싫은 당근을 먹은 애처럼 부루퉁해져선 땅바닥만 보았다.
“아이 같아요, 오필리아. 어떤 점이 당신 맘에 안 들었을까? 초콜릿 사 줄까요?”
“아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해요. 아니면 버리고 갈 테니까.”
“하지만 당신 여기 길을 모르잖아요.”
“……조용히.”
“응, 알겠어요.”
말룸은 날 놀리는 데 재미가 들렸는지 심심찮게 장난을 쳤다. 그는 장미가 만발한 정원에 갇힌 양 즐거운 얼굴이었다.
“드디어 첫 데이트군요. 이것저것 선물해주고 싶어요. 그보다 신발을 먼저 사야겠어요……. 아니지. 불편하면 차라리 승마복으로 갈아입을래요?”
“하지만 다들 소곤거릴 거예요. 티포주 성에서처럼 편하게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남의 시선은 살아가는 데 쓸모없을 때가 많아요. 다른 사람 입맛에 맞춰 살다간 몸이 백 개라도 모자랄걸요?”
말룸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덧붙였다.
“어차피 사교계에서 제 평판은 바닥이에요. 저더러 얼굴만 멀쩡한, 염치없는 데다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작자라고 하던데요. 그런 남자에게 시집오게 해서 미안하지만 당신은 코 꿰였어요. 알죠?”
의외로 말룸은 자신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놀란 듯 말룸을 응시하자 특유의 미끄러운 웃음이 살짝 보였다.
이 양반이 요즘 왜 이렇게 날 놀린담. 크로노를 만나고 나서부터 부쩍 심해졌다. 진짜 뱀탕 만드는 법을 알아오기 전에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당신…….
말룸의 팔을 꼬집듯 세게 잡았다. 그러자 말룸은 자기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느니, 신관에게 보여야 할 것 같다느니 씨알도 안 먹히는 엄살을 부렸다. 말룸의 팔이 떨어져 나가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것이다. 톡 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크로노가 사라져 먹이를 독점할 수 있게 되어서인지 말룸은 유독 신이 난데다 이 상황 자체를 기껍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나는 말룸이 이렇게 나올 때면 종종 하곤 했던 상상을 슬그머니 풀어 놓는 수밖에 없다.
‘말룸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냥 가볍게 흘러가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빙의해 말룸을 만난 거라면.
이 세계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감수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당신은 인간이기를 포기해버린 걸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중요한 것은 육신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육신이 뱀으로 변했을지라도 마음을 놓지 않으면 되었을 텐데, 그는 육신과 함께 마음마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제대로 마음을 갖춘 이들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상대의 안녕과 즐거움을 바란다. 호의는 받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까지 보슬보슬한 햇빛 속으로 이끌었다.
말룸은 이것을 모른 채 오래 사는 것 하나만을 염원해 다른 값진 것들을 전부 바다 깊은 곳에 수장시켜 버렸을 테다.
그래서 나는 말룸이 뼈저리게 두려우면서도 때때로 가여워지곤 한다. 인간애를 누린 적이 없기 때문에, 베풀지도 못하게 된 존재 같아서.
당신은 내가 도망치고 나서 어떻게 살게 될까. 원작의 소설처럼, 마리아에게 처단 당하게 되는 걸까…….
발밑이 푹 꺼지는 듯했다. 이번만큼은 미래에 대한 당신의 무지가 어두운 밤처럼 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