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29화
말룸은 크로노모르테의 예언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 대화가 성립되질 않았다. 나는 크로노모르테의 예언을 자세히 해석하려 애를 썼지만 황자의 말은 먹구름처럼 모호해 뚜렷한 수확이 없었다.
특히 크로노는 한 번 바깥에 낸 예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다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예언에 대해 물으면 그가 답해주는 것도 크로노가 내게 호의를 지니고 있어 성립하는 특별한 상황이었다.
“부질없군요.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을 상대로 내가 대체 뭘 하는 건지.”
말룸의 낯이 서릿발처럼 가라앉아 지루함을 품었다. 그는 경쟁에서 이긴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기뻐 보이거나 유난을 떨지 않았다.
대신 말룸이 취한 행동은 간단했다. 그는 내가 디저트를 배 속으로 모두 삼켜 내면 다시 마카롱이나 케이크 따위를 입에 넣어주었다.
굳이 단 것을 거부할 이유도 없어 덥석덥석 받아먹으니 말룸은 집사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홍차를 따라주고, 다른 간식을 집어 내 입으로 나르고. 그 흐름에 크로노까지 편승하는 바람에 수많은 애인을 거느리고 살았다던 술탄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미남 둘 사이에 앉은 이 상황을 즐길 수도 없었다. 즐거움이란 여유가 있을 때에야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오필리아 님, 여기 있소…… 초코 케이크. 먹기 좋도록 한 입 크기로 잘라 두었지.”
“오필리아는 민트를 좋아한다. 초콜릿 따위야 민트의 밑이지. 자, 오필리아. 민트 맛 쿠키예요.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아 하면 제가 입에 쏙 넣어줄게요.”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 사람, 본성을 숨기고 유치원에서 일한 적 있는 게 아닐까?
“……제발. 저 배불러요. 둘 다 음식 갖고 장난치지 마요. 그건 당신들이 판촉하는 경쟁 상품이 아니니까.”
크로노는 말룸을 따라 하는 것이라 쳐도, 이 뱀 양반은 왜 이렇게 자꾸 먹이려고 하는 건지 나쁜 생각만 든다.
먹이의 부피를 키우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내 몸이 비쩍 마른데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붙지 않고, 리 경과의 운동에서도 수준 이하의 실력을 보이기는 했지만…….
말룸의 일에 정신이 팔려 뒷전으로 미뤄 두고 있었지만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내 몸은 고여 있는 것처럼 손톱도, 머리카락도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소름이 끼쳐 몸을 움찔 떨었다. 부디 좀비 같은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오필리아.”
몸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려니 말룸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너무 생각에 몰두했나 싶었지만 말룸도 크로노도 사색에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말룸이 나뭇조각을 만지작거리는 크로노를 배제하기로 한 듯 내게만 집중했다. 그는 한동안 말을 고르며 머뭇거렸는데, 자꾸만 내 약지를 흘끗거리는 것이 난파선에서 발견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세공해 만들었다는 결혼반지 때문인 듯했다.
“아, 반지. 깜빡했네요. 미안해요.”
미안함을 최대한 꾸몄지만 시큰둥함이 묻어나는 것은 별 수 없었다.
나는 평소 액세서리를 하지 않아 그 반지는 서랍 안에 방치되어 있었다. 말룸이 준 끔찍한 열쇠가 아니라면 달리 신경 쓰는 치장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결혼반지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결혼했다는 것도 실감 나질 않았고, 나는 신혼일기가 아니라 생존 일기를 쓰고 있었다.
말룸이 흰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무언의 압박에 손을 올리자, 그는 왼손 약지를 유심히 관찰하며 낙담한 듯 흐린 표정을 지었다.
“반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요? 하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손마디에 걸린다든지, 디자인이 부담스럽다든지…….”
말룸은 숲속에 홀로 동떨어진 사람처럼 쓸쓸한 얼굴이었다. 정작 자신도 장갑을 착용하느라 거추장스러운 반지는 하지 않고 있으면서.
크로노도 이 대화에 관심이 생겼는지 나뭇조각 위에 꽃잎을 흩뿌리는 걸 그만두고 내게 집중했다.
“액세서리를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요.”
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 답하는 게 빨랐다. 말룸에게 어설픈 미소를 지어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싫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우리 결혼반지인 걸요. 그래도 당신이 신신당부했으니 열쇠는 빼놓지 않고 가지고 다니는 중이에요.”
보란 듯 목에 걸린 열쇠를 집어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말룸은 못마땅해 보였다. 뱀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잔뜩 낙담한 표정이 비 맞은 여우를 연상케 했다.
“그다지 예쁜 열쇠도 아닌걸요.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당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어서.”
“아뇨, 아니에요. 충분해요. 제게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거 알아요.”
“그 열쇠, 중요한 물건이니까 당신께 맡긴 겁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아줘서 고마워하고 있어요. 하지만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죠.”
말룸이 평탄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는 봄날에 소풍을 나온 것처럼 편안해 보이기만 해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푸른 문을 열지 말아요.”
심장이 비탈길을 굴러 덜컥 바닥에 처박혔다. 푸른 문에 대한 두려움 탓도 있었지만, 말룸의 웃음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처럼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행복을 그리기가 참 쉽진 않네요. 어쨌든, 정말 중요한 물건이니까…… 잘 간수해 줘요. 누군가에게 주지도 말고, 뺏기지도 말고.”
“명심할게요. 애초에 금고 여는 것에만 쓰는걸요. 요즈음에는 금고 근처에도 잘 가지 않고 있어요. 제가 번 돈이 아니라…….”
“그 열쇠를 주는 것으로 저는 제 인생을, 제 모든 걸 당신에게 맡긴 거나 다름없어요. 그건 그런 의미니까.”
“…….”
“하지만 돈은 지금보다 더 많이 써 줘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상대에게 주고 싶어서 모아온 돈이니까.”
“……그럴게요. 고마워요.”
말룸의 미소가 부서지는 다이아몬드처럼 희었다.
그러면 나는 말룸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단정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소설 속의 잔악한 말룸과, 마치 날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는 말룸. 대체 어떤 말룸이 진짜 말룸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만약 내 앞의 말룸이 진짜 그라면, 그렇다면……. 내게 그가 뱀 괴물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그 소설이 어떤 맥락에서 형성되었는지 설명이 되질 않았다.
언젠가부터 말룸이 항상 곁에 있는 것이 생활 전반에 걸쳐 익숙해지고 말았다.
말룸이 절제된 동작으로 홍차를 따랐다. 금박으로 테두리를 입힌 작고 깨끗한 흰 찻잔에 홍색 물이 들었다. 말룸이 살며시 그것을 내게 밀어주었다. 난 찻잔만 가만히 쥐었다.
“오필리아. 신전에 가고 싶다고 했죠?”
말룸이 화두를 돌렸다.
뜻밖의 주제였다. 말룸의 입에서 먼저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룸은 원작에서 신전과 아주 척을 진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렇긴 해요. 그런데 그걸 당신이 왜?”
얼떨결에 대답하자 말룸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놀란 것 같군요. 신실해 보이지 않나 보죠?”
양심이란 게 있으면 거짓말도 그런…….
저도 모르게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는지 옆에서 크로노가 고요히 웃었다. 멋쩍기는 했지만 우리와 함께 있는 시간이 크로노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때가 된다면 좋겠다.
말룸은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에서인지 상당히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그가 턱을 괴고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은빛 식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샛노란 눈동자가 의미 모를 그늘을 품었다. 그는 무언가에 대한 증오를 내보이면서도 다 꺼진 재처럼 체념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티포주 성에는 신상도 예배 장소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당신 짐작대로 저는 신 같은 것을 믿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침 볼일이 있고, 당신도 원하니 들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어요.”
말룸이 신에 대해 명백한 악의를 드러냈다. 이빨을 놀리는 맹수 같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말룸이 한결 누그러진 기색으로 마카롱을 건네주었다.
“자, 또 다른 마카롱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크네요. 잘라줄까요?”
먹이의 부피를 늘이고 싶은 것은 알겠지만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것까지 받아먹으면 정말 한계였다. 뾰족한 눈매를 하곤 고개를 저었다.
“배부르다고 한 지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요.”
“아쉽네요. 하지만 더 먹어야 하지 않나요? 알렉산더에게 들었습니다. 살도 붙지 않고, 근육도 잡히질 않는다고.”
“움직이는 게 많이 나아져서 괜찮아요. 조금만 움직여도 힘든 건 비슷하지만요.”
여기 보라는 듯 체조를 하는 동작으로 팔을 휘휘 저었다. 썩 잘 되지는 않았다.
말룸과 크로노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꽝스러워 보였을 것은 인정한다. 한숨을 쉬고 홍차를 머금었다.
“크로노는요? 같이 갈래요?”
크로노의 눈매가 우울하게 누그러졌다.
“나는 열 살 생일날 이곳에 유폐되었소. 아버지께서는 나를 수치스러워하시지.”
“……예언 때문인가요?”
크로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내 말을 믿지 않고 미치광이로만 취급하니까.”
그의 말투가 문드러졌다.
“무도회도…… 함께하고 싶소. 바깥으로 나들이를 하는 것도, 신전에 가는 것도.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오.”
“크로노…….”
“오필리아 님, 나는 착하게 기다릴 수 있소. 그러니 꼭 이곳을 다시 찾아주시오……. 내가 보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크로노, 진정해요. 나 좀 봐요.”
크로노의 상태가 이상했다. 계속 그를 불렀지만 크로노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흘끗 바라본 말룸은 크로노의 이상 행동이 익숙하다는 양 팔짱을 낀 채 방관하고 있었다.
“예언을 알려주지 않아도 올 거예요.”
선언하듯 또박또박 말했지만 급격히 불안정해진 크로노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버릴 것이오. 나를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질 테고, 나는 쓸모없는 철판처럼 바닥을 구르겠지. 쓸모가 없으면, 나는…… 당신에게서도 미치광이가 될 뿐이오…….”
“아뇨, 저는 크로노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 좀 봐요. 좋은 생각만 하는 거예요. 네?”
“자아……. 그만……. 이걸 받아주시오.”
그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내 말을 차단해버렸다. 나는 그의 세계에서 추방당했다.
대신 크로노는 지금껏 만들고 있던 작은 공예품을 쥐여 주었다. 황자의 자세는 주눅이 들어 허물어졌고 건장한 육신에는 기운이 없었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크로노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마디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기다리겠소, 올 때까지.”
그가 물방울 깃든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 오필리아 님. 나를 버리고 가려 하시거든, 나는 말도 되지 않는 떼를 쓰며 당신에게 동정을 구걸할 것이오. 그래도 부디 경멸을 품지 말아주시오…….”
……그 누구도 갇혀 있어야만 하는 자는 없다.
크로노의 신은 대체 어떤 뜻으로 그에게 이런 운명을 내려주었던 걸까. 그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것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었다. 단지 화가 났을 뿐이다. 나를 제멋대로 책 속에 집어넣고, 크로노를 미치광이 예언가로 만든,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신이라는 작자에게.
무의식중에 바라본 말룸은 그것 보라는 듯 무덤덤한 낯이었다.
나는 그의 불신에 동조하고 싶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비극만을 내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