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28화 (28/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28화

04. 프랑켄슈타인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무도회가 미루어졌다. 말룸은 그쪽에서 잘못한 것이기에 보상도 없다고 했다. 속이 착잡해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말룸에게 제제를 가하는 자는 없었다. 나도 더 이상 그에게 첨언하지 않았다. 정원 일을 굳이 들쑤시지도 않았다.

나는 말룸에게 기대가 없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탈출 경로를 상상하면 그만이었다.

어찌 되었든, 황제를 보기 위해 수도로 온 것이라 나도 말룸과 함께 황제를 만나게 되었다.

헬리오스 레시우스는 한 왕국을 제국으로 탈바꿈한 레시우스의 7대 황제였다. 그는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멋들어지게 잘생긴 이였으나 말룸을 노려보는 등 날을 세웠다. 말룸이 동생 신분을 얻기 위해 그를 협박한 것이 확실했다.

말룸이 나를 의식했는지 그에게 살가운 동생인 척 굴었다. 그러자 식초를 사발로 들이켠 듯 구겨지는 황제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알현이 끝난 후.

황성에서 나와 말룸은 세트로 취급되어 기피 대상 1순위가 되었다.

잠시 복도를 돌아다녔는데도 마주치는 사람마다 얼굴이 희게 질려 도망치기 일쑤였다. 말룸이 상대하지 말라 신신당부한 황족은 크로노모르테를 제외하고선 본 적도 없었다. 듣기로는 크로노의 형제들이 있다는데……. 덕분에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상황이었다.

귀족에게 둘러싸이는 귀찮은 일이 사라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싫어해야 하는 것인지.

충격적인 상황이 폭풍처럼 몰아쳤고, 대놓고 숙부의 아내에게 관심 있음을 표현하던 크로노까지 만나는 바람에 그 다음다음 날인 오늘까지도 나는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였다.

그래도 그 예언자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3황자는 전에 당부했던 대로 방문 시간을 미리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들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행동하는 말룸과 비교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크로노는 빈번히 찾아와 예쁜 꽃이며 잔가지 따위를 엮은 공예품을 건네주었다.

공예는 그의 취미인 듯했다. 독특하게 생긴 나뭇조각에 들꽃을 엮어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는데, 엉성했지만 소박하니 예뻤다.

말을 나누는 빈도가 늘자, 나는 어느 틈엔가 크로노를 친밀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는 가끔 먹구름 덮인 아침 햇살처럼 흐리게 웃었는데, 그 미소는 멍든 마음을 풀어주는 구석이 있었다.

크로노는 자연물보다 흉악한 검이나 창이 더 잘 어울리는 외모를 가졌지만 무척이나 마음이 여렸다. 그는 망가진 꽃나무 얘기를 할 때도 눈물지었으며, 말룸에게 선전포고 비슷한 것까지 했음에도 나를 수정 같은 눈동자로 응시하기만 할 뿐 마음을 강제하지 않았다.

크로노가 건네는 공예품에는 손자국이 여럿 나 있어 그가 쏟아 부은 정성이 드러났다. 나는 공예품을 손에 쥐며 어린아이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감동했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었다. 화려한 방 오른쪽, 작은 책상 위에 쌓여 가는 크로노의 공예품이 그의 마음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공예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마음 없는 결혼이라지만 내가 말룸의 서류상 아내인 것은 맞았으니까.

그러나 크로노는 내가 자신의 선물을 받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내가 공예품을 받아줄 때에만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주었다.

또, 그는 내가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잡아내었다. 크로노는 아주 순하게 행동하며 슬쩍 쓰다듬어주길 종용했다. 거절하면 시무룩해져서 쓸쓸한 표정이 되는데, 도저히 손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어떻게 크로노모르테를 미치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제 보니 무척이나 영악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크로노의 예언은 큰 위안이었다. 이 삭막한 세계에서 어느 정도의 차분함을 되찾은 건 그의 덕이 컸다. 수명을 측정할 수 없다는, 날 볼 때마다 고장 나버릴 것 같다는 그 거짓말 같은 예언이야말로 내 삶을 보장하는 수표였다.

나는 크로노를 만날 때마다 공예품을 받아주는 대가로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느냐 물었고, 크로노는 한결같이 ‘측정할 수가 없소…… 미안, 미안하오’ 하며 당황스러운 낯을 했다. 답을 들으면 나는 크로노가 원하는 대로 그를 쓰다듬어주었다. 크로노는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모양인지 매양 작게 웃었다.

그가 수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크로노는 증표였다. 내가 잘 하고 있다는, 이대로만 한다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증표.

크로노가 내게 안정을 찾아주었다면, 당혹감을 선사하는 쪽은 말룸이었다.

나는 크로노와 함께 있으면 말룸이 반드시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갔다.

정원 사건 이후로 말룸은 태도를 바꿨다. 그는 크로노를 쫓아내거나 윽박지르며 소란을 피우는 대신 황자와 경쟁하듯 값비싼 보석이나 달콤한 디저트를 선물했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말룸은 크로노의 자연물을 가치 없는 쓰레기라고 비하했고, 크로노는 특유의 몽롱한 말투로 ‘숙부는…… 관계없소’나 ‘순리를 빗겨간 속물……’이라며 뚜렷한 반감을 표현했다.

크로노는 말룸에게 겁을 먹지 않았다. 특히 그 의미심장한 말들 때문에 크로노가 말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내 거처를 방문하는 시간이 대부분 겹쳤다. 사이에 놓인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말룸도 그날 이후로 내 눈치를 보는 것인지 잠깐이라도 살벌한 기색이나 살기를 내비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오필리아. 많이 피곤한가요? 자, 허브 차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도록 해요. 달콤한 마카롱도 가져왔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민트 맛이에요.”

티타임.

말룸이 내 오른편에 의자를 끌어와 앉아 마카롱을 내밀었다. 먹여주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이곳에 우리 둘만 자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필리아 님……. 이번에는 작은 버섯을 쫑쫑 올려놓은 나뭇조각을 가져왔소. 운명의 바다 위, 선원을 태운 돛단배인 셈이오.”

왼편에 앉은 크로노가 주눅 든 표정으로 공예품을 내밀었다.

“어젯밤에 비가 왔소. 오늘도 비가 올 것 같긴 하오. 공예품에 비 냄새를 담아 댁으로 가져가시어, 볼 때마다 나를 생각해주시오…….”

그러자 말룸이 아주 뾰족해졌다.

“오필리아는 텃밭을 가꾸는데 뭐 하러 나무 쓰레기를 집에 가져가겠나. 쓸데없는 수작이다. 그 텃밭은 오필리아가 나와 단둘이 가꾸는 사랑의 결실이니 네가 끼어들 틈은 없다.”

“대체 뭐가 사랑의 결실인데요!”

보다 못해 소리치자 말룸이 매끄럽게 웃었다.

“우리 둘이 가꾸는 공간이니 당연히 사랑의 결실이죠.”

내 거부에 허둥댔던 것은 다 옛말이었다. 그는 과연 오래 산 뱀답게 노련했다.

“텃밭 가꾸기에 대한 책도 샀습니다. 전에는 제가 서툴러 모종을 여럿 망쳤지만 이제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거예요. 정원 양식을 공부하고 나면, 여러 식물 종을 한데 모아 심는 것보다 예쁜 텃밭을 가꿀 수 있게 되겠죠. 당신도 그 장소를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법적 부부’니까.”

말룸은 크로노 들으라는 양 법적 부부를 강조했다. 크로노가 바짝 대꾸했다. 놀랍게도, 크로노는 그 유치한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오필리아 님은…… 내가 필요하오. 숙부가 아니라…….”

말룸이 얄밉게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제국에 나를 대신할 남자는 없다. 오필리아는 그저 신기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네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겠지.”

“오필리아 님은 결국 도망칠 텐데. 숙부에게 바다 냄새 나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소…….”

말룸이 그 말을 간과하지 못하겠다는 양 안광을 퍼렇게 빛냈다. 크로노가 황족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말룸의 힘을 끔찍해하는 내가 없었다면 크로노의 숨통이 끊어질 만큼 예리한 기세였다.

그러나 나는 크로노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룸은 크로노의 말에 반박하지 않는 나에 상처받은 기색이었다.

나는 탁자에 늘어질 듯 턱을 괴었다.

“그만하고 마카롱이나 먹어요. 당신들이 제 유일한 말동무인데 매번 만나면 싸우기나 하고. 싸우는 것도 힘들지 않아요?”

입 좀 다물라는 뜻에서 사이좋게 마카롱 하나씩을 물려주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크로노는 표정이 폈고, 반대로 인간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듯한 말룸의 얼굴은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말룸은 마카롱을 우물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냅킨에 뱉어내기까지 했다.

“저는 단 것을 싫어한다고 일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정말이지…….”

“……미안해요. 장난을 친다는 게 너무 과했어요. 하지만 저는 말룸이 음식을 먹는 건 본 적이 없어요. 식사 자리에서도 저 혼자 먹잖아요.”

“소식하는 버릇이 들어 괜찮다고 했을 텐데요.”

“그래도 사람이 식사를 챙겨야 힘이 나죠. 하는 일도 많으면서.”

걱정하는 척 말하자 말룸의 안색이 나아졌다.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을 걸려 할 줄 알았는데, 되레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말룸이 턱을 괴곤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안개비처럼 매혹적으로 미소했다.

친애가 깊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뱃속에 몇 명이나 들었든 모두 잊고 모른 척 품에 안기고 싶어지는…… 굉장히 사랑스러운 상대를 대하듯 작게 들뜬 친애.

“걱정해주는 건가요?”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 당연한 걱정을 저는 받은 적이 없어서요. 생각보다 인간들은 타인에 무관심하거든.”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말룸은 요즘 자기의 과거를 암시하는 말을 불쑥불쑥 했다.

말룸이 접시 위의 몽블랑을 한 입 크기로 잘라 포크로 콕 집었다. 그러더니 다시 유혹적으로 웃으며 내 입가에 그걸 가져왔다.

“자, 오필리아. 좋아하죠? 사랑하죠?”

나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저 몽블랑이 얼마나 달콤한지 내 혀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어서요. 좋아하죠? 사랑하죠? 자, 대답하지 않으면 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내게 마카롱을 억지로 먹여서 심술부리는 겁니다.”

“……맞아요. 좋아해요.”

“다음 말은?”

“사랑해요! 됐죠? 빨리 주기나 해요! 크로노도 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부끄럽게…….”

“하하, 응, 알았어요. 하지만 듣고 싶어서.”

황실 요리사의 실력은 매우 빼어났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몽블랑을 받아먹었다. 사육당하는 쪽의 상하관계가 불분명한 것도 같았다.

생각에 잠겨 몽블랑을 우물거리다 얼핏 본 것은, 의기양양한 낯으로 크로노를 바라보는 말룸과 기분이 상한 듯한 크로노였다.

나는 모르는 척 디저트나 크게 우물거렸다. 모든 사람의 사이를, 그것도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 말룸과 크로노의 관계까지 중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슬슬 티타임을 정리하고 싶었다. 입안에 단내가 돌아 불편했다.

크로노와 말룸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투덕거리다가도 한순간이나마 멈추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크로노의 공이었다. 크로노는 굳이 말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룸이 무어라 시비를 걸어도 입을 꾹 다문 채 이 년 칠 개월이니 하며 말룸의 수명이나 거론했다.

말룸이 무어라 일침을 놓으려 해도 크로노는 머릿속에 무언가 휘몰아친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나 했다. 사막에서 손님이 올 것이라느니, 용에게 닿을 것이라느니, 결국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라느니…….

용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막에서 누군가 찾아오고, 말룸이 실패하는 일이 생긴다는 의미인 듯했다.

나는 말룸의 실패에 주목했다. 그것이 나와 관련된 실패였으면 했다. 내가 도망치는 것에 성공함으로써 생기는, 그의 실패.

누군가의 실패를 진심으로 바라게 될 날이 올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상대가 남편이라는 것도.

역시 인생은 아이러니했다.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무도회가 미루어졌다. 말룸은 그쪽에서 잘못한 것이기에 보상도 없다고 했다. 속이 착잡해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말룸에게 제제를 가하는 자는 없었다. 나도 더 이상 그에게 첨언하지 않았다. 정원 일을 굳이 들쑤시지도 않았다.

나는 말룸에게 기대가 없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탈출 경로를 상상하면 그만이었다.

어찌 되었든, 황제를 보기 위해 수도로 온 것이라 나도 말룸과 함께 황제를 만나게 되었다.

헬리오스 레시우스는 한 왕국을 제국으로 탈바꿈한 레시우스의 7대 황제였다. 그는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멋들어지게 잘생긴 이였으나 말룸을 노려보는 등 날을 세웠다. 말룸이 동생 신분을 얻기 위해 그를 협박한 것이 확실했다.

말룸이 나를 의식했는지 그에게 살가운 동생인 척 굴었다. 그러자 식초를 사발로 들이켠 듯 구겨지는 황제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알현이 끝난 후.

황성에서 나와 말룸은 세트로 취급되어 기피 대상 1순위가 되었다.

잠시 복도를 돌아다녔는데도 마주치는 사람마다 얼굴이 희게 질려 도망치기 일쑤였다. 말룸이 상대하지 말라 신신당부한 황족은 크로노모르테를 제외하고선 본 적도 없었다. 듣기로는 크로노의 형제들이 있다는데……. 덕분에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상황이었다.

귀족에게 둘러싸이는 귀찮은 일이 사라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싫어해야 하는 것인지.

충격적인 상황이 폭풍처럼 몰아쳤고, 대놓고 숙부의 아내에게 관심 있음을 표현하던 크로노까지 만나는 바람에 그 다음다음 날인 오늘까지도 나는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였다.

그래도 그 예언자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3황자는 전에 당부했던 대로 방문 시간을 미리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들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행동하는 말룸과 비교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크로노는 빈번히 찾아와 예쁜 꽃이며 잔가지 따위를 엮은 공예품을 건네주었다.

공예는 그의 취미인 듯했다. 독특하게 생긴 나뭇조각에 들꽃을 엮어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는데, 엉성했지만 소박하니 예뻤다.

말을 나누는 빈도가 늘자, 나는 어느 틈엔가 크로노를 친밀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는 가끔 먹구름 덮인 아침 햇살처럼 흐리게 웃었는데, 그 미소는 멍든 마음을 풀어주는 구석이 있었다.

크로노는 자연물보다 흉악한 검이나 창이 더 잘 어울리는 외모를 가졌지만 무척이나 마음이 여렸다. 그는 망가진 꽃나무 얘기를 할 때도 눈물지었으며, 말룸에게 선전포고 비슷한 것까지 했음에도 나를 수정 같은 눈동자로 응시하기만 할 뿐 마음을 강제하지 않았다.

크로노가 건네는 공예품에는 손자국이 여럿 나 있어 그가 쏟아 부은 정성이 드러났다. 나는 공예품을 손에 쥐며 어린아이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감동했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었다. 화려한 방 오른쪽, 작은 책상 위에 쌓여 가는 크로노의 공예품이 그의 마음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공예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마음 없는 결혼이라지만 내가 말룸의 서류상 아내인 것은 맞았으니까.

그러나 크로노는 내가 자신의 선물을 받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내가 공예품을 받아줄 때에만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주었다.

또, 그는 내가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잡아내었다. 크로노는 아주 순하게 행동하며 슬쩍 쓰다듬어주길 종용했다. 거절하면 시무룩해져서 쓸쓸한 표정이 되는데, 도저히 손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어떻게 크로노모르테를 미치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제 보니 무척이나 영악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크로노의 예언은 큰 위안이었다. 이 삭막한 세계에서 어느 정도의 차분함을 되찾은 건 그의 덕이 컸다. 수명을 측정할 수 없다는, 날 볼 때마다 고장 나버릴 것 같다는 그 거짓말 같은 예언이야말로 내 삶을 보장하는 수표였다.

나는 크로노를 만날 때마다 공예품을 받아주는 대가로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느냐 물었고, 크로노는 한결같이 ‘측정할 수가 없소…… 미안, 미안하오’ 하며 당황스러운 낯을 했다. 답을 들으면 나는 크로노가 원하는 대로 그를 쓰다듬어주었다. 크로노는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모양인지 매양 작게 웃었다.

그가 수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크로노는 증표였다. 내가 잘 하고 있다는, 이대로만 한다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증표.

크로노가 내게 안정을 찾아주었다면, 당혹감을 선사하는 쪽은 말룸이었다.

나는 크로노와 함께 있으면 말룸이 반드시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갔다.

정원 사건 이후로 말룸은 태도를 바꿨다. 그는 크로노를 쫓아내거나 윽박지르며 소란을 피우는 대신 황자와 경쟁하듯 값비싼 보석이나 달콤한 디저트를 선물했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말룸은 크로노의 자연물을 가치 없는 쓰레기라고 비하했고, 크로노는 특유의 몽롱한 말투로 ‘숙부는…… 관계없소’나 ‘순리를 빗겨간 속물……’이라며 뚜렷한 반감을 표현했다.

크로노는 말룸에게 겁을 먹지 않았다. 특히 그 의미심장한 말들 때문에 크로노가 말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내 거처를 방문하는 시간이 대부분 겹쳤다. 사이에 놓인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말룸도 그날 이후로 내 눈치를 보는 것인지 잠깐이라도 살벌한 기색이나 살기를 내비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오필리아. 많이 피곤한가요? 자, 허브 차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도록 해요. 달콤한 마카롱도 가져왔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민트 맛이에요.”

티타임.

말룸이 내 오른편에 의자를 끌어와 앉아 마카롱을 내밀었다. 먹여주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이곳에 우리 둘만 자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필리아 님……. 이번에는 작은 버섯을 쫑쫑 올려놓은 나뭇조각을 가져왔소. 운명의 바다 위, 선원을 태운 돛단배인 셈이오.”

왼편에 앉은 크로노가 주눅 든 표정으로 공예품을 내밀었다.

“어젯밤에 비가 왔소. 오늘도 비가 올 것 같긴 하오. 공예품에 비 냄새를 담아 댁으로 가져가시어, 볼 때마다 나를 생각해주시오…….”

그러자 말룸이 아주 뾰족해졌다.

“오필리아는 텃밭을 가꾸는데 뭐 하러 나무 쓰레기를 집에 가져가겠나. 쓸데없는 수작이다. 그 텃밭은 오필리아가 나와 단둘이 가꾸는 사랑의 결실이니 네가 끼어들 틈은 없다.”

“대체 뭐가 사랑의 결실인데요!”

보다 못해 소리치자 말룸이 매끄럽게 웃었다.

“우리 둘이 가꾸는 공간이니 당연히 사랑의 결실이죠.”

내 거부에 허둥댔던 것은 다 옛말이었다. 그는 과연 오래 산 뱀답게 노련했다.

“텃밭 가꾸기에 대한 책도 샀습니다. 전에는 제가 서툴러 모종을 여럿 망쳤지만 이제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거예요. 정원 양식을 공부하고 나면, 여러 식물 종을 한데 모아 심는 것보다 예쁜 텃밭을 가꿀 수 있게 되겠죠. 당신도 그 장소를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법적 부부’니까.”

말룸은 크로노 들으라는 양 법적 부부를 강조했다. 크로노가 바짝 대꾸했다. 놀랍게도, 크로노는 그 유치한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오필리아 님은…… 내가 필요하오. 숙부가 아니라…….”

말룸이 얄밉게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제국에 나를 대신할 남자는 없다. 오필리아는 그저 신기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네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겠지.”

“오필리아 님은 결국 도망칠 텐데. 숙부에게 바다 냄새 나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소…….”

말룸이 그 말을 간과하지 못하겠다는 양 안광을 퍼렇게 빛냈다. 크로노가 황족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말룸의 힘을 끔찍해하는 내가 없었다면 크로노의 숨통이 끊어질 만큼 예리한 기세였다.

그러나 나는 크로노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룸은 크로노의 말에 반박하지 않는 나에 상처받은 기색이었다.

나는 탁자에 늘어질 듯 턱을 괴었다.

“그만하고 마카롱이나 먹어요. 당신들이 제 유일한 말동무인데 매번 만나면 싸우기나 하고. 싸우는 것도 힘들지 않아요?”

입 좀 다물라는 뜻에서 사이좋게 마카롱 하나씩을 물려주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크로노는 표정이 폈고, 반대로 인간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듯한 말룸의 얼굴은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말룸은 마카롱을 우물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냅킨에 뱉어내기까지 했다.

“저는 단 것을 싫어한다고 일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정말이지…….”

“……미안해요. 장난을 친다는 게 너무 과했어요. 하지만 저는 말룸이 음식을 먹는 건 본 적이 없어요. 식사 자리에서도 저 혼자 먹잖아요.”

“소식하는 버릇이 들어 괜찮다고 했을 텐데요.”

“그래도 사람이 식사를 챙겨야 힘이 나죠. 하는 일도 많으면서.”

걱정하는 척 말하자 말룸의 안색이 나아졌다.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을 걸려 할 줄 알았는데, 되레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말룸이 턱을 괴곤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안개비처럼 매혹적으로 미소했다.

친애가 깊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뱃속에 몇 명이나 들었든 모두 잊고 모른 척 품에 안기고 싶어지는…… 굉장히 사랑스러운 상대를 대하듯 작게 들뜬 친애.

“걱정해주는 건가요?”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 당연한 걱정을 저는 받은 적이 없어서요. 생각보다 인간들은 타인에 무관심하거든.”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말룸은 요즘 자기의 과거를 암시하는 말을 불쑥불쑥 했다.

말룸이 접시 위의 몽블랑을 한 입 크기로 잘라 포크로 콕 집었다. 그러더니 다시 유혹적으로 웃으며 내 입가에 그걸 가져왔다.

“자, 오필리아. 좋아하죠? 사랑하죠?”

나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저 몽블랑이 얼마나 달콤한지 내 혀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어서요. 좋아하죠? 사랑하죠? 자, 대답하지 않으면 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내게 마카롱을 억지로 먹여서 심술부리는 겁니다.”

“……맞아요. 좋아해요.”

“다음 말은?”

“사랑해요! 됐죠? 빨리 주기나 해요! 크로노도 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부끄럽게…….”

“하하, 응, 알았어요. 하지만 듣고 싶어서.”

황실 요리사의 실력은 매우 빼어났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몽블랑을 받아먹었다. 사육당하는 쪽의 상하관계가 불분명한 것도 같았다.

생각에 잠겨 몽블랑을 우물거리다 얼핏 본 것은, 의기양양한 낯으로 크로노를 바라보는 말룸과 기분이 상한 듯한 크로노였다.

나는 모르는 척 디저트나 크게 우물거렸다. 모든 사람의 사이를, 그것도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 말룸과 크로노의 관계까지 중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슬슬 티타임을 정리하고 싶었다. 입안에 단내가 돌아 불편했다.

크로노와 말룸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투덕거리다가도 한순간이나마 멈추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크로노의 공이었다. 크로노는 굳이 말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룸이 무어라 시비를 걸어도 입을 꾹 다문 채 이 년 칠 개월이니 하며 말룸의 수명이나 거론했다.

말룸이 무어라 일침을 놓으려 해도 크로노는 머릿속에 무언가 휘몰아친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나 했다. 사막에서 손님이 올 것이라느니, 용에게 닿을 것이라느니, 결국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라느니…….

용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막에서 누군가 찾아오고, 말룸이 실패하는 일이 생긴다는 의미인 듯했다.

나는 말룸의 실패에 주목했다. 그것이 나와 관련된 실패였으면 했다. 내가 도망치는 것에 성공함으로써 생기는, 그의 실패.

누군가의 실패를 진심으로 바라게 될 날이 올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상대가 남편이라는 것도.

역시 인생은 아이러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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