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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27화 (27/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27화

「꽃무릇」

티포주 성 중앙, 석산이 화려하고 정갈히 피어난 정원.

그 누구도, 말룸조차 들어올 수 없는 토지의 제공. 이것이야말로 리 알렉산더가 말룸 발타사르를 돕는 조건으로 요구했던 단 한 가지였다.

엘프의 무덤이 정원처럼 대지 위에 뿌리를 내렸다. 공사 중이라는 허술한 변명 속에는 절멸한 일족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이 실타래처럼 진득하게 엉켜 있었다.

잡벌레가 규칙 없이 제멋대로 울었다. 무성히 자란 풀을 정리하는 이도, 매일 찾아 제주를 바치는 방문객도 없었다. 이따금 걸음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귀 뾰족한 사내, 리 알렉산더뿐이었다.

그는 너무 오래 연명해 지리멸렬해진 생이 견딜 수 없을 때, 혹은 검은 상어의 배 속으로 사라진 여동생이 생각날 때면 정원을 찾았다. 평소에는 부러 신경을 두지 않으려 했다. 비참한 현재에 묶인 자에게 찬란했던 과거는 맹독이었다.

엘프는 신단수에서 열매의 형태로 태어났는데, 한 가지에서 난 엘프들이 서로와 형제자매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자연으로, 신단수로 돌아가는 것이 삶을 온전히 매듭짓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엘프는 다른 종족처럼 묘지를 만들거나 비석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 알렉산더는 그들을 기억하고 싶어 멋대로 묘지를 만들었다.

흔한 묘비조차 없었다. 얼핏 보기에는 꽃무릇만 가득 핀 야트막한 동산에 불과했다.

꽃무릇은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사시사철 피었다. 생물의 법칙을 거스른 일이었다. 모두의 염원이나마 옮겨 담은 흙에는 꼭 이렇게 꽃무릇이 피었다. 꽃은 신록을 사랑하는 그의 일족답지 않게 처량한 독을 머금어 붉었다.

알렉산더가 쓰고 있던 우산을 유독 무성히 핀 꽃무릇 위로 드리웠다. 차가운 빗줄기가 아름다운 엘프를 적셨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는 가진 생명을 대지에 흩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을비 속에서 점점 핏기를 잃어버렸다.

단언컨대, 모두의 무덤을 티포주 성 한가운데에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라딘라티의 수족이 똬리를 튼 곳이니까.

다만 새롭게 만들어진 세계의 땅은 천 년 전 구세계의 사람인 그에게 발붙이길 허락하는 법이 없어서, 사기로 오염되고 순리를 거스른 곳에 무덤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한때 엘드라코의 왕이었던 자는 백성을 잃고 홀로 남았다.

이곳에 서면 지하로부터 새어 나오는 라딘라티의 광기도, 증오도, 검은 인어가 짊어진 끔찍한 죄도 확실해졌다.

엘프가 마른세수를 했다. 명색이 왕이었으면서도 일족을 보존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 컸다. 세계가 갑작스러운 멸망의 때를 맞이했을 때, 자신은 무엇을 했어야 했나…….

그는 다만 무력했다. 용이 내린 신단수를 등에 짊어지고 이미 끊어진 별의 수명을 연장하려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선수를 친 것이 라딘라티였다.

그 검은 인어는 수많은 인어들의 목숨을 제물로 세계 수명을 자신에게 덧대었다. 세계는 다수의 생명력을 흡수한 그를 신으로 착각해 멋모르고 인어를 받아들였다.

결국 라딘라티는 멸망한 세계를 지탱하는 새로운 신이나 다름없어졌다.

그자는 세계의 연장을 위해 자신의 수명을 세계와 동일시한 것이 아니었다. 라딘라티는 영생을 살기를 바랐다. 오욕이었고, 끝을 모르는 깊은 거만이었다.

그는 행성과 묶인 이후로도 행성을 통치하거나 재앙을 억누르지 않았다. 그 탓에 요르나스는 여전히 척박했으며 곳곳이 불타올랐고, 엘드라코는 얼음 속으로 곤두박질친 듯 얼어붙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라딘라티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딘라티는…… 아틀란티스와 하이스트림의 트리아이나는, 도저히 그럴 만한 인어가 아니었다. 알렉산더야말로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트리아이나 본인보다도 그를 더 잘 알았다.

네 종족의 화합을 위해 마련된 공식 석상에서 알렉산더는 찬란히 빛나는 인어들의 왕, 아틀란티스와 하이스트림의 트리아이나와 곧잘 어울렸었다.

인어의 머리칼은 바다를 닮았고, 파도를 형상화한 듯 희게 물결쳤다. 그 대양을 담은 인어를 알렉산더는 깊이 친애했다.

트리아이나는 사람들이 칭하길 신이 내린 통치자였다. 바다의 왕은 악함과 욕망, 분노와 원망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이 거세당한 것처럼 상냥하고 다정했으며 온건하면서도 굳건했다.

모르겠다…… 어째서 그토록 상냥한 남자가 자신의 욕망 하나만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무기력한 마음을 가지고서 진정 영생을 바라고 있었는지는.

하지만 이제 와 이유를 알아차린대도 의미가 없었다. 라딘라티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그자는 수인족과 엘프를 멸족시켰고, 숱한 학살을 자행했다. 그가 내린 피가 산 그림자에 얹혀 한때는 산천이 틈 없이 붉었다.

알렉산더는 구세계의 마지막 유산으로써 세계가 다시 성장하게끔, 그리고 스러져 먼지가 된 이들의 애도를 위해 라딘라티를 처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신들이 떠난 여파로 생긴 행성의 상처가 아물어 이제는 라딘라티라는 쐐기 없이도 행성 존속에 무리가 없게 되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울부짖으며 사그라든 동족을 생각하면 절대 그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알렉산더는 라딘라티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온통 도려내어 토막토막 분쇄하고 싶었다.

라딘라티는 절대악이었다. 신이 내린 왕이라 칭송받았던 주제에, 재앙으로 절멸해가는 구세계를 구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영생을 위해 세계의 목숨을 떠받치는 쐐기가 되었다, 감히.

말룸 발타사르도 교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자가 자신의 주인을 배신한 것은 언젠가 있을 법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뱀이 세계 수명과 연관된 구세계의 사정을 알 리 없었고, 그렇다면 그 사내는 순전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라딘라티를 배신했다는 것이 되었다.

인기척이 났다.

알렉산더를 제외하고 정원에 걸음 할 수 있는 이는 이 성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교단의 대신관, 렉스 칼른.

삼 년 전, 말룸 발타사르의 요청을 받고 라딘라티의 사념체를 억누르기 위해 알렉산더와 함께 티포주 성으로 숨어든 자였다.

그가 햇살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리 알렉산더를 불렀다.

“엘로힘.”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이군. 나쁘지 않아.”

알렉산더,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영혼 깊이 묻은 엘프가 옅게 웃었다.

오랜 세월동안 신전에 협력했지만 눈앞의 늙은 인간처럼 청렴하고 편한 이는 없었다. 렉스는 일전에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었는데, 그곳의 식구들이 말룸과 같은 존재 중 하나인 거미 괴물에게 살해당했었다. 그 또한 숱한 비극을 목도한 자였다.

리 알렉산더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그가 우산대를 제대로 어깨에 걸쳤다.

알렉산더는 세상 돌아가는 일과 담쌓은 눈치 없는 기사도 아니고, 원수를 목전에 두어 분노에 찬 사냥꾼도 아닌, 미풍에 심장을 맡긴 평온한 엘프로 되돌아갔다. 그제야 엘프는 자신의 외모에 걸맞은 기품과 고결함을 풍겼다.

“저택이 조용합니다.”

렉스가 공손히 이야기했다. 그는 늘 정중했다. 가슴에 분노를 품은 채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사람이었다.

알렉산더가 김빠졌다는 듯 시큰둥하게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룸 내외를 예뻐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동안은 그렇겠지. 그놈이 눈앞에서 사라지니 속이 다 시원하군. 물론 지하에서 앵앵대는 건 아직 남아 있지만.”

“가까이에서 본 오필리아 님은 어떠셨습니까?”

리 알렉산더의 낯이 순식간에 침잠했다.

“그 유약한 여자 말이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봤을 것 같은데도 비렁뱅이라니, 모순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시신을 보듯 생기가 하나도 없었지.”

엘프가 취조 결과를 털어놓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평범하다. 대체 말룸이 그 여자를 왜 주워왔는지 알 수가 없을 만큼.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고, 짐작 가는 것이 있기는 하다.”

“짐작 가는 것이라면…….”

“평범에 대한 강박.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지, 녀석은 행복한 가정에 대해 환상이 있다.”

오필리아는 말룸을 격 없이 대했다. 그가 대공이라는 것도, 자기가 거리 출신이라는 것도 전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룸은 그런 그자에게 끌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겠지만, 결국 평생의 반려로 오필리아를 선택하게 되었겠지.

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분 고하가 없는 분 같았지요. 그래서 발타사르의 태도가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처음 오필리아 님을 데리고 왔을 때에는 작위적이었는데 말이지요.”

렉스의 맞장구에 리 알렉산더가 인상을 찌푸렸다. 말룸 발타사르와 라딘라티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파악할 수 없는 존재가 늘어난 셈이니 달갑진 않았다.

“미심쩍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그자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더군. 트리톤을 찍어낸 듯 닮은 인어와 조심성도 없이 떠드는 걸 들었다.”

“예? 설마 오필리아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또 누굴 이야기하겠나? 말룸 발타사르? 그 녀석은 항상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니 논외다.”

렉스는 깜짝 놀랐다. 오필리아가 도저히 그럴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매우 평범했다. 공부를 따라오는 것은 익숙한 일인 양 나쁘지 않았지만 특별히 똑똑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악한 마음을 품을 정도로 성미가 비뚤어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잘 교육받은 티가 났고 평균 이상의 윤리의식을 가졌다.

리 알렉산더가 시선을 꽃무릇에 고정했다. 그는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듯, 혹은 과거의 나날을 떠돌아다니듯 상념에 잠겨 있었다.

“기가 찰 정도였다. 심장까지 결정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진심인 모양이야. 어쨌든, 봉인이 안정되었으니 난 관심 없다. 본인이야 심장을 빼놓은 데다 주술을 온통 박아 넣었으니 몸 상태가 이상한 것은 감수해야지.”

엘프의 어조가 꺼끌꺼끌해졌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녀석을 사랑하지 않아. 패닉에 빠질 정도로 경계하고 있지. 그 여자는 한계다.”

리의 초록빛 눈동자가 빗물을 머금었다.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말룸 발타사르의 정체를. 하지만 어떻게? 이야기가 성립되질 않는다. 그 여자는 말룸과 만난 지 며칠 만에 결혼했지. 그러니 성에 올 기회도 없었다. 말룸 녀석이 정체가 들통 나도록 허술하게 행동하진 않았을 테고.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은데…….”

“오필리아 님과 접촉할 생각이십니까?”

“글쎄. 겁에 질려 도망가는 영양은 대개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볼 수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걸 봐. 그걸 모르는 건 눈에 뭐가 씐 뱀 녀석뿐이겠지. 녀석은 아니라고 했지만 분명 반동의 위험이 산재할 정도로 그자를 깊이 원하고 있다.”

알렉산더의 낯이 납처럼 푸르스름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살았다.

렉스가 안타까운 낯빛을 띠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때로 죽음은 축복이 될 수 있다. 그것을 박탈당한 자의 말로란 얼마나 비참한지.

리 알렉산더는 라딘라티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었고, 라딘라티를 살해하려 했지만 실패해 검은 인어와 영혼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리 알렉산더는 라딘라티가 죽기 전까지 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반대로 라딘라티가 죽으면 그때야 비로소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리 알렉산더는 삶보다 안식을 간절히 염원했다. 일족이, 그의 백성이 시커먼 바다 밑으로 사라진 후의 삶은 죽음보다 고통스러웠다.

“특히 그 여자는 생김새나 버릇이 너무 닮아서 보고 있기가 힘들다.”

알렉산더가 고해하듯 털어놓았다. 렉스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대꾸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라딘라티를 처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엘프가 무너진 태도를 보일 때면 어김없이 따라붙는 이름이 있었다.

“포인세티아, 내 사랑. 어떻게 그 정도로 닮을 수 있는지 모를 정도다. 달콤한 것을 먹을 때 눈부터 감는 하찮은 버릇까지 똑같아.”

한때 왕과 함께 엘프 왕국을 통치했던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었다. 이 세계에서 견줄 바 없다던 미인, 강하고 총명하며, 순리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푸른 신목의 포인세티아.

리 알렉산더는 포인세티아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과거의 왕좌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기품 있는 자가 박제된 모습을 렉스는 죽기 직전까지 잊을 수 없을 듯했다.

알렉산더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마른 가지에는 결코 꽃이 필 수 없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고, 행복도 마찬가지지…… 현재를 살아가면서 이전의 찬란함을 찰나 느꼈대도 그것은 기만이나 섬망이다.”

엘프의 머릿속에 오랜 풍경이 하나 스쳐지나갔다.

연못 위에 우뚝 선 버드나무가 햇살과 산들바람을 맞이해 부드럽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 단단한 가지 위에 편안한 듯 걸터앉은, 이 엘로힘의 파도, 나의 아름답고 푸른 왕…….

오가는 말은 없었다. 비만 추적추적 내렸다.

렉스는 그냥 오래도록 사내의 곁을 지켜주었다. 지친 엘프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끔, 이미 내린 결정을 굳힐 수 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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