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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25화 (25/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25화

눈앞에서 사람이 썩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설산의 조난자처럼 얼어붙어 끝내 말리지 못했다. 죽음이 상기되어 두렵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내가 죽을 것이라는 위험 때문에.

“많이 놀랐나요? 당신이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제가 가진 힘은 워낙 유명하니까요.”

“힘이라고요? 그건 힘이 아니에요. 그런 걸 힘이라고 하지 않아요. 사람을 썩게 만드는 힘이라니, 그건 힘이 아니라 저주예요. 폭력이라고요. 당신이 무슨 권리가 있어서 남에게 폭력을 휘둘러요? 제가 말을 듣지 않아도 그럴 건가요? 끝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를 썩게 만들어 땅의 양분으로 만들 건가요?”

횡설수설했다. 정제하지 못한 말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입가를 가리고 올라오는 신물을 눌러 삼켰다. 목구멍에 바늘이 돋친 듯 아팠다.

말룸이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가시가 훑고 지나간 듯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진정해요. 오필리아, 그건 힘이 맞아요. 생명을 썩게 만드는, 모든 일을 편하게 해주는 수단이죠.”

“그건 힘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말 했잖아요. 당신은, 그러면 안 돼요.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남을 고통스럽게 해서는 안 돼요……. 그래선 안 되는 거예요.”

“남을 고통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요? 하지만 인간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당신은 아직 순수를 간직하고 있지만 꿈속에서 사네요.”

나는 불길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단 한순간도 진정하지 못했다. 모르는 오지에 홀로 내던져진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부디 당신이 그 순수를 오래 간직하길 기원할게요.”

뱀이 대수롭지 않은 듯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조차 달의 조각처럼 황홀했다. 독 있는 꽃을 닮은 남자였다.

그는 내가 어째서 겁을 먹었는지 알지 못했고, 단지 자신의 능력이 생소해 내가 이 꼴이 된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말룸이 품은 인격적인 결함이 비죽 솟은 가시처럼 도드라졌다.

“심문 당할까 봐 그런 건가요? 정말 괜찮아요. 이 제국에 내 힘을 모르는 이는 없죠. 또, 저들이 먼저 우리를 모욕했으니 적당한 처벌이었습니다. 조금 더 온건한 방법으로 검을 사용해야 했을까요? 가지고 있진 않지만 부탁했다면 가져올 수 있었겠죠. 아니면 재판에 넘겨야 했을까? 자아, 진정해요. 천천히 호흡해요. 피하지 말고. 응?”

말룸이 눈을 초승달처럼 밝게 휘었다. 그가 집요하게 어르고 달랬다.

“이건 위험하지 않아요. 잘 제어할 수 있어요. ……오필리아. 오필리아? 잠깐만, 나 좀 봐요.”

말룸이 연신 속삭였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듯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절절해 애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말룸을 마주 안지도 않고, 파고들지도 않은 채 그저 그의 품에 매달려 있기만 했다. 몸에 힘이 빠져 어떤 동작도 취할 수가 없었다.

말룸이 무어라 항변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가 무엇이라 하는지……

“제발, 잘못했어요.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나 버리지 말아요, 당신을 위해 심장까지 바쳤단 말입니다…….”

……들리지가 않았다.

큰 충격에 머리가 멍하고 귓가에 이명이 윙윙거렸다. 날파리 떼를 마주한 것 같았다.

말룸의 체온이 지저로 곤두박질쳤다가 다시 타올랐다. 그의 체온은 여전히 변칙적이었다. 말룸의 품은 나를 단단히 감싸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는 방패였지만 동시에 나를 찌르는 비수였다.

말룸이 나를 보다 단단히 끌어당겼다. 그는 포식자가 먹이를 삼켜 뱃속에서 소화하듯 느리고 힘 있게 나를 깊이 옭아맸다.

“오필리아. 당신이 아직 날 사랑하지 않는 거 알아요. 지금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도요. 당신이 겁먹지 않도록 제가 더 잘할 테니까…….”

그러나 참 이상한 일이었다.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것은 분명 나여야 할 텐데, 애원하는 쪽은 그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뱀의 속을 헤아리려 들지 않았다. 귀를 막고 한껏 웅크린 채 그의 품에 얹혀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 여자들은 죽음의 형상을 산 자의 세계로 끄집어 낸 것처럼 되어 간신히 숨만 쉬었다. 오르페우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발견한, 썩고 짓무른 피부의, 반은 살고 반은 죽은 에우리디케처럼…….

말룸은 그들이 겪는 고통에는 좁쌀만큼의 상념도 없는지 무어라 말을 걸기만 했다.

어느 누구도 말룸에게 죄를 묻거나 질책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변에서는 ‘그럴 만했지, 뭐’, ‘저주를 타고난 대공의 면전에 대고 신부 욕을 하다니.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만 해도 자비로운 처사 아닌가’ 하고 소곤대기까지 했다.

그럴 만했다고? 사람이 그 꼴이 났는데. 자비로운 처사라고…… 발끝부터 썩어 들어가 숨만 겨우 몰아쉬게 되었는데.

이곳의 윤리관은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지구와 궤를 달리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납득은 다른 문제였다.

영혼부터 벌벌 떨렸다.

내 잘못이었다. 말렸어야 했다. 말룸은 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으니 벌금이나 물리라고 말했어야 했다. 정신이 잠깐 나갔던 것이다.

그에게서 도망칠 수나 있을까? 말룸은 신랑 역할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신부인 척 비위를 맞춰 삼 년 후 그의 자비에 기대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만일 실패한다면, 나도 땅 속에 묻힌 상한 생선처럼 썩어 말룸의 뱃속에 들어가게 되겠지.

말룸은 애당초 인간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삼켜 잡아먹음과 동시에 타인이 존중받을 권리도 함께 집어삼켰다.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말룸과는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언제든 나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몸을 비틀어 내려 달라는 의사 표시를 했다. 그러나 말룸은 나를 땅에 내려주지 않았다. 그가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 이쪽을 응시했다. 사금 같은 눈동자가 다급히 파도쳤다.

하지만 되었다. 말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원작의 그와 왜 다른 행보를 보이는지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려줘요…….”

말룸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라는 괴물이 치가 떨리게 끔찍했다.

“잠시만요. 설명할 수 있어요.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고칠 수 있습니다.”

그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조각난 조화를 화병에 억지로 꽂아 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다. 내게 애원할 필요가 없을 텐데도 그는 매번 이렇게 약한 척을 했다.

나는 고갯짓으로조차 긍정 표시를 하지 않았다. 그제야 말룸은 거의 울듯이 웃으며 나를 서서히 땅에 내려주었다.

“제가 뭔가를 잘못한 거죠?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게 있었던 거죠?”

말룸은 꼭 부모에게 내쳐진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간절히 잡고 싶은 사람처럼.

“미안해요. 저는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적하면 반드시 고쳐 보일게요. 당신이 제 선생님이 되어주는 거죠. 당신 입맛대로 나를 가르쳐서, 당신이 원하는 모습대로의 신랑을…….”

“괜찮아요.”

기운이 죽 빠졌다. 몇 달 치의 에너지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냥 평생 그렇게 살아요.”

증오도, 두려움도, 우울감도 모두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탈력감이 가득 남았다.

말룸의 태도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 마디에서 나와 다르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식인을 해 인간성이 사라지다시피 한 괴물 뱀, 나는 특별히 똑똑하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 여자.

죄책감이 없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자신을 내 입맛대로 개조하고 또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는 아무리 괴물이라도 지나쳤다.

말룸은 상냥한 신랑 연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저 말은 그가 그토록 집착하던 평범에서 천 리나 벗어나 있었다. 규칙을 강요하며 사람을 썩게 만드는 것 말고는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듯싶었다. 방법을 알지 못하니 목적을 위해 매달리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지쳤다. 당분간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앞이 캄캄해 천지 분간이 힘든 밤의 산속에나 있고 싶었다, 그럼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로보가 돌아오는 날로 단숨에 시간을 뛰어넘고 싶었다. 그라면 이것저것 기념품이라도 풀어 놓으며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모험 이야기를 통해 나를 안심시켜줄 것 같았다.

로보는 나의 환상이었다. 심해 깊은 곳에 터를 잡은, 아름다운 비늘을 가진 자유로운 인어.

인파가 급작스럽게 사라졌다.

나는 꽃나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룸이 끈질기게 곁을 지켰다.

그는 자신의 호소가 무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더는 변명하지도, 첨언하지도 않았다. 단지 깊은 달처럼 내 주변을 빙빙 공전하기만 했다.

나뭇잎이 속도 모르고 예쁘게 푸르렀다. 다른 세계라 그런지 처음 보는 식물도 많았다. 빨갛고, 노랗고, 얼룩덜룩한 꽃들이 마치 별처럼 정원을 떠다녔다.

‘로보가 준 향주머니는 짐가방에 잘 있겠지?’

액운을 막아 준다고 하더니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로보를 생각할 수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침묵이 습관처럼 되었을 무렵, 적막 속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을 주목했다. 말룸보다도 체격이 건장한 미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 사내는 맹견이나 표범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다부졌으며 선이 굵은 외모를 가졌다.

남자는 흑색 정복을 가지런히 빼입고 이쪽을 관찰하고 있었다. 검정 머리칼을 짧게 잘라 뒤로 넘긴 깔끔한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이마 위로 몇 가닥 흘러내린 잔머리가 인간다운 틈을 흘렸다.

사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동자였다. 반짝이는 은이나 수정 따위를 닮은 은백색 눈동자가 나와 말룸 사이의 공간을 헤집듯 유영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는 내가 이 세계에서 본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단단해 보였으나, 그런 굵은 선을 가졌으면서도 강하다는 생각이 좀체 들지 않았다. 사내는 먹구름을 몰고 우울에 잠긴 신처럼 무기력한 낯이었다.

그때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풍성한 속눈썹이 한 번 차양을 내려 기묘한 눈동자를 숨겼다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내어 놓았다.

그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말룸과 나는 각자의 사건에 사로잡혀 무어라 응대할 상황이 아니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남자는 아주 정갈하면서도 붕 뜬 음성으로, 말룸을 정확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삼 년…… 이번에는 삼 년 남았소, 숙부님. 아니, 아니지. 이 년 칠 개월 하고도, 조금 더…… 기묘한 노릇이오. 당신의 끝은 늘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감이 서질 않았다. 해석을 바라고 말룸을 응시했지만, 그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는 듯 차갑게 응대했다.

“그렇겠지. 미치광이의 예언은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이번에는 나를 보고 고장 나지 않는 것이 신기하구나.”

말룸이 사무적으로 내게 그 남자를 소개했다.

“오필리아. 이쪽은 일전에 이야기했던 조카, 크로노모르테 레시우스. 그리고 크로노. 이쪽은 내 아내, 오필리아. 상대할 일 없을 테니 인사는 적당히 하도록.”

말룸의 소개 아닌 소개에 크로노모르테 레시우스, 제국의 미치광이 3황자는 몽롱한 어조로 말을 풀어 놓았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극중 배우를 만난 것처럼 달뜬 시선으로 나를 담은 채였다.

“드디어 당신을 만났군…… 오필리아 님, 방황 끝에 이 행성으로 돌아온 명왕의 사람. 나는 당신을 참 오랫동안 기다렸지.”

“네? 아, 네…… 저도 반가워요.”

“나는 당신에 대해 계산할 수가 없소. 고장이 날 것 같소……. 하지만 숙부의 수명은 앞으로 조금이오. 그걸 말해주고 싶어서…… 부러 이곳으로 왔다오. 숙부는 내 말이나마 받아쳐주니까……. 답례인 셈이지.”

나는 머리끝까지 쭈뼛 서서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잡아 애원하듯 이야기했다.

맹수 같은 남자가 한참 작은 나에게 잡혀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귀여운 것도 같았지만 감상은 찰나에 불과했다. 심장이 불안으로 폭발할 듯 쿵쾅거렸다.

“그 얘기 자세히 해주세요. 제 수명을 계산할 수 없다뇨? 그리고 말룸의 수명이 이 년 하고도 칠 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의미죠? 말룸은, 아, 팔을 잡은 무례는 사과드립니다, 황자 전하. 하지만 말룸은…….”

그러자 이어진 크로노모르테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결코 약한 면모를 보여서는 안 될 위치에 있는 권력자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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