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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24화 (24/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24화

폭풍 속을 내달리다 절벽 밑으로 추락해도 이보다 진흙 범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갑자기 현실 속으로, 잔혹 동화 속으로 내던져진 듯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꼭 말아 쥔 채 화창하게 피어난 푸른 덤불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덤불이 검게 울룩불룩 일어 몸체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마차를 타고 레헬른에 도착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일은 연회에 초대받은 귀족들이 머무는 공간인 수정궁에서 벌어졌다.

수정궁은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는 말룸의 설명답게 완벽한 건축미를 자랑했다. 크로노모르테 레시우스, 말룸이 미치광이라 매도했던 3황자도 이곳에 유폐되어 있었다.

나는 극구 함께하겠다는 말룸과 정원을 산책하게 되었다. 그를 밀어낼 뚜렷한 구실이 없었다.

정원 건축물은 신전 일부를 떼어다 옮겨 놓은 듯했다. 무성한 덤불 틈새로 보이는 오래된 조각상이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수정궁 정원이 말룸의 심미안을 만족시킨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집품과 이곳의 조각상을 비교하며 티포주 성 정원을 수정궁처럼 개조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오랫동안 마차 안에 앉아 있어 약한 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몸이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말룸의 부축을 받았다. 말룸은 어깨를 감싸 자신에게 기대도록 했다. 흘끗 올려다 본 그는 잔잔한 호수처럼 진중했고 싫은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사나운 늑대를 길들인 듯 속이 날뛰었다. 흑백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속내를 캐낼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몸을 풀어내기 위한 산책조차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가 왔다는 소식이 그새 퍼졌는지, 말 나르기 좋아하는 귀족들이며 하인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마구 떠들기 시작했다. 입이 촉새보다도 빨라 부리라도 달아주고 싶었다.

“저기 좀 봐요! 세상에, 무척 아름답네요. 평민 특유의 천박함도 없고, 적당히 화젯거리가 될 만큼 고결해 보여요.”

“부인도 참. 아무리 그래도 거리의 평민이잖아요. 잘 봐요, 비린내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많이 뿌린 모양이에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저런 건 어디서 구했을까요? 독하기도 해라. 잘못 버릇이 들리면 고생하는 건 저쪽인데 말이에요. 향수 뿌리는 매너도 배우지 못했나 봐요.”

여자들이 연신 부채를 펄럭거렸다.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 자락을 보란 듯 가벼운 손짓으로 털어내기도 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저 사람들은 기선 제압인지 갑질인지를 위한 구실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심지어 향수 냄새는 독하지 않고 딱 적당했다.

그보다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 머스크 향은 내가 아니라 말룸의 향수 냄새였다.

나는 고양이를 만난 새처럼 말룸의 눈치를 살폈다. 말룸은 정원 중앙에 우뚝 선 채 덤불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작위적으로 가라앉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저냥 상냥한 낯이라 착각할 법도 했다.

모욕을 당했음에도 말룸이 이렇게까지 태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말룸은 저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머리에 새똥만 찬 인간들이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었다. 말룸이 여기에서 폭발해 본체를 드러내면 끝장이었다. 대공은 순식간에 괴물로 몰리고 나는 화형 당하는 미래가 선명했다. 어떻게든 말룸의 시선을 돌려야 했다.

나는 아무 덤불이나 가리키며 억지로 신난 듯 말을 꾸몄다.

“저, 말룸! 꽃이 참 예뻐요.”

“이 덤불은 초가을에 꽃을 피우지 않아요, 오필리아. 푸른 덤불만 무성하군요.”

“마음의 눈으로 보면 예쁜 꽃송이가 있을 거예요. 예술적인 환상을…… 느껴보는 거죠.”

예술적인 환상?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말룸은 호랑이 옆에서 취침하는 병아리를 발견한 양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농담이에요. 저기, 신경 쓰지 말아요. 저는 정말 괜찮은걸요.”

“저자들은 결과적으로 날 모욕했습니다, 오필리아. 저는 그 무엇보다도 제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무척 혐오하지요.”

말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저들이 도전하고 있잖아요.”

“뭘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사자는 쥐를 사냥할 때 전력을 다하지 않잖아요. 그렇죠? 저는 당신과 조금 더…… 신혼부부처럼 있고 싶은데.”

행여 말룸이 폭발할까 그가 입은 예복의 소맷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저런 떠들어댐 하나로 당신 권위가 실추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사내는 샛노란 눈을 빛내며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요…… 당신과 함께하는 첫 외출에 굳이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겠죠. 장소를 옮길까요?”

말룸이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듯 미소 지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진땀이 났다. 왜 내가 뱀 사육사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노력을 무시하려는 모양인지 떠드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대공인 말룸이 내 곁에 붙어 있는데도 대화 수위가 높았다. 그 폄훼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할 말을 잃게끔 했다.

“저 구부정한 자세 좀 봐요. 교육 받지 못한 태가 나네요. 그렇죠?”

“아까워라, 저 외모에. 혹시 귀족 집안의 사생아가 아닐까요? 저렇게 아름다운 평민은 세상에 없는 법이니까요.”

대체 어떤 생각으로 저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결혼식 당시, 하객들은 말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입을 벙긋하지 못했었다. 그저 저들이 생각이 없다고 밖엔, 혹은 말룸이 내게 그새 질린 것이라 느꼈다고 밖엔 추측이 되질 않았다. 확실히 나의 거부 때문인지 말룸과 내 사이에 연인 특유의 기류가 부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저 사람들은 지나쳤다.

“정말이지, 대공 전하가 불쌍하네요. 아름다운 여자가 가지고 싶다면 인형을 주문제작하면 되셨을 걸.”

“하지만 뭔가 더 있을 듯해요. 단순히 아름다운 여자라면 홍등가에도 널려 있잖아요. 밤 상대를 원한다면 정부로 두면 되었을 텐데, 역시 대공 전하의 속은 되짚어 봐도 모르겠어요.”

“하긴, 그분께서 독특한 행보를 보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긴 하죠.”

……입술을 깨물었다. 대화가 너무 역겨웠다.

외면하고 있던 서러움이 순식간에 범람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저런 말까지 들어야 해? 내가 이 괴물 뱀한테 결혼하자고 했나?

아니었다. 말룸이 먼저, 그가 먼저 손을 내민 것뿐이었다.

터져 나오려는 짜증과 서러움을 막기 위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데도 폐허 위 홀로 내동댕이쳐진 양 비참했다.

“이런데도 참아야 하나요? 당신을 저렇게나 깎아내리고, 더러운 오물이 묻은 입으로 속살거리는데?”

말룸이 잘 벼려낸 칼을 대장간에서 막 꺼낸 사람처럼 서슬 퍼렇게 안광을 빛냈다. 샛노란 눈동자가 귀기에 가려져 빛을 잃었다. 그는 화를 억누르려는 것 같기는 했으나, 인내심도 메말라 버렸는지 내가 쥐고 있던 소맷자락을 살며시 떼어냈다.

“어차피 우릴 모르는 사람들 얘기잖아요. 제발 좀 진정해요.”

말룸이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표정, 하지만 저 밑에는 들끓는 용암이 바깥으로 터져 나올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과하게 긴장해 숨이 줄타기를 하듯 불안정했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눈치 빠른 말룸이 친히 허리를 굽혀주었다.

“전 괜찮다니까요. 진심이고요.”

귓가에 대고 그를 홀리기라도 할 것처럼 염원을 담아 속삭였다. 지금 말룸을 막지 못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 될 것만 같았다. 허세로 사람을 위협하는 것과 진심으로 상대를 죽이려 하는 것은 달랐다. 말룸은 명백히 후자였다.

“지금까지 잘 하고 있었잖아요.”

그러나 내 말이 기폭제가 된 듯 그의 기세가 노도와 같이 돌변했다.

“잘 하고 있었다고요? 예, 물론 그렇죠. 제게 도전하는 것들을 요리해 땅의 거름으로 만들어주는 식으로 잘 살아왔죠.”

말룸이 나와 황금빛 눈을 맞추곤 사악하리만치 활짝 웃었다. 그는 사냥을 성공할 것을 미리부터 단정 지은 포식자였다.

스산한 기운이 들어찼다. 평화롭고 따스했던 야외 정원의 분위기가 검게 가라앉았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치밀었다.

몸을 움츠리며 말룸을 올려다보자 그는 내게 겉옷을 둘러주었다. 하지만 나는 옷가지 따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룸이 무언가 끔찍한 일을 벌이려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감히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막아서면 저들이 아니라 네가 죽을 것이 빤하니 못 본 척 목숨이나 부지하라고, 너는 한없이 무력하니 숨을 죽인 채 살아남으라고.

말룸이 몸을 돌려 귀족 여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는 더 이상 천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설령 외모에 홀려 천사라 여겨도 그는 종말의 나팔을 손에 쥔 심판자였지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선한 이가 아니었다.

귀족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서로를 붙든 채 두어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나 말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비가 결여되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으나 모두에게 좋은 운명을 내리지 않은 것처럼…….

“감히.”

말룸이 건조한 목소리로 딱 한 마디 읊조렸을 뿐이었다.

푸르른 초목이, 덤불이, 각종 나무와 심지어 그 위의 작은 새들까지 시시각각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멀쩡한 것이라고는 생명 없는 것, 즉 울타리를 이룬 돌이나 야외 테라스 탁자 위의 유리 화병뿐이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말룸의 발밑에서부터 뻗어 나온 수십 갈래의 검은 기운이 뱀처럼 땅을 유영했다. 대공은 뱀을 부리는 악마였다.

그 불길한 안개 줄기가 여자들에게 다가가 발목을 옭아맸다. 그러자 두 여자의 몸체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혹은 파도에 쓸려 나가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그들은 땅바닥을 기며 연기에 속절없이 휩쓸린 채로 꺽꺽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몸을 집어삼킨 것은 죽음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몸 속 모든 장기가 눈사태 속에 파묻힌 듯 시리게 아렸다.

인기척 없는 한적한 시골길, 뒤따라오는 괴한, 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묻지 마 살인, 배를 몇 번이고 난도질했던 은빛 칼날…….

말룸은 지루한 낯이었다. 차라리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면 조금 더 나았을 법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싶었다. 차라리 병원 응급실에서, 혹은 저승에서 눈을 떠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여자들은 지옥 속에 있었다.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으나 비명은 채 단어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혀를 잘못 놀린 죄로 생살이 썩어 들어가는 형벌을 받고 있었다.

“각오한 것 아니었나? 자살 방법이라면 아주 참신한 것으로 골랐군.”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다. 그들은 육식 뱀을 목전에 둔 쥐 떼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동상처럼 있었다.

말룸이 찰나 나를 흘끗거리곤 힘을 거뒀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미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입을 놀리지 못할 것이다. 이전처럼 살아가지도 못하겠지.

말룸이 재판 없이 내린 벌은 생명의 박탈이었다. 입을 쉽게 놀린 대가치고는 중력에 어깨가 짓눌릴 만큼 무거웠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해 뒤로 몸을 물렸다. 그제야 말룸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꼭 인격이 두 갈래로 나뉜 사람처럼 전전긍긍했다.

나는 말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틈도 없이 속에 북받친 두려움을 입 밖으로 줄줄 풀어 놓았다. 공포가 범람해 제대로 마음을 일구지 못했다.

“말룸, 당신, 당신은 왜…….”

저 여자들은 심한 말을 하기는 했지만 반드시 상대해야 하는 적도, 죽여야 하는 원수도 아니었다.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나 잔인하게…….

“오필리아, 세상에. 미안해요. 보기 역겨웠을 텐데 그걸 미처 고려하지 못했군요.”

산허리를 잔뜩 휘감았던 검은 안개가 태양을 만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말룸이 애타는 얼굴로 나를 안고 달랬다. 그가 운운했던 기피증 생각일랑 나지도 않았다.

충격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무어라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를 빼앗긴 듯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없었다.

검은 안개가, 뱀으로부터 발원한 짙은 악의가 언젠가 나를 향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속을 죄다 게워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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