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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23화 (23/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23화

말룸은 말끔히 낫지 못했다. 그의 체온은 여전히 종잡을 수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식은땀을 흘리고 체온이 이상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전과 같았다. 불로불사를 얻었기 때문에 괜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깥 날씨가 화창해 공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을 초입의 숲 향기가 뱅뱅 돌았다. 무도회까지는 고작 일주일 남은 상태. 렉스는 스파르타식으로 몰아치듯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렉스가 외알 안경을 치켜세우며 작문을 감독할 때면 말룸의 눈을 마주한 것보다 더한 소름이 돋았다. 스승을 면전에 두었을 때 드는 본능적인 기피였다.

렉스는 지리와 국제 정세를 포함한 이 세계의 지식을 내 머릿속에 주입했다. 그는 노장의 미소를 지은 채 이런 말을 남겼다.

‘실바누스라는 학자는 ⟪쉽게 쓴 정치학⟫에서 이렇게 말했었지요. ‘어떤 바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자, 이제 비전하의 차례이십니다. 저는 전하께서 어떤 바보가 한 일을 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렉스는 학생의 마음을 모른다는 점에서 대학교수를 닮았다.

나는 나날이 비쩍 말라갔다. 팔목이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졌다. 렉스의 교육 방침이 쉴 틈 없는 건 둘째 치고, 밤마다 오필리아가 겪었던 일을 꿈으로 접하고 있어 잠을 자는데도 자는 것 같지가 않았다.

흔히 소설 속에서는 이런 일을 두고 ‘육체의 주인과 동화되어간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집요했다. 육체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뿐인지라 로보가 준 향주머니도 효과가 없었다.

오필리아의 인생이 처참하다는 것도 기운을 빼는 요소 중 하나였다.

오필리아는 17살이 되던 해 빈민촌 에트왈 거리에서 도망쳤다. 키스하는 척하며 남자의 코를 물어뜯어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틈을 타 내달렸던 것이다. 하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태양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본 이들이 모두 오필리아를 탐냈다.

결국 오필리아는 부랑자 생활을 선택해 몸에 악취를 두르고 얼굴을 가려 자신을 방어했다. 그런 오필리아에게, 잠깐 부딪혀 나뒹굴어진 후 저를 경멸하지 않고 부딪혀서 미안하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다정스레 구는 말룸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가장 처음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 준 존재……. 그것이 오필리아에게는 말룸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이 늘어져 땅속에 묻힌 것 같았다. 말룸의 거짓 다정이 서러웠다.

차라리 통상적인 괴물처럼 잔인하게 굴었음 더 나았을 텐데.

말룸은 오필리아에게 결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그는 오필리아의 알맹이가 나로 바뀐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오필리아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한 줌의 관심도 없어 바뀐 입맛도 이상스레 여기지 않았다.

무도회를 위해 수도 레헬른으로 출발하는 당일.

금실로 장식된 흰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었으나 여전히 체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말룸과, 움직이기도 힘든 흰 드레스를 입고 간신히 서 있는 퀭한 낯의 나.

최악이었다.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빴는지 말룸은 물론이고 리 경까지 컨디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쁜 것이 분명한 사실을 들쑤시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은 없었다.

나는 리 경의 도움을 받아 뱀 문양이 음각된 마차에 올랐다.

첫 외출, 그것도 황성 나들이였는데 일말의 벅참조차 없었다. 보통의 소설 속에서는 남편을 사모하는 영애들에 의해 시비가 걸리기 일쑤던데, 말룸의 음산함을 이기고 그에게 다가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칭찬해줄 만했다.

“오필리아, 얼굴이 너무 안 좋아요. 무릎을 내어 줄 테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세요. 레헬른까지는 몇 시간 더 걸릴 테니까요.”

말룸이 드레스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며 내 상태를 살폈다. 나는 잘 관리된 그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피했다.

말룸은 내가 그를 간호한 이후 부쩍 다가오려 했다. 거절할 틈을 주지 않는 남자였다.

그가 내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때마침 마차가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말았다. 나도, 말룸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요전 그의 가슴을 실수로 만지게 되었던 일이 떠오르는 것은 별 수 없었다.

나는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미남이 해주는 무릎베개를 한 상태로 천장 무늬만 세었다. 그 미남이 식인 뱀이라는 것이 옥에 티였다.

말룸은 기피증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내 머리칼을 정리하길 반복했다. 농익은 벼를 닮은 금빛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에 감겨 일렁였다. 말룸은 작물을 공들여 매만지는 농부처럼 나를 소중히 대했다.

마차가 평화를 동반한 고요에 잠겨들었다. 말룸은 다만 고요했고, 나는 자는 척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불꽃 속을 걸어가는 것 같다가도 영원히 얼어붙은 대지 속에 묻힌 듯했다.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다.

나는 확연히 다정해진 말룸에게 신경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시계 째깍대는 환청이 들렸다. 찾아오는 주기도 일정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으음…….”

자리가 불편하다는 양 침음을 흘리며 뒤척였다. 말룸이 쓰다듬기를 멈추더니, 조용하고 수려한 저음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자세가 불편했나요?”

“그건 아닌데, 화장이 신경 쓰여서요. 당신 예복 바지에 묻으면 곤란할 테니까.”

“바지 같은 것보다 당신 상태가 더 중요해요, 오필리아.”

“그래도 미안하잖아요.”

멋쩍은 척 웃으며 슬쩍 몸을 일으켰다. 아부성 대답에 말룸은 캐묻지 않고 어릴 적 모래에 묻어둔 보물을 그리듯 나를 응시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마차를 같이 탔을 때처럼 먹이를 관찰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좀 더 뭉근하고 집요했으며 한편으로는 독기가 없었다.

말룸이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그는 거의 속삭이듯 내게 말을 내렸다.

“이 시기가 지나면…… 더 잘 해줄게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말룸은 심장에 말뚝이 박힌 것처럼 힘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부정을 고백하는 것처럼, 혹은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온기에 기대려는 것처럼 신중히 속내를 풀어 놓았다.

“함께 나들이를 가고, 성 곳곳을 탐험하고, 당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뱃놀이는 좋아하나요? 함께 요리를 하는 건? 말을 타는 것도, 내 영지에서 축제를 즐기는 것도, 화롯가에 앉아 서로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도, 전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속이 막혔다. 나는 흡사 고백과도 같은 절절한 말에 아무 답변도 해줄 수가 없었다.

“당신과 함께라면 어릴 적부터 소원하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감은 정확한 편이죠. 우린 분명 행복하게, 그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노란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였다.

“당신이 제 기회이고 증거예요. 저도 남들처럼 살 수 있다는 증거. 살아가기만 하면, 행복은 언젠가 찾아와요. 저는 당신이란 행복을 막 발견한 탐험가고요.”

말룸이 구름처럼 미소 지었다. 그의 눈동자가 흐르는 물 위로 비친 달을 닮아 유려하게 반짝였다.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손톱 가의 거스름이라도 죄다 뜯어내고 싶었다.

당신은 확신을 잃게 만든다. 내가 보는 것은 검은 잉크로 이루어져 껍질뿐인 당신이고 진짜 당신은 거울 속에 숨어 있다며 자꾸만 내게 호소한다.

도저히 말룸이라는 개체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말룸이 내게 잘해주고 있는 것은 맞았다. 온 마음을 바쳐 나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남부럽지 않은 신부가 되어 지금쯤 로맨스 드라마를 찍고 있어야 했다. 여러모로 내 현재 주소와는 달랐다.

‘완벽한 결혼 생활을 꿈꾼다고? 식인을 하는 뱀 괴물이?’

그럴 리 없다는 단정은 하지 않겠다. 말룸은 평범과 행복에 대해 어떤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듯싶었으니까. 그러나 결혼이나 평범한 생활이 대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말룸은 사랑타령을 하는 것보다 번쩍이는 황금이나 오래된 골동품을 수집하는 편이 더 잘 어울렸다.

내가 답하지 않자 말룸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속에 묵은 말을 풀어 놓았을 뿐, 특별히 명확한 답을 구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어렵게 생각 말아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니까.”

말룸의 목소리에 핏기가 없었다. 발아하지 못하는 씨앗이나 잎이 다 떨어진 고목처럼 버석버석하고 황량했다. 그의 외모만큼은 눈이 멀 것 같이 아름다웠는데, 그 점 때문에 말룸이 내가 모르는 지하 세계에 갇힌 듯 멀었다.

“……정말 멋대로 굴어도 괜찮나요?”

여기서 더 멋대로 행동하라니? 말룸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많아 문제였지 지금껏 행동에 제약을 당한 일은 많지 않았다. 그의 비위를 맞추겠다 행동하던 일도, 두려움에 갇혀 있는 바람에 잘 되었는지 의문이었다.

“당연하죠. 물론 위험하거나 무모해 보이는 일이라면 잔소리를 하고 마음을 돌리게끔 설득하겠지만, 당신 의사를 존중해요. 그걸 위해 열쇠도 주었잖아요. 항상 가지고 있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치장 전담 사용인들은 값비싼 보석 목걸이 대신 새끼손가락 크기의 열쇠를 금줄에 걸어주었다. 작달막한 열쇠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모두 그 열쇠에 굉장한 의미가 있다는 양 행동했다.

대외적으로, 그리고 티포주 성 내부에서도 이 열쇠는 대공비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해주었다. 하지만 그 열쇠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만악의 근원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말룸이 내 안색을 면밀히 살폈지만 웃는 가면을 덧쓰는 것조차 힘들었다. 목에 무거운 쇳덩이를 달고 있는 기분이었다.

“무도회가 걱정되는 건가요? 너무 긴장하지 마요, 막상 닥치면 쉬울 겁니다……. 재미있는 녀석도 볼 수 있겠군요.”

말룸의 웃음 이면에는 어떤 조롱이 숨겨져 있었다.

“재미있는 녀석이라뇨?”

“크로노모르테 레시우스. 정신 나간 조카가 한 명 있습니다. 3황자인데, 제가 폐하와 햇수 차이가 있다 보니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진 않죠. 당신이 올해 스무 살이니까…… 동갑이겠군요.”

나는 사실 스무 살이 아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친구가 되지는 못할 거예요. 다들 녀석과의 대화를 피하고 멸시하죠.”

“말룸도 그렇고요?”

“솔직히, 네, 그렇습니다. 날뛰는 종류의 잔혹성을 가진 건 아니지만 의미 모를 헛소리만 해대죠.”

말룸이 웃음기를 숨기지 못한 채 덧붙였다. 그는 ‘정신 나간 먹잇감’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크로노는 자기가 다른 사람의 남은 수명을 볼 수 있는데다 예언을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재미있지요?”

“아…… 참신하네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말룸이 거 보라는 듯 매끄럽게 웃었다.

나는 말룸의 거만함이 싫었다. 그것은 죽음이 자신을 비껴갔다는 것에서 나오는 자신감의 표시였다.

백색의 웅장한 성이 창 바깥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꼭 말아 쥐고 있던 주먹의 힘도 강해졌다. 몸에 떼어낼 수 없는 가시가 돋은 듯 기분이 찝찌름했다. 일단 무도회에 집중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리고 부디 그동안 말룸이 내게 본성을 드러냈으면 바랐다.

귓가에 째깍거리는 환청 대신 자꾸만 말룸의 달콤한 언사가 메아리쳤다.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 말들이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 이상 말룸을 시야에 두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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