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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22화 (22/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22화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말룸의 침대 위에서.

허리케인에 휩쓸린 듯 평정심이 떠나갔다.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소란을 피워도 이득이 없었다.

말룸은 책상 앞에 앉아 서류 처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팠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완벽하고 우아한 자세로 무언가를 필기하고 있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낮인 것으로 보아 하루 내내 잤거나 시간이 바뀌지 않을 정도로 얼마 자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말룸의 상태가 괜찮아 보이니 짧게 자진 않았을 듯했다.

요 사이 이상하리만치 잠이 많아졌다. 평소 잠을 많이 자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멍하니 천장의 격자무늬만 감상했다.

아무리 피곤했더라도 말룸의 침대에서 자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지만 점점 무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말룸이 자꾸만 틈 있는 모습을 노출해서 더욱 그랬다.

감정의 둑을 잘 막아 두어야 했다. 부족하면 흙으로 담장이라도 둘러야 했다.

일단 이것 하나는 명확했다.

말룸 발타사르는 타인을 향한 감정을 모르지 않는다.

나를 상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제 정체로 추정되는 걸 숨기려고 하는 것도, 그가 괴물 뱀인 것도 맞았다. 하지만 작중 묘사했던 것처럼 타인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룸은 내가 깨어났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거짓말처럼 만들어진 웃음을 새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일어났군요.”

원작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또렷해졌다.

작중 ‘오필리아’처럼 행동하지 않아서 발생한 차이일까? 하지만 원작의 오필리아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서술된 것이 없었다.

게다가 소설이 3인칭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마리아의 속내와 목적 역시 의문스러웠다. 마리아는 철저히 속을 숨긴 채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이용하며 말룸을 처치하려고만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조금 더 잘래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말룸이 펜을 내려놓고 침대로 다가왔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입가를 매만졌다. 침 자국은 없었다.

“환자 침대를 빼앗아 버렸네요. 이러려던 게 아닌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것보다는, 아팠을 때 짜증내서 미안했어요. 노려봤던 것도…… 내보내려 했던 것도.”

말룸이 최대한 눈썹을 내려뜨리고 이야기했다. 신뢰 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입 발린 이야기라도 사과했으니 되었다.

그가 다시금 덧붙였다.

“당신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어요. 간호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말은 해도 얼굴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떫은 감을 먹어 탈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침대에서 꾸물꾸물 일어나 말룸의 이마에 다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말룸은 몸을 물리는 기색이었지만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기피증 운운하던 남자가 많이 발전했다.

그리고 펄펄 뛰었다. 이 뱀 양반을 그냥!

“뭐가 괜찮아요? 아직도 끓잖아요. 조금 있다가는 또 꽁꽁 얼어버릴 거면서! 맞죠?”

“오필리아,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뭐가 어쩔 수 없어요? 좀 쉬지 그랬어요. 이게 뭐예요, 아픈 사람 침대 차지해선 실컷 잠만 자고. 저는 당신을 보살펴주러 온 건데…….”

“덕분에 나아졌다는 말은 정말입니다. 이전보다 훨씬 괜찮아요. 어차피 불면증으로 잠도 자지 못하는데, 정신이 멀쩡하니 일이라도 해야죠.”

“그래도요…….”

“걱정해줘서 기뻐요.”

말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걱정 받는다는 거……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네요.”

순간 깜짝 놀랐다. 감사 인사를 들을 줄은 몰랐다.

말룸은 저만이 아는 회한에 잠긴 듯했다. 마음에 방치해 둔 먼지 쌓인 앨범을 정리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의 태도가 거짓인지 진실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말룸은 서투르지도, 어설프지도 않았다. 그는 의심을 하나하나 벗겨내려 하고, 품고 있는 두려움과 편견을 사라지게 만들려 했다. 마치 새를 사냥하는 고양이처럼 노련히 내게 접근했다.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 말룸 발타사르…….’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어떻게 해석했는지 말룸이 열심히 변명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게다가 한창 항구 무역에 집중하고 있어서 쉴 시간이 없어요.”

“저도 일자리 찾아볼 거예요.”

“당신은 이미 제 대공비인데요?”

“그런 의미 아닌 거 알잖아요.”

가끔 말룸의 화법은 닭살을 돋게 할 때가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물어물 주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불면증이 그렇게 심해요?”

말룸이 다시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매끄러운 몸체가 말룸의 곤란을 드러내는 듯했다. 나는 말룸을 주시했다. 말룸이 거짓말 속에 섞어 내뱉는 진실을 가려내야 했다.

“그런 셈이죠. 거의 자질 못해서…….”

내 짐작이 맞는 듯했다.

말룸 발타사르는 잠을 잘 수 없는 개체였다.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도 그렇지, 어떻게 잠을 자지 않을 수 있을까? 역시 인간임을 버리고 괴물이 되었기 때문에 받은 저주인가.

저주가 아니라면 말룸의 불면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휴식 없는 삶은 뿌리 없는 꽃과 같았다.

“안 힘들어요? 잠 못 자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잖아요. 삼 일 동안 밤을 새운 적이 있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던데요. 당신 게다가 기피증도 있고, 음식도 잘 먹지 않고…….”

“익숙하니 괜찮아요. 그리고 기피증이라기보다는…… 잠깐.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죠?”

“당신…… 혹시 몸이 좀 약한가요?”

장난 반 진담 반 내민 말에 말룸의 인상이 완전히 구겨졌다. 기분 상했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말룸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양, 혹은 듣고 싶지 않다는 평가를 들었다는 듯 기분이 매우 나빠 보였다.

그가 연기 같이 희미한 한숨을 띄웠다.

“전 아프지 않습니다, 오필리아.”

“지금도 아프잖아요. 체온도 이상하고. 의사를 부르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필요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의사는 당신도 부르지 않고 있지 않나요?”

내가 너무 들쑤신 것 같았다. 긴장이 풀어졌던 심장을 잠식했다. 말룸이 원작의 그처럼 사이코패스가 아니라고 해서 저자가 나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갑자기 속이 거북해졌다.

“가벼운 농담이었어요. 말룸이 너무 심각하니까…….”

“……제가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다는 말은 제 역린이나 다름없죠.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요. 부탁할게요.”

“미안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그제야 말룸이 기세를 풀고 슬쩍 내 낯을 살폈다. 그래도 소용없다, 당신 호감도 이미 내 안에서 마이너스니까.

속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전해졌는지 말룸은 내게 눈을 고정하지 못했다. 그는 이것저것 말을 붙일 거리를 찾고 있었지만 이 이상 말룸과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전 가볼게요.”

“아…… 벌써요?”

“벌써가 아니에요. 하루 내내 여기 있었던 거잖아요. 맞죠?”

“그렇긴 하지만…….”

“무도회도 얼마 안 남아서 시간이 촉박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준비해볼게요.”

말룸이 그제야 떨떠름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조심스럽게 일러주었다.

“렉스가 벼르고 있더군요. 당신이 요새 공부를 많이 빠트렸다고 하던데.”

머리털이 쭈뼛 섰다.

“네? 큰일이네요. 무도회에서 주의해야 할 귀족들에 대해 알려준다고 했었는데!”

말룸이 넌지시 말했다.

“……그자가 떠나서 다행이에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룸이 이야기하는 ‘그자’가 로보인 것이 너무 확실했다.

인어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토록 인어를 싫어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두 달 있다가 다시 온다고 했어요.”

“아예 안 왔으면 좋겠는걸요. 난파당해 바다 깊은 곳 수장된 인어…… 흥미로운 신문 헤드라인이 되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요.”

“당신은 봄바람같이 한없이 따스하다가도 해일처럼 잔인해진단 말이죠.”

“친구 관계까지 제한하려 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종속된 게 아니니까.”

말룸은 할 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이내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차 싶었다. 요즘 이것저것 선별할 정보가 많아 말룸이 어떤 존재인지 잠시 잊고 예민하게 응대한 것 같았다.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예민해진 모양이에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수도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수도…… 말인가요?”

대답을 잘 해야 했다. 수도에 가서는 반드시 할 일이 있었다. 신전에 들르는 것, 그래서 로보 말고 마리아를 도와주었던 다른 조력자들을 찾는 것.

분명 붉은 성해포를 두른 남자 신관과, 키 작은 소년 신관이라고 했었지…….

그러나 워낙 원작을 흘리듯 읽어 그들을 마주해도 알아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긴장된 표정을 지워버리고 들뜬 소녀처럼 행동하려 노력했다. 눈을 빛내며 말룸을 바라봤다.

“먼저 이곳저곳을 구경할 거예요. 발타사르 영지도 물론 멋지지만, 수도만은 못할 테니까요. 그 다음에는 무도회에서 귀족님들을 만나고, 말룸이 저를 사랑하게 된 걸 감사할 수 있도록 신전에 가서 기도를 드릴 거예요.”

“귀족님이 아니에요, 그냥 귀족들이지. 당신은 그들 머리 위에 있는 신분이니까 그렇게 즐거워할 필요 없어요.”

말룸은 의외로 신전에 대해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곳에 더 신경이 쏠려 있었다. 말룸이 불만스러운 듯 들고 있던 펜을 서류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 두었다. 글자 위로 펜 그림자가 졌다.

“당신에게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머저리가 있다면 내 앞으로 데려와요. 존중해줄 필요가 없는 작자들이라 말이 곱게 나오진 않네요.”

공기가 오싹해졌다. 말룸은 고혹적으로 미소 짓고 있었지만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말룸은 그 상상 속의 귀족에게 명백히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감히 내게 도전하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뱀이 쉿쉿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나는 몸이 꽁꽁 얼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말룸 발타사르는 지극히 위험했다. 날 위해 그런다는 말을 듣는 것뿐인데도, 어떻게 이만큼의 위압감을 줄 수가 있을까.

“참, 오필리아. 황실 일가를 건드리면 귀찮아지니 썩은 것 같은 검은 머리칼을 한 족속들은 주의하도록 하세요.”

말룸은 잔뜩 겁을 먹은 날 발견했는지 말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경계심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후였다. 내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썩은 것 같은? ……그런데 말룸은 황제 폐하의 동생인데도 검은 머리카락이 아니네요.”

“어머니 쪽을 많이 닮았죠.”

말룸은 숱하게 들은 질문이었는지 시큰둥하게 답했다.

거짓말쟁이. 황제를 협박해 동생 자리를 얻어 내어 놓고서 천연덕스럽기가 바퀴에 기름칠을 한 듯 매끄러웠다.

“그리고 일반 귀족들 중에서는…… 잘 들어요. 이 제국에 유일한 여자 공작이 하나 있어요. 이름은 아라크네, 성은 피티아. 보통 피티아 공작이라고 불립니다.”

“공작이요?”

“정치에 시간을 들일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긴 했지요. 네, 공작이요.”

“위험한 사람인가요?”

말룸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의 얼굴에 음습한 청동빛이 감돌아 이끼를 얹어 놓은 것 같았다. 가끔 말룸에게서 풍겨 나오는 축축한 빛깔을 발견할 때면 살짝 몸을 떨게 되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판을 짜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어 그랬다.

“위험한 셈이지요. 그러니 그 녀석과는 말도 섞지 말아요. 무도회가 열리면 당신에게 오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적당히 인사만 하고 자리를 피해버려요. 피곤하다든지 하는 핑계를 대서요.”

“……알겠어요.”

“차라리 내게서 떨어지지 말아요. 그게 나을 것 같군요. 공작을 상대할 필요는 없어요. 그자에게 관심 주지 말아요, 오필리아…….”

말룸이 기묘하리만치 엷은 웃음기를 띠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 맘속에 경계심을 키우면서도 어딘지 찝찌름해 한참동안 말룸을 흘끔거렸다.

아라크네 피티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치밀었다. 그 역시 작중 나오지 않은 인물이었다. 비중 없는 엑스트라라는 소리인데, 엑스트라 중 괴물 뱀으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경고하게 만들 있는 사람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혹시 그 아라크네라는 사람이 내게 도움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일어난 걸 알아차리고 들이닥친 렉스의 손에 공부방으로 이끌려가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아라크네 피티아. 그 이름만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말룸은 내가 아라크네에게 호기심을 품을 것을 알았는지 이후에도 틈날 때마다 그자의 위험성을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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