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20화
티타임 이후, 로보와 나는 하루 종일 얘기를 나누었다. 일명 ‘귀족 수업’의 총책임자인 렉스마저 수다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로보가 떠난다는 걸 렉스도 알고 있었던 걸까?’
집사장 렉스는 첫인상과는 달리 내게 무관심한 것은 아닌 듯했지만 말룸과 관련된 인물인지라 꺼림칙한 것은 별 수 없었다. 렉스에게는 노련미가 있어 그의 앞에만 서면 절로 언행을 조심하게 되었다.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로보에게 아틀란티스에 대한 이야기를 졸랐다. 바다 깊이 가라앉은 고대의 도시는 지구인의 환상을 자극했다. 이 세계의 아틀란티스는 그저 이름만 같은 인어 왕국에 불과하겠지만, 로보의 이야기로는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황금이 많은 도시라고 했다.
아틀란티스는 철저히 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로보는 왕을 필두로 한 늑대상어나 귀신고래 같은 유력 일족들이 인간을 폄훼하며 배척하는 정책을 편다며 불만스러워했다. 종족의 보존과 연명을 위해 무척이나 폐쇄적인 성향을 띤다는 것이다. 그 자신도 기득권인 늑대상어면서 일족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 서슴없었다.
그 밖에도 로보는 아틀란티스의 정세나 문화에 대해 세세히 알려주었다. 로보는 본인이 마다하고 있을 뿐 후계자로 거론되어 영향력 있는 인어였기에 현재 보위에 있는 포세이돈의 비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자신이 후계위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알고 있다고 하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 싶어 즐거워졌다.
중간 중간 성이 크게 진동하는 등 이상 현상이 있었다. 거인이 땅에 내리면 이런 지진이 발생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우리 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진은 이전 세계에서도 왕왕 있었고, 로보와 있으면 나는 안전 불감증이라도 온 것처럼 편안해졌다.
게다가 이곳은 뱀의 둥지, 티포주 성이었다. 말룸이 집 안 무너지게 어련히 잘 하겠거니 싶은 마음이 안전 불감증에 한 몫 거들었다.
그리고, 예상했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로보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조개껍데기에 눌린 쪽지 하나가 티타임 테이블 위를 지킬 뿐이었다.
조개껍데기가 앙증맞고 예뻐 시선을 잡아끌었다. 주름 진 연분홍빛 껍질이 물감을 칠해 놓은 듯했다.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재빨리 쪽지를 집어 들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로보의 글씨체는 그를 닮아 아주 자유분방했다. 로보는 글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읽기 힘들 만큼 악필이었다.
나는 애를 써 가며 더듬더듬 쪽지를 읽었다. 속도가 느렸지만 귀찮지는 않았다.
아가씨에게. 오늘 오후 3시 출항 예정. 발타사르 대공령 북동쪽 첼로스타인, 4번 포트. 완전히 수리된 케이론 호와 선원들을 소개해주고 싶어. 부디 들러주었으면 해.
뒷장에는 장난스러운 웃음 모양 그림과 함께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부담 갖진 말고! 1순위는 그곳에서의 안전이니까, 의심을 살 것 같으면 무시해줘. :)
한참 동안 쪽지를 붙잡고 있었다. 읽고 또 읽으며 짭조름한 바다 향이 묻은 종이에서 로보의 흔적을 찾아내려 무진 애를 썼다.
마음이 술렁거렸다. 파도에 홀린 것 같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무척이나 로보에게 가고 싶었다. 어젯밤 작별 인사를 하긴 했지만 앞으로 두 달 정도는 못 볼 사람인데다 로보의 선원들도 궁금했다.
이별은 두 달뿐이었지만 로보의 얼굴이 가물가물해지면 슬플 것 같았다.
로보는 내게 특별했다. 그의 까무잡잡한 갈색 피부가 본연의 피부색이 아니라 선상 생활을 오래 해 태양에 그을린 것이라는 비화도, 붉은 산호를 닮은 눈동자도, 입 맞추면 물릴 것 같은 삐쭉빼쭉한 상어 이빨도, 바닷바람을 닮은 시원한 웃음도, 뭉게구름을 닮은 흰머리칼도, 붉은 눈동자를 가리고 있는 푸르스름한 선글라스도,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비늘 문신도, 왼쪽 입가의 점도 전부 한여름의 바람처럼 기꺼웠다.
나는 빠르게 아침 샤워를 마치고 얇은 재질의 원피스를 차려 입었다. 티샤와 모아는 부르지 않았다. 요즘 로보의 일로 어색해지기도 했거니와 혼자 치장하고 싶었다.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분을 찍어 바르고 입술을 붉게 하는 염료를 정성 들여 발랐다. 치장이랄 것도 없었지만 마지막 모습이니 꾸미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포트에 가면 로보를 만나 해군과 마찰이 있지 않기를 기도하고, 소용돌이 속으로 잠수를 해도 끄떡없다는 케이론 호도 구경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로보는 꾸미기에 관심도 없던 나를 변하게 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신세계였다. 그 세계는 꾸민 듯 안락하고 솜인형처럼 부드러워 나를 살게끔 했다.
오후 3시 출항 예정이라고 했었나, 첼로스타인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리 경은 알고 있을 것이다. 말룸이 나를 혼자 내보낼 리 없으므로 리 경과 동행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순간 노크 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정갈한 세 번. 티샤였다.
“비전하. 티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들어와. 나 일어났어.”
찔리는 기분에 평소보다 활기차게 답했다.
하나로 묶어 올린 검은 머리칼, 화장기 없는 얼굴. 오늘도 티샤는 틈 없는 차림새였다.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 티샤는 사용인의 정석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빗을 내려놓았다. 티샤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오며 망설이는 듯했다. 떨떠름해 하는 걸까? 로보와 내 관계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 지는지 알고 있었다.
“외출하십니까?”
“오늘 로보가 출항한다고 해서. 참, 로보는 그냥 친한 친구야. 항해 잘 하라고 배웅해주려는 거지.”
노파심에 뒷말을 덧붙였다. 티샤가 말룸의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지만 그의 정체까지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말룸에 대해 알아도 문제였고, 모른다면 티샤에게는 말룸이 그저 완벽한 대공처럼 비추어질 것이기 때문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티샤에 대해서는 대부분 불확실했지만 그래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인데 적의를 사고 싶진 않았다.
티샤가 검은 눈을 깜빡였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당황이 훤히 보였다.
“죄송합니다. 주제넘게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에 모셨던 마님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외도를 하시는 바람에…….”
이렇게 솔직히 말해주니 훨씬 나았다.
“안 말해준 내 잘못도 있으니까 괜찮아. 믿어줘서 기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오기는 했습니다만…….”
티샤는 드물게 머뭇거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티샤가 슬그머니 물었다.
“친구 분과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약속한 건 아니지만 초대받기는 했는데. 무슨 일 있어?”
“전하께서 함구하라 명령하시었으나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명백한 불복이라는 것은 알고 있고, 벌을 달게 받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말룸이 티샤에게 따로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나와 관련된 일인가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말룸에 대해서는 항상 조심해야 했다. 심기를 상하게 하면 안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의 동태가 이상한 것도 불안감을 키웠다.
얼굴에 그늘이 나타났는지 티샤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실은, 대공 전하께서 앓아누우셨습니다.”
“뭐? 말룸이? 아니, 그 사람이 대체 어떻게…….”
나는 너무나도 뜻밖의 소식을 들어 고목처럼 굳어 버렸다. 말룸이 아플 수도 있는 존재였나? 그럴 리가 없었다. 로보는 말룸이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라고 했다. 생장 노화가 멈춘 존재는 아플 수도 없었다.
그러나 티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티샤는 함구령을 어겼기 때문인지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불안감이 수풀 속에서 튀어나와 나를 덮쳤다. 주먹을 쥐어 손바닥을 손톱으로 연신 내리눌렀다. 살갗에 분홍 초승달이 떴다. 이렇게 하면 그나마 진정이 되었다.
“……언제부터 아팠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늘 아침 집무실에서 쓰러지신 것을 리 경이 발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제부터 앓으신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별일 아니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다니, 아픈 것뿐인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픈 날이 있잖아.”
“체온이 너무 변칙적이십니다. 갑자기 뜨거워졌다가도 급격히 차가워지십니다. 주치의나 신관님도 부르지 않으시고, 혹시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니실지……. 하지만, 감히 정황을 여쭐 수가 없어서…….”
티샤가 착잡한 듯 차분히 말을 전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장 화장대 앞에서 일어났다. 티샤가 내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전하께 가시는 겁니까?”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 했다. 마구잡이로 행동하면 안 되었고, 상황 파악을 똑바로 해야 했다. 입장을 상황에 맞게 이리저리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면 곤란했다.
내 목표는 생존이었다. 말룸이 아무리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공감하지 못해도 나는 말룸을 대할 때 반감이나 악감정을 섞어 행동하면 안 되는 처지에 있었다.
……로보. 그 상냥한 인어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 버렸다.
“로보는…… 괜찮을 거야. 다른 일이 있다면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줬는걸.”
“지속적인 연락이 가능하게끔 주술 전보를 준비할까요?”
“아냐. 소용돌이 해역으로 간다고 했으니까 전보도 소용없을 거야. 거긴 전보가 닿질 않는대. 말룸에게 가자, 티샤. 어떤 상태인지 좀 봐야겠어.”
기운이 쭉 빠졌다. 하지만 싫은 티를 내진 않았다.
“대신 로보에게 사람을 좀 보내주지 않을래? 못 갈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고 전언을 부탁할게.”
티샤가 눈에 띄게 안심했다. 나와 말룸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내가 로보와 함께 있느라 말룸을 찾지 않으니 그새 맘이 떠난 건 아닌가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로보의 출항을 배웅하지 않고 아픈 말룸을 찾으니 내가 말룸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겠지. 사실과는 무관했지만 그렇게 생각해주는 게 이득이었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용할 것은 전부 이용해야 한다.
나는 항상 죽음을 기억해야 했다.
티샤가 훌쩍 앞장섰다. 층계를 오르내리고 모퉁이를 도는 발걸음이 바빴다. 티포주 성은 과연 미로처럼 복잡해 안내를 받지 않으면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좌우가 찍어낸 듯 비슷해서 말룸의 수집품이 아니면 길을 찾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윽고 티샤가 황량한 문 앞에서 멈추었다. 수집광 말룸의 방답지 않게 문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었고, 딱딱한 회색 일색이라 메말라 보였다. 말룸의 방이 맞기는 한지 의심스러웠다.
티샤가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하곤 떨리는 마음을 노크를 했다. 그러자 놀랄 만큼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아무도 걸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깜짝 놀라 티샤를 응시했지만 티샤는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말룸의 허락은 이 상황에서 필요하지 않았다. 황량한 방 안이 인상 깊이 남았다. 방이라기보다는 지하 감옥 같았다.
나는 애써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저예요, 말룸. 허락 없이 미안하지만, 안 들여보내줄 게 뻔해서 그냥 들어갈게요.”
장식 없는 철제 침대에서 사내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가시를 두른 듯 날 선 기세가 매서웠다.
“……오필리아?”
그가 나를 발견하더니 눈가를 손으로 덮어 숨겼다.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어 대신 보이지 않기를 선택한 것 같았다.
낯을 숨기기 전 잠시 보았던 말룸은 눈 밑이 거뭇거뭇해져선 병색이 완연했다. 어딘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