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9화
03. 술병 속 크로노미터
분명했다. 나는 지금 꿈속에 있었다. 생생해도 너무 생생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는 듯했다.
주변이 흙 속에 잠긴 것처럼 어두웠다. 그러나 무대의 한가운데라도 되듯 빼빼 마른 남자가 앉아 있는 방 안만 불이 환했다.
방은 극도로 더러웠다. 다 마신 술병이나 모조품인 듯 광택이 다채롭지 않은 진주 목걸이, 화려한 맵시의 조개껍질, 낡은 책이나 현이 끊어진 류트 같은 것이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남자는 나를 볼 수 없는 듯했다. 그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바로 그때, 남자가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크로노미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시계가 산산이 부서지며 태엽이며 유리 따위가 사방으로 튀었다. 물속에 잠긴 듯 고요했던 방 안에 굉장한 파열음이 났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꿈 속 남자가 내게 해를 끼칠 리는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폭력에 움찔하게 되는 것은 인간인 이상 당연했다.
이윽고 웬 깡마른 여자가 허둥지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잘 먹지 못한 듯 왜소했는데, 거적때기를 걸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입고 있는 옷이 형편없었다.
뒷모습만 보여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세상에 닳아 낡아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등이 생선뼈처럼 메말라 저도 모르게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남자가 무어라 이야기했지만 그가 소리치고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어떤 내용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말을 쏟아내던 남자는 화풀이를 할 생각인지 여자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보는 내가 천불이 일 정도로 심각한 강도였다. 불길하고 소름 끼치는 감각에 어서 꿈에서 깨고 싶었다. 폭력을 보게끔 하는 것도 폭력이었다.
남자가 한동안 여자를 움켜쥐고 흔들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더니 제 화를 못 이겨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가 버렸다.
여자의 얼굴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이 비참한 여자가 누구인지 본능처럼 깨달았다.
오필리아였다.
내가 빙의하기 전, 비참한 생활을 하던 오필리아.
나는 곧장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이게 뭐야. 내가 왜, 대체 어떻게 오필리아가 겪었던 일을…….”
숨을 고르게 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아 헐떡거렸다. 이마를 매만지니 식은땀이 손끝에 묻어 나왔다.
나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요 사이 말룸도 더는 텃밭에 나오지 않았고, 내게 시비를 거는 이들도 없어서 초코 마카롱과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꿈이 의미하는 것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대로 침대에 파묻히듯 앉았다. 양손이 간헐적으로 떨려 손을 서로 맞잡았다. 떨림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진동 기계를 손에 쥐고 있는 듯했다.
비명 소리가 문밖으로 퍼져나갔는지 호위를 서던 리 경과 함께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내게 오고 있던 로보가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로보는 일전의 느긋하고 호쾌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고, 리 경은 안 그래도 딱딱한 표정이 더 굳어졌다.
“아가씨! 무슨 일 있어?”
“암살자의 기척은 느끼지 못했는데, 다른 위협이라도.”
“아뇨. 아니에요. 나쁜 꿈을 꾸는 바람에…….”
쉽게 치부할 일이 아닌 듯했지만, 꿈 때문에 호들갑 떠는 것도 꼴불견이었다. 두 사람이 오해하기 전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맺었다. 하지만 리 경은 인상을 찌푸렸고, 로보 역시 진지한 얼굴로 성큼 다가와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로보가 봄날의 햇살처럼 부드럽게 물었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해 발끝이 간지러웠다.
“머리는 안 아파? 속이 메스껍다거나 그런 건?”
“그런 건 없어요. 정말 괜찮으니까, 손 좀……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요.”
아닌 게 아니라 로보는 거의 침대 위로 올라올 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제야 자세의 문제점을 알아차린 로보가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라 뒤로 물러났다.
며칠 사이 로보와 부쩍 가까워져 이런 분위기가 연출될 때가 많았다. 생각하기도 민망하지만, 사귀기 직전의…… 남자 대 여자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그만두는 게 나을 듯해 생각을 털어냈다. 로보도 평소대로 돌아와서는 쿠키 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부산을 떨었다.
……로보는 부산을 떠는 인어가 아니었다.
얼굴이 새빨개질 뻔했다. 겨우 리 경 쪽으로 시선을 돌려 진정했다. 리 경은 우리의 촌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잠겨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굳이 엿보고 싶지 않았다. 저 사람은 어쩐지 상사를 대하듯 어려워서, 반말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반말을 해야 하는 쪽은 리 경이고 내가 존대를 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았다.
로보가 티타임 테이블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뭍으로 올라오며 얻은 강인한 두 다리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가 차분하게 턱을 괴었다. 동작 하나마저도 화보의 한 장면 같았다. 지구에서 로보를 만났다면 순식간에 팬이 되지 않았을까?
“아가씨. 내가 어제쯤 주지 않았어? 라벤더 향주머니.”
“침대 헤드에 잘 묶어 두고 있어요. 향이 좋아서 잠도 잘 오던걸요.”
나는 보란 듯 침대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얼마 전 로보가 주었던 보라색 향주머니가 똑바로 걸려 있었다.
로보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입술 사이로 슬쩍 드러난 뾰족한 이가 불만스러움을 품어 유독 예리해 보였다.
“이상하네. 인어가 만든 향주머니는 특별해. 액운이나 악몽을 쫓아내주거든.”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향주머니, 로보가 직접 만든 거였어요?”
“당연하지. 나 말고 향주머니 만들어줄 인어가 또 있어? 이래봬도 손재주가 좋은 편이야. 또 향주머니를 만들 때에는 공을 들여 기원을 담아야 하는데, 그 때문에 향주머니 대량 생산은 아틀란티스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기원 없이 껍질만 남은 향주머니를 진품이라고 속여 파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로보는 장난스럽게 얘기했지만 표정을 풀지는 않았다.
인어의 향주머니가 꽤 영험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꿈으로 꾼 것은 오필리아의 과거사였고, 그렇기에 악몽이 아니라고 간주된다면 향주머니가 소용없는 상황도 있을 법했다. 오필리아의 과거사가 꿈으로 나온 것을 보면 순전히 내 문제가 맞았다.
과한 보살핌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둥실 떴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악몽이라고 했지만 과거의 일을 꿈으로 꾼 것뿐이니까요.”
“전에 괴로운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런 거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게 악몽이 아니면 뭐겠어. 하여튼 눈을 뗄 수가 없네. 우리네 선원들도 아가씨가 불안하다면서 여러 가지 챙겨주는 걸 겨우 말렸다니까.”
“로보의 선원 분들이 저를 알아요?”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로보는 그새 리 경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질문을 하자 바로 내게 시선을 주는 것이 꽤나 고마웠다. 리 경과 있으면 쉽게 상황을 잊어버리곤 했다. 저 기사에게는 주변을 장악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로보가 어깨를 으쓱인다.
“당연히 알지. 내가 아가씨 얘기를 많이 했거든. 초코 쿠키를 가장 좋아하면서 녹차 맛은 싫어하고, 민트를 모욕하는 걸 참을 수 없어 하는 것부터…….”
“잠깐, 대체 뭘 말하고 다니는 거예요?”
“아이스크림 기호 정도는 괜찮잖아. 이것도 개인정보에 포함되는 건가? 육지 법칙은 어렵다니까……. 민트 맛 아이스크림 사줄게. 착하지, 내 아가씨.”
로보가 씩 웃었다. 특유의 시원시원한 웃음이 인상 깊었다. 저 상어 이빨도 자주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내 아가씨’ 운운하는 것은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말을 할 때마다 로보가 나를 무척 다정하게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로보가 아틀란티스로 떠나면 냉동고에 홀로 갇힌 것처럼 외로워질 듯했다. 하지만 아무 관계도 없는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상대에게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귀찮은 일을 덜어주었던 데다 배를 수리하는 대가라고는 하지만, 말룸과 관련된 일이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은 명백했다.
로보는 왜 나를 도와주는 걸까? 원작에서는 이렇게까지 다정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는데.
원작과 직접 겪은 일들 사이의 괴리감이 점점 심해졌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어긋남이 뚜렷했다.
로보가 리 경에게 관심을 돌렸다.
“거기 기사 형씨는 뭐 좀 알아낸 거 있으신가?”
그렇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리 경이 로보를 무시하고 방을 나가 버린 탓이었다.
내가 다 무안해서 로보를 보았다. 로보는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가 찻잔을 스푼으로 퉁퉁 튕기며 장난을 쳤다. 비뚜름하게 앉아 긴 다리를 꼰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마주칠 때마다 저래. 기사들과만 교류하고 사용인과도 친한 것 같지 않더라. 저런 딱딱한 녀석이 호위라니, 아가씨도 참 고생이겠어.”
로보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그는 불쾌한 것을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미간을 찌푸리고선 입을 열었다.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지만, 요즘 말룸 발타사르와 잘 만나지 않는 것 같던데. 뭔가 눈치챈 기색이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 새 말룸의 태도가 확실히 이상했다. 말룸은 꼭 나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먹이를 꾀기 위해 전처럼 달콤한 말을 하지 않았고, 텃밭에 물을 주러 오지도 않았다.
가끔 마주칠 때 보이는 얼굴은 어딘가 아픈 듯 심하게 창백했다. 눈 밑의 거뭇거뭇 한 그림자도 평소보다 짙었다. 이전부터 퇴폐적인 인상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곤 이야기했다.
“확실히 이상해요. 무도회 건으로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잘 찾아오지도 않고요. 하지만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진 않았어요. 의심하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적당히 둘러댔고요.”
“조심해, 아가씨. 괴물을 얕봐선 안 돼.”
로보가 팔을 뻗었다. 그러더니 시가지에서 했던 것처럼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었다.
‘지금 막 일어나서 머리 안 감고 세수도 못 했는데!’
얼굴에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조그맣게 말했다.
“티타임은 제가 세수를 좀 하고, 그런 다음에 마저 잇는 게 어떨까요?”
“응?”
“막 일어나서 씻기 전이거든요.”
“아하하! 이미 다 봤는걸, 괜찮아. 어떤 상태라도 아름다워. 아가씨는 심해의 푸른 진주를 닮았거든.”
그야 그렇긴 할 것이다. 오필리아는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미인이니까…….
그렇게 한동안 그를 내보내려는 나와 나를 놀리는 그 사이에 말싸움이 계속되었다.
로보가 떠나고 나면, 이런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도 누리지 못하게 되겠지.
“……출항은, 언제인가요?”
이불을 내리고 눈만 내놓은 상태로 넌지시 물었다. 로보는 약간 씁쓰름한 기색이었다.
그가 곧 나른한 웃음과 함께 답을 돌려주었다.
“내일.”
“너무 빨라요! 언제 말해줄 셈이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빨리 떠나는 게 여러모로 좋죠. 말룸을 상대하려면.”
그를, 상대하려면…….
이상해진 말룸이 마음에 걸렸지만, 위화감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 놓은 채 로보에게 집중했다. 인어가 멋들어진 웃음을 전시했다.
“그래, 빠른 이별이지. 내가 곁에서 지켜줄 수 없을 테니 없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향주머니를 준 건데, 악몽을 꿨다니 무안한 걸. 그래도 누군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예품을 만든 건 생애 처음이야.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아가씨.”
로보가 잔잔한 바다를 닮은 눈빛으로 구김 없이 덧붙였다.
“다음에는 더 효과 있는 걸 줄게. 이를테면 머리칼로 만든 팔찌 같은 거. 부적 효과가 있긴 한데, 우린 연인도 아니니까…… 좀 그러려나?”
나는 오히려 환영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로보는 거짓말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솔직함이 사랑스러웠다.
로보와 함께 훌쩍 바다로 떠나고 싶을 만큼 그가 소중했다. 나는 쿠키를 먹는 인어를 끝없이 눈에 담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바다에 몸을 맡긴 것처럼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