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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18화 (18/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8화

「새벽」

그의 방은 대공의 방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황량했다. 방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책상과 장식도 없는 철제 침대가 전부였다. 침대는 구김 없이 깔끔했다. 사용하지 않아 그랬다.

회색 벽에는 작게 째깍대는 낡은 시계 하나와 명화를 담은 액자 몇 개가 달랑 걸렸다. 누구든 말룸의 사치벽과 수집광적인 기질을 알고 있다면 의아해할 법한 풍경이었다.

이 황량함은 유일하게 남은 과거의 흔적이었다.

말룸은 한창의 밤과 시린 새벽을 견디다 못해 일에 매몰되었다. 영지는 발전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즐겁다거나 보람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권위를 쌓아올리고, 필요 없는 것은 버렸다. 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그 여자를 제외하고서는…….

인기척이 나는 날이 드문 방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리 알렉산더. 조력자 같지도 않은 조력자.

리 알렉산더는 보험이었다. 그의 힘은 라딘라티조차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아니, 리 알렉산더야말로 천 년 동안 괴물을 상대한 검은 인어의 호적수였다.

“말룸 발타사르.”

리 알렉산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법 전등이 그의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비추었다. 우거진 숲을 닮은 엘프였다. 그리고 까마득한 과거에는 숲 자체이기도 했다.

“울었다. 얼마간 뒤척이다가 잠들더군.”

“……라딘라티의 사념체는 모가지만 남겨 두고 사람을 뜯어 먹는다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잘 살펴요, 오필리아는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말 돌리는 건가? 어이가 없군. 이봐, 서류 순서 바뀌었다.”

“시비 걸지 마십시오. 제가 만만합니까?”

“이 세상에 애송이에게 겁먹는 엘프는 없다.”

“다 망한 나라의 왕인 주제에. 당신 말고 다른 엘프가 남아 있긴 합니까?”

말룸이 이를 갈았다. 그는 리 알렉산더를 바라보지 않고 펜대만 시시각각 움직였다. 리 알렉산더는 뱀에게 타박을 늘어놓는 대신 황량한 방 안을 감시하듯 살폈는데, 책상 오른편 위, 귀퉁이에 장식되어 있는 스노우볼을 발견하고서 매우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방 구경은 그만 하세요. 남의 아내에게 흥미라도 생긴 겁니까? 이런 새벽에 다짜고짜 찾아와선 대뜸 그 여자 이야기라니.”

“흥미가 생긴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리 알렉산더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말룸은 엘프를 기꺼워하지 못했다.

말룸이 마른세수를 했다.

저 엘프는 너무 많은 것을 꿰뚫어 보았다. 리 알렉산더가 같은 편으로 돌아서며 그 파괴적인 무력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았지만, 신전 측의 인물인 데다 오래 반목해 온 자라 극도로 꺼려졌다.

리 알렉산더를 마주할 때면 채 씻기지 못한 인간 시절의 열등감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이비 신에 푹 빠진 부모 밑에서 학대당하고 폐병에 걸려 콜록대기나 했던…….

창백한 얼굴에 짙은 혐오가 피었다. 알렉산더에 대한 혐오인지, 말룸 자신에 대한 혐오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향하는 곳이 모호했다. 뱀의 한쪽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상한 음식을 먹은 표정이었다.

“제가 부탁한 건, 행여 실수로라도 그곳에 걸음하지 않도록 그자를 지켜봐달란 거였습니다. 다른 사족은 궁금하지 않아요.”

“열쇠를 주지 않으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열쇠가 위치를 확고하게 해주는 거 알잖습니까. 그건 내 권리를 상징하니까. 나 참, 대뜸 남자 인어를 사 오다니. 열쇠가 아니었다면 식솔들에게 무시를 당했을 겁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는 걸 할 정도로 분별없는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자는 겁에 질려 있더군요.”

말룸이 말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겁을 먹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귀족인 제가 낯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안전 문제도, 그자가 지하로 걸음하면 알 수 있도록 주술을 걸어 두었으니까…….”

“깊이 신뢰한다면서?”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는 것뿐입니다. 죽어버리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더니 아교로 칠한 듯이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리 알렉산더가 말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흥미롭군. 정말 마음을 주기라도 한 건가.’

세월에 묶인 사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럼 애매하게 굴질 마라, 여자가 오해하지 않도록. 넌 늘 멍청하게 행동해서 무엇이든 놓치지. 짜증 날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신경을 긁어내리는 폭언이었다. 말룸과 리 알렉산더는 협력한 시간보다 반목한 시간이 유구했다.

말룸의 속에서 왈칵 북받치는 것이 있었다. 자신은 항상 최선의 선택을 했다. 비참하게 죽기 싫어 인간의 껍데기를 버렸고, 라딘라티에게서의 탈주와 복수를 위해 그자를 배신하고 봉인했다. 그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대공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알렉산더를 위협하듯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말룸의 주위에 검은 안개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고양이 재롱을 보듯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말룸을 매번 상처 입혔던 빛의 활을 꺼내지도 않은 채였다.

뱀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흰 손바닥에 날카로운 손톱자국이 흉터처럼 자리 잡았다. 황량한 벽에 매달린 액자 하나가 산산조각이 났다. 명백한 화풀이였다.

리 알렉산더가 코웃음 쳤다.

“인간이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군. 성장이란 걸 하는지 의문이다. 버티듯이 연명할 뿐이면서 왜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지?”

말룸의 낯이 독기를 품고 일그러졌다. 일부러 속을 긁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더는 심기 건드리지 말아요.”

그러자 리 알렉산더가 팔짱을 끼더니 말룸의 방까지 친히 걸음 한 본론을 꺼내 놓았다.

“너 명백히 실수했다, 말렉시우스. 네가 동요하면 성이, 애써 쳐 둔 미로가, 모든 술식이 무너지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나. 왜 그 여자를 들였지? 놈을 치는 데 그 여자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신전에서 벗어난 이후 단 하루라도 그렇게 불린 적 없으니까.”

대공의 목소리에 뱀의 쇳소리가 겹쳐 났다. 알렉산더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병상에 누워 오늘내일하던 시절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군.’

하지만 감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는데, 그것이 말룸의 뿌리 깊은 혐오를 건드려 파괴 저주라도 전개할까 저어되어서였다.

말룸 발타사르의 심장은 티포주 성과 일체화되어 봉인의 위력을 끌어올리는 동력 역할을 했다. 성이 다치면 봉인도 다쳤다.

수려한 엘프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졌다.

“초저녁 즈음 성의 봉인 한구석이 무너졌다.”

말룸이 숨을 멈추었다. 상황을 추론하는 샛노란 눈동자가 흐려졌다가 밝아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럴 리가요.”

거친 파도처럼 몰아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봉인이 풀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부와 권력도, 갈망하던 평범한 삶도…… 오필리아도.

리 알렉산더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몇 번을 말했다. 그놈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동요하지 말라고. 감정을 내보이지 마. 품지도 말아라. 동력이 되는 네놈 심장, 그게 녹으면 봉인을 유지할 수 없다.”

“…….”

“입을 다물면 모든 일이 해결되기라도 하나? 심장이 녹아 박동하는 꼴이란. 제정신인가? 정말 그 여자를 사랑하기라도 해?”

말룸의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져 음산함을 품었다. 화를 억누를 수 없어 의태마저 유지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리 알렉산더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칼집으로 말룸의 이마를 툭 쳤다. 말룸이 서릿발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았지만 알렉산더는 동요하지 않았다.

“‘반동’을 잊지 마라. 네놈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 꽃밭 속에서 살다가 전갈처럼 미쳐버리기라도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반동에 대한 건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그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스스로를 망칠 정도로 분별없지도 않고, 그 여자가 그만큼 신경 쓰이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말룸이 뜨거운 물을 삼키는 사람처럼 찰나 고통스러운 표정을 내보였다.

“……맘 터놓을 사람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잖아요. 어차피 일이 끝나기 전까지 그자는 아무것도 모를 겁니다.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늙고, 평범하게 죽어가겠죠. 저는 그런 인생을 그자에게 배당할 겁니다.”

리 알렉산더는 뱀의 계획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첨언하는 대신 조금 더 속을 들쑤셔 보기로 했다. 이성 잃은 자는 숨기고자 할 심계마저 무심코 풀어놓을 때가 있었다.

“예전의 네가 생각나기라도 했나 보지? 밑바닥의 밑바닥 인생 말이다.”

알렉산더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저주가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처 자리가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썩게 만드는 힘.

그것이야말로 말룸이 괴물로 변하며 라딘라티에게서 내려 받은 파괴적인 저주였다.

말룸은 일부러 빗맞혔다. 알렉산더가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는 볼을 감싸 쥐고 혀를 쳤다.

저 뱀은 위험한 존재였다. 라딘라티의 수족들 중 가장 강한 힘을 타고나, 검은 인어의 육신을 완전히 썩게 만들고 사념체만 남겼다. 아무리 라딘라티가 천 년 전의 힘 대부분을 잃어버렸대도 그자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은 말룸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말룸 발타사르는 결코 자신을 해치지 못했다. 이해관계란 그러했다. 적이었던 관계도 서로에게 창칼을 겨눌 수 없게끔 했다.

“네가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간섭하지 않았을 거다. 친구뿐이겠나. 연인도, 자식도 누릴 대로 누리는 게 정상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평범한 인간들의 삶이지.”

리 알렉산더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재앙이 내린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인간을 살게 한다.”

“그런데, 어째서…….”

“넌 그걸 스스로 버렸지 않나? 정말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리 알렉산더가 혐오스럽다는 듯 말룸을 응시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리 알렉산더가 힘 빠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때 널 구하지 말았어야 했다.”

말룸은 얼어붙은 듯 몸을 경직시켰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양 다시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작이 단조로웠다. 같은 서류를 뒤집고, 또 뒤집고…….

리 알렉산더가 동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목소리로 선고하듯 이야기했다.

“네 죄다.”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뭐가 문제죠? 과거에 누리지 못했던 평범을 이루고 싶어 하는 것뿐이에요. 이제는 그럴 힘도, 권력도 있으니까.”

알렉산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평생 그렇게 살아라. 내가 라딘라티를 찢어 죽일 때까지. 놈을 죽인 다음은 네놈 차례다.”

“내 저주에 절절매는 주제에 퍽이나 잘도 날 죽이겠습니다.”

“사념체 하나 처리 못 해서 신전에 손을 벌리는 주제에 말이 많군.”

“……당장 꺼져버려!”

기어이 말룸이 들고 있던 펜을 기사에게 집어던졌다. 기사는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그것들을 대강 피해내다가 작은 쓰레기통 하나를 빗맞아주었다. 너무 자극하면 골치 아팠다. 속을 긁는 것은 이 정도로 해 두는 편이 나았다.

알렉산더의 낯이 다시금 침잠했다. 그가 진중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경고는 진심이다. 봉인의 보수야 하겠지만, 얼마나 회복될지는 장담할 수 없어. 감당할 수 없겠다면 차라리 이혼해라.”

“새신랑에게 이혼 운운하다니 제정신입니까?”

“지극히도. 애초에 그놈의 인간 혐오 탓에 끌어안지도, 입술을 비비지도 못하는 주제에 새신랑? 웃기지도 않아. 신방에는 걸음했나?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신방이 텃밭에 있는 건 아니겠지.”

말룸이 아예 폭발할 것 같으니 리 알렉산더가 덧붙였다.

“난 널 동정하지 않는다. 마땅히 괴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뭘 아는지, 정체를 들킨 건 아닌지, 널 사랑하긴 하는지, 혹시나 인어를 사랑하게 되진 않을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괴로워해라. 예민한 성격 꾹꾹 눌러 숨기고, 지금처럼 얌전히 연기나 해. 잘난 잔머리나 좀 굴려서 네 ‘주인님’을 처리할 생각이나 하란 말이다, 괴물.”

“…….”

“고작 싸구려 스노우볼 하나에 봉인이 완전히 사라질 뻔했다. 애정결핍이냐? 비싼 것만 모아 놓는 주제에…… 생각이 있다면 알아서 처신해라. 아니면 내가 널 죽이고 어떻게든 라딘라티를 상대할 거다. 네가 그자에게 찢겨 죽든 말든, 먹혀서 몸을 빼앗기든 말든.”

리 알렉산더는 도중에 감정이 격해졌는지 문을 거칠게 닫고 방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말룸은 심호흡하며 짜증과 분노를 다스리려 애를 썼다.

모든 것들이 물길 속으로 사라진 듯 엉망이었다.

일전에는 누군가와 혼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황제의 동생이 되는 대가로 혼인하게 된 첫 아내가, 물론 그자와는 매번 냉랭하기만 했고 심지어 그쪽에서 외도를 하는 바람에 이렇다 할 감정 교류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그래도 가까운 자가 자신의 치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 평범한 소꿉놀이를 흉내 낼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점이 썩 마음에 들었었다.

열쇠를 던져 준 것이 실수였을까.

그렇지만 권위를 세워주는 그 열쇠가 아니었다면 행실이 좋지 않았던 그자는 사용인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말룸의 호의는 딱 거기까지였다. 사실 그자가 죽든 말든 별 상관이 없어 보조 장치도 해 두지 않았었다. 이쯤 살면 서면상의 가족관계는 수집품 하나의 의미만도 갖지 않았다.

결국 그 여자는 성을 멋대로 쏘다니다 라딘라티의 사념체와 마주하고 잡아먹혔다. 실종 공표를 한 후 말룸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신부를 찾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을 뿐이었다. 인간 여자는 제게 사랑을 속삭이고 상냥하게 대하는 남자를 선호한다고 했으니 그에 맞는 가면도 썼다. 실제로 지금의 그 병약한 여자는 요즘 퍽 살갑게 굴어서…….

심장이 고장 난 창문처럼 덜컥거렸다. 성 전체가 한번 크게 진동했다. 봉인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말룸이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귀 끝이 화끈거렸다. 오필리아가 나날이 바짝 닿아 오는 바람에 평정심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근처에 두지 않으면 허전해 지켜보고만 있겠다 결심했지만 그것마저 시원찮았다. 봉인을 위해서라면 거리를 두는 것이 맞는데도 오필리아가 신기루처럼 어른거려 말룸은 자꾸만 텃밭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노기를 띤 정갈한 목소리가 낮게 비행했다.

“발타사르 님.”

“……렉스.”

말룸이 눈가를 꾹꾹 눌렀다. 목이 탔다. 고요에 감싸여 있던 새벽이 요란스럽게 동요했다.

말룸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물꼬가 트여 흐르기 시작한 감정의 강줄기를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심장이 완전히 녹아버리기 전에 수를 써야 했다.

‘아예 성과 일체화시켜 결정처럼 만드는 것도 좋겠지, 생명과 연관된 부위라는 말은 옛 이야기니까…….’

그렇게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면 진심을 내보이고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주술을 많이 중첩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 고통에는 이미 무뎌졌다. 고통에 물러서기보다는 섬광처럼 경이로운 그 사람의 마음을 쫓는 편이 나았다.

오필리아가 녹슨 밤, 수풀 사이에 숨은 작은 점 크기의 반디에 불과할지라도 말룸은 아내를 사랑하고 싶었다. 오필리아는 말룸의 마지막 인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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