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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17화 (17/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7화

말룸의 표정이 폭풍 가장자리의 낙엽처럼 흔들렸다. 선물 처음 받아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런담.

말룸은 보는 내가 다 어색해질 정도로 계속 상자를 관찰했다. 구김 자국이 남은 표면을 엄지로 쓸어 보거나 눈꽃 무늬를 검지로 톡톡 건드리는 모습이 수면 위에 도시가 솟는 것을 목격한 사람 같았다.

말룸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풀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런데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요. 평범한 스노우볼이라서…… 수제인데다 우리가 생각나서 사 오긴 했지만 특별히 비싸지도, 당신 수집품처럼 금빛 은빛으로 반짝거리지도 않아요.”

“괜찮아요.”

말룸이 야무진 손놀림으로 포장을 풀었다. 아름다운 스노우볼의 자태가 드러났다. 투명한 유리 표면에 빛이 반사되어 사물에 반짝이 장식이 내렸다.

말룸이 스노우볼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심미안에 차진 않을 텐데 감정에 열심이었다.

“소중히 보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 취향 아닌 거 아니까.”

그러나 돌아온 것은 깎아내리는 말이나 작위적인 감사가 아닌, 약간은 얼떨떨하고 진심 어린 당황을 품은 문장이었다.

“……고마워요.”

말룸의 황금빛 두 눈 안에 스노우볼이 가득 들어찼다. 말룸은 스노우볼을 기억 속에 박제하려는 것처럼 그 구체 장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가져봐요. 스노우볼.”

“네? 처음 가져본다니요? 당신 영지에서 사 온 물건인데요.”

“있다는 건 당연히 알았죠. 하지만 이런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손에 넣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말룸은 여전히 스노우볼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스노우볼은 가만 들고 있기만 하면 진가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무엇을 하나 싶어서 슬슬 답답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룸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만은 않는 것이 다가가도 될 듯했다.

“잠깐 실례할게요.”

그는 오늘도 틈 없이 흰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말룸의 손을 감싸 쥐고 위 아래로 흔들었다.

“자, 이렇게 하는 거예요. 물론 알고 있겠지만.”

어지간히 닿는 게 싫었는지 말룸의 몸이 유령을 마주한 사람처럼 경직되었다. 그래도 그는 스노우볼을 내던져 깨트리거나 나를 밀쳐 버리지 않았다. 분위기가 상당히 순항했다. 하지만 나는 말룸이 본성을 드러낼 경우를 대비해 뱀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눈이…… 내리는군요.”

말룸은 그 말을 끝으로 물끄러미 스노우볼만 응시했다.

독과 같은 고요에 묻혀 숨을 잃을 것 같았다. 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희미하고 안개처럼 뭉뚱그려진 어떤 상념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바라보듯, 혹은 빛바랜 추억 속으로 던져 넣은 꿈을 되새기듯 스노우볼의 유리 구체를 매만졌다. 꼭 마음을 빚는 모양과 비슷해 보였다.

나는 이렇게 원작의 말룸과 내 눈 앞 당신의 차이를 발견할 때마다 기대하고 싶어지고 만다. 로보의 당부가 있었는데도 그랬다. 내 불행을 모두 말룸의 탓이라 변명했지만, 사람 맘은 뜻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종 속이 타오르듯 아팠다. 의도한 것이라면 교활하고 틈 없는 작자였다.

일부러 살짝 떠보듯 물었다.

“마음에 들어요?”

말룸은 아주 생각에 잠겼는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나는 텃밭 돌보기에 집중했다. 이 대지는 흙길이 울퉁불퉁 일어나 토질이 썩 고르지 않았다. 꽃과 방울토마토를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심어 놓아 모양도 통일성도 정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만의 정원이라는 기분이 들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귀농에 대한 로망을 이런 식으로 충족하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는데. 이곳에 오면 온천에 푹 잠긴 것처럼 마음이 풀렸다.

붉은 해가 쫓기듯 사라졌다. 어슴푸레한 저녁이 하늘을 끌어안았다.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 있어 다리가 저렸다. 일어나야겠다 싶을 무렵, 말룸이 물끄러미 시선을 낮추었다. 그는 위협적이지도,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도 없이 호수 가장자리에 고여 있는 나룻배나 버려진 조각상처럼 보였다. 거미줄이 잔뜩 얹히고, 먼지만이 그를 찾는 유일한 신도인……. 흰 눈 속에 영원히 얼어붙어 잊힌 존재.

“눈이 많이 오는 날은 사방이 고요해지지요. 알고 있나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말룸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는지 대강 얼버무려 버렸다. 아쉬움이 갈변한 나뭇잎과 섞여 내렸다. 지금까지 그를 파악한 것보다 이 순간 알게 된 말룸이 훨씬 진실해 보였다.

말룸이 텃밭의 흙길만을 눈에 담았다.

“그런 날에는 외로움이 크게 다가와요.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게 불가능할 때에는…….”

말룸은 말을 끝까지 내는 대신 살짝 웃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의 면면을 관찰했다. 흔한 잔주름 한 줄기, 점 하나 없이 매끈하고 찬란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표면 밑에 품은 물살이 거칠게 소용돌이쳐 말룸의 마음에 근심을 만들었다.

말룸이 스노우볼을 구깃구깃한 상자에 다시 넣어 보관했다. 소중한 보물을 대할 때의 조심스러움이 돋보였다.

“이건 잘 가지고 있을게요. 무척 예뻐요. 흰 눈도, 눈 덮인 성도, 성 앞의 남녀 한 쌍도.”

“다음에는 더 좋은 걸로 선물해줄게요. 보석이나 반짝이는 검 같은 거요.”

“이것도 충분히 반짝거려요. 선물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말룸이 엄지로 상자 표면만 매만졌다. 기분이 싱숭생숭해 노란 방울토마토 꽃만 바라봤다. 진심으로 내 선물이 달가웠던 걸까? 비싼 것만 갖는 남자라지만, 아내에게 받은 첫 선물을 기념하는 느낌으로?

하지만 말룸은 나를 순식간에 얼음 바다 속으로 던져 넣었다.

“당신과 친하게 지내는 인어가 저와 관련해 무언가 말하진 않던가요?”

“네?”

손끝이 차가워졌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내가 무언가 잘못 행동한 게 있나? 각종 의문들이 한데 엉겨 머리가 핑핑 돌았다.

긴장을 풀고 있었다면 오이 본 고양이처럼 팔짝 놀라 전부 들킬 뻔했다. 이제껏 최악의 시나리오를 전부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움찔하려는 몸을 가까스로 내리누를 수 있었다.

나는 천연덕스레 눈을 깜빡이곤 잡아떼었다.

“글쎄요, 별 이야기 없었는데.”

“……거짓말이군요. 당신과 그 인어 사이에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 특유의 유대감이 느껴져요. 짧은 시간에 상대와 친해질 수 있는 요소는 많지 않죠.”

말룸이 아름답게 웃었다. 입술을 깨물 뻔한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제는 손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차가워지고 소름이 비죽 돋았다.

단언하는 이유가 분명 있는 것 같았다. 흙 위로 구덩이를 내려 안으로 숨고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차악뿐이었다. 거짓 속에 진실을 교묘히 숨겨야 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죠? 성에 이상한 괴물이 산다고는 듣긴 했어요. 당신과 연관되어 있으니 조심하라고도. 하지만 너무 허황한 이야기잖아요. 당신은 저를 사랑하는데다 이 나라의 대공이고…… 그래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흐음…….”

그가 작게 비음을 흘렸다.

넘어가라, 그냥 넘어가, 제발.

말이 변명조로 나왔던 걸까? 조급한 감이 없잖아 있기는 했다. 나는 그린 듯 웃으며 재빨리 덧붙였다.

“로보에게 들은 말 중에 이런 이야기도 포함되는 건가요? 그 사람은 해적이라 그런지 종종 동화 같은 얘기를 많이 해요. 사람 말을 하는 핑크 돌고래 얘기도 해줬었는데.”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자가 당신에게 관심 있는 것 같아서, 살짝 예민해졌나 봐요.”

말룸이 결정했는지 화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거세게 흔들렸다.

“네? 로보가 저한테 관심 있다니, 설마요. 그건 정말 아니에요.”

너스레를 떨며 웃었지만 금방이라도 먹은 것을 게워낼 것 같았다. 모종삽을 든 손이 벌벌 떨려 삽을 흙 속에 푹 찔러 고정했다. 손 떠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식은땀이 났다. 어서 대화를 마무리 짓고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스노우볼은 자기 맘대로 하라지. 이미 내 손을 떠난 물건이었다.

나는 괜히 이런저런 동작을 하며 아무렇게나 말했다.

“음, 갑자기 생각난 건데, 당신에게도 결점이 있나요?”

“물론이죠. 아무리 완벽해도 어딘지 결함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살아 있는 이상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말룸이 단언하듯 말했다. 흘끗 올려다본 그는 뭔가가 북받쳤는지 흐린 표정이었다. 스노우볼이나 겨울 따위의 요소가 방아쇠가 된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말룸은 놀랄 만큼 감정적이었다.

“특히 인간은 구역질이 나올 만큼 형편없어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들 중 인간만큼 가치 없는 생명이 있을까요? 연약하고, 시끄럽고, 자기만 알고, 독선적이고…… 비단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아요.”

“…….”

“참. 음…….”

말룸이 정신을 차린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잠시 멈추어 있다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내게 장갑 낀 손을 보였다.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결점이라고 했었죠? 예를 들어, 저는 타인과 닿는 걸 싫어해요. 장갑을 착용하면 좀 낫긴 하지만요.”

“……미안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덥석덥석 잡았네요.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사과 받으려던 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은…… 괜찮을 것 같아요.”

“예의상이라도 고마워요. 그래도 조심할게요.”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도저히 믿을 마음이 들지 않아 그냥저냥 웃었다.

말룸은 그 이상 기피증이라고 포장된 먹이 멸시 사상에 대해 가타부타 첨언하지 않았다. 기피증이라기보다는 인간 혐오증이라고 이름 붙이는 게 나을 듯했는데, 어느 쪽이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텃밭 관리를 정리하는 척 삽이며 물뿌리개며 부산스럽게 정리했다. 나는 그것들을 한가득 끌어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벌써요? 곧 저녁이라 선선하고 좋은데.”

“아까 리 경에게 오래 시달렸더니 너무 힘들어서요. 운동이 그렇게 고된 건지 처음 알았어요. 참, 말룸도 원한다면 한쪽에 무언가 심어 보는 건 어때요? 꽃씨나 모종을 줄까요?”

말룸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항상 적막한 남자였다. 나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억지미소를 지었다.

말룸이 조용히 내리는 눈처럼 작달막하게 덧붙였다. 그의 시선은 텃밭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노우볼은 소중히 간직할게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지만 차라리 버렸으면 싶었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 물건을 굳이 떠안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껄끄러운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그 스노우볼이라면, 버리는 편이 말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가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기가 다 빨렸다. 말룸과 있으면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어서 더욱 그랬다.

말룸 발타사르는 아주 교묘한 사냥꾼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도록 하면서도 노련하게 원하는 정보를 쏙쏙 캐갔다. 내가 어설픈 건지도 모르겠다. 사회생활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수백 년 묵은 괴물을 상대할까.

방으로 올라가는 도중 입술을 이로 짓씹어 괴롭혀댔다.

조금 전, 나는 석양 속에 있는 당신이 참 예쁘다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러면서도 조금 외로워 보인다고까지 생각하고야 말았는데. 내가 준 것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일으킨 듯해 차라리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반짝이는 색지가 내리는 스노우볼을 살 걸 하고 찰나 후회하기도 했는데…….

방문 앞, 호위 중인 듯한 리 경이 붉게 떠 짓무른 눈가를 발견했는지 놀란 듯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바보같이 왜 울고 그런담.

지금쯤 배 수리 상황을 체크하고 있을 로보가 보고 싶었다. 마음이 바다에 담긴 것처럼 매양 일렁거렸다. 뱃멀미라도 할 듯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룸과 함께 있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문득 바라본 화장거울 안의 여자는 지나치게 창백해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죽은 자 특유의 소름 끼치는 창백함이 유독 도드라졌다.

아직 죽음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이 곧 저승이요 내 무덤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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