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6화
로보는 이후 이것저것 주의할 점을 늘어놓았다. 그것들을 크게 분류하면 대강 네 가지였다.
하나. 말룸이 의심할 가능성이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연덕스레 행동할 것.
둘. 로보가 돌아올 때까지 최대한 말룸의 비위를 맞출 것.
셋. 사랑에 빠진 듯 행동하되 절대 마음을 주지 말 것.
가장 중요한 마지막. 말룸 발타사르를 동정하지 말 것.
로보에 의하면, 모르긴 몰라도 말룸은 라딘라티가 수하로 삼을 만큼 불행한 과거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같다. 그렇지만 불행한 이가 말룸 하나도 아닌 데다 본인의 불행을 씻어내기 위해 남을 해치는 중죄를 저질렀으므로 동정할 가치가 없다고 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심장께가 욱신거렸다. 내가 아팠을 때, 왜 말룸은 나를 걱정했던 걸까. 그의 웃음과 친애가 전부 거짓이었던 걸까…….
잠깐 걱정해주었다고 믿고 싶고 마음에 두른 철을 뭉그러트리다니. 망망대해에서 마주한 뱃전의 불빛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법이었지만 내가 너무 무른가 싶기도 했다.
로보가 성에 온 후 며칠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착잡함이 가시지 않았다.
말룸은 그날 나를 겁먹게 한 일이 굉장히 꺼려졌던 모양으로 각종 선물 공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처럼 화병의 꽃을 갈아주겠다느니 건강 상태를 보겠다느니 하며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미묘할 정도의 거리감이 말룸과 나 사이에 장벽처럼 가로놓였다.
그래도 말룸은 결혼 며칠 만에 남자 인어를 끌어들인 신부라고 속닥대는 사용인들을 문초하는 등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모르는 이들이 보면 세기의 사랑꾼이라고 떠들어댈 정도였다. 그 점이 이상스러워 심계를 괴롭혔다.
거울 속 여자의 표정이 불량 사기그릇처럼 갈라졌다. 말룸은 나를 사육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질 좋은 음식, 다정한 미소, 달콤한 사랑의 말, 리 경으로 하여금 하게 된 규칙적인 운동……. 삼 년이 되기 전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잡아먹겠다는 심보가 훤했다. 말룸은 병약한 생명체를 먹이로 선택하지 않는 듯했다. 인간이 병 걸린 소를 잡아먹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나는 자연히 말룸과 리 경에게서 멀어졌다. 대신 배를 수리할 동안 성에 머물게 된 로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로보는 여러 섬을 누비고 다녔던 모험 이야기를 풀어놓거나, 배를 돌보러 외출한 후 돌아오면서는 군것질거리를 사 왔다. 말룸이 주는 보석함이나 값비싼 드레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싼 음식이었지만 입맛에 꼭 맞았다. 로보의 활기와 친애가 음식에까지 옮겨 붙은 듯했다.
나는 케이론 호 수리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친 선원의 치료비와 식비까지 지출했다. 어차피 살기 위한 돈인데다 말룸도 저택 세 채 값을 푼돈이라 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당당히 대가를 요구했던 것과 달리 로보는 종종 면구스러워 했는데, 그럴 때면 평소 거리낌 없던 태도와 대비되어 인어가 살짝 귀엽게 느껴졌다.
그와 결혼할 여자는 분명 꿈에서나 나올 법한 행복한 생활을 하겠지…….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로보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로보는 이곳에서 처음 사귀게 된 친구였고, 날 이끌어 갈 소중한 조력자였다. 마음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타인을 쉽게 믿어버리는 걸까? 그렇지만, 코랄 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 무엇도 숨기지 않는 상대에게는 벽을 세우기가 요원했다.
나는 로보의 배가 하늘을 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그는 나를 감옥 탑 밖으로 이끄는 푸른 돛단배였다.
말룸을 그럭저럭 대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내 생활은 로보와의 시간으로 예쁘게 색칠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면 로보가 있는지부터 확인한 후, 그가 저택에 있다면 티타임을 함께 보내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다. 만약 그가 없다면 글자를 공부하기 위해 신문을 확인한다. 그 후에는 귀족으로 있기 위한 수업이 이어졌다.
저녁부터는 휴식 시간이다. 처음에는 이 시간에 뭘 해야 할지 몰라 성 뒤편 텃밭에서 흙장난을 퐁당퐁당 쳤다. 나는 최근 들어 티샤에게서 모종이나 물뿌리개를 전해 받아 작은 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런데 텃밭에 쪼그려 앉아 모종 따위를 심거나 꾸물꾸물 기어가는 지렁이를 보고 있으면 슬그머니 합류해 내가 하는 모양을 바라보는 이가 한 명 생겼다. 정말 의외인 일로, 그자는 말룸 발타사르였다.
말룸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전처럼 완벽한 남편을 가장해 사랑을 속삭이거나 억지로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뜻 모를 시선으로 나를 집요하게 관찰하기만 했다. 며칠간 나를 슬슬 피하던 사람이 웬일인가 싶었지만 그는 딱 그만큼이 최대한이라는 양 그 이상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다. 처음의 유혹적인 태도와 상반된 모습이 낯설었다.
맨 처음에는 말룸의 비위를 맞추려 잔뜩 움츠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날 ‘아직은’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남편 연기를 하는 말룸은 좋은 청자였기 때문에, 말 할 사람이 로보뿐이었던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은근슬쩍 풀어놓게 되었다.
말룸은 이상한 개그나 비현실적인 모험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는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만 허수아비와 대화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경계하는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저녁의 말룸은 말을 꾸며내진 않았지만 굳이 연기를 이어갈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그는 싫은 것을 싫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좋다는 말도 없었다. 그 탓에 나는 항상 선을 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늘도 물을 주면 되나요?”
텃밭을 돌보고 있으려니 옆에서 말룸이 물뿌리개를 가져갔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졸졸졸 물을 주었다.
말룸은 요즘 식물 돌보기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물이 고일만큼 많이 주는 바람에 모종을 몽땅 망쳐 놓기도 했는데, 이제는 물 양도 조절할 줄 알고 모종도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제대로 심었다.
“주술로 성장시키면 금방 자랄 텐데……. 고생이군요.”
“그럼 재미없잖아요, 그쵸?”
“글쎄요. 하지만 당신이 즐거워하니까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말룸의 입 발린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가 주변 잡초를 대강 정리했다. 풀잎이 말룸의 화려한 손을 따라 서기도 했고 무너지기도 했다.
말룸이 대지에 묻혀 꽃잎을 뒤집어 쓴 듯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마치 재주를 부리는 뱀을 발견한 것 같았다.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코브라가 떠올랐다. 막다른 길에 몰린 뇌는 어떻게든 웃음을 찾으려 이런저런 궁리에 한창이었다.
그래도 로보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할 상대가 생겨 나쁘지만은 않았다.
“말룸, 오늘은 로보가 해군 소속 창잡이와 겨루었던 일을 얘기해줬어요. 그 창잡이는 인간인데도 인어만큼 강해서 로보도 애를 먹었대요.”
축축하게 젖은 땅을 보던 말룸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나와 텃밭에서 만나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큰 숨을 뱉었다. 뱀이 마침내 속내를 풀어놓았다.
“제발 내 앞에서 즐겁다는 듯 그자 이야기하지 말아요.”
나는 악의 반 긴장 반으로 받아쳤다.
“의심하는 건 아니죠? 로보는 제 친구고, 난파당했다는 것도 정말이래요. 바다와 친하지 않은 인어라던데요.”
“인어가 바다와 친하지 않다고요? 저주를 받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돌연변이인지…….”
말룸이 모종삽을 지면에 성의 없이 내리꽂았다. 잡초 몇 덩이가 뭉그러졌다.
“어쨌든 당신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인어가 싫어서 그런 겁니다.”
“저 때문에 싫은 거예요? 경계할 필요 없어요, 말룸. 마차에서 말했잖아요.”
“뭘요?”
“우리 함께 행복해지자고. 그런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 있겠어요?”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속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말룸이 그날 했던 아부를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가 그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줄 정도면 되었다.
말룸은 놀란 듯했다. 그는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지만 이전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진한 표정을 흉내 내었다. 모종삽으로 흙더미를 토닥이며 장난도 쳤다.
한참 말이 없던 말룸이 물뿌리개와 모종삽을 내팽개친 후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꾼은 만나 보았나요?”
어지간히 로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모험 이야기에 대한 주제가 아니었다. 말을 돌리는 모양새가 아주 얄미웠다.
“아직요. 로보가 있으니 괜찮아요.”
“해적은 무언가를 배우기에 적절한 부류가 아니죠.”
“저도 해적이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알아요. 로보가 벌써 섬 몇 개를 말아먹었다는 것도요…….”
로보는 자랑스럽다는 듯 자신에게 걸린 현상금이나 무용담 따위를 늘어놓곤 했는데, 그의 쌍창 두 자루가 이야기에 등장할 때면 로보도 이 세계에서 특별히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했다. 나는 무언가 첨언하고 싶었지만 인어에게 인간의 윤리의식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저 내가 로보에게 관대해지고 있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나는 로보가 있어서 손톱만큼이라도 웃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 법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말끝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자 말룸이 거 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는 사람 속을 긁어 놓는 재주가 있었다.
“그럼 말룸이 대신 해주지 않을래요? 재미있는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라…….”
말룸의 시선이 촘촘히 석양이 앉기 시작한 저녁 하늘로 멀리 향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이 석양을 받아 불그스름해졌다. 불타는 들녘을 엿본 듯해 장난을 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블랙아웃을 맞이했다.
지금 이 순간, 작달막한 텃밭의 중앙.
저 괴물 뱀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이 알고 있기는 하죠.”
말룸은 답지 않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마냥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라서 해줄 건 못 됩니다.”
“괜찮아요. 말동무가 생긴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서요. ……그리고, 저기, 오늘 줄 거 있어요.”
다름 아닌 스노우볼이었다. 오늘도 말룸이 텃밭으로 나올 걸 예상하고선 꼭꼭 챙겨 왔다. 구깃구깃해진 상자는 마이너스였지만 선물 상자 없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상자도 스노우볼에 딱 맞는 눈꽃 디자인이어서 다른 상자로 바꿈직 하지 못했다. 구김을 최대한 펴 보긴 했는데 영 석연찮았고, 말룸도 이걸 받자마자 뒤에서는 버려버릴 테지만 어쨌든 마음을 어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스노우볼을 주겠다고 결정할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룸이 싼 물건을 주었다고 성을 내진 않을지, 마음에 들지 않는답시고 해코지하지는 않을지 상당 기간 숙고하고 전달 결정을 내린 조공품이었다. 게다가 이건 로보가 내게 준 첫 선물이었다.
나는 미련을 뒤로 하고 말룸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자, 받아요.”
마른침이 넘어갔다. 버릴 걸 알고 주는 선물이란 뒷맛이 씁쓸했다. 말룸은 구김 진 상자를 빤히 관찰하다가, 며칠 전 로비에서 내가 힘껏 쥐고 있던 상자가 생각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전에 로비에서 당신이 들고 있던 상자가 아닌가요?”
“맞아요. 그때 분위기가 좀 그래서…… 언제 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비싼 것도 아니고, 당신 취향 고려하지도 못하고선 제 맘에 드는 걸로 사 왔지만요.”
말룸이 떠맡듯 상자를 받았다. 곧장 고맙다느니 하며 한쪽으로 치워 버릴 것이라는 짐작과는 달리, 그는 생경한 일을 겪는 듯 상자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