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5화
방 안에는 로보와 나, 이렇게 둘만이 있었다. 스노우볼이 든 선물 상자는 방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두고 신경 쓰지 않았다.
사용인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차를 내어주고 말없이 물러간 티샤가 로보와 나의 사이를 가늠하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내 평판은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을 듯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평판보다 로보와의 대화가 더 중요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 잠시만 기다려 줘.”
로보는 많은 것을 아는지 착잡해 보였다.
나는 찻잔을 꼭 쥐었다. 티타임을 위해 구비된 크리스탈 테이블이 푸르스름한 찻잔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가구의 고급스러움이 아니었다.
심장이 초조함 범벅이 되어 쿵쾅거렸다. 로보가 알고 있는 정보가 내가 아는 것보다 값진 정보였으면 좋겠다는 것만이 지금 내 최대의 관심사였다.
어쨌든 로보의 협조를 얻어내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쿠션에 파묻힌 듯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힘껏 헤엄쳐 흙탕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미꾸라지였다. 로보의 도움이 절실했다.
한참 동안 쿠키만 씹던 로보가 머리를 헤집었다. 로보의 홍차는 단 한 모금도 비워지지 않았다. 그는 내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 한쪽에 잘 놓아두었다. 덕분에 그의 표정이, 사납게 타오르는 용암 빛깔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잘 보였다.
로보가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얼마나 알아? 숨기지 말고 말해 줘. 그래야 아가씨를 도울 수 있어.”
“……말룸이 식인을 해서 불로불사를 얻었다는 거요. 다음 타깃이 저인데다, 돌아오는 식인 주기까지 삼 년 남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말룸은 삼 년 후에 저를 잡아먹을 거예요. 확실해요.”
“식인을 해서 불로불사를 얻었다고? 불로불사가 그런 걸로 이룰 수 있는 거였어? 뭔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아가씨 나름대로 짚이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겠지.”
로보가 턱을 괴었다.
“그것도 그렇고, 왜 삼 년 남았다고 확신하는지 모르겠는걸. 저 부류의 행동 양식이나 습성 같은 건 알려진 게 없거든.”
“저 부류라니요? 괴물은 말룸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나요?”
핏기가 가셨다. 뇌에서 정보 처리가 잘 되질 않았다. 말룸을 어떤 부류 중 하나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선 다른 괴물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일 그렇다면 내 생존 확률은 없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방석은 푹신했지만 영 딱딱하게만 느껴졌다. 긴장으로 입술을 잘근 씹었다. 로보가 친절히도 쿠키를 물려주었다.
“긴장 풀어, 아가씨. 내가 있잖아.”
얼떨결에 쿠키를 받아 우물거렸다. 내가 잘 받아먹자 로보는 뿌듯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애인이 생기면 상대에게 잘 할 것 같은 남자였다.
로보가 생각을 끄집어내듯 테이블에 팔꿈치를 내리고 턱을 괴었다.
“괴물이라…… 많지도 않지만 적지도 않다고 배웠어. 유적에 적힌 개체는 총 넷이야. 그중 하나는 전갈이었는데 신전 측에 사냥 당했고, 셋이 더 남았다고 했지.”
로보가 덧붙였다. 자신의 쌍창을 떠올리는 듯 빈손아귀를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어. 하지만 괴물 무리의 우두머리, 천륜을 저버린 배신자는 유명하지.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해줄게.”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놀라웠다. 전부 소설 속에 나오지 않은 정보들이었다.
로보의 말에 따르면, 말룸에게 불로불사를 준 존재는 따로 있다고 한다.
그자의 이름은 라딘라티.
인어들이 경멸을 담아 ‘존재해서는 안 될 자’라는 뜻의 이름을 붙인 것뿐이지 진짜 이름은 누구도 모른다 했다.
라딘라티는 천 년 전, 고대 세계가 피폐해지고 문명의 끝이 찾아왔을 무렵 절멸할 위기의 1기 아틀란티스를 재건한 영웅이었다. 그러던 중 아틀란티스에 유행병이 돌았는데, 다른 인어는 가볍게 앓고 넘어갔지만 면역 체계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라딘라티만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후 라딘라티는 온갖 주술과 저주를 섭렵하며 생을 이어갈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 끔찍한 방법으로 불사를 연명하는 주술이었고…….
로보가 홍차로 목을 축였다. 나도 따라서 찻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손이 떨려 찻물이 덤벙덤벙 튀었다.
말룸은 그저 하수인에 불과한데다, 괴물들의 수장이 따로 있다니.
설마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 없었다. 원작에도 등장하지 않은 비화였다…….
말룸 같은 괴물이 그를 포함해 셋이나 더 존재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창문을 열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로보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담았다.
“2기 아틀란티스 왕궁 유적 벽화에 적혀 있는 내용이야. 어린 인어들의 견학 필수 장소지. 어쨌든, 라딘라티가 찾아낸 게 행성의 수명을 자신에게 덧대어 생을 잡아 늘이는 방법이야. 그렇게 하면 행성 자체가 멸망하기 전까지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해. 오천의 인어가 그 주술의 동력으로써 학살당했고, 라딘라티는 결국 영생을 얻었지만 2기 아틀란티스를 연 해왕 트리톤과의 전투 끝에 패배했지.”
로보가 자신의 쌍창 중 하나를 소환해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성게의 가시를 닮은 듯도 했는데, 어딘지 섬뜩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창의 머리와 꼬리는 구별할 수 없었다. 그저 창날만 달린 꼬챙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바로 트리톤이 사용하던 창이야. 트리톤을 제외한 사람이 접촉하면 창을 쥐기만 해도 검은 피를 쏟으며 며칠간 앓고 말지. 그것 때문에 저주받은 창이라고 불렸고, 세대를 건너뛰어 나에게 계승되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어.”
나는 그 불길한 창에서 고개를 돌렸다. 로보가 창을 다시금 없애주었다.
“……일이 어떻게 되었든 라딘라티는 악당이네요.”
나는 부러 악당이니 뭐니 쉬운 단어만 거론하며 분위기를 풀어 보려 애썼다.
“응, 악당이지. 해왕 트리톤은 라딘라티와 이부형제였다는데, 나는 이게 애들 겁주는 용의 전설인 줄만 알았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잠 안 자면 라딘라티가 와서 잡아간다! 같은.”
로보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검은 혈관의 트리톤이 라딘라티를 심해 깊은 곳에 유폐했다고는 하는데, 그자의 힘이 너무 강해 도주했다고 해. 이후 라딘라티는 제 눈에 띄는 이들에게 생을 연명하는 저주를 내렸고.”
“말룸도 그 중 하나라는 소리죠?”
“그래. 인어는 기감이 민감하기 때문에 그런 녀석들을 만나면 곧장 알아볼 수 있다고 했어. 영혼에서, 그리고 그들이 다루는 힘에서 오래 묵은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고 했거든.”
“시체 썩는 냄새…….”
“맞아. 만나보고 확실히 알았어. 코를 쥐어뜯고 싶을 만큼 끔찍한 냄새였지. 그건 육체에서 나는 게 아니라 영혼에서 나는 악취라 사라지지도 않아. 누군가를 해치면 해칠수록 악취가 짙어지지……. 정말 심각한 수준이라면, 말룸 발타사르가 본모습으로 돌아갔을 때는 평범한 인간이라도 맡아낼 수 있을 거야.”
본모습이라면, 뱀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티스푼을 만지작거렸다. 스푼이 찻잔 벽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로보가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하니 인간들 틈에서, 그것도 대공으로 있는 줄은 몰랐어. 인어가 수인족만큼 기감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대놓고 풍기는 썩은 내를 못 맡을 리 없지.”
“…….”
“아가씨 남편이 아가씨를 정말 사랑하는 것도 아닐 거야.”
알고 있었다. 별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는 쿠키를 다시 집어먹었다. 초콜릿 칩이 박힌 쿠키가 끔찍하게 달았다.
로보가 짧게 땋아낸 왼쪽 머리칼을 의미 없이 빙빙 돌려 꼬았다. 어떤 일에 집중하는 그만의 방법인 것 같았다.
로보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그는 실을 잣듯 차분히 설명하려 노력했다.
“조금 전 말했지, 대공의 심장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심장을 육신에서 분리해 낼 수 있는 거라면, 혹은 아예 심장 없이도 움직일 수 있는 거라면 그건 괴물이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뜻해. 그리고 대공은 괴물로 탈바꿈하며 살고 죽는 순리를 벗어난 셈이라 모르긴 몰라도 행성의 저주를 받았을 거야.”
로보가 턱을 괴었다.
“그렇지만 그게 약점이 될 수는 없겠지.”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로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당연한 것을 말하는 양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도망쳐야지.”
“말룸은요? 그만큼 죄를 지었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데요?”
송곳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팠다. 로보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이 든 건 아니지?”
나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말룸 발타사르의 신랑인 척하기 작전은 상상 이상으로 내게 잘 먹혀들었다. 혼란스럽고 두려웠지만, 그리고 말룸이 끔찍했지만 자꾸만 그의 걱정 어린 눈동자와 엷은 미소 띤 얼굴이 어른거렸다.
나는 모든 춘몽을 떨쳐 내려 애썼다. 음색이 단호하게 잘 꾸며져 나왔다.
“아뇨. 말룸이 뱀인 줄 알았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걸 알게 된 후로는 도망가려고 조력자를 찾고 있었고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까지 말룸 하나만 피하면 다 괜찮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원흉이 따로 있었던 데다, 말룸 같은 존재가 더 남았다니……. 말룸도 그자들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속에 녹조가 낀 것처럼 울렁거렸다.
로보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쿠키 한 조각을 더 내밀었다. 나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 쥐었지만 입안으로 가져가지는 못했다.
로보가 테이블 표면을 검지로 일정하게 두드렸다. 잘 정돈된 둥그스름한 손톱이 눈에 띄었다. 메트로놈 소리를 듣는 양 나는 일정한 박자에 녹아들었다.
내가 조금씩 쿠키를 먹기 시작하자 로보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혼자서 많이 힘냈구나, 아가씨.”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그렇게나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방울방울 차올라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수그렸다. 로보가 허둥대는 게 느껴졌다.
“울리려던 건 아니었어! 괜찮아? 나는 아가씨가 걱정스러워서……. 걷는 거 보니까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비실비실하고, 처음부터 귀족이었던 것도 아닌 듯하고.”
“미안해요. 안 울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말룸에 대한 걸 안다니까 안심 돼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친절하고 잘 생긴 늑대상어 로보라고 해줘.”
그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자유분방한 능청스러움에 울음이 쏙 들어갔다.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로보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푹 숨을 내쉬었다.
“아틀란티스에 잠시 다녀올게. 공개된 유적 뒤편, 무너진 제단 유적이라고 다른 유적이 하나 더 있어.”
“공개된 유적 뒤편이라면, 출입이 제한된 유적이라는 의미인가요?”
로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접근하는 방법이 있지. 어쨌든 거기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배를 수리해줘. 난파당했다는 건 정말이거든……. 인어가 바다에 사랑받는 종족인 건 맞지만, 난 바다에게 사랑받지 않아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할게요. 골치 아픈 일 맡겨서 미안해요.”
“아가씨는 날 고용한 거잖아. 받은 만큼 일해야지.”
로보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납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살고자 노력하는 존재는 언제나 존중받아야 해. 게다가 아가씨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 도와주고 싶고.”
안도감이 추적추적 마음을 적셨다. 그렇지만 아직 잔재하는 불안감이 마음을 술렁이게끔 했다.
애처럼 구는 것은 마뜩잖았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에 로보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어 버린 듯했다.
“……돌아오는 데에는, 얼마나 걸리나요?”
로보가 씩 웃었다. 일전 광장에서 보았던 로보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두 달. 그 안에 반드시 돌아올게. 아가씨는 무도회 준비를 해야 하는 거지? 최대한 대공 녀석의 비위를 맞추고 있어.”
“두 달이나요?”
“아틀란티스는 랑그로스 삼각 지대 한복판에 있는 소용돌이를 통해서 가야 해. 그 소용돌이 해역이 아틀란티스로 가는 유일한 통로인데, 얼어붙은 남극해에 있어서 한 번 뭍으로 나온 인어조차 아틀란티스로 돌아가는 게 쉽진 않지. ……음. 아틀란티스로 가는 길은 종족 비밀인데. 잊어줄 거지? 우린 좀 폐쇄적이거든.”
“물론이죠. 부담주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미안해요.”
얼굴이 홧홧해졌다. 혼자 헤쳐 나가기로 했으면서 벌써 그가 떠난다고 실망하는 꼴이란.
하지만 로보는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조롱하거나 얕잡아 보는 대신 안심시켰다.
“이만 쉬어. 하지만 최대한 빨리 배를 수리해줘야 해. 수리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 테니까.”
“그렇게 할게요. 어차피 저는 자금을 대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로보가 위험해지는 건 아니에요? 말룸을 죽일 수 없다면서요.”
그가 코웃음 쳤다.
“난 녀석을 죽이려는 게 아니야.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거라면 어떻게 해볼 만하겠지만 호적수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상대와 싸우면서 아가씨를 상처 없이 지킬 수는 없겠지.”
“네? 그렇다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빤하잖아? 그놈에게서 아가씨를 약탈하는 거야.”
해적 특유의 바다 냄새 나는 이야기였다.
“정공법은 거추장스럽기만 해. 약탈하고 도망치며 바다를 유영하는 것이야말로 내 전문이지. 놈이 끝의 끝까지 쫓아와도 아가씨의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못하게 할게.”
그가 확언했다.
“난 지킬 수 있는 말만 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드리워졌다. 이곳에 체류하고 나서 처음 나오는 안도의 증표였다.
어둠에 함몰되어 있던 마음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로보야말로 나의 자유였고, 구원이었고, 내가 지니지 못한 힘이었다. 인간은 힘이 있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성향이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로보와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나는 그의 편으로 쿠키 바구니를 한껏 밀어주었다. 별이며 하트 따위로 빚어진 아기자기한 버터 쿠키는 분명한 뇌물로써 순수한 마음의 발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로보는 멋쩍은 듯 쿠키 겉면을 매만지다가 날름 먹었다.
나는 그 모습을 턱을 괸 채 지켜보았다.
처음부터 말룸이 아니라 로보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