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4화
나는 다가가 안겼던 일이 애초에 없었다는 양 말룸에게서 떨어졌다. 어색해서 도저히 안겨 있을 수가 없었다. 대신 그리운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젖은 눈으로 말룸을 담았다.
오래전에 죽은 애완 도마뱀 초록이를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 학창 시절 연극부에 들어 있었던 것이 새끼손톱만큼 도움이 되었다.
“별 일은 없었지만 그냥 보고 싶었어요. 저는 아직 당신이 낯설지만, 그래도 제 남편이라고 당신이 생각나나 봐요.”
말룸은 웃지 않았다. 내 머리칼을 다정스러운 척 정리해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내 옆, 기척 없이 서 있던 로보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무언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룸은 여름날 더운 음료를 뒤집어쓴 것처럼 불쾌해하고 있었다.
“말룸, 로보는…….”
“오필리아.”
사정을 설명하려 입을 열었지만 말룸이 말을 끊었다. 예의 운운할 때가 아니었다. 말룸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말룸이 무언가를 골몰하듯 남색 머리칼을 느리게 헤집었다. 그 행동이 꼭 뱀이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간 상황을 파악했는지 말룸이 호흡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는 예리한 분위기를 결코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시퍼런 빛을 띠었다. 그의 눈은 금처럼 찬란했지만 손에 넣으려는 즉시 인간으로 하여금 비극적인 끝을 맞이하게 만들었다.
“저 근본 없는 인어는 어디에서 주워 온 거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완전히 심기가 뒤틀려서,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숨길 생각도 없는 목소리.
말룸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 속내를 내보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로보가 말룸이 연기를 집어던질 만큼 적대감을 느끼는 상대라면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생존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크게 심호흡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면 긴장했다는 것이 들킬 것 같아 스노우볼 상자라도 세게 움켜쥐었다.
나는 말을 빠르게 쏟아내었다. 새로운 존재에 신난 여자처럼 보였으면 했다.
“아, 배가 난파되었다고 해서 제가…….”
말룸이 나를 맹렬히 직시했다. 맹수 앞의 쥐가 된 듯했다. 나는 불씨가 옷에 튄 것처럼 한껏 겁을 집어먹었다.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말룸의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검게 눌어붙은 경멸과 증오는 오롯이 로보만을 향해 있었다. 말룸은 로보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석탄처럼 짙게 굳어 흉포한 본성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말룸…… 그, 혹시 제가 잘못했나요? 만약 잘못한 게 있으면…….”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말룸이 다시 말을 둥글게 꾸몄다.
“아뇨, 당신 잘못 아니에요. 겁먹지 않아도 돼요.”
그러고는 기피증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나의 왼 볼을 어루만졌다. 단지 정해진 동작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지한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끔찍한 오싹함이 몸을 휘돌아 나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양손에 꼭 그러쥐고 있던 선물 상자는 찌그러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오필리아.”
말룸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만큼은 벨벳처럼 부드러웠고 마냥 다정했다.
“바다의 축복을 받는 인어의 배가 난파당할 수도 있나요?”
“……바다의 축복을 받는다뇨?”
“모르고 있었나요? 인어는 바다의 보호를 받아 물과 관련된 사고를 당하지 않아요.”
“잠시만요. 저는, 저는 정말 몰랐어요.”
“당연히 그러셨겠죠.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아, 미안해요. 말이 뾰족하게 나왔군요. 잠시 너무 흥분했어요. 이건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라…….”
말룸이 정신을 차린 듯 날카로움을 가라앉혔다. 그렇지만 내 손끝은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말룸도 그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달콤한 말을 늘어놓아 나를 달래려 했다.
“오필리아, 저 좀 봐요.”
아름다운 미남이 눈썹을 내려뜨리며 순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하나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맹세코 위협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제가 사랑하는 당신을 해칠 리가 없잖아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아요. 다만 저는, 경멸하는 것을 대할 때 예민해지는 구석이 있어서…….”
눈물이 비집고 올라오려는 걸 꾹 참아 삼켰다. 내가 서러워하는 이유는 당신의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입안 살을 짓씹어 감정을 억눌러야 할지, 아니면 마주 웃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고장 난 전자제품처럼 두뇌 회전이 멈췄다. 몸 곳곳을 이루는 회로에는 장마전선이 드리워져 스파크가 튀었고, 다시 고칠 재간도 기력도 몽땅 사라졌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말룸이 다시금 덧붙였다. 그가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내 심장을 걸고 맹세할게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키겠다고.”
기대고 싶어지는 표정과 함께, 결 좋은 남빛 머리칼이 가지런히 흘러내렸다.
“다시는 무섭게 하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봐줘요. 응?”
이런 거짓말보다, 차라리 위협하는 게 더 나을 텐데.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나는 지금까지의 다정이 모두 연기였구나, 그렇게 수긍하면 그만이었다. 로보에 대해 추궁하고, 그를 당장 내쫓아도 난 기분 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 없는 사람에게는 실망도 없었다.
거짓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 말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고 그 목적을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니.
“아…… 하하. 돈을 많이 써서 화난 건 아니고요?”
나는 머릿속에 떠도는 어떤 사탕발림도 꺼내 놓을 수가 없어 억지로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것. 이 세계에 와서 가장 잘 할 수 있게 된 일이었다.
“은행 길드에서 보고받기는 했지만 그런 푼돈은 신경 안 써요. 오히려 사용해줘서 기쁜걸요.”
평소대로라면 저택 세 채 값을 푼돈이라고 한 것에 놀랐을 것이다. 그러고는 말룸의 비위를 맞추려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겠지. 들고 있던 스노우볼도 건네주었을 것이다. 사태를 관망하듯 서 있는 로보에게도 신경을 써서, 의미 모를 적대감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사과도 마치고, 말룸의 가면에 기대어 로보와 인사하도록 중재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정신이 없었다. 이십여 년 간의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 거대한 허리케인을 만났다.
“……너무 걸어서 피곤한데 이만 쉬러 가 봐도 될까요? 생각보다 체력이 부족하더라고요."
말룸이 눈을 깜빡였다.
“저번부터 계속 당신을 배려하지 못하네요. 누군가와 보폭을 맞춘다는 게 어색해서. 물론이에요, 오필리아. 약이 필요하면 말해요. 의사 부를 생각이 들면 그것도 이야기해주고요.”
그가 무언가 고민하듯 머뭇거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자도 함께 갈 건가요?”
나는 말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만 덧붙일 뿐으로, 나는 로보와 말룸 사이의 간극을 가늠하다 결국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네, 같이 가고 싶어요. 전부터 모험을 동경했는데, 로보에게서 다양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말룸이 작게 웃었다.
“모험이라……. 좋죠. 하지만 푹 쉬는 걸 잊지 말아요. 항상 말했죠? 아프면 안 된다고. 세상사람 전부가 다 아파도 당신만큼은 아프지 말아야 해요.”
“명심할게요.”
“당신 몸이 나아질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말룸은 내 건강과 관련해서 무언가를 계획하는 듯했다. 먹이가 삼 년을 채우기 전에 돌연사하면 안 되니 그런 듯했다.
“그리고 저자와 너무 가까워지지 마세요. 인어에 대한 내 악감정과는 별개로, 당신을 속박하고 싶은 게 아니라 용인하는 겁니다.”
“……당연하죠.”
“그럼 원래 하려던 말을 할게요.”
말룸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로보를 상대로는 어떤 말도 건네지 않은 채 무시로 일관했다.
“별 건 아니고, 두 달 쯤 후에 황실 무도회가 열립니다. 그곳에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게 될 거예요. 우리의 결합을 축하하기 위한 거죠. 그래서 교육을 담당할 선생님을 불러도 되겠냐고 물을 참이었습니다.”
“네? 두 달 후요?”
너무 촉박했다. 두 달 동안 어떻게 해도 태생이 귀족이었던 사람들처럼 행동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당장 글도 몰랐고, 식사 예절도, 춤을 추는 법도, 화술도 바닥이었다.
초조한 속이 가감 없이 전해졌는지 말룸이 진중한 낯을 했다.
“걱정 마세요. 설령 황제 폐하라 할지라도 당신을 업신여기지 못해.”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워요!”
“괜찮아요. 당신은 이 말룸 발타사르의 아내니까. 그렇죠?”
“……네, 그랬죠.”
하지만 나는 그의 아내라는 타이틀 없이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쉬어요. 표정이 좋지 않네요. 부담을 준 것 같아 맘에 걸리는데…… 더는 괴롭히지 않을게요.”
괴롭힌다는 자각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말룸이 계단을 올라 멀리 가 버렸다. 로보에 대해서는 추궁을 멈춘 듯했다.
중앙 홀에 있는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서 그 누구도 나와 로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흘끗 내려다 본 스노우볼 상자는 긴장의 정도를 대변하듯 아주 구깃구깃했다. 이걸 말룸에게 주기는 해야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억지로 밝은 표정을 만들어 뒤에 서 있던 로보를 바라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미안함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꾸미지 않아도 어쩔 줄 모르겠다는 행동이 절로 났다.
“음, 그러니까…….”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말룸에게 절절매는 모습을 보이게 되어 머리끝까지 수치스러웠고 발가벗겨진 듯 비참했다.
“세워두어서 미안해요. 저기…….”
“아가씨.”
뜻밖에도 로보는 분노하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선글라스 너머의 붉은 눈동자가 타오를 듯 빛났다. 어째서? 왜 오늘 처음 본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뭐랑 결혼한 거야? 하, 웃기는군. 심장을 걸고 맹세를 해?”
로보가 주변을 인식한 듯 내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으르렁거리며 낮게 끓어올라 존재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로보가 말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이 턱 막혔다.
“로보.”
저도 모르게 로보의 옷자락을 동아줄 쥐듯 잡았다. 로보는 내 손을 떨쳐 내지 않았다. 나는 간절히 그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잘 들어, 아가씨.”
로보는 분노가 행여 내게 향하지 않도록 인내하듯 이야기했다.
“저 녀석은 심장이 없어. 고동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예 심장이란 기관이 없는 거겠지……. 혈색이 돈다 해도 그건 기만이야. 온기가 돈다 해도 주술일 거고.”
“……심장이, 없다고요?”
“그래. 모든 괴물에게 심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난 저런 부류를 알고 있어. 인어라면 누구나 알아.”
나는 바닥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가씨도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래서 날 찾았나? 녀석에게서 도망치려고.”
로보가 다시 허리를 세웠다. 그가 사납게 웃었다.
“아가씨가 누굴 죽이고 싶어 하는지 이제야 알겠어.”
그러나 그는 단언했던 전과는 달리 묵묵한 낯으로 말을 이을 뿐이다.
“하지만 저건 안 돼. 내 창 본연의 저주가 뛰어나 치명상은 입힐 수 있겠지만 죽일 수는 없을 거야. 왜냐하면, 대상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야.”
“살아 있지 않다고요? 말룸이?”
로보가 선고하듯 이야기했다.
“그래. 정확히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순리를 거스른 자를 두고 우리는 살아 있다 이야기하지 않아. 이미 죽었어야 하기 때문이야.”
로보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나는 그 시선을 따라 진창으로 처박혔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상냥했던 말룸의 모습에 희망을 걸고 있던 모양이었다.
로보의 단언이 운명을 선고하는 판사의 망치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