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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13화 (13/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3화

로보와의 잡담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리 경이 돌아왔다.

로보와 나는 그가 비뚤어진 검집을 제대로 고정하는 것을 보았으나 딴청을 피웠다. 타인이 해를 입는 것만 보아도 몸이 떨렸지만 리 경이 정도를 모르는 기사는 아닐 테고, 약간의 심술이라면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빨리 왔네? 참, 나는 로보야. 늑대상어 일족의 로보. 당신은?”

리 경은 로보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의 무례에도 로보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만 섰다. 포말을 닮은 희끄무레한 웃음이 짓궂었다.

“됐어, 오래 보면 이름 같은 건 자연스럽게 알게 되니까.”

그제야 리 경이 로보를 제대로 관찰했는데, 그는 로보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리 경에게서 처음으로 드러난 노골적인 감정이었다.

리 경은 로보를 낯설게 보지 않았다. 그는 업무 수행의 방해꾼이라기보다는 꺼리는 상대를 대하듯 로보에게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처음 대면하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가 또 누군가를 겹쳐 보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속에 든 것이 오래도록 쌓인 단층처럼 지대한 듯했다.

“기사 형씨. 그래서 이젠 뭘 할 생각이야? 여전히 아가씨 호위?”

리 경은 로보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대강 답을 내려주었다.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군…….”

기사의 낯빛이 창백했다. 이마를 감싸 쥐는 것으로 보아 머리가 아픈 듯도 싶었다.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리 경의 판단이 정확하기는 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데다 과소비의 충격으로 아무 말이나 튀어나올 것 같았다. 겨우 로보를 포섭했는데 문장을 마구 쓰면 도루묵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바깥으로 나온 데다 충동구매까지 한 상황에서 말룸에게 아부하지 않으면 당장의 미래가 불투명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리 경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은 별 수 없었다.

“조금만 더 머물다 가면 안 될까요? 말룸에게 줄 선물을 사고 싶어요. 오늘 돈을 너무 많이 사용했거든요.”

리 경의 얼굴에 희귀 동물을 발견한 학자 특유의 생경함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가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리 경은 단 한 구석이라도 명확한 점이 없었다.

말룸은 전말을 알고 보면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기라도 했지만, 이 엘프인지 인간인지 모를 사람은 속내가 바닥없는 수중 동굴처럼 어두컴컴했다.

리 경이 무뚝뚝하게 응대했다.

“안내하겠지만 고급 상점은 이 거리에 없습니다.”

그의 존대가 너무 어색해 몸이 번쩍 섰다.

“네, 부탁해요. 사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리고.”

리 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말 낮추십시오.”

“네. 아니, 으응…….”

천장에 매달려 흠씬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리 경은 시종일관 무심한 듯 날 선 태도로 나를 대했다. 나보다 한참 산 어른이나 선생님을 마주할 때의 긴장감이 절로 찾아왔다.

리 경이 기념품 가게를 향해 안내를 시작했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로보가 휘파람을 불었다.

“틈 없는 기사님이네. 타인을 업무로만 대하는 사람이 가장 대하기 어렵지. 안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뜻을 관철하려는 사람이 더 나았다. 통찰력도 뛰어난 걸까? 로보를 바라보자 그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리 경이 빠르게 걸었다. 그는 내가 뒤처져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를 업무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 빤히 보였다. 오가는 대화도 아예 절단이 났다. 리 경은 길을 안내하는 것에 몰두해 있었고, 나는 어색해 따개비처럼 굳어버렸다. 로보는 우리 둘을 관찰하며 흥미로워 했다. 어느 쪽이든 쉬운 상대가 없었다.

왼쪽으로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자 예술의 거리라 할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로보가 어깨를 쭉 펴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인어의 단정한 입가에 잘 빠진 미소가 내걸렸다. 왼쪽 입술 아래에서 돋보이는 점이 미소를 따라 살짝 올라갔다.

“육지 시장은 언제 와도 활기가 돌아서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리 경이 안내한 거리는 각종 예술품과 수공예품의 공방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천장 높이 걸린 오색 깃발들과 바깥으로 전시된 인형들, 조각품, 이젤에 걸린 아름다운 그림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소원 팔찌 같은 저가 제품들부터 고가로 보이는 보석 공예품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가라야 이곳에서 산 물건이 말룸의 입맛에 맞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말룸은 수인족의 보검 하는 값비싼 것들을 수집했다.

물건의 가치를 따지며 묵묵히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경! 잠깐만.”

하마터면 ‘요’ 자를 붙일 뻔했지만 이번에는 반말에 성공했다. 리 경은 무뚝뚝한 데다 틈 없는 사람이라 어렵게 느껴져 자꾸만 존대를 하게 되었다. 리 경과 로보가 그대로 멈추었다. 나는 반짝거리는 물건이 전시된 수공예 공방을 향해 잰걸음으로 걸었다.

“예쁘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스노우볼이었다. 이 세계에도 스노우볼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발견한 스노우볼은 매우 반짝거리는 데다 각종 보석으로 받침이 장식되었다. 커다란 성 아래 남녀가 행복한 듯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디자인도 인상적이었다.

죽어서 이 세계로 오기 전까지는 스노우볼 모으는 게 취미였다. 애틋한 감정이 물씬 났다. 목 밑이 뜨거워 왈칵 울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머리 위로 너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로보는 내가 눈도장을 찍어둔 스노우볼을 함께 구경하고 있었다.

“예쁘네. 반짝거리는 게 꼭 물밑에서 햇빛을 보는 것 같아. 가지고 싶어?”

로보가 불쑥 스노우볼을 집었다.

“저보다는 남편에게 선물하려고요.”

남편이라는 호칭도 발음하기 어색했다. 결혼한 것 같지도 않았고, 말룸을 남편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설프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비싸고 반짝거리는 수집품을 훨씬 좋아해서, 이런 수공예품을 반기진 않을 거예요.”

대답에 거슬리는 부분이라도 있었던 걸까? 로보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나는 미소 짓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기껏 여기까지 데리고 와주셨는데 죄송하지만, 리 경, 오늘은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더 파고들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 끝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리 경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고, 로보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공방의 주인을 큰 소리로 불렀다.

“로보! 안 살 거라니까요.”

기겁한 내가 그의 단단한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힘이 얼마나 센 건지 인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고 싶은 건 사야지. 이건 내가 살게. 남편에게 선물해도 좋고, 아가씨가 가져도 좋고. 그럼 되는 거지?”

“네? 로보가 왜요?”

그가 순식간에 값을 치러 버렸다. 그만 말을 잃고 그를 멀뚱히 바라보는데, 로보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내 손에 스노우볼을 꼭 쥐여 주었다.

“귀찮은 일을 피하게 해 준 답례야. 현상금이 느는 건 상관없지만 육지 한복판에서 소란을 피우면 성가시거든. 부선장이 잔소리꾼이라…….”

그가 한쪽 눈을 가볍게 감는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 못 하면 병 나. 아가씨는 참, 보면 볼수록 나랑 닮아서 참견을 안 할 수가 없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스노우볼을 감싼 상자만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로보가 검지로 내 볼을 꾹 눌렀다. 아까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스킨십에 망설임이 없었다.

“한 번 용기 내서 줘봐. 아내가 주는 선물인데, 남편도 좋아할 거야. 둘의 애정전선에 해님이 뜰지도 모르잖아? 다음에는 조잡한 육지산이 아니라 아틀란티스산으로 제대로 된 선물을 해줄게.”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그것도 스노우볼을 받아 보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말룸에게 넘겨주어야겠지만 손에 들어온 온기가 별처럼 반짝였다.

“고마워요…….”

“천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길바닥만 바라보았다. 색색의 종이가 회백색 바닥 위 어지럽게 흐트러졌고, 군데군데 전단지도 보였다.

로보의 웃음소리가 여름 거리를 가득 채웠다.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로보는 분명 뾰족뾰족한 상어 이빨을 내어 놓고 자유롭게 웃고 있을 것이다.

로보의 서풍 같은 장난기가 솜사탕처럼 달고 부드러워 가슴 깊이 내려앉았다. 나는 이 감각이 영 싫지 않았다.

리 경은 티포주 성의 미로 같은 길도 망설임 없이 짚어나갔다. 나올 때는 정신이 없어 살피지 못했는데, 성으로 들어가는 길목만 해도 숲이 우거진데다 오솔길도 이리저리 얽혀 있어 복잡했다. 성의 진입로라기보다는 미로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 뒤로도 나는 한참 걸어야 했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얼마나 안색이 좋지 않았던지 로보가 ‘부축해줄까?’ 하고 물을 정도였다.

성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로보의 기색이 심상찮아졌다.

가장 처음, 그는 무언가를 믿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와 리 경을 번갈아 흘끔거렸다. 성문에 양각된 뱀 문양을 마주했을 때는 인어들의 천적인 심해 괴물을 만난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로보가 나를 곁눈질하며 붉은 눈동자를 가라앉혔다. 나는 로보가 도망이라도 칠세라 그와 바짝 붙어 걸었다.

마침내 성 중앙에 있는 저택 내부로 완전히 들어왔다. 중앙 홀은 고급 호텔의 로비처럼 휘황찬란했다. 리 경은 남은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귀찮은 일을 떨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나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빨리 가서 쉬고 싶어요. 좀 지치네요……. 로보가 묵을 방은 사용인에게 물어본 다음 안내해줄게요.”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흘끔 바라본 로보는 당장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또는 사탕 봉지에서 벌레라도 나온 모양으로 질려 있었다.

로보가 내게 깍듯이 인사하는 사용인들을 보고선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아가씨. 여기 살아?”

로보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그는 명백히 긴장하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엄습했다. 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로보의 머리 위 찬란하게 내리쬐는 백색 불빛이 점멸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소개를 아직 안 했네요. 저는 오필리아라고 해요.”

“아, 이해했어. 성에서 일하는 사람 중 아가씨의 남편이 있는 거구나. 그런데 청소가 덜 된 모양이네. 썩은 내가…….”

“썩은 내라뇨? 좋은 냄새만 나는데. 얼마 전에 남편이 매일 방향제 종류를 바꾸라고 명령했었거든요. 오늘은 장미향이네요.”

로보가 왜 그렇게 이곳을 꺼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 로보에게 신경 쓸 여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말룸이 중앙 홀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편한 흰색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집에 있어서인지 머리칼을 묶지 않고 자연스럽게 흩뜨려 놓은 상태였다.

“오필리아. 이제 왔나요?”

그가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버릇인 듯싶었다.

“나들이가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 그런데 저자는…….”

“아, 저 사람은 로보예요. 인어고, 오늘 시가지에서 만났는데 저를 좀 도와줬어요.”

멋쩍음과 긴장이 한데 엉켜 쌉싸름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말룸에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말룸은 지극정성이었던 그간의 모습이 거짓말이었다는 양 이렇다 할 호응이 없었다. 괘씸함과 아주 조금의 서운함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나는 말룸에게 계속 말을 거는 대신 빳빳하게 굳어 우뚝 선 로보를 바라보았다.

“음, 로보. 저쪽은 제 남편, 말룸 발타사르예요. 워낙 미남이라 눈에 확 띄죠? 레시우스 제국의 대공이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색하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고도 이렇다 할 인사가 없었다. 기묘한 공기가 심장을 압박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치맛자락을 세게 쥐었다.

“몸 상태는 어떻죠?”

말룸이 다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로보를 향해 있었다. 증오와 경멸 따위의 강렬한 감정이 뱀의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천적을 보는 듯한, 금방이라도 주술을 쏘아 보내 로보의 심장을 낚아챌 것 같은 눈빛이었다.

“오필리아, 상태를 얘기해 줘요.”

나는 말룸이 저주를 발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얼어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자 말룸이 힘을 주어 다시 물었다.

“저 좀 봐요. 아픈 곳은 없는지 알고 싶어요.”

“……기절할 것 같기는 하지만 쉬면 나아질 거예요.”

“기절이라니,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돼요. 그래도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말룸이 그린 것처럼 요요한 금빛 눈동자를 빛냈다. 작은 쥐를 노리는 매의 눈동자를 닮았다. 나는 곁눈질로 로보를 응시했지만 로보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로보는 경계하는 것처럼, 그리고 의아해하는 양 말룸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뭔가 잘못 된 걸까?’

말룸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보가 신경이 쓰였다. 웃고 다니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웃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면 십중팔구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오필리아.”

로보에게 한눈을 팔고 있자니 말룸이 나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룸의 앞에서 그에게 집중하지 않고 있다니, 안 될 일이었다.

“딴 생각을 하는 바람에…… 보고 싶었어요, 말룸.”

어색하게 웃으며 말룸에게 안겨들었다. 말룸은 나를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먹이 혐오증이 있는 괴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는 억지로 팔짱을 꼈을 때처럼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말룸이 내 시선을 살짝 비껴내었다. 봄을 타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는데, 허무맹랑한 생각이라 금세 흩어 버렸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오필리아. 그나저나 당신이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다니. 시장에서 힘든 일이라도 있었나요?”

굉장히 의외인 상황이었다. 그는 걱정 어린 말을 건네며 내 등을 어색하게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오히려 자기가 석상이 되어 버렸다. 뜻밖의 상황에 돌이 된 것은 나도 말룸과 다를 것이 없었다.

“힘든 일은, 없었는데…….”

로보에게는 우리가 연극 무대에 처음 선 양철 깡통 세트처럼 비추어지지 않을까? 우주의 먼지나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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