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2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방법이 이것 하나밖에 생각나질 않았다.
“……제가 살게요.”
나는 내 창의력을 원망했다.
“얼마면 되나요? 저 남자 인어랑 꼬리 비늘. 그리고 배 수리비용까지 제가 다 지불할게요.”
“이게 어디서 끼어들어! 얼마나 대단한 귀족 집 아가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은 내 것일세!”
“두 배.”
“뭐?”
“시가의 두 배로 쳐 드릴게요.”
검은 창에서 발원한 불길함을 느꼈는지 우두커니 있던 남자도, 창을 쏘아 보내려던 로보도 모두 내게 집중했다.
얼굴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나도 알고 있었다, 상황에 맞지도 않는 이상한 말인 데다 철없어 보인다는 것. 하지만 내게는 황금 열쇠가 있었다. 가시가 매우 날카로운 선인장을 손에 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이 열쇠는 티포주 성의 재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뜻했다.
쐐기를 박으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수치스러움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아니면 세 배.”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리 경까지 막 도착했다.
“노예 시장은 이곳과 정반대편 동네에 있습니다. 말했으면 안내했을 겁니다.”
리 경이 딱딱하게 덧붙였다.
“물론 인어를 찾긴 힘들겠지만.”
리 경도 로보가 인어라는 걸 알아본 듯했다. 확실히 겉모습은 인간과 비슷했지만 본능적으로 인간이 아님을 느끼게 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해명을 나중으로 미루었다. 리 경을 이해시키려면 반나절을 설명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잠시 심호흡을 했다. 로보가 어떻게든 내게 흥미를 가져야 했다. 안하무인으로 비추어 보이든 철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그를 묶어 두기만 하면 설득할 기회는 이후에 어떻게든 만들 수 있었다.
“다시 말할게요. 저 남자 인어, 제게 파세요. 아니면 당신 살해당할걸요. 알잖아요?”
로보는 어이가 없는 듯 보였다. 그가 왼편의 창을 빙글 돌리며 나를 주시했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비죽 흘렀다. 로보는 지금 날 죽일지 살릴지 재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 인어 분. 이름이…….”
로보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씩 웃으며 답했다.
“로─보. 늑대상어 일족이야. 인어를 ‘인어 분’이라고 부르는 인간은 또 처음 보네.”
커피 광고 모델 같은 사내였다. 태양 같은 웃음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건장한 몸체며 다부진 체격, 멋들어진 외모까지……. 로보는 사람 가슴이 찌르르 떨리는 모든 요소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껏 만난 이들 중 내 이상형에 가장 가까웠다.
나는 헛기침을 해 쓸데없는 감상을 떨쳐내려 애썼다.
“좋아요, 로보. 노예에서 해방시켜주고, 꼬리 비늘을 돌려주는 것은 물론 배도 고쳐 드릴게요. 배를 모는 사람 같은데 선원들도 있죠? 항구에 정박하는 동안 충분히 먹을 식량까지 제가 살게요.”
“흐음……. 대가는? 바라는 게 있는 거지?”
로보가 붉은 눈으로 꿰뚫듯 나를 응시했다. 뭐라고 답해야 옳을까? 어떻게 해야 그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지…….
잠시 말룸의 걱정 어린 표정이, 영롱한 금빛 눈동자가 환각처럼 또렷해졌다. 그가 해주었던 요리가, 매번 바뀌던 화병의 꽃이, 머리칼을 땋아 내려가던 차가운 손끝이 댐 지척에 내린 안개처럼 사람 감상을 자극했다.
하지만 말룸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전투광 인어가 흥미를 끌 만한 문장을 하나 알고 있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로보의 기세 탓에 구경꾼은 몇 없었지만 여태 남은 자들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로보만큼은 별다른 동요 없이 무언가를 헤아리는 그대로였다.
“뭐, 그래.”
어느새 창들을 사라지게 만든 로보가 남자의 손아귀에서 노예 목걸이와 연결된 사슬을 거칠게 빼앗았다. 남자는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로보가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영롱한 붉은 눈동자가 푸르스름한 렌즈 너머 또렷했다. 우주에 뜬 적색거성 같았다.
로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인어의 미소는 흰 말을 닮아 거침없었다.
“보면 볼수록 맘에 드는걸. 겁먹은 사슴인 줄 알았는데 아기 상어였잖아? 발버둥 치는 인간은 취향이야. 나랑 닮았거든…….”
로보가 들고 있던 쇠사슬을 내게 쥐여 주었다. 나는 그의 목줄을 잡고, 로보는 그 목줄에 매여 있었다. 나는 그가 왜 목줄을 바로 벗어던지지 않는지 도통 알지 못했다.
목줄 쥔 손이 잘게 경련했다. 상상 이상으로 이상한 꼴이었다.
“이제부터 잘 부탁해, 아가씨. 아니지. 주인님이라고 해야 할까? 응? 주인님.”
“평범하게 불러요, 제발. 그리고 아기 상어 안 닮았거든요.”
“아기 상어 본 적 없잖아? 본 사람이 닮았다면 닮은 거지.”
곁에서 우리의 이상한 대화를 듣고 있던 리 경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낯으로 한 마디 첨언했다.
“아가씨가 아니다. 이미 혼인했다.”
“뭐? 정말이야? 그건 좀 아쉽네, 아가씨가 맘에 들었는데.”
그래도 로보는 끝까지 나를 아가씨라 칭하길 고수했다. 나는 그냥 응수하지 않기로 했다. 영양가 없는 대화였다.
어찌 되었든 로보는 내게 고용된 형태로 묶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로보의 검은 창끝은 말룸을 향할 것이다. 설령 되지 않는대도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잇새에서 한숨이 샜다. 말룸의 유혹적인 미소가 녹지 않는 사탕처럼 뱃속에 얹혔다.
나는 바라고 또 바랐다.
부디 말룸이 원작의 그처럼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괴물이기를, 그에게 심장이 존재하지 않기를, 마음이란 것이 세월에 지쳐 풍화되었기를,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기를.
버킷리스트 하나를 완료했다.
사치하기.
그것도 첫 번째 외출에 목표치 이상으로 달성.
여기는 사거리 은행 앞. 나는 대공비 명의로 발타사르가에 귀속된 재산을 마음대로 꺼내 쓰는 중이었다.
이 께름칙하기 짝이 없는 황금 열쇠는 그야말로 만능이었다. 은행 직원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진품 감정을 거친 후 발타사르 대공가의 금고까지 프리 패스였다.
그리고 나는 저택 세 채 값을 지불했다. 저택 세 채, 그것도 제국 수도의…….
한국의 시세로 환산하면 강남 아파트 세 채 값이었다. 열쇠를 든 손이 벌벌 떨렸다. 소비는 생활의 활력이 될 수 있다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는 불안증을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으하하! 골칫덩이를 치워버리고 이만큼의 돈을 얻다니!”
로보가 표정 없는 얼굴로 게걸스럽게 웃어대는 귀족 아저씨를 빤히 노려보았다. 귀족 아저씨가 겁을 집어먹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저 아저씨의 존재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더 큰 문제가 들이닥치면 인간은 하잘것없는 거슬림 따위에 신경 쓰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쓴 거지.
평정심이 흐트러졌다. 거대한 수를 마주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처럼 머릿속에 흰 설원이 펼쳐졌다.
귀족 아저씨는 아주 입이 귀에 걸려선 행여 말을 물릴까 은행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내가 리 경에게 눈짓하자 그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 몇 대 때려주고 오지 않을까 싶었다.
로보와 나는 리 경을 기다릴 겸 해서 은행 앞의 테라스에 걸터앉았다. 은행 길드는 손님을 위해 작은 카페를 함께 운영했다.
“하여튼 맘에 안 드는 인간이었어.”
“수리비가 많이 비쌌던 거예요? 그런 사람 밑에 계속 있어주다니.”
“아니, 내 돈 내고 수리하기 싫어서. 새 배에는 얼마든지 투자해도 아깝지 않지만 헌 배 수리하는 건 내 돈 내면 속이 쓰리단 말이야.”
무슨 논리지……. 하여튼 배에 대한 그만의 고집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은 좀 어때? 먹을 만 해?”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아이스크림이 썩 잘 어울렸다. 바닐라 맛……. 그렇지만 달콤한 부드러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후환이 두려웠다.
로보가 깊이 미소를 드리웠다.
“아틀란티스에서는 물에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을 개발해야 돼. 육지 건 물에 들어가면 다 녹아버리잖아.”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응. 기분 좋게 차갑고, 맛도 다양하고, 먹으면 기분까지 괜찮아지지.”
흉물스러운 목줄을 벗어버린 로보가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물었다. 막힘없는 성격만큼 먹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이 꽤나 부러웠다. 나는 아무래도 간담이 작아 낯선 곳에서 무언가를 먹을 정신이 없었다.
로보가 경쾌하게 이야기했다. 사내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햇살을 받아 화려하게 피어났다.
“어쨌든 다시 봤어. 그 정도의 재력가일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잊지 않았지? 내 배랑 선원들.”
“불난 집에 부채질하지 마세요, 잊지 않고 있으니까. 그런데 당신 왜 이렇게 몸값이…….”
“난 인어잖아. 게다가 어린 인어의 꼬리 비늘까지 끼어 있었고. 그걸 세 배로 지불한다고 했으니 그 정도가 된 거 아니겠어?”
그가 갑자기 내게로 와 귓가에 속살거렸다.
“사실 난 현상금이 어마어마하게 걸린 거물 해적이야. 그것까지 계산했으면 아가씨 오늘 파산했을 걸.”
로보가 씩 웃었다.
“포트 정박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내가 이 영지에 얼마를 냈는지 알면 아가씨 놀라서 뒤로 넘어갈 거야.”
푸르스름한 안경 렌즈에 햇빛이 반사되어 잠깐 눈이 부셨다.
파산이라…….
단기간에 레시우스 제국 제일의 부를 축적한 발타사르가가 파산할 일은 없을 테지만, 말룸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지기는 했다.
외출 첫날부터 저택 세 채 값을 쓰는 신부가 있다니.
그리고 그게 바로 나라니.
내가 말룸이었다면 다른 먹이를 들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지 않을까.
끝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늘어졌다. 푸우 한숨을 쉬자 밀짚 같은 황금 머리칼이 가닥가닥 팔랑거렸다.
로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울상인지 모르겠어. 아가씨 돈 아니야? 충동구매 때문인가 싶긴 했지만 인간 귀족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원하는 대로 마음껏 써도 된다고는 했지만, 따지자면 제 돈이 아니라서요.”
“음……. 결혼했다고 했으니까, 남편 돈인가?”
그가 느긋하게 하품을 했다. 그러다 위로라도 건네려는 모양인지 나를 툭툭 쓰다듬었다. 머리칼이 그가 헤집는 대로 이리저리 흩어졌다. 농익은 벼가 바람을 따라 흐느적대는 모양새였다.
로보는 쓰다듬는 것이 능숙했다. 일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 무렵 나를 어색하게 쓰다듬던 말룸과는 달랐다. 아이 취급을 당하는 것만 같아 그를 쏘아보았다. 로보가 활발히 흐르는 급류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기분 좀 나아진 것 같네. 어때, 쓰다듦 받는 것도 괜찮지? 누구 달래는 건 동생들이 밑으로 줄줄 있어서 익숙해.”
로보가 위로를 담아 내 어깨를 툭 쳤다.
“어쨌든, 남편이 아가씨를 정말 사랑한다면 돈쯤은 문제가 안 될 거야. 아가씨 남편도 돈이라면 얼마든지 써도 괜찮았을 테니 금고 열쇠까지 준 거 아니겠어?”
“…….”
“왜 그래? 낯빛이 안 좋아.”
말룸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말룸 발타사르는 오직 먹잇감을 노리는 교악한 뱀, 불로불사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팔아넘길 자였다.
그가 요즘 원작과 상이한 감정선을 보이기는 했지만 속단하기는 일렀다. 발을 잘못 옮기면 수장당하는 쪽은 나였다.
“아가씨,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구나.”
로보의 음성이 진지해졌다. 그의 눈동자는 푸른 렌즈에 가려 어떤 빛을 띠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글라스를 썼네요. 햇볕이 강하지도 않은데 쓴 걸 보면, 도수 있는 선글라스인 것 같은데. 시력이 좋지 않나요?”
일부러 말을 돌리며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렸다. 내 남편이야말로 당신이 상대했으면 하는 대상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그랬다.
나는 여름 활기와 내 곁을 지키고 선 이 남자와의 분위기를 괴물 이야기로 떨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렇게밖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흐음…….”
로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나를 관찰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넘어가주겠다는 태도였다. 그는 짐작한 것 이상으로 배려심이 뛰어났다. 종족이 다른데다 전투광일지 몰라도 제 편에게는 확실히 관대한 사람이었다.
“일단, 선글라스에 대해 얘길 해주자면. 내 시력은 보통의 인어 이상이야.”
로보가 눈을 꼭꼭 숨기고 있던 안경을 반쯤 내렸다. 가끔씩 드러났던 산호색 눈동자가 조개 속 진주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로보가 제 눈가를 검지로 두어 번 두드렸다. 홍옥 같은 눈동자에 절로 시선이 이끌렸다.
“심해 깊은 곳은 빛이 들지 않아. 인어의 육체는 강인해서 육지에 나와 있는 정도로 눈이 멀진 않지만, 태양 아래 오래 있으면 눈이 피곤해.”
“아, 처음 알았어요. 그럼 계속 쓰고 있어야겠네요.”
“맞아. 하하, 내 맨 얼굴이 궁금했어? 걱정 마. 단둘이 있을 때 실컷 보여줄게.”
“맘에도 없는 얘기 그만해요. 변태 같거든요.”
시든 배추처럼 말하자 로보가 복통을 일으킬 듯 웃어댔다. 얄궂게도 농담을 건넨 듯했다.
“아무리 인간 모습을 할 수 있어도 우린 바다 생물이니까. 재앙의 여름에는 특히 쓰러질 정도로 힘들어진다구. 태양은 인어에게 자비가 없거든.”
로보가 뒷머리를 헤집었다.
“올해 기온은 안정적이라 다행이야.”
나는 아이스크림 스푼을 입에 문 채 로보를 올려다보았다. 이전에 말룸도 재앙 운운한 적이 있기는 했다.
로보는 태생적인 약점을 말하면서도 표정에 온기를 잃지 않았다. 웃음 많은 인어였다. 저런 성격이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쾌활한 성격, 뛰어난 전투력, 자유를 수호할 수 있는 강한 힘…….
로보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소유했다. 나는 그의 자유로움과 강함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말룸에게서 도망치는 것에도 힘이 필요했다.
나는 구름이나 속절없이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저 활발한 인어를 심장을 갈라 바다에 흩뿌린 사람처럼 우울하게 바꾸어 버린다니…….
독한 가루약을 털어 넣은 것처럼 맘이 쓰고 텁텁했다. 로보를 오늘 처음 보았지만 그의 마음이 뭉개지는 미래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로보는 이 세계에서 내게 처음으로 인간적인 호의를 보여 준 사람이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닥칠 정체불명의 사건을 막아주고 싶었다. 그가 내게 준 호의에 대한 답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