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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11화 (11/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1화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몸이 늘어지니 의욕도 명멸했다. 나는 더위 섞인 한숨을 쉬었다. 오필리아의 몸에서 깨어나고 난 후 대부분의 시간을 한숨 쉬는 데 소모하는 듯했다.

나는 결국 외출 목적을 상실했다. 그저 건강이 극단적일 만큼 좋지 않다는 것만 다시금 확인했을 뿐이었다.

리 경이 나를 관찰하다가 결론을 내려주었다.

“단련을 해서 나아질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존대를 피하기 위해 말끝을 얼버무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착각이려니 넘겼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보다는 의자를 같이 찾아주지 않을래요? 숨을 고르고 싶어서요.”

리 경이 어깨를 으쓱하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의 옆에 힘없이 섰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최악의 몸이 따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리 경이 오래지 않아 분수대를 발견했고, 분수 앞에 휴식 공간이 조성되어 있어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늙은 여우처럼 비틀비틀 걸어 벤치에 몸을 묻었다. 리 경이 의자에 젖은 빨래처럼 늘어진 나를 가만가만 관찰했다. 그는 거리를 걷는 도중에도 간간이 나를 응시하곤 했는데,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해 꺼려졌다.

강물처럼 유려한 사내의 찌르는 듯한 시선에 나는 분수를 구경하며 딴청을 피웠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반가웠다.

매일 이런 것만 보며 생각 없이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낯선 세계에 적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살 궁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처량했다.

말룸에게 줄 사치품 구입을 외출 목표로 수정해야 할 듯했다. 그런 다음 성 안에 들어앉아 체력을 좀 키우고…….

“불안해 보이십니다.”

“네?”

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정확한 진단에 놀라 반문하자 리 경은 그냥 그대로 있었다. 의자에 앉은 나를 두어 걸음 떨어져 빤히 내려다보는 채였다.

마음이 파도치듯 살짝 울렁였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도 그랬다.

“체력이 걱정인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리 경은 뭔가를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살 게 있나요?”

“운동기구. 그쪽이 쓸 만한 건 성에 없어서.”

짧게 답한 리 경은 말릴 틈도 없이 긴 다리로 인파를 뚫고 성큼 떠나 버렸다.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하긴, 호위 대상이 체력 부족으로 돌연사하면 기사 입장에서는 곤란하겠지.

확실히 이 몸의 건강은 아주 형편없어, 반드시 개선해야 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없었다. 의학을 배운 것도 아니고, 운동법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사나 신관을 부르기는 영 꺼려지는 것이, 나는 아직 말룸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건강과 관련된 것이 아니더라도 낯선 세계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하필 기계 설계나 컴퓨터 코딩을 배웠고, 이 세계에는 당연히 전자기기가 부재했다. 애써 쌓은 지식이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다.

지구에서 나는 이런 무력감을 깊이 경멸해 아등바등 노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막상 ‘별수 없다’라는 한 마디로 합리화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니 고래에 먹힌 듯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무릎에 팔꿈치를 내리고 턱을 괴었다. 땅바닥을 보자 점점이 개미가 지나갔다. 한낱 미물조차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인간인 나는 무얼 하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룸은 내게 대공비로서의 의무를 요구하긴 했지만 큰 기대를 하고 있진 않은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한 곳이 있었다.

분수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중앙 광장에서 소란이 일었다.

“감히 노예 주제에!”

“좀 진정하는 게 어때? 나 참, 이 짓도 힘들잖아.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넌 내 소유다. 감히 그만둔다 어쩐다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란 말이야!”

……노예?

다리가 풀릴 뻔했지만 바짝 긴장해 일어섰다. 장소를 옮길 필요도 없이 조금만 걸으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소란의 중심을 에워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사람의 바다를 뚫고 간신히 구경꾼의 맨 앞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보기에도 역겨운 목줄을 찬 신체 건장한 청년과 그 목줄을 잡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살찐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 짜증 나는 해군 녀석들. 케이론 호가 박살나지만 않았어도.”

마리아의 조력자이자 늑대 해적단의 선장, 인어 해적 로보였다.

작중 묘사된 것보다 몇 배는 활기차고 생기 있어 보였지만 분명 그가 맞았다.

로보의 해적단은 온 바다를 끊임없이 떠돌아다녔고, 배를 정비하기 위한 거점으로 발타사르령의 항구에 정박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이 거세게 파도쳤다.

로보야말로 나의 열쇠였다. 나를 바깥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열쇠, 마리아의, 나의 조력자…….

갈색의 건강한 피부, 사납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와 포말을 닮아 넘실거리는 흰 머리칼. 한쪽은 어깨까지 길러 얇게 땋아 내리고 다른 머리칼은 자유분방하게 짧게 자른 별난 헤어스타일, 왼쪽 입 아래의 작은 점과, 콧잔등에 걸쳐 둔 푸르스름한 선글라스까지.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청해를 주름잡는 해적, 법으로도 쏘아 떨어뜨리지 못하는 남자. 늑대 해적단의 선장 로보가 맞았다. 척추를 따라 목덜미부터 길게 새겨진 푸르스름한 비늘 문신이 그가 인어임을 단번에 천명했다.

손에 땀이 들어찼다.

로보는 어떤 법칙을 초월해 혼자만의 생활양식을 구가하는 ‘변수’였다.

원작 소설의 작가는 로보가 등장할 때마다 쓰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며 ‘작가의 말’을 통해 폭언을 퍼부었다. 평소 말을 하는 법을 없던 사람이라 별나게 생각되기도 했다.

실제로 작중 로보는 마리아가 들이미는 모든 규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끝까지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로보는 가장 강한 인어로 손꼽혔다. 인어는 심해의 괴물을 격퇴하기 위해 가장 전투에 능한 인어를 왕으로 삼았는데, 보통은 늑대상어 일족과 귀신고래 일족이 왕위를 놓고 후계다툼을 벌이는 편이었다. 그리고 이번 세대 아틀란티스의 차기 왕에 내정되어 있는 인어가 바로 그였다.

로보는 후계자로 추대되었음에도 해적 생활을 이어나갔다. 심해 괴물 때문에 전시 체제를 이어나가는 아틀란티스에서는 그가 상당한 골칫거리였음에도 가진 무력이 뛰어나 후계위에서 내치지 못했다.

그는 말룸만큼은 아니었지만 각종 주술에 능했고, 인간과 인어로 이루어진 제 선원들에게 관대했다. 여러모로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독특하게도 로보는 바다에 들어가 본모습을 보이길 꺼렸다. 이유는 소설에서 하차하는 바람에 알 수 없었지만.

원피스 자락을 꼭 쥐었다. 로보를 반드시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로보는 귀족이 폭정을 휘두르는 섬만 골라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 전투광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사용하는 검은 쌍창은 맞은 이가 누구든 사흘 내로 목숨을 앗아가는 무시무시한 저주를 품고 있었다. 검은 쌍창이야말로 아틀란티스에 머물지 않는 저 방랑자가 후계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로보가 가진 쌍창의 저주가 말룸에게 통하면 도망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흥미 위주로 움직이는 사내라 날 도울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로보와 소란을 피우던 귀족 남자가 힘껏 악을 썼다. 얼굴까지 시뻘게져서 침을 튀기는 꼴이 보기 좋지 않았다.

“어서 아틀란티스로 가는 길을 안내하라고! 노예로 팔려 왔으면 제값을 하란 말이다!”

로보가 귀찮은 듯 하품을 하며 흰 머리칼을 헤집었다. 구름 닮은 은실이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졌다. 주변에서도 간헐적으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가 허황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로보의 굵고 선명한 백색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봐, 주인님. 나는 놀이에 어울려주고 있는 것뿐이야. 잊었어? 한 달 만이라도 인어 노예를 가지고 싶다고 사정사정해서 케이론 호 수리를 대가로 거래한 거. 원래 수리는 아무리 돈이 넘쳐흘러도 남의 돈으로 해야 제 맛이거든.”

로보가 천연덕스럽게 하품을 했다.

“내 배 수리비 만만찮아, 알지? 죄다 청구할 거니까 알아둬. 그리고 나를 정말 노예 삼을 셈이었나? 게다가 아틀란티스를 털어? 인어를 상대할 수는 있고? 바다엔 어떻게 들어가게. 수압에 짓눌려 죽거나, 숨 막혀 죽거나, 아니면 왕실 직속 처단부대에게 살해당할 걸.”

“이 천치 놈. 인어를 제압할 수단이라면 마련해 두었다! 준비도 없이 지껄일 리가 없지 않느냐. 노예면 노예답게 주인의 말을 좀 들어!”

그 말에 로보가 흥미가 생긴 듯 붉고 영롱한 눈동자를 반짝였다. 푸른 선글라스조차 붉은 눈동자를 완전히 가리지 못했다.

나는 머리끝까지 소름이 비죽 돋아 로보를 경계했다. 겨울 바다를 닮은 매서운 느낌이 그에게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 그러셔.”

로보가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이빨은 꼭 상어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로보는 선을 넘은 남작에게 명백히 짜증이 나 있었다.

“인어를 제압할 수단이라, 그건 나도 궁금한걸. 나를 가출 청소년 대하듯 하는 우리 집 영감한테도 써먹게 알려주지 않겠어?”

“수단? 바로 새끼 인어의 꼬리 비늘이다! 네놈들은 새끼 인어를 아주 소중히 한다지? 암시장에서 어렵게 구매했다. 자, 봐라!”

그 호언장담은 허풍이 아니었다.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바닥만 한 비늘 하나를 꺼내 보란 듯이 로보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인어의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비늘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진품이군. 값을 꽤 비싸게 치렀겠어. 감히 동족의 아이를……. 그걸로 뭘 할 셈이었지?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로보의 낯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구경꾼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가거나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말룸과 대적할 수 있는 열쇠를 언제 다시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두어 발자국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했다. 숨을 죽이고 로보를 설득할 틈을 찾아야 했다.

로보가 다시금 씩 웃었다. 이전과 다른 부분은 그가 아주 분노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로보는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양손에 수십 개의 검은 점이 십시일반 모이기 시작했다.

분명했다. 검은 쌍창을 꺼내려 하는 것이다. 로보는 눈앞의 남자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해적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살인사건을 보게 될 것이다. 죽음이라면 지긋지긋했다. 로보의 심기도 아주 뒤틀린 채 멋대로 떠나 버리겠지.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말룸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뭐든 해야 했다. 부끄러움은 잠시일 테다. 생명체를 사고팔 수 없다는 신념도 목숨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검은 점의 무리가 창의 형태를 띠었을 즈음이었다. 나는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로보는 오른 창을 어깨에 걸치고 왼쪽 창의 끄트머리를 남작에게 겨누고 있었다. 그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위를 향했다.

“구경꾼 아가씨? 여긴 좀 위험하거든. 못 볼 꼴 볼 수도 있으니까 멀리 떨어져.”

“……아뇨, 잠시만요.”

입안이 바짝 말랐다. 일단 앞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어떤 말을 해야 로보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떠오르는 묘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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