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10화 (10/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0화

02. 기사와 인어와 뱀 대공

오늘도 결국 자지 못했다. 말룸을 생각하느라 밤을 다 흘려보낸 탓이었다. 그에 대해 정의내리는 일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듯 쉽지 않았다.

원작 이외의 정보를 모으려 해도 말룸은 좀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지 않았다. 나는 연기 쫓는 스님이라도 된 것처럼 그를 살피기만 했다.

혹시 말룸은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약한 걸까? 하지만 내가 상냥한 것도 아니었다.

요즘 그의 태도 때문에 혼란스러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완전히 폐기해야 할 계획이라고 여겼는데, 말룸이 원작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으니 선물 공세를 하거나 입 발린 말을 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다 내가 홀리면?

범죄자에게 감화된 피해자를 가리키는 용어, 스톡홀름 신드롬도 있지 않은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룸에게 익숙해졌다는 증거였다.

확실히 그 얼굴만큼은 넋을 놓을 만했다. 선이 아름답게 굵으면서도 장발이 잘 어울리는 사내는 생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태도도 굉장히 상냥했다. 표면적으로나마 이어지는 배려는 이상한 세계의 표류자가 된 내게 가뭄의 단비였다.

아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펜 끝으로 허벅지를 쿡 찔렀다. 벌침에 쏘인 듯 따끔한 감각이 허물어지던 벽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일전에 보았던 말룸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정확히는 그 잘난 얼굴 밑에 숨기고 있었을 나름대로의 애환이 가시처럼 나를 찔렀다.

나는 잠을 자며 앓다 문득 깬 적이 있었다. 그리고 물을 찾아 두리번거렸는데, 컵 대신 침대 곁에 앉아 새벽빛에 녹아든 사내의 씁쓰름한 표정을 발견하고 말았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빛은 아침 햇살처럼 따사롭지 않고 창백했다. 대공은 한 폭의 고즈넉한 그림과 같았다. 그 그림은 너무 낡아 망가져 있었으나 내가 깨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새것처럼 멀끔해졌다. 말룸은 진흙 위에 핀 연꽃을 닮았다. 화려한 듯싶었지만 뿌리를 내린 곳은 엉망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쉬운 사람이었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변온동물 취향은 아니었다. 뱀보다는 농촌 봉사활동에서 자주 보던 생쥐가 차라리 나았다.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황금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열쇠는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다. 침대에 누워 천장 불빛에 비추니 노란 표면이 말룸의 눈동자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나 이 열쇠는 내 목숨을 끊어 놓을 도끼였다.

기어가듯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는 제법 사용한 태가 났다.

아픈 와중에서도 틈틈이 적어 넣어 내용이 꽤 들어찼다.

<말룸 관찰 일지>

스물다섯 번째 날

열여덟째 날 작성한 것에서 이어짐.

4. 당장 할 일

―금고에서 금화 빼기. 께름칙하지만 말룸이 준 열쇠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도주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결혼반지도 팔아버릴 용의가 있다. 하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벌고 싶기도 하다. 내가 이 세계에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자부터 배워야겠다. 오필리아는 거리 출신이니 글을 몰라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바깥 외출하기

1) 마리아를 도와주었던 소설 속 남주인공들을 만나야 했다. 말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관인 둘은 수도의 신전에 있다. 하나는 키가 무척 작고, 다른 하나는 붉은 성해포를 어깨에 두르고 있다고 했다.

남주인공은 아니지만 다른 조력자도 있었다. 늑대 해적단의 선장, 인어 해적 로보. 그는 마리아 일행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졌고, 고전하기는 했지만 말룸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등장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리아와 거리를 두었던 데다 시종일관 무기력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이미 죽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와 상관없는 속사정이었지만, 그렇게 무기력한 사람이 도움이 될 지는 미지수다.

2) 내 편 고용하기. 노예 시장에 가보아야 할까? 하지만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아 있는 것을 물건 취급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3) 말룸에게 조공하기. 원작에서처럼 영 소름끼치는 사내도 아닌 것 같으니 가능성이 있다. 예쁘고 귀해 보이는 것은 전부 사 와야겠다. 일단 금고 안의 금화를 사용해야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여건이 따르면 제대로 연애하기. 단, 말룸 제외!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속 편히 침대 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은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다.

탁자 위 곱게 놓인 작은 은색 종을 집어 들었다. 나무 손잡이와 연결되는 부분에는 예쁜 붉은색 리본까지 매여 있었다. 몇 번 횡으로 흔들자 청량한 종소리가 상당히 크게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중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부르는 종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짐승을 취급하는 기분이라 속이 거북스러웠다. 이 종은 서랍 속에 박아 두어야겠다.

나는 싫은 기색을 내지 않기 위해 몇 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들어와도 괜찮아. 다른 게 아니라, 저번에 조만간 외출하겠다고 했었잖아. 오늘 시가지에 가려고 하거든.”

“그럼 준비를 도울 아이와 호위를 맡아주실 기사님을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물러간 티샤는 다른 이들과 함께 나타났다. 들어온 사람은 갈색 머리의 활기차 보이는 소녀와 금발 머리의 청년이었다. 아이는 사용인처럼 보였고, 청년은 기사 작위를 받은 귀족처럼 보였다.

특히 남자는 순간 넋을 잃을 정도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김새를 타고났다. 목덜미까지 자른 단정한 벌꿀 빛 머리칼, 숲의 초록빛과 바다의 푸른빛을 절묘하게 섞어낸 오묘한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말룸이 요사스럽도록 수려했다면 그는 고아하면서도 진중했다.

살짝 뾰족한 귀도 인상적이었다. 엘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만약 정말이래도 이미 멸족했다는 종족의 사정을 들쑤시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말룸과 비견될 만한 외모를 가졌음에도 그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다. 비중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이가 주홍색이 섞인 초록빛 눈망울로 연신 나를 흘끔거렸다. 그에 반해 청년은 수려한 얼굴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기사가 폐허 속의 왕처럼 쓸쓸한 위압감을 풍겼다. 틈이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저, 그…….”

아이가 먼저 앞으로 나서더니 손을 앞으로 모아 깊이 인사했다. 수줍음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모아라고 합니다, 주인님! 오늘부터 주인님의 치장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믿고 맡겨주세요!”

모아는 과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게 살짝 귀여워 웃음이 났다. 지금까지 만난 이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응, 나도 안녕. 잘 부탁해.”

“네, 네! 예쁘게 꾸며 드릴게요!”

나는 다음 소개를 받기 위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 가만히 있는 그대로였다. 불이 나 재가 된 낡은 고목 같았다. 의미 모를 상념에 잠긴 것 같기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추억에 묻힌 것 같기도 했다.

기사는 나를 보고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꼭 자신만의 생각 더미에 깔린 사람처럼 보였다.

보다 못한 티샤가 그를 불렀다.

“리 경.”

그러나 리 경이라 불린 남자는 희미한 그리움과 당황을 표정에서 지우지 못했다. 그의 녹색 눈동자와 의아함 품은 내 시선이 마주친 후에야 그는 이전의 무감각함을 얼굴에 드리웠다.

“리 알렉산더입니다. 대공의 개인 호위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전에 한 얘기를 정정했다.

“……대공 전하의.”

곁에서 티샤가 몇 마디 거들었다.

“리 경. 조금만 더 소개해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이 성이 처음이시니까요.”

그러자 기사는 명백히 귀찮다는 낯으로 쏘아붙이듯 이야기했다.

“오늘부로 비전하의 호위를 도맡게 되었습니다. 리가 성이고, 알렉산더가 이름이지만 내키는 대로 부르십시오.”

짧은 인사를 끝으로 리 경은 나를 다시 바라보지 않았다. 눈의 초점이 흐리멍덩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리 알렉산더는 노골적으로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속이 쓰려 무어라 대거리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나는 애써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건넸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예.”

그리고, 다시 침묵.

리 경은 나와 어울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말룸의 호위 기사라고 했나? 골칫덩어리를 떠넘긴 건 아닐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리 알렉산더의 저음이 들렸다. 그는 목소리조차 우아해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의 꼬리를 닮았다.

“더 볼일 없으시다면 치장 동안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아, 네…….”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지만 리 경은 내 태도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지 밖으로 나가 버렸다.

티샤와 모아가 상황을 수습하려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리 경이 사회성 부족하다는 평가를 많이 듣습니다. 그래도 영지에서 가장 좋은 실력을 갖춘 기사지요.”

“마, 맞아요!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긴 해도 실력 하나는 정평이 나 있으시니까요!”

시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모아와 티샤는 변호를 그만두고 치장에 집중하기로 한 듯했다.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리 경과 둘이 시장을 순회해야 한다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티샤와 모아의 반응을 보아선 완전히 선입견인 것도 아닌 듯했다.

사람들은 티포주 성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울창한 숲에서의 실종과 짐승의 추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성문을 지나면 곧장 시가지와 민가가 눈에 띄었다. 시가지에는 소박하면서도 다양한 볼거리가 많았다.

치장을 하느라 시간을 꽤 소비했다. 벌써 한낮이었다. 상인들의 호객 행위와 일 거드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합주를 했다.

직접 재배한 밀로 만든 빵, 올리브기름, 전통 공예 방식의 각종 예술품과 아기자기한 도자기까지 모든 것이 눈을 현혹했다.

오색 다양한 천막이 가게 앞에서 나부꼈다. 나는 이국적인 정취에 혼이 뺏겨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말룸의 영지는 정교하고 활기찼다. 건물은 산토리니를 연상시키듯 흰 외벽에 푸른 지붕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벽을 따라 대롱대롱 매달린 담쟁이덩굴이 사랑스러웠다. 거리 가장자리에 죽 늘어진 가판대까지 완벽했다. 이방인은 나뿐인 듯싶었다.

“…….”

아니, 이방인은 한 명 더 있었다.

리 경은 입에 아교를 칠한 것처럼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는 분명 현지 사람일 텐데도 시가지의 활기와 섞이지 못했다.

리 경이 낡은 나무처럼 내 곁을 지켰다. 들뜬 기분이 어색함으로 변모했다. 호위라면 보통 뒤에서 따라오는 게 정석 아닌가? 소설 속에 나오는 유능한 기사들은 몸을 숨긴 채 호위하던데…….

빤히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이상했는지 그는 의아한 낯이었다. 하지만 리 경은 절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햇빛을 받아 그런 것인지 리 경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혹시 휴가 중이신가요?”

아닌 게 아니라 리 경은 기사라기에는 복장이 가벼웠다. 치장 전까지만 해도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 그는 지나다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물음의 답을 내 놓을 심산인지 리 경이 보란 듯 허리춤의 장검을 가리켰다. 해바라기로 염료를 만들어 칠한 듯한 머리칼에 햇살이 내려 잔잔한 은빛 윤기가 드리워졌다.

“갑옷은요? 아까까지는 입고 있었잖아요.”

“그건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은데요. 요즘 제 목숨에 민감하거든요!

톡 쏘아붙여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그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게끔 하는 고아함이 있었다.

리 경은 내가 걷는 대로 따라왔다. 그러나 대상을 호위하는 기사의 태도는 아니었다. 걸음이 느려지면 제멋대로 앞서나가기도 하고, 대장간 앞에서 한눈을 팔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무 태만이었다. 실력 좋은 기사라곤 했지만 암살자가 오면 한 번에 목이 베일 것 같았다. ……아니다, 말룸은 삼 년 후 날 잡아먹길 원하니 지금 죽게 두진 않겠지. 리 경이 뛰어난 기사라고 한 티샤와 모아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 건은 납득했다고 해도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힘들어…….”

이러다가 말룸에게 조공할 사치품을 고르거나 조력자를 구하기 전에 객사할 듯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다리가 당겼다.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었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내 기이한 몸 상태가 리 경에게는 아주 생경한 듯했다. 그는 시큰둥한 낯을 버리곤 외계인이라도 발견한 듯 놀라워했다. 미모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은 봐줄 만했지만, 나오는 말은 배려가 없었다.

“살아 있는 건가…….”

“제가 귀신으로 보이는 건 아니겠죠?”

리 경은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생기가 없는데.”

사람 면전에 대고 생기 없다는 말을 운운하다니.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데 진이 빠졌다. 무언가 숨기거나 음흉한 구석은 없어 보였지만 저런 성격은 대하기가 무척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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