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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7화 (7/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7화

손톱자국이 나도록 양손을 맞잡았지만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날개가 꺾여 지면 위를 버둥거리는 잠자리가 된 것 같았다.

말룸이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의 숨에 염산이라도 담긴 것처럼 움찔했다.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모든 정보들이 망그러져 말룸이라는 괴물 자체를 제대로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말룸이 느리게, 그러나 특유의 딱딱하고 명확한 발음으로 이야기했다.

“병이 있으면 사실대로 이야기해 줘요. 불치병이라도 어떻게든 고쳐줄게요. 저를 믿지 못하겠다면 제가 쌓아올린 부와 명성을 믿으세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왜 하필 저죠?”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물음이 삽시간에 튀어나왔다. 말을 걸러낼 틈도 없었다. 말룸이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일순간 흩어낼 만큼 당황했다.

“네?”

“왜 하필 저냐고요.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골라잡아도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하잖아요. 제국 최고의 귀족이 가장 밑바닥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다니. 제가 예쁜 얼굴을 가지긴 했지만 당신이라면 미녀는 어디서든 찾을 수 있었을 테죠.”

말룸이 나를 응시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나룻배처럼 고요한 시선이었다. 나는 비를 맞은 새처럼 입안 살이나 짓씹었다. 차라리 지금 잡아먹힌다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말룸이 신중히 말을 골랐다. 그가 얼마간의 침묵 끝에 답을 내려놓았다.

“눈에 들어왔으니까요. 당신은 온전히 제가 찾은 사람이잖아요.”

“…….”

“연고 없는 당신은 제가 유일하죠? 제 세계에서도 당신이 유일해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상대를 마음에 품게 되는 건 아주 찰나면 족하거든요. 그러니까 제발, 아픈 거 있으면 숨기지 말아요. 딴 건 다 숨겨도 괜찮으니까.”

나는 그 무엇보다도 말룸의 언행에 민감했다. 생존 본능이 판단한 결과 말룸 발타사르의 저 말은 한 스푼의 먹구름조차 없는 진심이었다.

더는 견딜 여력이 없어 쥐고 있던 이불을 뒤집어썼다.

감정을 다스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애처럼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그러다 저자가 놓은 덫에 걸려 잡아먹히면…….

나는 이 몸에 빙의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겁에 질려 이렇다 할 묘수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얇은 천막 바깥에서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폭풍 끄트머리에서 나는 바람소리 같기도 했다.

“귀엽게 보이려고 시위하는 건가요? 삼하인의 꼬마 유령 같군요. 우리 영지에서도 10월이 되면 삼하인 축제를 벌여요. 이번 년도엔 항만 유치 축제로 대체되어 아쉽지만, 내년에는 꼭 성대한 축제를 열어줄게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자려고요. 피곤해서…….”

“아픈 곳은? 부탁이니까 말 해 줘요. 거리감을 느껴서 그런 거라면, 다른 사람을─”

“─저 원래 좀 예민해요.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 거니까, 이만 돌아가주면 안 될까요? 제발요…….”

내가 들어도 동정심을 유발할 듯 힘없는 음성이었다.

나는 이불을 깊이 끌어안아 가슴에 맞닿도록 했다. 분명 악당은, 나를 잡아먹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쪽은 말룸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을 받아야 하느냔 말이다.

“알겠어요. 미안해요. 참, 그렇지. 이야기꾼을 불러줄까요? 마음이 불안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말고 나중에 불러다줄래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그럼 명령을 내려 둘게요. 어디 아프면 꼭 말하고, 간단한 복통이라도요.”

“……그럼 소화제 좀 부탁할게요.”

아닌 게 아니라 뱃속에 구더기가 앉은 것처럼 명치께가 이리저리 쑤시고 아팠다. 그 때문에 허리가 앞으로 살짝 굽어 모르긴 몰라도 환자 같아 보일 듯했다.

말룸이 작게 말을 내었다. 그의 목소리 곳곳에 걱정 조각이 걸렸다.

“역시 아침에 먹은 게 체한 모양이군요. 식사 자리에서 열쇠를 준 것이 화근이었을까요? 부담 갖지 말아요. 푸른 문만 열지 않으면 괜찮으니까. 열쇠는 당신이 그걸 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 준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파악한 당신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사람이더군요.”

“……네.”

“조금 더 있고 싶지만, 제가 있으면 영영 이불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별 수 없군요.”

말이 끊어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어졌다.

“이제는 당신에게 황금도, 권력도 모두 있으니 지금껏 살면서 하고 싶었던 걸 해봐요.”

“안 그래도 며칠 쉬었다가 시가지에 가려고 했어요.”

이번에는 흔쾌히 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룸은 무언가를 더 첨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말을 맺었다.

“그럼 호위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가고 싶을 때 언제든 이야기해요. 꼭 당장이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이불 벽에 손 그림자가 비쳤다. 잠깐 몸을 웅숭그리자 그림자가 거짓말처럼 굳었다. 별 말 하지 않고 있으려니 말룸은 내 머리를 살짝 눌러 몇 번이고 슥슥 문대기를 반복했다. 쓰다듬거나 어루만진다기보다는 헤집는 것과 비슷했다.

머리카락이 마구 엉켜 까치집이 되어 갔다. 하지만 손길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말룸의 손길은 생전 처음 남을 쓰다듬는 것처럼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것을 떨쳐내면 천하의 나쁜 놈이 될 듯했다.

나는 묘한 감정에 이끌려 이불더미에 얼굴을 폭삭 묻었다.

“……아까, 말룸. 축객령만 내려서 미안했어요.”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불 바깥에서 그가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쉬고 있는데 찾아와서 저야말로 미안했어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티샤 편으로 얘기하고. 바로 살피러 올게요.”

그 후 말룸은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잘 자요. 아무도 당신을 괴롭히지 못해. 그러니 좋은 꿈 꿔요.”

밤 인사를 건네는 것이 본인도 낯설었는지 그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말룸이 가고 정적만이 남은 방, 가슴이 쿵쾅거리며 세게 뛰었다. 심장에서만 사는 천둥새가 마구 난동을 부리듯 했다. 머릿속이 이전보다 더 복잡해졌다.

그에 대해 도저히 정의내릴 수가 없었다.

⟪뱀의 둥지⟫ 속의 말룸은 한없이 포악했고 빈말이라도 걱정스러운 말을 건네지 않았다. 마리아가 아팠을 때에도 흘긋 보고 돌아설 뿐이었다.

확실히 말룸은 식인 뱀이 맞았다. 착각할 리가 없었고,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원작이 어긋났을 리도 없었다. 모든 상황이 그가 괴물임을 등불처럼 밝혔다.

그러나 말룸이 원작과 상이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겪은 말룸의 언행은, 일부는 연기였지만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연기를 통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먹이를 안심시키기 위한 교란 작전인 걸까? 내가 오필리아의 몸에 빙의해 이야기가 틀어졌기 때문에, 소설 속에 등장했던 수법보다 훨씬 발전한 수법을 사용하는 건가?

오늘도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입 밖으로 한숨이 삐져나와 힘없이 추락했다.

나는 단순히 눈앞의 진실을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 * *

티포주 성에서의 나날은 조심스럽고도 은밀히 행동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양손을 꾹 맞잡거나 이불을 몸 곳곳에 두르는 일이 늘었다.

말룸은 그날 이후 나와 식사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방에서 만나는 일도 없었다. 대신 종종 마주칠 때면 그는 기묘한 친절을 뒤집어쓰곤 내게 다가왔다. 매끄러움이 과연 뱀과 같았다.

한편 렉스는 그간 내게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이 세계의 지리와 관련된 것부터 티포주 성에 대한 것까지 배울 것이 많았다.

이 세계는 세 개의 대륙과 일곱 개의 바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 행성을 ‘한 번 죽었다 소생한 땅’ 이라는 뜻의 ‘요르나스’라고 불렀다. 내가 살던 푸른 별을 지구라 불렀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하지만 멀쩡히 번영을 구가하는 곳은 세 대륙 중 레시우스 제국이 위치한 레시암 대륙뿐이었다. 그 레시암마저도 레시우스 제국을 제외한 소국들은 재앙을 이기지 못하고 멸망하거나 레시우스의 정복 전쟁으로 제국에 복속된 상태였다.

레시암을 제외한 나머지 두 대륙은 결코 멀쩡하지 않았다. 엘드라코는 대륙의 태반이 얼어붙었고, 멤피스는 불길이 치솟는 척박한 사막이었다.

렉스의 설명에 따르면 엘드라코에는 엘프가 살았고 멤피스에는 수인족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모두 멸족해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말룸이 과시하듯 보여주었던 수인족과 엘프의 수집품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나마 멤피스에는 한 사내를 필두로 재건 작업이 이루어지는 중이라 했다. 레시우스 제국이 신경 쓸 만큼의 세력은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왕이라 칭한 그자는 통솔력과 안목이 뛰어난 세기의 천재라 메마른 사막에 물길을 끌어올렸다고 했다. 그 남자는 어떤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매년 발타사르령에 걸음한다고 했으니 후일 만날 기회가 있을 것도 같았다. 내가 흥미를 보이자 렉스는 어딘지 달갑잖은 기색을 띠었다.

육지와는 반대로 번영을 구가하는 쪽은 바다에 세워진 왕국이었다. 일곱 바다에는 인어가 살았다. 이곳에서 인어는 전설 속의 생물이 아니었고, 마리아를 도와주는 무기력한 해적, 로보가 속한 종족이기도 했다.

인어는 인간보다 몇 배는 오래 살았고 강력한 주술을 구가하며 바다 속에서 군림했다. 그들은 아틀란티스라는 해양 왕국을 건설해 번영했는데, 고대로부터 계보가 이어진 유서 깊은 왕국이었다.

하지만 인어가 지배하고 있는 바다는 일곱 바다 중 세 개의 바다뿐으로, 나머지 네 바다는 인어들의 숙적인 심해 괴물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인어들은 심해 괴물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느라 육지 일에 관심이 없었고, 다양한 이유로 저들끼리만 어울려 폐쇄적인 성향을 띠었다.

모두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았던 정보였다. 동화를 듣는 것 같아 경청하자 렉스는 전보다 나를 편하게 대하는 듯했다.

내친 김에 그는 발타사르령에 대한 것도 이야기해주었다.

발타사르령은 소위 말하는 노른자 땅이었다. 제국의 수도 레헬른과도 가까웠고, 바다와 산, 평야를 고루 가져 농사를 짓고 상업 활동을 벌이기에도 적절했다. 특히 티포주 성을 중심으로 시가지와 민가가 그물처럼 얽혀 있었는데, 레시우스의 작은 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을 이루었다고 했다.

점점 외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전에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처럼 시가지로 나가 기분 전환을 하고 탈출로를 숙지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 무리했던 몸이 괜찮아지질 않아서, 본의 아니게 나는 이주 남짓 더 침대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나뭇잎이 바람에 속절없이 흩날리듯 나도 그렇게 떨었다. 오한이 일어 헛소리도 했다. 여름임에도 두꺼운 이불을 담뿍 덮어 몸을 꾹 눌러 두지 않으면 관절이 뭉뚱그려져 어긋날 것 같이 아팠다.

하지만 우두커니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앓고 있는 동안 아주 의외인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원래대로라면 대연회장에서 식사를 해야 할 시간.

뼈마디에 녹이 슨 듯해 나는 침대에서 비척거렸다.

방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껄끄러운 상대, 새벽이슬을 끌어 모아 만든 듯 영롱히 아름다운 사내가 상냥함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납셨다. 말룸이 아픈 내 곁에 붙어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날이 좋아요. 재앙이 닥치지 않은 날씨는 오래간만이네요. 당신과 결혼한 해여서 그런 걸까요?”

재앙이라는 단어가 신경을 자극했다. 그렇지만 나는 굳이 그의 말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통증 때문에 만사가 귀찮았다. 어서 말룸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싶었다.

“오필리아, 아, 해봐요. 수프 끓여 왔어요.”

나는 천둥에 놀라 몸이 굳은 것처럼 어떤 반응을 내지 못했다. 멀건 수프 안에 독이 들지는 않았을지 의심스러웠다.

“어서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말룸이 연신 재촉했다. 수려한 사내가 애탄 얼굴을 했다.

나는 결국 침대 위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하지만 입을 벌리지는 않았는데, 말룸이 숟가락을 넘겨주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식기를 넘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룸은 내가 입을 벌리지 않는 게 기호의 문제인줄 착각하고 속 편한 소리나 해댔다.

“소고기 수프는 별로인가요? 걱정 말고 한 입만이라도 먹어 봐요. 제 요리 실력이 그렇게 엉망은 아닙니다.”

“……당신이 만든 거예요?”

“네. 꼭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아픈 아내에게 수프 끓여 주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실내에 있었는데도 별이 보이는 것처럼 아찔했다.

말룸은 직접 끓인 수프를 손에 든 채 훌륭한 남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병시중에 능숙한 사람이 아닐 텐데도 물이 든 컵을 입에 받쳐주거나 열을 재는 모양새가 매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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