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6화
사고가 복잡하게 엉켜 붕괴할 것 같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황금 열쇠가 손 안에서 빛났다. 이 열쇠는 마스터키인데다 내키는 대로 보관하기에는 너무 매서운 물건이었다.
이 열쇠가 앞으로 어떤 기능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내가 지하 3층의 푸른 문을 열 날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호기심은 인간을 망가뜨리지만 나는 이미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위험을 자초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검은 글자 위로 잉크를 몇 차례 덧대 노트가 아주 엉망이었다. 입에서 단내가 났고 어깨며 목덜미가 욱신거렸지만 나는 펜을 들어 기록을 이어나갔다.
<말룸 관찰 일지>
둘째 날
첫째 날 작성한 것에서 이어짐.
2. 알고 있는 것들: 추가 사항
―말룸은 머리만 남기고 사람을 잡아먹는 못된 식습관이 있고, 지하 3층의 푸른 문 안에서 식사한다. 전 아내의 유해도 그곳에 있겠지…….
―잘해주는 척 잡아먹으려 든다. 그에 대해 몰랐다면 단번에 넘어갔을 정도로 위협적이다.
―티샤는 그가 밤잠이 없다고 했다. 잠을 잘 수 없는 것 같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못 먹는 것 같다. 그가 식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중앙 정원에 무언가 있다. 티샤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것 같고…….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이 없다. 원작에서도 정원에 대해서 언급이 없었다. 정원에 대체 뭐가 있는 걸까?
3. 의문점
―정말 인간을 잡아먹으면 불로불사를 얻게 될까? 소설 속 세계관이니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조건이 너무 단순하다.
―말룸의 약점, 혹은 그를 죽이는 법, 그것마저도 실패할 때를 대비해 그가 나를 놓아주게 할 방법을 알아두어야 한다. 선물 공세? 반짝거리는 걸 모아다 주면 그의 마음이 동할까? 희박한 확률이기는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돈도 말룸의 돈이니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일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말룸을 유혹해 살아남는 것은……. 관두자. 바보 같은 얘기다. 그자가 내게 사랑에 빠지더라도 내가 그 괴물을 사랑할 수 있을 리 없다.)
생각이 범람해 이것저것 재어 보니 벌써 저녁이었다.
속이 먹먹했다. 명치를 작게 누르니 꽉 막힌 듯 아팠다. 기다란 막대기라도 쑤셔 넣으면 얹힌 것이 약간이나마 나아질까?
열쇠를 받은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사용인들이 줄곧 방문을 두드리며 이런저런 음식을 들이밀었지만 속도 좋지 않았고 먹음직스러워 보일 정도로 살이 찔까 봐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말룸은 신부의 우울증 정도로 조언 받은 모양인데, 우스운 일이었다. 내 우울의 원인은 다른 무엇도 아닌 말룸이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결 좋은 금빛 머리칼이 풍성히 침대 위에 퍼졌다. 관리는 하지 않았을 텐데 머릿결이 좋았다. 멸족했다던 엘프가 꼭 ‘오필리아’처럼 생겼을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쁘고 귀여운 생김새였다. 여기에 다재다능했다면 금상첨화였겠지. 멀쩡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말룸보다 더 좋은 신랑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한숨이 푹 나왔다. 나도 나였지만 ‘오필리아’도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그러나 마냥 비관적으로 늘어질 수는 없었다. 내게는 살아남기라는 최우선 과제가 할당되어 있었다.
며칠 좀 쉬다가 돈을 빼내어 시가지에 나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이 세계를 탐색하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말룸이 먹이를 혼자 내보낼지는 미지수였다.
괜히 퍽 외로워졌다. 말룸은 나를 가두지 않았지만 내가 도망치고 그가 찾고자 한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레시우스 제국은 말룸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부와 물자가 그를 통해 유통되었고, 그에게로 귀결되었다. 황제가 호락호락한 작자가 아니라 그나마 이 정도라는데, 황제가 조금만 유약했다면 이 제국은 꼼짝없이 말룸의 둥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말룸이 내게 동한다는 가정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진즉 사랑에 빠져 가정을 꾸렸을 테니까.
바로 그때,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필리아, 아무래도 걱정돼서요.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바늘에 찔린 것처럼 기겁해서 몸을 경직시켰다.
“네? 아, 네! 들어오세요.”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말룸이 의자를 빼 침대 곁에 앉았다. 흘끗 올려다본 그의 표정이 연인을 걱정하듯 애수에 잠겼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말룸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 체력이 좋지 않은 데다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은 먹잇감은 그의 입장에서 번거롭기만 할 뿐이다.
나는 어서 말룸을 내쫓고 싶었다. 마침 밤이 되었으니 내일을 위해 잠이나 자려고 했는데, 곱게 보려고 해도 곱게 볼 수가 없는 상대였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떨떠름해졌는지 말룸이 의문스럽다는 듯 나를 주시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여자가 무슨 불만이 이렇게 많아 침대에 틀어박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단순히 살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에게 먹혀 죽는다는데 어떻게 칠렐레 팔렐레 돌아다닐 수 있을까?
애써 미소 짓기도 지쳤다. 덧댄 가면이 버석버석 말라붙었다. 말룸에 대해 정리하고 나니 그가 괴물이라는 것이, 그에게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 삼원색보다 선명했다.
“당신 나 좀 봐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말룸은 내 속도 모르고 연신 신랑 흉내 중이었다. 차라리 소설에서 나왔던 것처럼 빈정대며 먹이 운운이라도 하면 나도 거리낄 것이 없을 텐데, 소설 속 말룸과 지금의 말룸은 완전히 다른 개체 같았다.
나를 관찰하던 말룸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주제를 꺼냈다.
“혹시 지병이 있나요?”
“네? 갑자기 지병이요?”
“갑자기가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서요.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하고…….”
말룸이 인상을 찌푸렸다.
건강하지 않은 먹이는 먹지 않는 주의인가? 일부러 병에 걸린 척을 하면 살 수 있는 걸까.
말룸은 나무 의자에 앉은 그대로 딱딱한 낯을 하고 있었다. 청동으로 빚은 조각상을 닮았다. 분명 살아 있는데도 죽은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말룸이 나를 진실로 걱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지저로 처박혔다가 다시 지면으로 솟는 둥 어지럽게 널뛰었다.
때를 놓쳐 답을 하지 못하자 말룸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유려한 사내는 한숨을 쉬는 것조차 장인이 빚어 내린 예술품 같았지만 소유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필리아.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의사라도 부를 기세다. 나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당황해 자세를 정리하지 못하고 말룸에게 다가가게 되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뇨! 정말 괜찮아요. 일단은 멀쩡해요.”
혹시 병든 먹이는 먹지 않을 수도 있으니 여지를 남겼다. 그러나 당장 건강하다는 확답을 들었는데도 말룸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가 침대 근처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백색 수정처럼 잘 빚어진 낯에 균열이 졌다.
“‘일단은’이라뇨. 가족 중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거나, 유전병 내력이 있는 겁니까? 확실히 말해주어야 해요.”
말룸이 거의 침대 위로 올라올 듯 이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나는 번쩍 놀라 숨을 멈췄다.
“그래야 당신을 고칠 수 있어요. 응? 숨길 필요 없습니다. 누군가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저는 이제 당신 가족이잖아요.”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당신은, 내 가족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렇게 꺼슬꺼슬한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때마침 살짝 열어 두었던 창문 틈으로 밤바람이 불었다. 아침에는 맡지 못했던 기이한 꽃향기가 시원한 머스크 향과 섞여 마음 틈새로 훅 끼쳤다. 말룸이 즐겨 사용하는 향수인 걸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멍하니 말룸만 바라보았다. 사내로 둔갑한 뱀은 그저 한없이 수려하고 우아했다.
말룸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내게 보다 가까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행동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뱀과 한 침대에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정말 괜찮아요, 말룸. 잠시만, 너무 가까워요…….”
생존 본능 때문인지 내 손은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사내의 가슴팍을 짚어 그를 침대 바깥으로 밀어내고야 말았다. 말룸은 순순히 물러나주었지만 어색한 정적이 방 안을 떠돌았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려댔다.
값비싼 예복으로 가려져 있던 튼튼한 사내의 몸 근육이 적나라하게 느껴졌었다. 아직까지도 감촉이 가시질 않아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필리아.”
도로 의자에 앉은 말룸이 한숨을 쉬었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저는 괜찮은데 자꾸 그러니까…….”
“당황하게 한 거 알아요. 미안해요.”
낯선 기분이 온몸에 퍼졌다. 말룸은 애인 대하듯 날 대했다. 이것도 연기일까? 눈앞의 말룸은 원작을 통해 접한 말룸과는 너무나 달랐다. 텍스트가 아닌 실물로 접하는 그가 무척 낯설었다.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것들이 빙산의 일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위 아무렇게나 흩어진 이불을 모아 쥐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미지는 언제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천천히 이불을 가지고 와 몸에 단단히 둘렀다. 말룸이 빼앗으면 소용없는 행동이었지만 마음에 안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동안 대치했다.
의자에 앉아 금이 간 얼굴로 날 바라보는 말룸과, 이불을 둘둘 싸매고 약간의 방어라도 해보자는 나.
우리는 나침반 없이 밤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나는 말룸에게 잡아먹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건강 상태를 털어놓지 않는 나 때문에.
당장 말룸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포식자 앞에 선 몸이 굳어 뜻대로 되질 않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말룸이었다.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뱀의 둥지⟫속의 말룸은 마리아에게 도저히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말룸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시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당신도 언젠가는 늙고, 끝으로는 죽음을 맞이하겠죠.”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기보다는 잡아먹혀서 끝을 보는 게 맞는 말일 텐데. 말룸은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훌륭한 연기를 계속했다.
말룸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자신만이 알 어떤 감상 속을 유영하며 머리칼을 오른쪽으로 한데 넘겨 정리했다. 정갈히 묶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려뜨린 머리칼은 유화로 칠한 듯 예술적인 남빛이었다.
말룸이 다시 말문을 열었을 때, 뱀의 샛노란 눈동자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안광이 곧 저물 초승달처럼 희미하게 깜빡거렸다.
“저는 당신의 죽음이 병에 걸려서 숨을 거두는 형태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약한 육체, 병에 걸려 떠는 나날, 호흡조차 이어나가지 못하고 헐떡대는 폐……. 모든 게 악몽 같단 말입니다.”
뱀이 속삭였다.
“아프면 무력해져요. 어떤 것도 홀로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그런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제가 귀족이라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거 알아요. 하지만 부디 곁을 허락해주지 않을래요? 저는 그 무력감으로부터 당신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무서운 일이 있으면 제 뒤로 숨어도 괜찮아요. 어떤 목적을 위해 죄책감 없이 이용해도 상관없고. 모든 게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데, 당신은 항상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 버리니 애가 탑니다.”
말룸 발타사르는, 그것이 설령 연기일지라도 이런 말을 먹이에게 건네는 족속이 아니었다. 나는 왜 내게 이러느냐 소리쳐 묻고 싶었지만 그의 금빛 눈동자가 처량히 요동치고 있어 차마 말을 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