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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5화 (5/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5화

7월, 아침 공기가 맑았다. 안개가 끼었는지 대기가 약간 축축했다.

성은 공해 없는 천혜의 자연 속에 있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피곤한데다 일지를 작성하느라 잠을 설쳐 몸이 곧게 서질 못했다.

티샤는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깨웠다. 티포주 성의 아침은 꽤 빠르게 시작되는 듯했다.

“비전하. 혹 선호하는 옷차림이 있으십니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원피스가 좋아. 다리에 달라붙지 않으면서 허리를 세게 조이지 않는 거. 꿰어 입으면 되니까 편해.”

티샤는 굳이 불편한 옷을 권하지 않고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몇 벌 골라주었다. 그러면서 말룸의 전언을 읊었는데, 어제 내가 드레스를 입고 휘청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며 성 안에서는 코르셋이고 드레스고 굳이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단다. 말룸은 내키는 대로 바지를 입어도 좋다고까지 했다.

옷차림까지 신경 쓰는 그가 얄미웠지만, 무척 의외인 일이었다. 이 세계는 여자에게 상당히 배타적이었고, 치렁치렁한 의복을 통해 목줄을 채우는 것도 사람의 몸가짐과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악습이었다.

하지만 말룸은 괴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예법에서 벗어나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먹이로밖에 보이지 않아 상관이 없는 건지 나를 강제하거나 구속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티샤가 추린 원피스 중 과거에도 자주 입던 흰 원피스와 비슷한 것을 골랐다. 확실히 원단이 걸리는 곳 없이 매끄러웠고 등줄기를 따라 올라오는 장미 덩굴 자수도 정교해 비싼 옷이라는 태가 물씬 났다.

멀거니 천을 손가락 사이에 두고 비볐다. 죽은 후의 호사가 싱숭생숭했다.

“티샤, 나 준비 끝났어.”

다시 티샤를 불렀다. 단련된 사용인일 그조차 내 생김새에 잠시간 넋을 놓았다. ‘오필리아’의 외모는 파급력이 엄청났다. 이 애의 외모를 찬양하는 것은 달이 지구 주변을 공전하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벌써 기다리고 있다고? 일찍 일어나는구나.”

“워낙 밤잠이 없으신 분이니까요.”

티샤는 여전히 묵묵한 낯으로 길을 안내했다. 이전에 말룸도 자신이 밤잠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긴 했었다.

말룸의 생태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나를 요리하기 위해 방법을 강구하느라 밤을 새우는 것일지도 모르니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성은 활기가 넘쳤다. 사용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우중충했던 인테리어를 새로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명목상의 대공비라도 새로 왔다고 분주한 모습이 떨떠름했다.

사용인들은 나를 발견하는 즉시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신분의 고하를 나누고 그 수혜자가 된다는 건 썩 귀찮고 이상한 일이었다. 내 오묘한 표정에도 그들은 특별한 의문조차 품지 않는 듯했다.

식사를 함께 하는 대연회장은 1층 중앙 로비 오른편에 있었다. 중앙 홀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티샤와 나는 금세 도착했다.

대연회장은 입구부터 화려했다. 세 마리 뱀이 아름답게 양각된 값비싼 은제 문이 가장 눈에 띄었다. 두 마리 실뱀이 양옆에서 중앙의 거대한 뱀을 떠받드는 모양새였다.

그 커다란 뱀은 산양의 뿔을 갖고 있었는데, 어딘지 모를 처연함과 섬뜩함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뱀은 비명을 지르는 듯도 했고, 불꽃 속에서 춤추는 듯도 했다. 또는 이겨낼 수 없는 절망에 깔려 몸부림치는 것도 같았다…….

티샤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즐거운 식사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안내 고마워. 참, 조금 있다가 중앙 정원을 산책하고 싶은데…….”

탈출로를 알아봐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흔쾌히 따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티샤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중앙 정원은 오랫동안 공사 중이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저도 자세한 일은 잘 알지 못하지만, 최대한 신속히 마무리되게끔 전달하겠습니다.”

거짓말이다. 공사를 하는 기색은 없었다. 정말 공사 중이라면 벽돌 나르는 소리라도 나야 할 텐데 성은 물에 잠긴 듯 고요하기만 했다.

미심쩍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티샤는 그제야 문을 열어 길을 터주었다.

식당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별천지였다. 푸르스름한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화려하고 정교했다. 빵과 수프 냄새가 아침 공기를 물들였다.

향긋한 과일과 먹음직스러운 고기, 샐러드와 각종 음료, 그것들을 받치고 있는 아기자기한 접시들까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그러나 입맛이 돌지는 않았다.

“오필리아. 좋은 아침이에요. 잠자리는 어땠나요?”

말룸이 반색하며 성큼 다가왔다. 샛노란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뱀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그는 자신의 수집품을 자랑했던 때처럼 들떠 있었다.

“음, 좋았어요.”

말룸은 노상 상냥했다. 저 헌신이 진심이면 좋을 텐데…….

“기다리고 있었어요. 음식 취향을 알 수 없어서 이것저것 준비하라 지시했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빵? 수프? 파스타도, 아침이라 망설였지만 스테이크도 있습니다. 디저트로는 브라우니와 홍차를 주문해 놓았어요.”

“브라우니는 마음에 드네요. 그런데 너무 많이 준비한 거 아니에요?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남은 음식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은 그냥 누리기만 하면 되니까.”

말룸이 나를 각양각색의 음식이 펼쳐진 식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절대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하는 일은 없었다. 살갗이 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착용한 흰 장갑까지 전날과 같았다.

당황스러웠던 점은 말룸이 ‘나 상석이오’ 하고 쓰여 있을 법한 자리에 나를 앉혔다는 것이었다. 다른 자리는 들러리였다. 식당 안이 온통 황금빛이었지만 이 의자만큼 화려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뜯어봐도 말룸의 자리였다.

“여기 당신 자리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이제부터는 당신 자리예요. 자, 식사해요. 어제 저녁도 먹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나요?”

말룸이 냅킨까지 집어 와 친히 내 앞에 두었다. 독충이 옆에 있는 것처럼 소름이 바짝 돋았다.

식기를 더듬는 때, 그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스치듯 마주쳤다. 항상 날이 서 있을 것만 같은 황금색 눈이 한껏 누그러져 부드러웠다. 나는 급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부담 갖지 마세요.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말룸이 피어나듯 웃었다. 놀라 굳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호선이었다. 눈가의 음영이 퇴폐미를 더했다. 저도 모르게 심장을 내어 줄 것만 같아 홱 고개를 돌렸다.

말룸은 면전에서 외면당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기만의 모형 정원에 갇혀 이것저것 인형을 늘어놓는 소년 같았다.

“……아침부터 소란 피우게 해서 미안해요.”

“소란이라고 할 수도 없죠. 당신은 제 유일한 아내잖아요.”

“유일하다고 하기에는, 당신 저랑 재혼한 거잖아요?”

“정략적인 이유에서 결혼했던 거예요. 그자와는 손 한 번 잡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오필리아. 내게는 당신만이 유일하니까.”

사내는 입 발린 말의 천재였다.

찝찝한 기분에 계속 그를 흘끔거렸다. 말룸은 내 오른편에 의자를 빼고 앉아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했다. 뱀이 서커스에서 아양을 부리는 듯해 입안이 텁텁해졌다.

‘……먹이 대우가 훌륭하네.’

자세가 불량스럽게 비뚜름해졌다. 자세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가시 돋친 고의였다. 그러나 말룸은 내 비딱한 자세에도 전혀 기분 상하지 않은 듯했다.

말룸이 이것저것 접시를 내밀며 식사시중을 들었다.

“스테이크 굽기도 아직 당신 기호를 몰라 전부 준비했습니다. 어떤 걸로 줄까요?”

“……제일 덜 익힌 거요.”

“날고기를 좋아하나요?”

“네. 육회도, 회도 잘 먹기는 해요.”

나이프를 보자마자 난도질당했던 복부가 아렸다. 나는 시선을 치워 버렸다. 채 가시지 않은 죽음이 생각나 손끝이 잘게 경련했다.

말룸이 눈치 좋게 끼어들었다.

“잘라줄까요?”

“……네.”

“좋아요.”

말룸이 능숙하게 스테이크를 잘라 앞으로 내밀었다. 한 입 크기로 잘린 고기가 정갈히 늘어섰다.

“어색해하지 말아요, 기뻐서 하는 일이니까. 아침부터 당신을 보니 즐거워요. 부부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나 벅차오르는군요.”

포크까지 쥐여 주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인간을 얕잡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은 희대의 바람둥이가 되었을 것이다.

“당신은 안 먹어요? 식기도 없고.”

연신 음식을 집어다 나르는 말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긴장감이 슬금슬금 되살아나 몸을 잠식했다.

그는 배고픈 기색도 없었다. 어제 결혼식장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말룸이 무언가를 먹은 듯한 기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걸까?

말룸이 대본을 읽듯 대꾸했다.

“소식하는 중이라 아침 식사는 챙기지 않는 편입니다.”

“……다음에도 같이 먹는 거죠, 우리? 그때는 조금이라도 먹어 봐요.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건강에 좋대요.”

말룸의 미소에 순간 금이 갔다.

“바쁘지 않으면요.”

이후 말룸은 자세를 고쳐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다음 식사 자리가 내키지 않는 듯 보였다.

말룸이 자기 나름대로 변명을 덧붙였다.

“항구 개발 건으로 이것저것 올라오는 보고가 많거든요. 소식하는 게 건강에 좋다고도 하고.”

이쯤 되면 확실했다.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굳이 핑계일 게 분명한 이유를 대면서까지 음식 먹기를 피하지 않았을 듯했다.

말룸 발타사르는 인간의 음식을 먹지 못한다.

당장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 <말룸 관찰 일지>에 적어 넣고 싶었다. 이런저런 추측으로 가슴이 거칠게 달음박질했다. 말룸이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를 하나둘 발견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고 긴장으로 피가 빠르게 돌았다.

말룸이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맛은 어때요? 입에 맞나요? 황성에서 일하던 수석 요리사를 데려왔는데, 당신 입맛을 사로잡지 못하면 바로 자를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납치한 건 아니길 빌게요. 물론 맛은 있어요. 지금까지 뭘 먹고 살았나 싶은 정도예요.”

“이 내가 못할 건 없습니다. 그리고 납치가 아니라 직장을 새로 제공한 거죠. 더 나은 조건의, 쾌적한 직장을.”

그가 샐러드와 포도 몇 알을 접시 위에 덜어다주었다.

“기름진 음식만 먹으면 속에 안 좋아요. 샐러드와 함께 드세요.”

나는 여물 받아먹는 소처럼 샐러드를 입안 가득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접시에 얼굴을 박을 듯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제발 말을 그만 시켰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말룸 발타사르는 강적이었다.

“그리고, 부담 갖지 않는 선에서 대공비로서의 일을 맡기고 싶은데. 어떤가요?”

“대공비로서의 일이요?”

대강 반문하며 말룸이 있는 쪽을 보니 그는 턱을 괸 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시 파스타를 돌돌 말아 한입 가득 집어넣었다. 오늘은 소화제가 필요할 듯싶었다.

말룸이 단조로우면서도 고요히 말했다. 속삭이는 것과 진배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제 곁에만 묶어 놓고 싶지만, 알다시피 귀족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라. 특히 조만간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야 해요. 당신 재량대로 영지를 돌볼 수 있다면 더 좋겠군요.”

“……의무는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기뻐요, 오필리아. 저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주는 거죠?”

말룸이 활짝 웃었다. 나는 메두사의 웃음이라도 본 것처럼 께름칙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이쪽을 잠시간 응시하다 작은 보석함을 불쑥 건네주었다. 무언가 불길했다. 그러나 잠자코 함을 받아 열었다.

그 안에는 황금빛의 열쇠 하나가 들어 있었다.

푸른 수염 동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마법 열쇠입니다. 마법이란 게 오래전에 사장되었다지만 몇 개쯤 관련 물건이 남아 있지요. 우연찮게 인연이 닿아 강력한 열쇠를 손에 넣게 되었는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숨이 턱 막혔다. 기도에 고무풍선이 걸린 것 같았다. 영롱히 빛나는 금빛 열쇠를 금방이라도 떨어트릴 것만 같아 아예 손바닥 안으로 집어넣었다.

“서재, 무기고, 각종 보물고……. 제가 오랫동안 모아 온 수집품이 있는 곳까지 모두 열 수 있어요. 당신이 의무를 맡아주기로 했으니 주는 선물이지요. 그리고 전에 말했었죠? 당신에게 발타사르의 금고를 주겠다고. 그 금고도 황금 열쇠로 열 수 있어요.”

말룸이 악마처럼 속삭였다. 분명 내 얼굴은 시시각각 창백해지고 있을 것이다.

“사치를 해도 괜찮고, 원하는 만큼 노예를 사들여도 됩니다. 금고도 마음대로 사용하세요.”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말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하 3층의 푸른 문은 열지 마세요. 그곳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당신은 나와 영원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간신히 상자에 열쇠를 다시 집어넣고 걸쇠를 걸어 잠갔다. 대수롭지 않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식탁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손가락 끄트머리가 덜덜 떨렸다. 말룸이 눈치채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곳만, 들어가지 않으면……. 되는 건가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내자 말룸이 기쁜 듯 웃었다.

“네. 제게도 사생활이란 게 있으니까요. 지켜줄 수 있지요?”

말룸의 말소리가 윙윙거렸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요. 별 것 아닙니다. 하지만 반응을 보니 안심이 되네요, 당신이 제 말을 잘 지켜줄 것 같아서.”

현실감이 갑작스럽게 훅 치고 올라와 심장을 옭죄었다.

동화 속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마법 열쇠를 주며 작은 방만은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그 안에는 실종된 전 아내들의 시신이 들어 있었고.

그러니 말룸이 말한 지하 3층의 푸른 문 안에는……. 전 아내의 머리가 들어 있을 것이다. 말룸은 머리를 빼놓고 식사를 하는 못된 식습관을 가졌으니까.

나를 시험하는 걸까? 어째서 내게 식사 장소를 알려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금기 모티브인가. 대체 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하면 안 되는 일을 꼭 알려주어선 괜한 호기심이 들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들고 있는 숟가락으로 말룸의 이마를 세게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황금 열쇠가 내 손 안으로 넘어온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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