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4화
“구경 잘 했어요. 애정을 가지고 꾸몄다는 게 느껴져요.”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말룸의 입매가 진심 어린 호선을 그렸다. 먹이와의 랑데부가 즐거웠던 것 같았다.
“아뇨, 저야말로 어울려줘서 기뻤어요. 대화가 이렇게 기꺼울 줄 몰랐는데.”
말룸이 멋쩍은 듯 이야기했다. 잘 빚어진 얼굴에 온기가 도니 정신이 아득했다.
순하게 내려간 눈썹과 애정을 담고 살짝 달뜬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의 면면은 별도 뜨지 않은 밤, 예쁜 반디가 총총 날아다니는 풍경의 평화와 닮았다. 의외의 측면을 보고 만 것 같아 기분이 이상스레 가라앉았다.
빤히 보고 있자니 말룸이 덧붙였다. 그는 빗줄기에 공을 들여 만든 비눗방울이 터져 버린 소년처럼 버석버석한 얼굴이었다.
“수집품은 관리만 잘 하면 썩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목숨처럼 한순간에 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멸하죠. 하지만 대부분 절 탐욕에 찌든 괴짜로 보거나 해서……. 이렇게 칭찬받은 건 오래간만입니다. 그래서 과했던 모양이에요.”
“수집할 능력이 있어서 수집하는데 뭐가 문제죠?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네요.”
저도 모르게 비뚜름한 진심을 풀자 말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나와 함께 지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중 가장 즐거워하고 있었다.
“결혼반지의 블루 다이아몬드도 삼백 년 전의 난파선에서 발견한 거예요.”
“……삼백 년 전이요.”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갑자기 왼손 약지가 무겁게 느껴졌다. 알 굵은 다이아몬드가 영롱했다.
삼백 년 전, 난파선의 보물.
탈출 자금으로 사용하기에 딱 적절했다. 팔아치우면 상당한 값을 받을 수 있을 듯했다. 탐욕에 젖어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렇게 좋아요?”
말룸이 다시금 작게 웃었다. 나는 약지에서 시선을 떨치려 노력하며 애써 흥분을 갈무리했다.
“앞으로 숱하게 구해줄 테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어떤 표정을 지었는데요?”
말룸이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심술궂게 웃었다.
“도토리 모아서 쌓아 두려는 다람쥐 같은 표정.”
“…….”
“몰랐는데, 물욕이 꽤 있는 편인가 봐요? 그럼 저와 결혼한 게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일 겁니다.”
“인생에서요? 어째서요?”
“당신이 평생 사치해도 재산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테니까.”
……뱀술로 만들어 버리겠다.
이루어지지 못할 바람을 버킷리스트에 추가해 단단히 잠가 보관했다.
그러는 사이 말룸이 흑단나무 문의 황금 손잡이를 당겼다. 그는 한 발 옆으로 비켜 내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낯선 배려였고, 시야에 펼쳐진 것 역시 낯선 휘황찬란함이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술탄의 궁전도 이보다 화려하지는 못할 듯했다.
천지가 황금으로 번쩍거렸다. 벽지에까지 황금 무늬가 양각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각종 보석이 기하학적으로 뭉쳐 화려한 은하수가 펼쳐졌다.
한술 더 떠 이불에까지 굵은 루비가 달라붙어 있었다. 자다가 깔려 죽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진귀한 보물과 값비싼 골동품, 보석들을 한 방에 쓸어 담다시피 해 넣어둔 것 같았다. 하지만 화려함이 너무 과했다.
나는 몇 번 할 말을 찾아 입을 달싹거렸는데, 끝내 혀에서 나오는 단어가 없었다. 말룸은 뿌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당황하기보다는 감동한 줄 알고 있는 듯했다.
“마음에 드나요? 전부 최상품으로 엄선해 채워 넣었습니다. 제가 골랐으니 품질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아요.”
말룸이 뽐내듯 이야기했다. 보석, 명예, 황금, 권력, 오래된 유물, 부……. 그런 것이야말로 말룸이 충족감과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인 것 같았다. 어쩐지 말룸의 기쁨이 썩은 나무처럼 허무하게 느껴졌다.
“부족하면 이야기해요. 그리고 당신 앞으로 품위유지비는 따로 할당하지 않을 겁니다. 쓰고 싶은 만큼 꺼내 써요.”
“어디서요?”
“내 금고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아무리 유혹 대상이라지만 그렇게 금고를 덥석 맡겨도 괜찮은 건가 싶었다.
“……꿈은 아니죠?”
“꿈은 아니고, 당신이 누려 마땅한 것들일 뿐입니다. 내 작은 신부에게 주는 선물이죠.”
말룸이 등 뒤에서 달콤히 속삭였다. 머릿속이 멈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등 뒤에는 비수, 눈앞에는 황홀경.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았다. 방 안 풍경, 예쁜 찻잔,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전부 새롭고 찬란했지만 하트 여왕에게 목이 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다.
“2층에 우리 신방도 마련되어 있어요. 어서 당신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군요.”
둘만의 시간? 황금 나라로 가출했던 정신이 급히 제 자리를 찾았다. 등줄기가 긴장으로 빳빳해졌다. 말룸과 함께 신방으로 가면 당장 잡아먹히지는 않겠지만 먹이 품평을 당해야 할 것이다. 설령 정말 부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나를 부른다 해도 뱀과 교접하는 취미는 없었다.
썩은 내가 거친 태풍처럼 밀어닥쳤다. 내 몸을 휘감은 거대한 괴물 뱀……. 생각만 해도 시야가 노래지고 신물이 났다.
부러 답하지 않고 비틀거리듯 침대로 가 엎어졌다. 아주 추해 보였으면 싶었다.
말룸은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나는 육지로 올라온 새우처럼 몸을 비틀었다. 팔다리가 따로 놀았다. 둥지 잃은 새처럼 보이면 더 할 나위 없겠다.
“미안해요. 피곤하고 놀라서 힘이 풀린 것 같아요. 그, 합방 말인데요. 오늘 꼭 해야 하나요?”
말룸이 내가 엎어진 바로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확실히 오늘 일이 많기는 했죠.”
“맞아요. 결혼식도 올렸고, 수집품도 구경했고, 무엇보다도 한 나라의 대공이 내 남편이라니 현실감이 없어요…….”
사람 잡아먹는 뱀이 내 남편이라니 현실감이 없긴 했다.
나는 엎드린 상태로 빙글 돌아누워 말룸을 보았다. 사내의 남색 머리칼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명주처럼 매끄러웠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수집품을 자랑하며 들뜬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손아귀에 땀이 들어찰 무렵, 드디어 뱀이 입을 열었다.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요. 물론 그 감상도 사실이겠지만, 당신이 아직 날 사랑하지 않는 건 알고 있습니다.”
나는 놀라 눈만 깜빡거렸다. ‘오필리아’가 말룸을 사랑해 결혼한 것이 아니었나?
“제가 갑작스럽게 구애한 거고, 당신은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으니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겠죠.”
곧장 의문이 풀렸다. 괴물은 먹이를 놓칠 생각이 없어 돈으로 오필리아를 회유한 듯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말룸이 처연한 척 미소했다. 가증스러움에 심장이 낙엽처럼 추락했다.
“기다릴 수 있어요. 오늘이 꺼려진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흠될 것 없어요. 티포주 성의 식솔들은 성의 일을 바깥에 전하지 않죠.”
나는 남몰래 허벅지를 꼬집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날 원하게 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하지만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배려 고마워요…….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니까,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말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가 노력할 일이죠. 이번 대화로 당신 안에서 제 평가가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어때요?”
“음, 대강 그런 것 같긴 해요. 점수로 환산하면 구십 점?”
아무것도 모르는 양 행복하게 웃자 말룸도 똑같이 마주 웃어 주었다.
나도, 그도 망루에 올라가 서로의 반응을 살폈다. 말룸은 포식자로서, 나는 피식자로서.
“쉬어요. 저녁은 사용인 편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먹지 않으려면 물려도 좋아요. 그자가 앞으로 당신의 전담 사용인이 될 겁니다.”
“네, 그럴게요. 당신도 좋은 저녁 보내요.”
“원하면 언제든 제 침실이나 개인 집무실로 찾아와요. 대부분 집무실에 있긴 하지만, 그곳에 없다면 방에 있을 겁니다. 저는 밤잠이 없으니 늦은 새벽에도 환영해줄 수 있어요.”
중압감과 두려움에 미치지 않는 이상 그를 내 발로 찾아갈 일은 평생 없었다.
말룸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장신의 남자는 걸음걸이마저 느긋하고 우아했다.
굳이 배웅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조심히 가요, 말룸. 오늘 고마웠어요.”
다신 오지 말아요.
말룸이 잠깐 뒤를 돌아보더니 쑥스럽다는 듯이 미소했다.
“내일 봐요, 푹 쉬고.”
철컥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기다리던 소리였다. 나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침대에 폭삭 매몰되었다.
고작 첫째 날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죽음이 나를 빗겨갔다.
값비싼 이불에 화장이 잔뜩 묻겠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에 얼굴을 비볐다. 화풀이였다.
호화 저택, 값비싼 보석, 대공비라는 지위, 이상한 세계.
눈물이 찔끔 삐져나왔다.
대체 저 괴물 남편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오필리아가 말룸을 사랑해서 결혼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사실 오필리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소설 속에서 오필리아는 한 줄 정도 등장했다. 심지어 어쩌다 잡아먹혔는지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개를 위해 만들어진 엑스트라의 정석이었다.
방 안 깊이 퍼지는 향초 내음이 꽃집에서 나는 향을 닮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한숨이 나왔다. 몸이 극도로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을 생각도 없었다. 사용인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냥 물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타이밍의 신조차 내 편이 아니었다. 그새 저녁상을 가져온 모양인지 두어 번의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새벽을 닮은 차분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오늘부터 비전하를 모시게 된 티샤라고 합니다. 저녁 식사를 가져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나는 곧장 대답했다.
“미안해요! 너무 피곤해서……. 그냥 가지고 가줄래요?”
“미안해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저 명령하시면 됩니다. 그럼, 목욕 시중은 어떻게…….”
“그것도 괜찮아요. 앞으로도 제가 할게요.”
“예, 전하. 샤워 가운은 욕실 안쪽에 있습니다. 혹 식사하시고 싶으시다면 추후에도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문 하나를 두고 티샤는 계속 이야기했다.
“대공 전하께서 내일 아침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일찍 깨우러 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리고 부디 말씀을 낮추어주십시오.”
아침부터 속이 좋지 않을 것 같다. 이 세계에도 소화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잇새로 한숨이 삐져나왔다.
나는 애써 몸을 반쯤 일으켜 욕실로 보이는 문을 노려보았다. 피부를 망가트릴 수는 없으니 잘 때 자더라도 씻기는 해야 했다.
하지만 속 편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알게 된 것을 정리해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했다.
방 안을 둘러보니 한쪽에 책상이 있었다. 평민 출신이라지만 명색이 대공비라고 책상까지 잘 놓였다. 책상 구석에는 잉크와 만년필까지 정갈히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작은 책꽂이에 자리한 검은 표지의 공책을 빼들었다. 노트를 한 번 펼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비명을 지르는 몸을 뒤로 하고 의자에 앉아 일지를 적기 시작했다.
<말룸 관찰 일지>
본 관찰일지는 말룸, 얼굴밖에 볼 게 없는 신랑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작성함.
첫째 날
1. 개체명 : 말룸 발타사르
2. 알고 있는 것들
―나이 불명. 하지만 오래 살았을 것.
―인간이었으나 불로불사를 위해 괴물 뱀이 되었다. 발타사르 대공령을 다스리고 있다.
―황제를 협박해 동생의 자리를 얻어낸 것으로 원작에 명시되어 있었다.
―타인에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천성을 타고났다. 대신 매우 계산적이다. 연기 실력도 탁월한 듯하다.
―첫 번째 아내를 이미 잡아먹었다. 퇴치당하는 것은 세 번째 아내인 마리아의 등장 이후로, 첫 번째 아내는 실종된 것으로 처리된 모양이다.
―마리아가 밝혀낸 것에 따르면, 말룸 발타사르는 삼 년을 주기로 인간을 잡아먹는다. 내 목숨이 삼 년 남았다는 뜻이다.
―‘먹이’에 닿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듯하다.
―주술과 각종 저주에 능통하다. 내가 성에 올 때 잠든 것도 주술의 일환으로 보인다.
―말룸 발타사르는 영생을 손에 넣는 대신 치명적인 저주에 걸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괴물이 되면서 얻은 고유의 저주가 어떤 저주인지는 알 수 없다. 원작에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던 것으로 보아 그의 생명에 지장이 가는 저주는 아닌 것 같다.
―빛나는 것, 값비싼 것을 좋아한다. 수집품에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수집품에 대해 거론하며 기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 아예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닌 듯하다.
검은 잉크가 지면에 떨어져 피를 흘리는 듯했다. 관찰 일지라니, 초등학생 시절 개미 관찰 일지를 적은 것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필기는 한글로 해 두었으니 말룸이 내용을 알 위험은 없었다.
나는 둥글둥글한 필체의 한글을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치웠다.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편이었는데도 향수병에 걸릴 것 같았다.
펜을 내던지고 노트를 서랍 깊은 곳에 숨겼다.
부나방이라도 되어 훨훨 날아가고만 싶다.
성에 귀기가 서린 듯했다. 조금만 몸을 담고 있어도 숨이 턱 막혀 영혼이 깊은 구덩이 속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