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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3화 (3/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3화

우선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망아지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날뛸 수는 없었다.

소설 속 말룸은 여주인공을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한 주제에 결코 연애전선을 구축하지 않았다. 여주인공 버프를 받은 마리아가 건실한 청년들을 홀리고 다녔음에도 말룸은 악의 위치에 남아 끝까지 마리아와 대적했다. 말룸에게는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정을 꾸릴 수 없을 만큼 감정이란 물이 메말랐다. 가물어 썩은 땅이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말룸은 자신만이 중요하고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였는데, 식인까지 하니 그보다 더했다. 그는 이해받아서도 안 되고 이해하려 해서도 안 되는 괴물이었다.

일반적인 빙의 소설의 전개대로라면 말룸과 사랑에 빠지거나 하겠지만, 대체 어떤 여자가 식인 뱀을 사랑할까? 말룸은 연애 대상이 아니라 도주 대상이었다.

“오필리아, 듣고 있나요?”

퍼뜩 상념을 지웠다. 내가 한동안 대꾸하지 않자 말룸은 서리가 내려앉은 얼굴로 나를 관찰했다.

“아, 미안해요. 물론 듣고 있었죠. 그냥, 사방이 생소해서요. 졸리기도 하고요.”

나지도 않는 하품을 애써 했다. 멋쩍은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한 긴장으로 배가 살살 아팠다. 잡아먹히기 전에 스트레스로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음, 다 온 것 같네요. 여기는 티포주 성인가요?”

“맞아요. 중앙에 저택도 딸려 있으니 지내기 편할 겁니다. 모르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당신은 성을 처음 보았을 테니까…….”

참 재수 없는 남자였다.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것은 아닐 테고, 자신과 나의 재력 차이를 명확히 하고 싶었던 걸까?

“성에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사용인을 새로 고용했습니다. 드레스 룸도 증축했으니 옷은 원하는 만큼 구입해요. 가격표 보지 말고. 알겠죠?”

말룸이 달콤하게 웃었다. 사랑에 빠진 사내로 착각할 법했다. 하지만 그는 프로그래밍 된 자동인형 같았다. 표정은 대리석 조각처럼 딱딱했고, 행동은 규칙에 따르듯 작위적이었다.

저렇게까지 해서 불로불사를 영위해야 하는 걸까…….

한 번 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결말을 불러일으켰다. 절로 얼굴이 굳었다. 긴장 때문이라고 오해했는지 말룸이 노래하듯 속삭였다.

“괜찮아요. 이제 당신 집인 걸요.”

“음……. 네, 집으로 여길 수 있게 노력할게요.”

“하하, 고마워요.”

그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솔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괜찮다면 내리도록 해요. 벌써 저녁이군요.”

“……다음부터는 잠들어도 깨워주세요. 다른 분들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잖아요.”

“참고하겠습니다. 그래도 피로를 푸는 게 우선이니 억지로 깨울 일은 없을 거예요. 어차피 봉급을 받고 일하는 자들이니까요.”

드디어 마차 문이 열렸다. 상쾌하고도 음산한 공기가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말룸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균형 잡힌 탄탄한 몸의 소유자답게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는 내가 내리는 것을 도울 심산인지 손을 내밀고 기다렸다. 혼자 내리고 싶었지만 마차의 턱이 높았고 드레스가 치렁치렁해 불가능했다.

잠자코 그의 손을 잡았다. 손끝만 살짝 잡을 생각이었지만 말룸이 깍지를 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단단히 얽었다. 흰 장갑의 매끄러운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결국 말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최소한의 매너였는지 그는 내가 땅을 딛자마자 손을 거둬 버렸다.

속이 비비 꼬였다. 뜨겁게 달궈진 부지깽이로 들쑤신 것도 같았다. 이런 게 남편이라니. 차라리 손을 내밀지 않았으면 더 나았겠다.

“이리로.”

말룸이 성큼 앞서갔다. 신부를 배려하는 기색도 없었다. 뒤통수에 대고 욕을 할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말룸은 혼자가 아니었고, 저녁 무렵의 거대한 성채가 상상 이상으로 위압적이어서 기운을 펼 수가 없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뱀의 둥지, 악당의 본거지 중 가장 핵심적인 곳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나는 영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주변 풍경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성이 너무 예뻐요.”

입바른 말이었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티포주 성은 달을 깎아 만든 것처럼 은은히 아름다웠다. 그 건축 양식을 한참 보고 있노라면 별가루처럼 부서져 달의 뒷면으로 끌려들어갈 것 같았다.

저녁나절 풀냄새가 맘속으로 깊이 스몄다. 국국대는 새 울음소리를 따라 흐느낄 것처럼 맘이 시렸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반들반들한 정원석에 시선을 주었다.

어느 정도 구경이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인기척의 주인이 앞으로 나섰다.

“티포주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는 흰 수염이 지긋한 노인이었는데, 내게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인사했다. 나는 이곳 특유의 신분제를 까맣게 잊고 덩달아 허리를 숙일 뻔했다.

말룸이 노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행동거지 하나까지 예의가 없었다.

“이쪽은 렉스. 성을 봐주고 있는 집사장입니다.”

“안녕하세요, 렉스…….”

“믿을 만한 사람이니 불편한 점이 있다면 렉스에게 말해주세요. 대부분 그가 해결할 겁니다.”

괴물 뱀의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내게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나는 순종적인 척 인사를 건네며 렉스를 살폈다.

렉스는 한 칠십 정도 되어 보였지만 자세가 곧았고 눈매가 예리했다. 덥수룩하지만 잘 정돈된 흰 수염이 렉스를 권위적으로 보이게끔 했다. 얼굴 언저리에 얹힌 주름 하나하나까지 우아하고 자연스러웠다. 젊었을 때 상당한 미남이었을 것 같았다.

“전하께서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셨군요.”

렉스는 내가 긴장한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주름이 고아하게 맞물리며 노인을 온화한 색으로 덧칠했다.

“렉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성은 특별히 없습니다.”

입안이 껄끄러웠다. 온화한 표면과는 달리 그는 형식적인 것 이상으로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노집사가 의중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날 죽 훑어보더니 안내를 시작했다. 말룸도 말룸이었지만 렉스 역시 접근하기 좋은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저택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하셔야 할 점이 있지요.”

“주의해야 할 점이요?”

“예. 티포주 성은 미로 같이 복잡해 산책하실 때 반드시 사용인을 대동하셔야 합니다. 전 부인께서는 어딘지 모를 곳에 홀로 가셔서 실종되셨었는데……. 세 번째 아내를 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나는 답하지 않았다. 렉스가 나를 환영하지 않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룸에게 다가갔다. 흰 천으로 눈앞을 가리고선 양 팔을 단단히 묶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저녁놀에 녹아든 사내는 저만의 상념에 잠긴 듯 마냥 고요했다. 나는 그가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인간임을 저버리고 괴물이 되다니.

말룸에게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뱀에게 사육당하는 것도 모르고 웃는 순진한 여자? 해맑은 백치? 그것도 아니면, 신데렐라가 되어 들뜬 거리의 노숙자?

“당신을 만나서 무척 기뻐요, 말룸. 인생의 모든 행운을 끌어다 쓴 게 아닐까요?”

뱀은 오직 침묵뿐이었다.

그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 동공이 세로로 죽 찢어지는 날이 내 목숨의 끝이었다.

“왜 그렇게 보나요?”

“……아뇨. 아닙니다, 오필리아.”

말룸이 인위적으로 미소했다.

우리를 주시하던 렉스가 다시금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풀릴 것 같았지만, 아주 뜻밖으로 팔을 잡게 해주는 말룸에게 매달리니 개미 눈물만큼 낫기는 했다.

티포주 성은 성이라기보다는 신전처럼 고아했고 무언가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미로처럼 보였다. 내 인생도 비비 꼬여 미로 안에 갇혔다. 발목에 추를 단 듯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만히 앉아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끝의 끝까지 발버둥 치다 죽는 것은 한참 달랐다. 어떻게 해서든 말룸 발타사르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이미 한 번 허무하게 죽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발악이었고, 내 인생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우리는 본성 저택에 도착했다. 말룸은 렉스를 물린 채 저택 곳곳을 안내했다. 그러면서 슬며시 나와 거리를 두었는데, 먹이와 닿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예쁜 얼굴에 뭉개진 인성이었다. 한숨이 시리게 흩어졌다.

저택을 구경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 몸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갯벌에 빠진 것처럼 근육이 축축 늘어졌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말룸은 나를 배려하지 않았다. 그는 전과 같이 홀로 길을 떠나는 나그네처럼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기만 했다.

아무리 표면상이라지만 명색이 자기 신부인데.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일단 말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삼 년의 시간동안이라도 그와 무난한 관계를 유지해야 이로웠다. 핍박받으며 신경전을 치르기에는 죽음을 막 지난 탓에 너무 지쳤다.

몸이 힘든 것과는 별개로, 성 중앙에 자리한 저택은 상상 이상으로 규모가 컸고 아름다웠다. 뱀 대공이 화려한 곳이라 호언장담할 만했다.

성 중앙의 저택은 지상 5층, 지하 3층으로 도합 총 8층이었다. 각양각색의 꽃이 핀 정원은 저택 바로 앞에 있었고, 뒤로 난 울창한 숲은 휴양지를 닮아 풍경이 좋았다. 연무장, 기사단 청사, 텃밭을 가꿀 수 있는 공터, 용도를 알 수 없는 부지, 유리 온실, 다락이 딸린 첨탑까지 부속 건물도 제대로 기획되었다.

특히 저택은 내부가 겉면보다 화려했다. 거니는 복도마다 진귀한 조각상과 황금 장식이 가득했다. 사방이 반짝거려 저녁인데도 눈이 부셨다. 피라미드 보물고에 갇힌 도굴꾼이 된 기분이었다.

대공이 저택 곳곳에 있는 자신의 수집품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그는 빛나는 것을 과하게 사랑하는 듯했다.

나는 수집품을 구경하는 틈틈이 저택 내부의 길을 머릿속에 꼼꼼히 그려 넣었다.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괴물이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그의 창백한 뺨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오필리아. 이것 좀 볼래요? 이 단검은 제가 전리품 격으로 가져온 거예요.”

저 구렁이가 전리품이라 발음하면 비유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백 년 전 사라진 수인족 왕국의 보검이죠.”

그가 예리하게 잘 벼려진 황금의 검을 내밀었다.

“오백 년이요? 세상에, 무척 귀한 물건이잖아요! 예쁘고, 또 반짝거려요. 감정사가 아니라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게 아쉽네요.”

“제가 특히 아끼는 물건이에요. 공을 들여 관리하고 있죠. 산화를 막기 위해 주술로 공기 흐름을 차단해 두었어요.”

“오백 년 전 물건이면 아끼고도 남죠. 그런데 수인족이라니, 처음 들어봐요. 실존하는 종족인가요?”

“이전에는 실존했지만, 조금 전 언급했다시피 지금은 멸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는, 자, 여기 있군요. 이건 용과 나무를 숭상하던 자들이 남긴 목걸이예요. 얼어붙은 대륙 엘드라코에서 발견된 유물이랍니다.”

“……용이요?”

“전설에 의하면 고대에 실존했다고 해요. 엘드라코의 엘프들은 용을 신으로 섬기며 예배에 충실했다는군요. 허무맹랑하긴 하지만.”

“수인족 말고 엘프도 있어요?”

“역시 멸족했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게 당연해요.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유물 수집에 관심이 많아서 알고 있는 것뿐이니까.”

대공이 내미는 수집품들은 하나같이 기상천외하고 아름다웠다. 말룸이 정체불명의 황금 가면을 꺼내 들었을 때에는 저택을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수집품을 관리하는 법에 대해서도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는데, 극도로 심취한 듯해 말이 끝나질 않았다. 나는 호응조차 잊고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수집품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어서, 진심으로 감탄하기도 하고 말룸의 비위를 맞추려 과장되게 반응하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기뻐 보였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뱀을 살폈다. 진심으로 기뻐할 수도 있었나? 아예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말룸은 자신의 보물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 난 소년 같았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또 진득하게 나를 이끌고 돌아다녔다. 과연 인간 아닌 사내답게 힘든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유리창에 비친 안색은 지나치게 창백했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나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비틀비틀 걸었다.

말룸은 한참 후에야 내 상태를 알아차렸다. 그가 아차 싶었는지 말을 건넸다.

“아, 이런. 미안해요,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말룸이 짤막한 사과를 건넸다. 이제 수집품 퍼레이드가 끝났나 싶어 눅진해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가 내 방이 있다는 4층의 왼쪽 복도 끝으로 안내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거머쥐며 긴장감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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