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2화
괴물
결혼식은 석양이 지듯 고요하면서도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하객들은 대공의 눈치를 보느라 쉽게 떠들지 못했다. 대공이 좌중을 압도했다. 그의 분위기가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나는 몸을 감싸 안은 채 맘껏 떨고 싶었다. 겁에 좀먹어 안주할 공간을 찾았지만 요원했다.
이곳은 어둠이 내린 미로와도 같아 한 순간의 방심으로도 길을 잃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다 막다른 길에 몰리면 방향을 모르는 나로서는 살덩이를 내어 주는 결말밖엔 없었다.
곧 피로연이 시작될 듯했다. 나와 말룸은 북적대는 하객의 틈바구니에 있었다. 하객들은 제국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말룸에게 줄을 대려 안간힘이었다. 과한 아부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나 역시 살금살금 그의 눈치를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 대공은 자신의 ‘먹이’를 하찮게 생각해 사람과의 교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말룸이 다가왔다. 태연한 척한 보람이 있는지 말룸은 신부의 긴장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에게는 내가 결혼식 때문에 잔뜩 긴장한 통나무처럼 보이지 않을까.
대공이 옅게 미소했다. 그의 다정함은 평원을 따스하게 감싸는 해님을 닮았지만 그 태양은 종이로 만들어졌다.
“어서 단둘이 있고 싶군요. 하지만 당신은 피로연까지 즐기고 싶겠죠?”
말룸이 서둘렀다. 속내는 묻지 않아도 빤했다. 그는 먹이 품평회를 열고 싶은 듯했다.
최대한 성으로 늦게 향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위를 맞춰야 했다. 나는 메추리의 날갯짓보다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피로연은 괜찮아요. 저도 어서 성에 가보고 싶은걸요. 그러니까…… 우리의 보금자리로요.”
더욱이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지병이 있는지 의심될 만한 수준이었다.
거리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 걸까?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거친 달리기를 이은 것처럼 숨이 벅찼고 입술이 떨렸다. 지구에서 나는 잔병치레도 없고 키도 길쭉길쭉하니 큰 태생 강골이었던지라 나쁜 몸 상태가 적응되지 않았다.
피로연을 거절하자 말룸은 깊이 만족했다.
나를 기다리게 한 그가 단상 위로 올라가 먹이 사랑을 과시했다. 대체로 빠른 해산을 이해하는 분위기였지만 내게 향하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 여자가 대공을 보채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발음하고는 있었지만 이질적인 언어, 생소한 문화, 날 선 배척……. 이곳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말룸이 보여주기 식 인사를 마치곤 다시 내게 왔다. 나는 불길이 다가오는 것처럼 어깨를 웅숭그렸다.
“미안해요. 지루했죠? 이렇게 매듭짓지 않으면 당신 평판에 문제가 생겨서.”
말룸은 초식동물을 안심시키듯 차분하면서도 다정하게 행동했다. 그는 10년 묵은 사냥꾼처럼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
우리는 세간의 눈을 피해 건물 뒤편으로 빠져나왔다. 말룸은 자신의 강함에 자신감이 있는지 호위기사조차 대동하지 않았다.
“자, 이제 갑시다. 마차는 바깥에 있어요.”
“오래 가야 하나요?”
“아뇨, 근방입니다. 발타사르령의 티포주 성……. 알고 있죠? 유명하니까.”
하나같이 생소한 지명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일단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말룸은 내 시큰둥함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말룸이 빙그레 미소하며 무지한 신부를 위한 설명을 덧붙였다.
“제 영지는 레시우스 제국에서 특히 발전한 땅으로 유명합니다. 항구, 자작나무 숲, 관광 동굴,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삼림이며 신비로운 축제들……. 전부 제 것이랍니다. 이제는 당신 것이고요.”
말룸이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재물을 논할 때의 쑥스러움을 흉내 내고자 하는 듯했다. 과연 그의 행동은 추락하는 빛처럼 우아해 속에 뱀이 들어앉은 것을 알면서도 시선이 끌렸다. 아름다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대꾸 없이 마차에 오르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철없는 신부인 척 말룸의 뒤를 바쁘게 쫓았다.
마차 안, 말룸은 당연하다는 양 내 곁을 꿰찼다.
“당신 곁에 앉고 싶어요. 허락해줄 거죠?”
그러더니 시종일관 완벽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룸의 표정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 무섭도록 아름다운 사내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감정 변화가 미미했다.
더운 것도 아니었으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뱀 괴물과 한 마차에 단둘이 있어야 한다니, 종유석에 머리를 박은 것처럼 어지러웠다. 나는 말없이 정면만 응시했다.
“오늘 정신없었죠? 갑작스럽게 결혼하게 되어서 당황했다는 건 알지만, 굳어 있을 필요 없어요.”
“음…….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제국 최고의 신랑감을 채가는 거잖아요.”
나는 부러 과장된 미소를 띠었다. 보호색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 카멜레온은 지독히 어설픈데다 부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므로, 다른 환경에 집어다 놓으면 피부색을 바꾸지 못해 잡아먹히는 결말밖엔 기대할 것이 없었다.
“긴장할 필요 없다니까요.”
필사적인 발악이 우스꽝스러웠는지 뱀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약간의 웃음소리마저도 낭랑해 화가 치밀었지만 본능이 나를 얌전하게 만들었다.
나는 드레스 자락만 꾹 쥐어 잡았다.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불쑥 들었다.
말룸이 속삭였다.
“신분 차이 때문인가요? 걱정 말아요. 당신을 욕하는 이들, 뒷말을 꺼내는 자들……. 모두 당신에게 닿지도 못할 시궁쥐에 불과하니까.”
뱀의 성격 귀퉁이가 작게 삐져나왔다. 판도라의 상자 안을 살짝 엿본 기분이었다.
“제가 쌓아 올린 부와 명예는 모두 당신 거예요, 오필리아.”
내가 호응하지 않자 말룸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감상적인 말을 덧붙였다.
“다만, 딱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평범한 가정이 누리는 행복을 가져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사랑을 제게 주세요.”
입 발린 말이라지만 농담이 심했다. 저 뱀이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사랑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온몸에 가시가 자라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비정하고 구역질나는 인형놀이를 이어나간다면 모를까…….
말룸이 장갑 낀 손을 뻗어 내 볼을 쓰다듬었다. 성게나 말미잘에게 손을 뻗듯 머뭇거림이 가득했다.
“날 사랑해준다면, 그만큼 당신에게 황금을 지불하겠습니다.”
사랑의 대가로 황금을 주겠다고? 실소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사랑은 황금 따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황금이 사랑의 물꼬를 열어 준다 해도 물길이 마르지 않도록 땅을 갈고 치어를 풀어 놓는 것은 사랑을 하는 당사자의 몫이었다.
손을 쳐내고 싶었지만 나는 용케 사납게 굴지 않았다. 그 대신 안쪽에서 설움이 폭발했다. 아직도 날붙이 생각만 하면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하는데, 왜 이자에게 집어삼켜져 소화되어야 하느냔 말이다.
사막을 표류해 목마름에 시달리는 사람 위로 석유를 부은 꼴이었다. 그렇게 되면 기갈에 헐떡이면서도 차마 석유를 긁어먹지 못해 마른침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반드시 살아야 했다. 의지가 두려움에 마모되어 저물기 전에 어떻게든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지금껏 살면서 뜻대로 결정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죽음만큼은, 논두렁에서처럼 헛되이 저무는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결정짓고 싶었다.
나는 오기와 괘씸함과 경멸을 담아 예쁘게 웃었다.
“저, 말룸.”
뱀의 눈매가 동그래졌다. 잔뜩 얼어붙은 내가 말을 걸 줄은 예상치 못한 듯했다. 이 식인 뱀은 놀라는 것마저도 밉지 않고 달처럼 은은해 경이로웠다.
나는 말룸을 부른 후에야 ‘오필리아’가 그를 평소에 어떻게 칭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 상대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말룸은 유난스레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이대로 밀고 나가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고마워요, 말룸은 제 구원이에요.”
부러 애교스럽게 그를 응시했다. 깊이 감동한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법도, 일하는 법도, 부끄럽지만 글 읽는 법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열심히 할게요. 그렇게 당신 곁에서 평생 함께 살아갈게요.”
내가 죽기까지 앞으로 삼 년.
당신 등에 비수를 꽂겠다.
“우리 같이 행복해져요.”
그럴 수 없다면, 힘껏 발버둥 쳐 창공으로 도망치겠다. 내 날개가 이미 한 번 죽어 산산조각 났대도 반드시 날아오를 방법을 찾아야 했다. 등대가 없다면 만들어 망망대해를 비추고, 배가 없다면 나무를 찧어 쓰러뜨려 뗏목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검은 속내를 숨기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긴장해 말룸을 주시했다. 하지만 대공은 꿀떡이라도 먹은 듯 말이 없었다. 그는 마차가 티포주 성에 도착할 때까지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말룸의 시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묘했다. 불타버린 대지에서 새싹을 발견한 사람의 눈동자가 그와 비슷할까?
나는 말룸의 시선을 받아내지 못해 마차 천장의 무늬를 헤아렸다. 앞으로 이자와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니……. 앞날이 천 길 낭떠러지였다.
갑작스럽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창밖을 찔끔 내다보니 전혀 모르는 장소였다. 잠들 상황이 아니었는데 수상쩍은 일이었다. 그 무엇도, 심지어 내 몸의 변화조차 신뢰할 수 없었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말룸이 이쪽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지개처럼 찬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말룸을 만났더라면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말룸은 괴물이었다. 나는 병 안에 든 뱀의 식량이었고.
“아, 일어났군요. 많이 피곤한가요? 좀 자는 게 낫겠다 싶긴 했는데…….”
말룸이 눈매를 차분히 누그러뜨렸다. 매끄러운 중저음이 아라베스크처럼 복잡하면서도 진중했다.
“제가 왜…….”
“조금씩 졸기 시작하더군요.”
인상이 석회처럼 굳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졸리지 않았다. 처음 대화 이후 우리는 급히 어색해져 창밖만 바라보았는데, 그때까지도 긴장과 공포가 반씩 섞여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리던 참이었다.
그러나 창밖에 짙은 안개가 끼었을 즈음 갑작스럽게 졸음이 몰려들었고, 나는 저항 틈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피로로 인한 잠이 아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뱀의 둥지⟫에는 여느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마법이 등장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힘은 주술과 신성력, 저주의 세 가지 힘뿐이었다.
말룸은 세 가지 힘 중 주술에 천재적이었다. 세계관 최강자라 칭할 만했는데, 그가 모종의 이유로 내게 잠이 오는 주술을 걸었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말룸이 괴물이 되며 얻은 고유의 저주, 그 정체불명의 힘도 문제였다. 나는 그것의 정체도 모를뿐더러 소설에서는 말룸의 저주를 마주한 누구든 살아나가는 법이 없다 서술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되었든 낭패였다. 말룸이 가진 힘은 내 생존을 힘들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살인마의 미모가 몇 백 계단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지금 요요히 웃고 있는 저 남자는 식인 뱀이었지 잘생긴 신랑감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대로 돌이나 되었으면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