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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1화 (1/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화

죽음을 기억하라

‘푸른 수염’이라는 잔혹 동화가 있었다.

푸른 수염은 돈 많고 부유한 귀족 남자였다. 그는 여러 차례 결혼을 했는데, 그때마다 아내가 실종된 수상한 사내이기도 했다.

첫 번째 아내와 두 번째 아내가 실종된 후, 푸른 수염은 여염집 막내딸에게 청혼해 결혼했다. 마치 갓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막내딸은 푸른 수염의 거처인 ‘티포주 성’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모든 것이 호화스러워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고, 남편조차 상냥해 막내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어느 날, 푸른 수염이 모종의 일로 집을 비우게 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작은 열쇠 하나를 건네주며 어슴푸레한 낯으로 이야기했다.

‘모든 방은 전부 열어도 되지만, 작은 방만큼은 열지 마세요. 알겠죠?’

막내딸은 불길함을 느꼈지만, 잠자코 알겠노라 답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가둬 두었던 호기심이 마음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결국 푸른 수염이 성을 비운 지 7일째 되던 날, 막내딸은 격정을 이기지 못해 작은 방을 열쇠로 열고 말았다.

방문을 연 막내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도였다. 지금껏 남편이 살해한 아내들의 주검이 방 안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막내딸은 두려운 나머지 열쇠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몇 방울의 피가 열쇠에 튀었다. 서둘러 방을 빠져나온 막내딸이 핏자국을 없애기 위해 열쇠를 세척했지만, 마법의 열쇠에 묻은 피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티포주 성으로 돌아온 푸른 수염은 열쇠에 튄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비밀을 알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약속을 어겼다는 분노에 아내를 살해하고자 했다.

당신, 그렇게 당부했는데 나를 신뢰하지 않았군요!’

막내딸은 그를 붙들고 울부짖었지만 푸른 수염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결국 막내딸은 마지막으로 기도를 할 시간을 달라 호소했다. 푸른 수염은 그간의 정을 보아 고민 끝에 허락했다.

막내딸은 그 시간동안 오늘 성으로 찾아오겠다 약속한 오빠들을 기다렸다. 하늘이 도왔는지, 마지막 기도를 하는 틈을 타 막내딸의 오빠들이 속속 도착했다. 사투 끝에 그들은 푸른 수염을 살해하고 여동생을 구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막내딸은 푸른 수염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아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게 된다…….

이것이 동화의 주된 내용이었다.

지금 이 동화의 내용을 되새기는 이유는, 내가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하는 악당 대공의 아내에게 빙의했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푸른 수염에게서 벗어나는 세 번째 아내가 아니라, 그에게 살해당해 죽는 두 번째 아내 ‘오필리아’에게.

* * *

황망하고 헛되었다.

모두 다 부질없었다.

무기력함과 짜증이 몸 깊이 밀려들었다. 마치 폭풍에 휩쓸려 사라지는 연꽃이 된 듯했다.

사방 천지 꽃향기가 진동했다. 샹들리에에서 불빛이 뿜어져 나와 눈이 아프게 부셨다. 불빛을 핑계 삼아 눈을 감아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진흙 속에 있었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에서 광대들이 모였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하객들은 하나같이 귀한 신분이었다.

예식장은 눈을 닮은 흰색이었고, 푸르스름한 에메랄드로 군데군데 방점을 두었다. 일회용에 불과한 신부 대기실 벽까지 보석으로 장식해 부로 쌓아 올린 왕좌에 앉은 듯했다.

제국 레시우스의 유력 귀족이란 귀족은 다 모인 결혼식. 그 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오필리아 님. 마음에 드시나요?”

가장 어린 사용인이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닌 이름을 불러 물었다.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이 난 아이가 치장을 계속했다.

일평생 만져보지 못한 좋은 질감의 드레스가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약지의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는 진품인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아이의 솜씨가 좋았다. 사용인 소녀는 단풍 같이 작은 손으로 옷맵시와 머리 모양을 야무지게 다잡았다. 남루한 옷을 입고 있던 거울 속 여자가 무도회장의 신데렐라로 변했다.

나는 넋을 놓고 손길에 몸을 맡겼다. 내 말상대를 담당하는 아이 뒤로 수많은 사용인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인내 끝에 기나긴 치장이 끝났다.

“정말 아름다우셔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에요.”

아이가 맑게 감탄했다. 피어나는 생기가 부러웠다. 아이에게는 삶이 있었다.

“그래. 고마워…….”

나는 목 꺾인 새처럼 힘없이 응대했다. 거울에 비친 상에 집중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황금 테두리가 인상적인 고풍스러운 거울 속에 낯선 여자, 낯선 신부가 비쳤다. 어리벙벙한 모양새가 엉성하게 만든 양철 깡통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외모가 영혼을 잡아끌었다. 거울 속의 낯선 자는 썩 잘난 정도가 아니라 정신이 희뜩 빠질 정도로 어여뻤다. 고개를 돌리면 빛이 따라왔고, 미간을 살짝 찌푸려도 백설처럼 고왔다.

허리까지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머리칼은 금을 녹여 만든 듯했고, 눈동자는 블루 다이아몬드보다 청명하게 빛났다. 이목구비는 밀랍 인형이 연상될 만큼 비뚤어짐이 없었다. 거울 속 여자는 근심을 모르는 사랑스러운 소녀였고,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고개를 숙일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바뀐 얼굴조차 나를 도닥이지 못했다. 긴장으로 마음이 오그라들어 나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내내 양손을 맞잡았다.

마음에 재앙이 깃들어 불안이 요동쳤다.

나는 결혼식을 하고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죽었다. 농촌 오지로 봉사를 갔던 날, 밤중 시골길을 홀로 걷다 괴한을 만나 그대로 숨을 잃어버렸다. 날붙이가 복부에 꽂혔던 감각이 서늘했다.

당시 나는 살 수 없음을 직감했다. 잦아들던 숨결,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소생 불가 판정이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결혼을 삼 일 앞둔 여자의 몸속에 들어와 있었다.

이 불행한 여자의 이름은 오필리아. 막 피어나는 스물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린 채 저잣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던 여자였다.

그리고 오필리아를 꼬드겨 결혼에 성공한 남자의 이름은 말룸 발타사르. 레시우스 제국 황제의 동생이자 지고의 부를 쌓은 대공으로, 아내가 있었지만 그자가 실종되는 바람에 지금은 옆자리가 비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 말룸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공의 생김새는 요정이 숨겨 놓은 금처럼 아름답고 웅덩이 속으로 추락하는 폭포처럼 정교해 일단 마주하면 홀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 될 사람의 얼굴이 잘난 것만으로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이곳은 킬링 타임용 로맨스 판타지 소설, ⟪뱀의 둥지⟫ 속이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마리아였다. ⟪뱀의 둥지⟫는 마리아가 악당 대공의 아내가 되어 잘 생긴 남자들과 염문을 뿌린다는 내용을 골자로 두었는데, ‘끔찍한 악당 대공’이 바로 말룸 발타사르, 내 남편 될 작자였다.

말룸 발타사르는 푸른 수염을 기원으로 만들어진 인물답게 마리아와 사사건건 대적했다. 마리아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들을 이용해 말룸 발타사르를 무찌르려 할 정도로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작중 정보에 의하면, 대공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불로불사를 탐해 괴물이 되었다고 했다. 하여 거대한 괴물 뱀이야말로 그의 본체였다.

그는 인간을 혐오하고 하찮게 생각해 접촉하는 것조차 꺼렸다. 악당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일이 수틀리면 앞길을 가로막는 요소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치워버렸고, 부를 앞세워 여주인공의 거취를 제한한데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알았다.

게다가 그는 삼 년을 주기로 인간을 잡아먹어야 불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대공의 결혼 목적은 사랑이 아니라 불로불사를 유지하기 위한 먹잇감 확보에 있었다. 삼키는 데 기분 좋겠다 싶은 적당한 여자를 점찍어 놓고, 삼 년 동안 애지중지 기르고, 살을 찌워 잡아먹었다. 이것이 그 괴물이 먹이를 신부로 만드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이유였다.

정리하자면, 원작 최고 악당이 퇴치당하는 건 세 번째 아내 마리아가 나타났을 때로…… 나는 앞으로 삼 년 후면 괴물 뱀에게 잡아먹혀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이라는 뜻이었다.

되새길수록 한숨만 나왔다. 나는 어떻게든 탈출에 성공하는 세 번째 아내가 아니었다. 시신으로 발견된 두 번째 아내가 내 역할이었다.

마리아에게는 동화 속 등장하는 오빠들처럼 자신을 구해줄 남자 주인공들이 있었지만 내게는 어떤 뒷배도 없었다.

좋은 집안의 여자에게 빙의했다면 그나마 나았을까? 나는 이 낯선 땅에서 혈혈단신이었다.

공포로 호흡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했다. 겉모습에 홀리면 잡아먹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모든 상황이 내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소설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아 대공이 인간을 얼마나 잡아먹었는지, 언제부터 살았는지, 왜 이 제국에 똬리를 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을 잡아먹기만 해도 불사를 얻을 수 있는지조차 오리무중이었다. 약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여주인공이 말룸과 대적하기 시작했을 때 소설에서 하차했고, 이후 그 괴물이 죽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착잡한 와중, 시간은 잡을 길 없이 흘렀다. 나는 끌려가다시피 해 버진 로드의 초입에 섰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서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도한 악역이 흰 제복을 빼입고 내 곁에 자리했다.

대공은 감성이 결여된 만큼 매우 계산적이고 치밀해 작은 흠결조차 남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내가 오필리아가 아니라는 것을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했다.

하지만 공포가 무색하게 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절벽 끝에 매달린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상에 걸린 양 감각이 없었다.

말룸은 황금 사과처럼 유혹적이었다. 얼굴만큼은 신의 강림, 천사의 화신이라 해도 믿을 만큼 완벽했다. 검은색으로 착각할 만큼 짙은 남색 머리칼은 길게 길러 하나로 정갈히 묶었고, 우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 단정히 매듭지어진 눈매가 한없이 상냥해 보였다.

특히 저 눈…….

요요히 빛나는 황금빛 눈이 가장 찬란했다. 대공의 눈동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내놓고 싶을 정도로 사람 정신을 훔쳐 도주했다.

그야말로 꿈에서나 나올 법한 유혹적인 사람이었다. 창백한 피부 위로 눈 그늘이 도드라졌지만 그마저도 퇴폐적인 미학을 가중시켰다.

말룸은 나를 관찰하고 있는지 눈 깜빡임 하나 없었다. 내가 그를 감상할 때,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끌려 들어왔다. 나는 결혼식이 시작될 때까지 정면만 굳게 바라보았다.

웅장한 음악이 홀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것이 장송곡처럼 느껴졌다.

주교가 외쳤다.

“신랑, 말룸 발타사르 대공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대공은 얼마간 뜸을 들이다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귓가에 내려앉는 숨에 화석처럼 몸이 굳었다.

“긴장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진중한 미성이었다. 최고의 악기를 모아 한 순간에 전부 연주하는 듯했다. 괴물이 상냥한 신랑 껍질을 뒤집어썼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내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말룸은 나보다 머리 하나 반쯤 더 컸다. 그가 먼저 단상 앞에 자리한 주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감정이라도 가라앉히고 싶었지만, 곧장 내 차례가 돌아오는 바람에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었다.

“신부, 오필리아 입장!”

‘오필리아’가 평민이었던지라 주교의 말 어디에도 높임이 없었다. 명백한 업신여김이었다.

초청받은 귀족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들은 내 입장에 집중하기보다는 제 몫으로 선물된 샴페인이나 디저트를 입으로 가져가며 담소를 나누었다. 나를 그들의 찬란한 세계로 끌어올리는 것이 마뜩잖다는 기류였다.

나는 기죽고 싶지 않아 부러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저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부, 천 년이 지나도 꺼지지 않을 찬란한 황금은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 황금의 속살에 독이 묻었대도 저자들의 질투를 유발하기엔 충분했다.

버진 로드의 끝, 무섭도록 아름다운 남자가 꿀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잡으라는 듯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손을 잡을까 망설이는 사이, 사내와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대공이 독버섯처럼 화려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겨울의 한창, 눈부신 설원에 피어난 꽃과도 같아 감히 그에게 범접할 수가 없었다. 하객들이 그의 외모에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뱀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듯 느껴져 잘생긴 신랑에게 찬사를 보내지 못했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말룸이 걱정스러운 척 나를 살폈다. 하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태가 났다. 입가는 부드럽게 누그러져 있었지만 황금색 눈동자가 청동보다 딱딱했다.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신히 말룸의 손을 잡았다. 이어짐은 굳건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온기가 단절될 듯 살갗 사이의 공백이 컸다.

말룸은 주교만을 응시할 뿐 구태여 손을 단단히 얽지 않았다.

괴물은 식장에서조차 두드러지게 흰 장갑을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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